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한 병 사들고 할아버지 제사에 갔지요
아버지 목소리가
집 앞, 옥수수 키처럼 높아졌지요
그래도 장남이 따라주는 술을 제상에 올리는 아버지는
오랜만에 장승처럼 커보였지요


"아비가 못 먹히고 못 입혀서
네 놈이 운동하는 것 같아
항상 맘이 편치 않다"
아버지의 삶은 소금꽃,
제 삶의 첫 선물이었어요
흉터 같은 첫사랑이었어요


"능력이 서로 다른데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가질 수는 없다
사회주의는 땀 흘리지 않고 돈 벌려는 도둑놈 심보가 아니냐
이철이나 김문수 같은 놈들 봐라
한때 운동한다  동네방네 떠들다가도
운동권 경력삼아 여당 야당 들어가서
입 다물고 있는 꼴 좀 봐라
저렇게 운동하려면
일찌감치 때려치워라"


- 아버지
사회주의는 현실의 모순에 눈 돌리지 않는 거예요
아버지의 삶처럼 벼랑 끝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거예요
이건희의 얼굴이 김영삼의 얼굴을 닮아가듯
사회주의는 이 땅 아버지의 모습처럼
정치권력을 바꿔내는 거예요
수십 년을 하루로 압축한 날들이 와요 아버지!

"내 그런 날이 생전에 살아 생전에 올지 모르겠다만
이제 네 나이도 서른인데
운동을 하더라도
네 살 궁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굳이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엄마 마음 고생하지 않게 해라"


아버지는 제사상처럼 오래도록 말이 없었지요
말없이 술을 드시던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제 살을 태워 길을 낸 지방처럼
말씀했지요


"그리고 네 놈이 詩를 쓴다고 하니
한 마디만 덧붙이자
詩는 우주만물을 몇 문장 안에 표현하는 일이다
시는 무한히 크고 또한 작은 것이다
말장난하지 말고 영혼으로 써라!
詩에 네 운명을 표현해라!"

                      
                               -- 조성웅 시집 <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중
                                       '詩에 네 운명을 표현해라'  全文,  2001년, 도서출판 갈무리 刊

 

감옥에서 나온 지 벌써 3개월
쉴만큼 쉬었다
그러나 눈썹 밑을 파고드는 이 불안함은 무엇인가
활동은 온전하게 내 것이었는가?
칠순 아버지는 갈수록 술주정이 심해지고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시간을 보내려던
칠순 어머니는 매일 양말공장으로 출근한다

                    (조성웅詩  '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중에서)

 

도서출판 갈무리의 '마이노리티 시선' 11권.
시인의 칠순 술주정뱅이 아버지 말씀보다 남편의 술주정을 피해 양말공장으로 출근한다는
어머니의 삶에 시선이 꽂힌다.
"이철이나 김문수 같은 놈 봐라"는 아버지의 말도 통쾌하고.
갖은 핑계를 대며 현재의 자신을 합리화하지만 그게 어디 통해야 말이지.
그나저나 시인의 말처럼 '수십 년을 하루로 압축시킨 날'이 올까?

새벽에 일어나 정신을 번쩍 깨우는 찬물 한 사발 같은 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udan 2006-12-14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은 드셨어요? ^^
덕분에 좋은 시 읽고 갑니다.

로드무비 2006-12-14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dan 님, 이 누꼬!
반가워라.
아니요, 좀 있다 먹으려고요.
님은 벌써 출근하셨겠네요.

큰 기대 없이 주문한 시집인데 시들이 좋아서 흐뭇합니다.^^

2006-12-14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owup 2006-12-1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로드무비 님.
이런 시들을 어쩜 그리 잘 찾아내시는지.
찬물이 아니라 얼음물처럼 얼얼해요.

urblue 2006-12-1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말인데 일이 많으신가봐요. 다행인가 불행인가. ^^

에로이카 2006-12-1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십년을 하루로 압축시킨 날"과 "우주 만물을 몇 문장 안에 표현하는 일" 간의 댓구가 인상적입니다. 이런 시들은 가볍고 얄팍하니 하루하루 사는 제 모습을 반성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야말로 죄책감과 미안함이 눈썹 밑으로 파고들지요.. 잘 봤습니다.

플레져 2006-12-1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송전차, 샀어요. 어제 조금 읽었는데 회송전차의 의미가 너무도 맘에 들었어요 ^^
(페이퍼와는 다른 댓글이지만... 많은 의미가 들어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ㅎㅎ)

짱꿀라 2006-12-15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오랫만에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가네요.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 시였습니다.

니르바나 2006-12-15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시인들은 로드무비님 같은 독자가 있어서 행복하실 듯 싶어요.
이름이 보이는대로 시인 성함 몇 분만 적어도
조성웅, 이병률, 박흥식, 우영창, 이재무...
시인협회에서 상 주겠다는 이야기는 없으신가요.ㅎㅎ

로드무비 2006-12-1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 님, 앞으로도 좋은 시들 꾸준히 소개할게요.
그리고, 글쎄말입니다.
상을 준다고 하면 덥석 받을 텐데......^^

santaclausly 님, 많은 것이 불쑥불쑥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연말이라 그럴까요?
님도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플레져 님, <회송전차>는 오래 전에 사두고 최근에 읽었어요.
책을 읽는 시기도 보면 정해져 있더라고요.
그런 산문들을 저도 쓰고 싶어요.

에로이카 님, 가볍고 얄팍한 하루하루라면 저를 따라올 사람이 있을라고요.
그래도 저 반성 안합니다.
시를 열심히 읽는 것으로 시인들에게 최소한의 보답을......^^*

블루 님, 일이 많기는요. 게을러서 그렇죠.
그래도 이번주에 책장수님이 책들을 싹 정리했어요.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먹지 않고도 배가 부릅니다.^^
(연말이라 바쁘신가요?)

namu 님, 나어릴때 님 페이퍼를 보고 알게 된 시인입니다.
시들이 참 좋아요.
든든합니다.^^

속삭이신 님, 시가 마음에 드신다니 흐뭇합니다.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한 결을 갖춘 드문 시인 같아요.^^






2006-12-15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15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12-15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퍼갑니다.
좋은 시입니다.

로드무비 2006-12-16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 님, 퍼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침마다 보따리 님, 아이고, 그렇군요. 짐작은 했지만.
제 남동생도 아버지에게 '빠따'를 맞고 책들을 압수당한 적 있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생활이 조금 더 쾌적해지길 바랄게요.^^

반가운 분이 누구일까요?( '')
버선발로 달려가겠습니다.^^


2006-12-17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17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