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싶었던 책은 루이스 어드리크의 『그림자 밟기』였다.  최지월의 『상실의 시간들』에 밀려 다음으로 미뤄진다. 받아든 책을 펼쳐 만난 문장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두 번째로 펼쳐진 곳이다.

 

 ‘엄마는 세 번의 출산을 모두 집에서 했다. 세 번 다, 아버지는 근무하느라 집을 비웠다. 옆집 아주머니가 도와주긴 했다지만, 엄마는 소희 언니를 낳을 때 호되게 고생했기 때문에 내 출산 예정일에 맞춰선 시댁에 연락했다. 친할머니가 왔는데, 나는 예정일에 나오지 않았다. 보름쯤 해산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급한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시골로 돌아갔다. 나는 고 사이에 태어났다. 열네 시간에 걸친 지독한 난산이었다. 내가 태어난 뒤에 할머니가 다시 왔지만, 이제 몸도 풀었으니 일해도 되겠다면서 밥을 차려내라, 국이 맛이 없다, 집이 더럽다, 애 꼴이 저게 뭐냐 하는 등등의 잔소리와 훈수로 엄마 가슴에 평생 잊지 못할 한을 남겼다.’ (80쪽)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엄마는 다섯 번 출산을 했다. 마지막 남동생의 출산엔 내가 있었다. 뜨거운 물을 끓이는 등 분주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아들 손주라 좋아했다. 하지만 그 귀한 손주를 낳은 엄마에겐 어떤 말도 건네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소설처럼 아버지는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두 달이 지났다. 아버지 방은 사라졌다. 동생이 새로운 장판을 깔고 벽을 도배했다. 방 어느 벽엔 구름무늬가 있는 벽지가 있었다. 그리고 동생이 들어왔다. 아버지가 잠들었던 방에서 동생이 잠을 잔다.

 

 밤새 쏟아지던 장맛비가 사라진 시각, 나는 제습기를 돌린다. 창을 닫고 선풍기를 켜고 제습기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옮긴다. 단편집 『뱀』으로 만난 윤보인의 장편소설 『밤의 고아』가 들려주는 문장들.  ‘문을 열면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간다. 서른한 개의 계단, 아니 서른세 개의 계단, 계단 끝에는 지하실이 있다. 지하실 옆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다.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9쪽)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걸을 것이다. 정해진 곳을 향하거나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을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딘가에 멈춰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이광호의 산문집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속 문장처럼 말이다.

 

 ‘절대로 닿을 수 없을 만큼 누군가와 떨어져 있다면, 죽음처럼 건너갈 수 없는 곳에 누군가가 있다면, 너는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아득한 거리는 아득한 시간이다.’ (37쪽)

 

 나와 아버지의 거리, 나와 엄마의 거리는 아득한 그것이다. 때로 아득해서 꿈속을 헤맨다. 때로 아득해서 멍으로 채워진 시간을 보낸다. 부재를 인정하고 부재를 소멸해야 하는 일이 남은 것일까?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커진다. 엄마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아빠가 아닌 아버지.

 

 

 

 

 

 

 

 

 

 

 

 

 

 

 

 

 

 

 

 

 

 

 내게는 이해인 수녀의 책이 아닌 백지혜의 책인 『밭의 노래』가 나왔다. 백지혜의 책이 처음이라면 『꽃이 핀다』와 함께 만나면 더 좋을 것이다. 끝이 보이는 장마, 그 뒤를 이어 달려올 더위를 날려줄 책으로 『유괴』를 고른다. 초복, 여름이라는 삶에 지친 당신에게 윤희상의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에 수록된 이 시를 건넨다.

 

 

  버드나무로부터의 편지 - 윤희상

 

 

 이른 아침부터 언덕을 거닐며 안으로부터

 울컥 차오르는 마음을 읽고 있다

 그리움이거나

 미움이거나

 목마름이거나 그럴 테지만, 뜨겁다

 이내 바람이 불어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이지만,

 아픈 것은 마음이다

 이제 다치지 않는 바람이 되고 싶다

 날마다 그런 마음을 드리운 그림자를 물 위로 띄워보지만,

 아무도 건져서 읽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바람에게로 간다

 이미, 풀어내린 긴 나뭇가지의 잎사귀들이

 바람 속으로 먼저 들어서고 있다

 언덕에서 바람에게 몸과 마음을 다 맡기도 있다

 벌써 바람과 함께 놀고 있다

 

 -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6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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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돌이 2014-07-22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꽃이 핀다]의 그림작가였군요. 이해인의 글에 그린 사람이...어쩐지 푸근하고 낯이 익는 그림이다 했어요^^
아이 어릴때 사놓곤 그림이 너무 예뻐 자주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림자밟기] 읽으려고 하고 있는데, 선뜻 손이 안가네요.
가슴아픈 가정사를 읽으면 우울해지려고 해서...

자목련 2014-07-23 10:11   좋아요 0 | URL
남희돌이 님도 <꽃이 핀다>를 곁에 두셨군요. 저도 종종 들여다보는 책이에요.
이번 그림책엔 이해인 수녀님의 글이 있어 한층 더 풍성할 듯해요.

[그림자 밝기]는 지금 오는 중인데, 저도 언제 읽게 될 지 모르겠어요.

비가 오는 수요일, 평온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