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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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바 <HEATH>의 공동 경영자로, 아내 가오루,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 호노카와 함께 평범한 삶을 누리고 있다. 공동 경영자인 치프쉐프 오치아이와도 그럭저럭 뜻이 맞아 14년간 별다른 탈 없이 지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 호노카가 학교 친구 때문에 밥을 잘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반 친구 하나가 얼굴 반쪽이 파란 멍으로 뒤덮여 있어 보고 있으면 속이 뒤집힌다는 것이었다. "나"는 호노카를 호되게 꾸짖는다. 다름 아닌 "나"의 과거 얼굴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나"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얼굴 반쪽이 푸른 멍으로 뒤덮여 있어 사람들은 "나"를 괴물이라며 멸시했다. 멸시받을 수록 "나"는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폭력을 쓰면 묘하게 마음이 위로 받았다. 그렇게 반 건달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야쿠자와 시비가 붙어 야쿠자 셋을 칼로 난자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허겁지겁 도망친 뒤 동료인 마카베를 통해 알아보니 칼에 찔린 자 중 하나가 실명했다고 한다. 야쿠자에게 잡히면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할 터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근거지를 버리고 노숙을 하며 하루하루 연명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갈 무렵, 사카모토 노부코를 만난다.

사카모토 노부코는 말기 암 환자였다. 식사를 대접 받고 휴식을 취하며 그녀에게 조금 의지하던 "나는 어느 날 "나"의 비밀을 불완전하게나마 들려준다. 그리고 그녀가 하나의 제안을 한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는 자신이 가진 전 재산 500만엔을 줄 테니 한 가지 부탁을 들어 달라고 한다. 

그 부탁이란 감금 성폭행 당한 뒤 토막내어진 딸의 원한을 갚아달라는 것이었다. 범인은 둘인데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다고 했다. 사카모토 노부코는 그들이 사형 당하지 않고 사회에 나와 다시 삶을 영위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그들이 언젠가 사회로 나오면 죽여달라는 것, 그것이 그녀의 부탁이었다.

"나"는 500만엔만 있다면 새로운 호적을 사고 성형수술을 받기에 충분한 금액이었기 때문에 며칠을 망설이다가 그녀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15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다. 발신인은 "사카모토 노부코". 내용은 "그들은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한 줄이었다.


15년이 흐른 지금 "나"에게 약속 이행을 강요하는 그 한 통의 편지. 그리고 어쩔 줄 몰라 시간만 허비하는 "나"에게 다시 배달된 위협 편지 한 통. "만약 당신이 약속을 어기면 당신 주변에도 나와 똑같은 재앙이 덮질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내용. "내" 딸 호노카가 성폭행 당한 뒤 토막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상상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나"는 선뜻 결심을 하지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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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것도 모자라 토막 내기까지 한 범인들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그들이 무기징역을 마친 시점에 또 다른 계획을 예비하고 사망한 "사카모토 노부코".

"나"는 그녀가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누가 "나"에게 약속 이행을 강요하며 살인을 교사하는 지 알아내기 위해 전전 긍긍한다. 


작가는 다른 작품 <천사의 나이프>에서도 이와 유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천사의 나이프>에서는 주인공 히야마의 아내가 13세의 소년 3명에게 잔인하게 살해 당한다. 갓난아이인 마나미가 보는 앞에서였다. 그러나 그 세 명은 '14세 미만인 자의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촉법 소년 규정에 따라 처벌받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피해 당사자인 히야마는 범행을 저지른 소년들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과연 이것이 정의 실현을 위한 정당한 법률 체계인가 하는 의문을 독자와 공유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살해 했는데도 불구하고 15년 정도 흐른 뒤에 범인은 사회에 나와 "갱생"의 삶을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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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사카모토 노부코"의 약속 이행을 강요하는 것은 공동경영자 오치아이였다. "나"는 반 건달 생활을 하던 때에 여성들을 상대로 강도 행각을 벌였었다. "내"가 잡히게 된 4번째 범행 사건의 피해자가 바로 오치아이의 여자친구였다. "나"는 강도짓을 벌이려다 3살 정도 된 사내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동요한다. 바로 그 때 다른 남자가 그 집에 찾아와 "나"는 어쩔 수 없이 벽장에 사내아이와 숨게 된다. 그런데 들어온 남자는 피해여성의 아버지였고 야쿠자였다. 그 남자는 친 딸을 범한 뒤 사라졌고 여성은 얼마 뒤 자살하고 만다. "나"는 그녀를 성폭행 한 죄까지 뒤집어 쓰고 복역한다.

