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5년 4월
구판절판


사람이 하루에 경험하는 희로애락의 양은 어느 정도일까?
언젠가 신문에서, 어떤 할 일 없는 친구가 영혼의 무게를 달았더니(아마 죽기 전휴의 몸무게를 비교한 것일 테지만) 10그램 정도가 나가러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의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나는 이 네 가지의 무게 중에서 애哀의 절대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삶을 살 수 밖에 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쁨이란 얼마 지나지 않아 내성이 생겨서 금방 무뎌지지만, 슬픔이란 몇 배 더 여운이 길게 남는 법이다.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 -51쪽

미진이가 세상을 떠나고 이틀 후, 혈액배양 검사 결과가 나왔다. 역시 포도상구균에 의한 ㅍ패혈증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이런 일을 감당하기가 벅찼다. 어린 생명을 앗아간 제도에 분노하고, 하루를 망설이면서 시간을 보낸 나의 비겁함에 분노하고, 사악한 세균에 분노했다.
그때부터 나는 의료시스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되고, 그때마다 의사로서의 소신과 제도에 복종해야 하는 사회인으로서 규범 사이에서 일종의 사회부적응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결국 종합병원에서 전문의로 근무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스스로 옷을 벗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행복하다. 당장 최소한 일주일에 한 명씩 내 환자의 임종을 지켜봐야 했던 끔찍한 상황이 없어졌고, 하루에도 서너 번씩 피를 말리는 상황도 없다. 또 피고름이 묻은 속옷을 버리고 매일 속옷을 사 입지 않아서 좋다.
나는 지금 부끄럽다 중-256-257쪽

그런데 누군가는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상황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우리 동기 중 누군가는 중환자실 환자 때문에 오늘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당직실에서 쪼그리고 자고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방금 전에 눈을 감은 환자를 떠나보내고 밤하늘에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있거나, 천장으로 솟구치는 피를 덮어쓰면서 누군가의 배와 가슴, 그리고 머리를 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부끄럽다. 그들과 같이 밤을 새우지도 않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응급실 중환자실을 뛰어다니지도 않으면서 그냥 이렇게 하루종일 농담 같은 삶을 살고 있어서 그들에게 한없이 부끄럽다.
나는 지금 부끄럽다 중-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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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2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구판절판


머리 위에서 별들이 우수수 쏟아져버릴 듯 위태롭게 반짝였다. 전투가 끝난 북변 전쟁터가 생각났다. 비릿한 피의 냄새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어둠 속에 떠도는 전쟁터.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명쾌했다. 삶과 죽음, 적군과 아군, 승리와 패배, 명령과 복종, 용기와 비겁.......
대적하는 두 개의 가치는 명확했다. 죽음이 아니면 삶이라는 사실은 삶에 연연하게 않게 했다. 어떻게 사느냐, 왜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죽지 않는 것.
전선은 내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결정해주었다. 나는 전신의 이쪽에 있고 적들은 저쪽에 있었다. 이기기 위해서 싸웠고 이기면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수십, 수백의 목숨이 이유 없이 널브러졌지만 살인에 대한 가책도, 부상의 아픔도 이내 잊혀졌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죽음의 이유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살아가는 데 이유가 있듯 죽는 데도 이유가 필요했다.
궁궐에는 적군와 아군이 없었다. 유일한 아군은 나 자신일 뿐이었다. 적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싸움이었다. 내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적이 되어 달려들었다. 그것이 궁궐이란 곳의 복잡다단함이었다. -114-115쪽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해도 좋았다. 그저 먼 곳에서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그것으로 족했다. 단 한 번만 속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그렇게만 된다면 평생 그녀를 다시 못 본다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왜 알지 못했던고. 그때 자신의 속마음을 배보였어야 한다는 것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고 말해야 했다는 것을. 나중에, 나중에라고 미룰수록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것을.
숨이 턱에 차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채윤은 다짐했다. 살아만 있어라. 살아만 있어주어라. 그래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하리라. 나중에 할 수 있는 말을 왜 지금 하지 못한단 말인가?-198쪽

주상은 그 외롭고 위태로운 전쟁을 계속 치러냈다. 대국의 위협과 시대의 강퍅함과 문신, 경학파 학사들의 조직적인 반발과 전국 방방곡곡의 향교와 성균관의 반대와 편전의 용상 앞에 쌓이는 언관들의 상소와.....주상은 혼자 몸으로 그 모든 것들과 맞섰다.
다행히 주상 곁에는 그를 지키려는 신하들이 있었다. 그들은 철퇴에 머리가 으깨져 죽었고, 심장에 칼을 맞고 죽었으며, 시신이 우물간에 버려지고, 대들보에 매달렸다. 혈족이라 할 며느리조차 처참한 능욕을 뒤집어쓰고 궁궐을 쫓겨나야 했다.
궁궐 어디에나 그 전쟁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하릴 없는 죽음을 택했던가? 그들이 죽어간 이유는 주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주상이 아니라 주상의 뜻이었다. 그것은 이 시대의 뜻이기도 했다.
-221쪽

