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무리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8년 11월
절판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스승의 대답.
"시간 낭비하지 말라. 네가 숨이 멎어 무덤 속에 들어가거든 그때 가서 실컷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거라. 왜 지금 삶을 제쳐두고 죽음에 신경을 쓰는가. 일어날 것은 어차피 일어나게 마련이다."
우리는 참으로 소중한 것은 배우지 못하고 어리석은 것들만 배워 왔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 깨어 있음이다. 삶의 기술이란 개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깨어있는 관심이다.
삶의 기술 -54쪽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기 말라.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지 말라.
자신의 행동을 항상 살피라.
하느님이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공허한 말, 남을 웃기려는 말을 하지 말라.
다툼이 있었으면 해가 지기 전에 바로 화해하라.
-몬떼 까시노 수도원 성 베네딕도 생활의 지침
우물쭈물 하다가는 -78-79쪽

새해 달력을 보니 지나온 한 해가 묵은 세월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면서 또 한 해를 소모해 버렸는지 새삼스레 묻는다. 그러다가 문득 내 남은 세월의 잔고는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이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뎌진 감성, 저녁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 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이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섬이다.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88쪽

때로는 높이높이 우뚝 서고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
지금이 바로 그때 -115쪽

좋은 친구란 주고받는 말이 없어도 마음이 편하고 투명하고 느긋하고 향기로운 사이다.
좋은 말씀을 찾아-176쪽

사람이든 사물이든 또는 풍경이든 바라보는 기쁨이 따라야 한다. 너무 가까이도 아니고 너무 멀리도 아닌, 알맞은 거리에서 바라보는 은은한 기쁨이 따라야 한다.
바라보는 기쁨 -18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구판절판


나는 한 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 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 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말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든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히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따.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13-14쪽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14-15쪽

살아 있는 동안 너는 나만 사랑한다고
나는 너만 사랑한다고 맹세할 때,
난 신이 가장 무서운 존재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건
사람 마음이야.
신 앞에서 한 맹세도
마음 한번 바꿔 먹으니까 아무것도 아니잖아
<거짓말>중에서-57쪽

사랑은 또 온다.
사랑은 계절 같은 거야.
지나가면 단신 안 올 것처럼 보여도
겨울 가면 봄이 오고, 이 계절이 지나면
넌 좀 더 성숙해지겠지.

그래도, 가여운, 내 딸.
<거짓말>중에서 -109쪽

산다는 것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놈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며 오는 법은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 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육십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
- 그들의 사는 세상 중 그의 이야기 -103쪽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몇 가지
나는 한때 처음엔 도저치 할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어떤 두려운 일도 한 번 두 번 계속 반복하다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길들여지고, 익숙해지고, 만만해진다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만 해도 인생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시간이 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애인의 배신이 그렇고,
백번 천번 봐도 초라한 부모님의 뒷모습이 그렇고,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웃는 그녀의 모습이 그렇다.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너무나도 낯선 이 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 그들의 사는 세상 중 그의 이야기-194쪽

해피 엔딩의 역설
나는 결코 인생이 만만하지 않은 것인 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행복과 불행, 화해와 갈등, 원망과 그리움, 상처와 치유, 이상과 현실, 시작과 끝, 그런 모든 반어적인 것들이 결코 정리되지 않고, 결국엔 한 몸으로 뒤엉켜 어지럽게 돌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쯤은, 나는 정말이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아니, 안다고 착각했다. 어떻게 그 순간들을 견뎠는데, 이제 이 정도쯤이면, 이제 인생이란 놈도 한 번쯤은 잠잠해져 주겠지, 또다시 무슨 일은 없겠지, 나는 그렇게 섣부른 기대를 했나 보다. 이런 순간에, 또다시 한없이 막막해지는 걸 보면.
- 그들의 사는 세상 중 그의 이야기 -20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지중해식 인사
이강훈 글.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6월
품절


섬에서만 벌써 세 번째 여름을 맞이한 살림은 이미 현지인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내가 섬에서 보내는 겨울은 어떻느냐고 묻자 살림은 과장된 동작을 만들어 보이며 익살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흔히들 지중해가 남태평양이나 인도양인 줄 착각하곤 하지. 하지만 산토리니는 모리셔스 제도에 있는 섬이 아냐. 당연하지 않아? 여긴 지중해라고. 지중해의 겨울은 뭐랄까.....나처럼 낙천적인 사람도 염세주의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포스를 지녔지」
그의 표정으로 봐서는 반 농담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역시 절반은 진담인 것 같다.
「이곳의 여름이 왜 이렇게 찬란하고 눈부신지 아니? 이런 수혜를 누리지 못하면 겨울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야. 그 누구도」
지중해 섬의 겨울-스위스 청년 살림이 들려준 이야기 中 -249-250쪽