오치아이는 범행 피해자 모임에서 "사카모토 노부코"와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계획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당시 3살 짜리 아이는 후에 자라서 <HEATH>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게 되는데 바로 고헤이다. 고헤이가 마지막에 증언해 준 덕에 "나"는 누명을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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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꽃
정현웅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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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의 여대생 민선아가 파라티온이라는 농약에 중독되어 사망한다. 경찰은 없어진 물건이 없고, 미혼임에도 3개월 된 태아를 잉태하고 있던 점 등을 종합하여 신변 비관 자살로 처리하려 한다. 하지만 민선아의 남동생은 자살이 아니라며 신문기자인 '나'를 찾아오고, '나'는 그의 말대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판단하여 사건에 뛰어든다. 

민선아의 주변 인물부터 조사를 시작하자 뜻밖에도 아름답고 청순하게 비춰지던 그녀는 윤리적으로 상당히 문제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녀는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가난한 농부에게 입양되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야망이 남달랐다. 

대학에 진학한 뒤 그녀는 재력가의 아들과 사귀면서도 요정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가 하면, 모처에서 재벌의 정부 노릇도 하였다. 그녀는 돈이 되는 일이면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고 자신의 몸도 적극 활용했다.  

그런데, '내'가 민선아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니 뜻밖에도 그녀가 재일교포 재력가의 숨겨진 딸이라는 사실이 알게된다. 재일교포 재력가는 민선아에게 거액을 상속하려 했는데, 상속이 이뤄진 직후 그녀가 사망한 것이다. 

문란한 성생활에 배신감을 느낀 남자친구와 그녀에게 거액을 상속시켜 주는 과정에서 돈에 욕심을 낼 법한 자들, 민선아에게 사랑을 고백했거나 고백하기 직전 실연을 맛본 짝사랑남 등 용의자는 무려 10명에 달했다.

'나'는 민선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재벌의 아이라는 점을 통해 민선아가 씨받이 노릇으로 한몫 챙기려다 재일교포 생부로부터 거액의 돈을 상속받게 되자 아이를 지우려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그리고 10명의 용의자에게 민선아가 잉태한 아이의 정체를 밝히면서 그들의 반응을 살펴 용의자에서 한 명씩 제외해 나가기로 결심한다.


작가 정현웅은 1949년 청주 출생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死者의 목소리>, <잃어버린 世代>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어느 여공의 죽음>, <마루타>, <여대생 살인사건>, <소설 광주 청문회> 등 현실성과 역사성이 강한 소설을 써왔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읽히지 않는 소설이 진정한 소설' 이라는 묘한 논리를 펴는 작가들에 대해 위선과 가식을 느낀다면서, '독자들에게 읽히는 소설, 좋은 추리소설'을 써서 한국 추리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바늘꽃>은 6.25.라는 역사적 격동과 재일교포 문제, 천민자본주의의 폐해가 낳은 윤리적 타락 등을 '사회파적' 관점에서 굵직한 필치로 그려낸 작품으로, 읽히는 소설이고 괜찮은 소설이다.


