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2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구판절판


머리 위에서 별들이 우수수 쏟아져버릴 듯 위태롭게 반짝였다. 전투가 끝난 북변 전쟁터가 생각났다. 비릿한 피의 냄새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어둠 속에 떠도는 전쟁터.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명쾌했다. 삶과 죽음, 적군과 아군, 승리와 패배, 명령과 복종, 용기와 비겁.......
대적하는 두 개의 가치는 명확했다. 죽음이 아니면 삶이라는 사실은 삶에 연연하게 않게 했다. 어떻게 사느냐, 왜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죽지 않는 것.
전선은 내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결정해주었다. 나는 전신의 이쪽에 있고 적들은 저쪽에 있었다. 이기기 위해서 싸웠고 이기면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수십, 수백의 목숨이 이유 없이 널브러졌지만 살인에 대한 가책도, 부상의 아픔도 이내 잊혀졌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죽음의 이유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살아가는 데 이유가 있듯 죽는 데도 이유가 필요했다.
궁궐에는 적군와 아군이 없었다. 유일한 아군은 나 자신일 뿐이었다. 적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싸움이었다. 내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적이 되어 달려들었다. 그것이 궁궐이란 곳의 복잡다단함이었다. -114-115쪽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해도 좋았다. 그저 먼 곳에서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그것으로 족했다. 단 한 번만 속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그렇게만 된다면 평생 그녀를 다시 못 본다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왜 알지 못했던고. 그때 자신의 속마음을 배보였어야 한다는 것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고 말해야 했다는 것을. 나중에, 나중에라고 미룰수록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것을.
숨이 턱에 차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채윤은 다짐했다. 살아만 있어라. 살아만 있어주어라. 그래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하리라. 나중에 할 수 있는 말을 왜 지금 하지 못한단 말인가?-198쪽

주상은 그 외롭고 위태로운 전쟁을 계속 치러냈다. 대국의 위협과 시대의 강퍅함과 문신, 경학파 학사들의 조직적인 반발과 전국 방방곡곡의 향교와 성균관의 반대와 편전의 용상 앞에 쌓이는 언관들의 상소와.....주상은 혼자 몸으로 그 모든 것들과 맞섰다.
다행히 주상 곁에는 그를 지키려는 신하들이 있었다. 그들은 철퇴에 머리가 으깨져 죽었고, 심장에 칼을 맞고 죽었으며, 시신이 우물간에 버려지고, 대들보에 매달렸다. 혈족이라 할 며느리조차 처참한 능욕을 뒤집어쓰고 궁궐을 쫓겨나야 했다.
궁궐 어디에나 그 전쟁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하릴 없는 죽음을 택했던가? 그들이 죽어간 이유는 주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주상이 아니라 주상의 뜻이었다. 그것은 이 시대의 뜻이기도 했다.
-221쪽

시대는 살아 숨쉬었다. 시대는 생각하고 성장하며 완숙해졌다. 사람이 시대를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대가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시대가 성장하는 데는 그 시대의 명을 좇는 자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거대한 시대의 전쟁에 맨몸으로 나선 자들이 그들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시대가 성장하고 발전하여 융성의 시대가 올지라도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부름을 피하지 않고 맞건 그들은 자신들의 피와 살이 융성의 시대를 만드는 한줌 거름이 됨을 기꺼워할 것이었다.-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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