「아마 너도 곧 알게 되겠지. 벌써부터 몇 차례 비가 내렸으니까. 하지만 이건 약과야.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본격적인 우기가 들이닥치거든. 기온은 점점 떨어지고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고.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겨울이 다시 시작되는 거지.」
.....
그칠 줄 모르는 비, 냉기와 습함을 한껏 머금은 바람. 지난날의 풍요로움을 모두 앗아가 버린 것 같은 결핍 그리고 외로움. 이것이 지중해 섬의 겨울의 모든 것이다. 지중해의 겨울이 더욱 혹독한 것은 그만큼 찬란한 여름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고양이에게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겨울을 견디면,」 살림이 말했다. 「우린 다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을 만날 수 있지. 그것이 바로 지중해의 섬이야.」

지중해 섬의 겨울-스위스 청년 살림이 들려준 이야기 中 -250-25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 스스로 행복해지는 심리 치유 에세이
플로렌스 포크 지음, 최정인 옮김 / 푸른숲 / 2009년 3월
품절


혼자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시점이 왔다고.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살아 있는 한 혼자인 때가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던 환상을 버려야 했다. 그러자 점차 두려움이 걷히면서 혼자인 것이 더 이상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혼자 사는 삶에 숨겨진 다양한 가능성들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수치와 외로움의 공간이 아니라 치유의 공간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내 안의 많은 것이 다시 깨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혼자라는 것은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광야가 아니라 사실은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 있는 왕국이었다.
이런 경험을 거치면서 나는 나 자신을 ‘혼자인 여자’로 정의 내렸다. 혼자인 여자란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여자’다. 나는 때로는 외로웠지만 대부분은 외롭지 않았다. 새로운 에너지로 내 길을 만들어가고 두 아들을 키우고 재정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는 고독의 기쁨과 충만함을 알게 되었다.
여자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26쪽

스토에 따르면, 우리 인생은 두 가지 상반되는 충동이 늘 함께하고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충동이요, 다른 하나는 고독을 통해 자기 본연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이다. 삶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 충동 모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고독과 자기 중- 54쪽

자기는 존재를 관통하여 흐르는 강과 같다. 자기의 맥박을 느끼려고 멈출 때마다 언제나 자기가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거나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 때, 그것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 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없는 듯이 느껴지면 나 또한 없는 듯이 느껴진다. 역으로, 살아 있음과 충만함을 느낄 때는 바로 자기와 함께하고 있는 순간이다.
자기란 주관적인 실체로서, 삶을 존재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고 감정을 느끼며 대화를 하게 한다. 자기는 태어난 순간부터 진화를 시작한다. 자기는 첫 숨을 내쉬는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삶을 관통하고 있다.
고독과 자기 중 -56쪽

세인트 존스베리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잔 역시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여자다. 그녀의 친구들 중에도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여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녀는 고독과 개인적인 공간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녀의 일은 주로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집에 오면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서 자신만의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집 안이 고요하면 앉아서 뜨개질을 하거나 한 시간 동안 책을 읽는다. 나는 그녀에게 고독과 개인적인 공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개인적인 공간을 갖는 것은 마음을 고요하고 안정되게 하기 위한 것인 반면, 고독은 좀 더 초월적이고 창조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고독과 자기 중 -57쪽

혼자 있음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고독으로 하는 문을 열어준다. 연인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친구 사이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가 되려면 자아가 안정된 기반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를 해서는 혼자 있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혼자임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두려움 때문에 정체되어 있거나 자신을 소외시키거나 파괴시키지 않는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고독은 여유롭고, 유동적이고, 열려 있고, 가능성이 살아 숨쉬는 어떤 것이었다.
고독과 자기 중 -60쪽

그녀는 남편이 일 때문에 몇 주간 집을 비우고 보모가 아파서 자기가 하루 종인 아이를 돌보게 되었을 때 아이 돌보는 일이 너무 싫다고 했다. 그녀는 고뇌에 차서 물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죠? 나는 남편과 아이를 사랑하고 내 가정을 사랑해요. 하지만 일 또한 내 가정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스물네 시간 내내 엄마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자신이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꼈다.
" 나는 불구인가 봐요. 왼손만 두 개인. 아이를 돌보는 일은 정말이지 끝인 없어요."
스물 네 시간 내내 엄마로 살다 -83쪽

