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외면일기’를 다시 꺼내놓고 내 발밑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발견, 관찰, 그리고 일화들로 재구성된 일년 열두 달을 닦고 문질러 광택을 냈다. 중세시대의 화가들과 판화가들이 그린 서민생활의 장면들에서 볼 수 있듯이 독자들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인 ‘죽음 부인’의 두건 쓴 실루엣과 여러 번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이 조그만 책이 제공하는 웃음의 기회에 그 부인은 보다 더 심오한 메아리를 보태줄 것이다. -머리말 中-7쪽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러나 시간은 또한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들, 우리를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또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파괴하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시간은 우리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喪과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 1월 中-19쪽
귀가 점점 들리지 않는다. 적당한 기계를 맞출 생각으로 보청기상과 만날 약속을 해놓았다. 그래놓고는 자꾸만 약속을 연기한다.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남들이 하는 얘기를 듣는 게 그리도 중요한 일일까?" -1월 中-21쪽
지휘자란 대체 무엇에 소용되는 것인지 늘 궁금했었다.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 그는, 연주자들은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 그는, 연주자들은 아무도 쳐다볼 생각을 않는데 쓸데없이 자기 혼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허수아비만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 그는 오직 관람객들만을 위해서 안무를 해 보이는 춤꾼임이 분명했다. 그는 연주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펄쩍펄쩍 뛰고 두 팔을 휘젓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자신의 온몸으로 음악을 육화肉化시키는 것이다. -1월 中-22쪽
사진과 문학, 렌즈의 조리개 열기. 조리개를 적게 열수록 장면의 깊이가 깊어진다. 다시 말해서 풍경의 깊이가 또렷해진다. 반대로 조리개를 크게 열면 겨냥하는 피사체는 또렷해지는 반면 그 나머지는 모두 흐릿하다. 스탕달 : 조리개 3.5 발자크 : 16. 왜냐하면 발자크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환경, 배경, 일화 등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다시 말해서 조리개를 적게 열어 풍경의 깊이가 잘 느껴지게) 독자에게 소개된다. 반면 스탕달의 인물들은 배경이 흐릿한 가운데, 다시 말해서 배경 제로 상태에서 (조리개를 많이 열어 풍경의 깊이가 없이) 인물 자신만 또렷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2월 中-39-40쪽
흔히 하는 말로 "한쪽 발을 무덤 속에 담고 있다."는 것은 병들어 아프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반을 땅 속에 묻었다는 뜻이겠다. -2월 中-44쪽
어떤 민족의 가난한 정도는 그 민족의 각종 화려한 축제를 보면 알 수 있다. 반대로 생활수준이 점차적으로 높아지면 각종 축제 행사들이 점차적으로 사라져가게 된다. -3월 中-65쪽
시몬 베이유 : "인간의 사랑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쾌락들 중 하나 :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가 모르는 가운데 봉사하는 것." -3월 中-72쪽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 자신이 의식적으로 전혀 개입하지 않은 채로, 삶이란 ‘여러 시기들’의 연속이다. 규칙적으로 하나의 시기가 끝나면 또 하나의 시기가 시작된다.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심각한 병, 직업의 변화, 이사, 절교 등등. 흔히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는 것을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7월 中-170쪽
신문을 읽으면서 포르투갈 특산 포르토를 음미한다. 이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지난 석 달 동안 나는 일체의 알코올성 음료를 입에 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다음 세 가지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 나는 금주할 능력이 있는가? 대답 : 그렇다. 2. 금주를 하기가 힘든가? 대답 : 그렇다. 3. 금주를 해서 얻은 이득이 무엇인가? 대답 : 없다. -7월 中-177쪽
나이가 들어 늙으면 세 가지 위안이 찾아온다 : 돈, 권력, 명성. 여기에 더하여 이 세 가지 선물에 에로틱한 차원이 덤으로 부여된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유명한 사람은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 -7월 中-178쪽
일 년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인 이 7월이 끝나가는 것을 보는 슬픔. 당당하면서도 젊음 가득한 이 달은 백합꽃으로 절정에 이르고 보리수 향기가 풍기는, 여름 중에서 으뜸가는 달이다. 8월은 꼼짝도 하지 않는 여름. 서서히 가을의 부패를 향해 기울기 시작한다. 7월 中-183쪽
여행이 점점 더 힘에 겹다. 물론 여행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가 얼마나 비싼가! 이것은 사람들이 극약劇藥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여행을 떠날 때 나는 벌써부터 돌아오는 즐거움에 앞질러 집착한다. -10월 中-24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