시대는 살아 숨쉬었다. 시대는 생각하고 성장하며 완숙해졌다. 사람이 시대를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대가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시대가 성장하는 데는 그 시대의 명을 좇는 자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거대한 시대의 전쟁에 맨몸으로 나선 자들이 그들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시대가 성장하고 발전하여 융성의 시대가 올지라도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부름을 피하지 않고 맞건 그들은 자신들의 피와 살이 융성의 시대를 만드는 한줌 거름이 됨을 기꺼워할 것이었다.-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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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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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시간에 함께한 일들은 어찌 도니는 건지 당신은 알고 있소이?
당신한테 묻고 싶은 말을 내 딸애한테 물었더니 내 딸은 엄마가 그런 말을 너무 이상해, 하면서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게 아닐까, 엄마~합디다. 무슨 말이 그리 어려운지. 당신은 알아듣겠소? 이젠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사실은 모두 여기에 스며들어 있다는데, 느끼지 못할 뿐, 옛날 일은 지금 일과 지금 일은 앞의 일과 또 거꾸로 앞의 일은 옛날 일과 다 섞여 있다는데 이제 이어갈 수 없네. -235쪽

이젠 당신을 놔줄 테요. 당신은 내 비밀이었네. 누구라도 나를 생각할 때 짐작조차 못할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네. 아무도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다고 알지 못해도 당신은 급물살 때마다 뗏목을 가져와 내가 그 물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는 이였재. 나는 당신이 있어 좋았소. 행복할 때보다 불안할 때 당신을 찾아갈 수 있어서 나는 내 인생을 건너올 수 있었다는 그 말을 하려고 왔소.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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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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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나만 진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알았다. 이제부터는 일이 더 쉬워지겠지. 하루하루 지날수록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불안은 점점 줄어들겠지. 피터슨은 땅에 묻혔고, 부검으로 무엇이 드러날 위험도 없어졌다. 비행기는 눈에 묻혔으며, 비행기 주변의 발자국들은 영원히 지워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위안은, 내가 스스로를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나는 자연보호림 가장자리에서 일어난 사건이 나를 변화 시킬 것이라고, 내 성격이나 특질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가 죄책감에 황폐해져서 내 범죄에 대한 공포를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 피터슨의 죽은 내가 발견한 돈과 같았다. 내가 굳이 그 일을 떠올리지 않는 한, 그 일 때문에 내 평소 생활이 달라진 바는 전혀 없었다. 그 일을 떠올리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139-140쪽

나는 몸서리치며 깨달았다. 내 주의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내 자신의 행동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었다. 나쁜 징후 같았다. 지도도 없이 낯선 땅에서 헤매게 됐다는 표시 같았다. 우리는 길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163-164쪽



"다 잘될 거야. 나를 믿어. 잘 헤쳐 나갈 수 있어."
그 말을 뱉자마자 깨달았다. 그런 말은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우리 어머니를 보았을 때, 어머니도 그런 말을 했다. 용기를 북돋우기는 하지만 잘못된 말, 눈을 피하고 귀를 닫는 말, 자신이 처한 위험을 부정하는 말. 그런 말을 해야 한다고 느끼다니, 나쁜 징조였다.
-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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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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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을 탈 때나 목욕을 할 때, 찻집에서 기다릴 때, 치과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 아무튼 늘 추리소설이 없으면 안 된다. 갈 장소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또는 있을 곳이 없다는. 누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이건 순전히 도피다.
몇 년 동안 그렇다는 걸 인정하기 두려웠지만, 일을 하거나 식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사람을 만나는 등의 내가 정해서 하는 일, 또는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을 할 때가 아니면 나는 늘 책을 읽고 있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가령 내 신변에 굉장히 불행한 일이 생겼다 해도, 재미나는 추리소설이 있으,면 그것을 읽는 동안에는 울거나 한탄하지 않을 것이라도 생각한다. 그 현장에 없으니까.
원하지 않는 장소에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게 된 시가와 텔레비전을 외면하게 된 시기가 얼추 일치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 원하지 않는 정보를 싫든 좋은 보고 듣게 되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겁 많으면서도 이기적인 정신. 호기심 없는 어린애 같다.
하지만 아마도 그 때문에 나는 하루하루를 건강하게, 기분 좋게 살 수 있는 것이리라. 이것은 하주 중요한 점이다.
추리소설 -177-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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