민선아를 살해한 범인은 민선아의 동생 민태호이다. 그는 민선아를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윤리적 타락에 깊이 절망한 나머지 그녀를 살해했다. 커피만 마시던 그녀가 쥬스를 마시고 사망한 것은 그가 민선아를 죽이려고 결심했을 때 1-2분 내로 집으로 찾아온다는 장성태(경찰이 범인으로 지목하여 2심 재판까지 마친)의 전화 때문이었다. 1-2분 내에 커피를 끓이는 것이 불가능하자 민태호는 쥬스를 이용한 것이다. 장성태는 실제 민선아의 시체와 쥬스잔, 부엌의 구조를 보았기 때문에 거짓말탐지기에 반응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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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1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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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방은 정조의 종친으로, 약관의 나이에 무과 별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가 된 인물이다. 그는 뜨거운 충심으로 종묘사직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으며, 연쇄살인을 여러 건 해결하여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 그가 최근 스물 다섯 편으로 묶인 금서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금서의 제목은 <열하일기>이고, 지은이는 연암 박지원이다. 박지원은 건륭제의 일흔 번째 탄신일을 축하하는 진하별사의 일원으로 경자년(1780년) 5월 25일 한양을 출발하여 연경과 열하를 주유한 뒤 10월 27일에 조선으로 돌아와 <열하일기>를 지었다. 공맹과 주자의 단조롭고 따분한 문체와 사상에 지쳐있던 조선의 서생들은 <열하일기>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정조는 <열하일기>로 인해 새로운 문체가 난립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정조는 서얼허통 정책을 펴며 <백탑파>를 중하게 썼지만 이 즈음에 이르러서는 문체반정을 꾀하며 <백탑파>의 새로운 사상과 문체를 경계했다. 

정조는 이명방에게 <열하>를 읽으며 모임 갖는 이들을 감시하고 그들의 전모를 파악하여 낱낱이 고하라고 명을 내린다. 하지만 정작 이명방이 <열하>를 읽는 모임의 일원임을 정조는 몰랐을까? 이명방은 자신이 간자 노릇을 해야하는 처지에 떨어진 것에 절망하면서도 왕에 대한 충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을 받든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후 <열하>를 읽는 모임 구성원들이 하나, 둘 살해되기 시작한다. 범인은 오리무중이고, 증거들은 훼손되어 이명방을 범인으로 지목하기 시작한다. 의금부의 추격을 따돌리지 못하고 마침내 압송되어 갖은 형벌을 받은 이명방은 정조와 독대하길 청하여 단 하루의 말미를 얻는다.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를 잡아 결백을 증명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용의자가 폭사하여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다시 의금부로 돌아온 이명방에게 꽃미치광이 김진이 범인을 잡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후 떠나고, 이명방은 <열하>를 읽은 자가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과거 시험장 입구에 세워져 수모를 받게 된다.


<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에 이은 <백탑파>의 세번 째 이야기이다. <백탑파>는 정조의 총애를 입었기에 규장각을 근거지로 새로운 사상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그들은 붓을 꺾어야만 했다. 자송문을 지어 바치라는 왕의 명에 응하면 자신의 사상을 버리는 게 되고, 응하지 않으면 불충한 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백탑파> 서생들은 "군왕은 군왕의 편일 뿐, 누구의 편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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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
디디에 드쿠앵 지음, 양진성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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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중고차 시장에 와서 쉐보레 코베아를 눈 여겨 본다. 중고차 판매인은 그에게 코베아의 성능에 대해 다소 과장해 설명한다. 그러나 사내는 오직 차의 색깔에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는 코베아의 하얀색을 마음에 들어했다. 뉴욕에서 눈이 내리거나, 눈이 쌓여 있는 60일간, 사내는 하얀색 코베아를 타고 경찰을 피해 먹잇감에 접근할 것이었다.


1964년 3월 3일 뉴욕 퀸즈 구역의 큐 가든스에서 28살의 이탈리아계 여성 캐서린 수잔 키티 제노비스가 새벽 3시 30분경 자택 부근 도로에서 윈스턴 모즐리에게 살해 당한다. 윈스턴 모즐리는 하얀색 코베아에서 사냥감을 물색하다 제노비스를 발견하자 곧 차를 주차시킨 뒤 그녀를 쫓아가 칼로 두 차례 찌른다. 제노비스는 윈스턴 모즐리가 다가오는 순간 위험을 감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모즐리의 행동이 더 빨랐다. 자상을 입은 제노비스의 죽음은 아주 잠깐 유예되는데, 한 시민이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야! 여기서 꺼져" 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제노비스는 골목을 돌아 자신이 살고 있는 건물까지 피신해 간다. 모즐리는 아주 잠깐 자신의 모습이 시민들에게 노출되어 범인으로 특정되거나,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차를 이동 주차하고 난 모즐리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주민들이 방관자로 머물러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핏자국을 따라 제노비스를 쫓아간 모즐리는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칼로 찔렀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제노비스의 웃을 벗긴 후 시간(屍奸)까지 마친 모즐리는 유유히 현장을 떠난다. 그가 체포된 것은 얼마 후 전혀 다른 사건 때문이었다. 빈집을 유유히 털던 모즐리는 빈집 주인을 잘 알던 이웃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게 잡힌다. 경찰은 모즐리의 차가 제노비스 사건 때 발견된 수상쩍은 차량과 비슷한 점을 알아차리고 별 기대없이 얼마 전 일어난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묻는다. 뜻밖에도 모즐리는 자신의 범행을 순순히 인정한다.