나는 여성이라는 점이 허락하는 커다란 보상 중에 하나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기르는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이 엄마 역할과 충돌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아이를 위해 곁에 있어주려고 노력하면서도 나 자신의 관심사를 추구할 때 나는 죄책감이 몸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종종 다른 사람의 인생은 돌보면서, 자기 자신의 인생은 소홀히 한다.
자신의 인생을 돌볻다는 것은 거품 목욕이나 손톱 손질 같은 것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삶과 관련이 있는,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돌봄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스물 네 시간 내내 엄마로 살다 -83-84쪽

여성은 강하면서 섬세한 존재다. 수많은 여성들과 상담을 하면서 나는 이 점을 간접 경험한다. 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아주 다양하다. 가냘프고 공허하고 허기지고 황폐하다. 그러나 내면은 모두 신성한 빛으로 빛난다. 밖으로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윤곽이 아무리 희미하더라도 ‘가지’가 고집스럽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변화의 필요성을 느낌에 따라, 그리고 상처 입고 무시당한 정도에 따라, 한마디로 말해, 자신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 ‘자기’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혼자됨이다. 그것은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여성의 자아를 훼손하는 것은 없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나를 볼 수 없다는 것과도 같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법 -94-95쪽

이런 모든 상실은 영혼을 뿌리째 흔들어놓는다. 때로 상실감은 너무나 파괴적이어서 후에 혼자 서는 능력을 아주 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혼자인 여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감정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기보다는 상실과 고통의 불안한 감정을 그대로 느끼며 견디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 안에 있는 공허함을 마주할 때 더욱더 심해진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두려움과 불안과 함께 있는 방법을 알게 되면, 우리 목을 조르던 이 감정들에서 점차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고독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껴안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공허감과 의존감 아래 눌려 있던 우리의 열망을 깨워 의미 있고 풍부한 인생을 향하게 만든다. 우리는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게 되고 ‘자기’는 자유를 숨쉬게 된다. 그러고 나면 혼자 사는 것의 ‘예술(art)'이 시작된다.
거실을 맴도는 아이 -118-119쪽

모든 아이는 자신을 보호해주어야 할 주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는 고통을 겪는다. 배신은 거짓말이나 약속을 어기는 것 같은 미묘한 형태도 있고, 신체적인 폭력이나 성적 학대같은 직접적인 것도 있다. 집에 와서 숙제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해놓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아빠와, 학교 마치면 데리러 오기로 해놓고서 오지 않는 엄마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부모다. 거짓말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배신의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사람을 신뢰하기가 힘들어진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절대적으로 무기력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이해할 방도가 없다. 더 나쁜 것은 끊임없이 혼란을 느끼기 때문에 그 사건에 얽매이게 된다는 점이다.

트라우마와 자기 부정 -122쪽

아이는 가족이라는 둥지 안에 있다. 음식이 있고, 잠잘 수 있는 침대가 있고, 함께 뒹굴 수 있는 형제자매가 있고, 해야 할 숙제가 있고, 텔레비전이 있는 곳. 그 속에서 아이는 사랑과 공포를, 따스함과 차가움을 오간다. 사랑을 할 수 있는 아이의 능력은 눈부시다. 아이가 겪는 고통이 무엇이든지 간에 아이의 사랑은 끈질기다. 아이는 부모에게 충성할 것이다. 부모 중 최소한 한 사람에게라도 말이다. 아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그리고 필사적으로 잊으려고 애쓰면서 자기에게 가해진 거짓말과 약속의 불이행과 폭력을 용서한다. 아이는 자신을 학대한 사람까지도 용서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오직 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트라우마와 자기 부정 -122-12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품절


엄마가 죽었을 때, 내게서 평범한 세계는 사라졌다.
그 대신 지금까지 커튼 너머에 있던 어떤 굉장한 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란 정말 죽는 거네, 아주 평범했던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거네. 그 지지부진하고 따분했던 감정들이 모두 착각이었어.
깊은 슬픔 속에서도 매일, 신선한 발견이 있었다.-7쪽

슬픔과 그리움보다 즐거웠던 일들이 무수히 되살아나고, 아무리 복잡한 길거리에서도 그날의 날씨에 상관없이 신선한 공기가 싸하게 가슴으로 흘러 들어온다. 마치 기적처럼.
그리고 가슴 언저리가 노르스름하고 따스한 빛으로 채워지고, 행복이 찡하게 온몸으로 번진다.
그립고 애틋한 마음과,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신비로운 감동이 내 온몸을 비추고, 그 빛은 내 안에 쌓여있던 쓰잘 데 없는 것들을 말끔하게 씻어내 준다.-2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