재판을 통해 모즐리는 평범한 집안의 가장으로 밝혀진다. 그는 제노비스 외에도 몇 건의 살인을 더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모즐리는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보다는 죽어버린 상태에 흥분했다. 죽어버린 대상은 모두 여자였고, 기회가 있다면 시체를 강간했다. 돈을 뺏기 위해 죽인 건 아니었지만 돈이 있으면 빼앗아갔다. 그는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데 왜 하지 않겠느냐는 투로 일관했다. 사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이던 모즐리는 얼마 후 항소를 제기해 감형 받는다. 정신이상일 수 있다는 이유였다. 

감형으로 목숨을 구한 모즐리는 얼마 후 자신의 항문에 이물질을 넣어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탈옥한다. 평범한 가정집에 침입한 그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강간하고 그들을 인질삼아 경찰과 대치하다 다시 체포된다. 


제노비스 사건은 <뉴욕 타임즈>의 마틴 갠스버그 기자를 통해 38명이 침묵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38명의 주민들이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는 30여분 동안 침묵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고, '제노비스 신드롬', '방관자효과' 등이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하지만 최근 이 사건은 '기레기'의 조작이었을 수 있다는 점이 재조명되고 있다. 기자는 주민들이 모즐리가 제노비스를 칼로 공격하고 죽을 때까지 찌른 후 강간하는 동안 침묵했다는 식으로 기사를 썼지만 사실 주민들은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난 이 사건 전체를 모두 관망한 뒤 침묵한 게 아니었다. 일부는 사소한 다툼으로 이해했고, 일부는 고양이 소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침묵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모즐리가 최초 범행 장소를 피해 도망간 것도 한 주민이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모즐리가 제노비스를 죽이고 강간한 마지막 장소는 길거리가 아니라 건물 안이었으므로 목격자가 없었다. 게다가 모즐리가 일주일 후 잡혀온 것도 따지고 보면 빈집털이 중 시민의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서였다. 


<지옥의 존>으로 콩쿠르 상을 수상한 디디에 드쿠앵은 제노비스 사건을 소설화 하면서 <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 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는데, 그가 생각한 답은 '방관자' 들인 것 같다. 그리고 '방관자'들은 '다름 아닌 우리'이니, 우리가 제노비스를 죽였다는 울림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제노비스는 엄연히 시체성애자 모즐리가 죽인 사건이다. 시민들은 살인을 방조하여 침묵한 적이 없다. 물론 일부 상황을 잘 못 파악했거나, 이웃에 대한 관심이 다소 기대에 못 미쳤을 수는 있다. 하지만 '누가 죽였는가?'라고 물을 정도는 아니다. 

디디에 드쿠앵은 소설 속 주인공 나단에게 아내 길라가 "나단, 당신이었따면 정말 내려가 봤을까?"라고 질문하며 소설을 마무리짓는다. 하지만 사건 당시 모즐리가 되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제노비스의 곁을 지킨 이웃 주민도 있었다. 소설가의 자극적인 도발에도 불구하고 실제 주민들은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범인이 명백한 살인사건에 '누가 죽였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인간성에 대한 심각한 불신을 초래할 뿐이다. 제노비스를 죽인 것은 시체성애자 모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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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 밸리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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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웨일즈의 펨브로크셔 해안 공원 휴게소에서 바네사라는 이름의 대학교수가 실종된다. 남편 매튜는 경찰에게 '개와 산책을 다녀오니 아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진술한다. 자동차 키도 그대로 있었고 핸드백 등 소지품도 그대로 있었다는 남편의 진술은 어딘지 의심스러웠다. 보통 이런 경우 남편이 범인인 경우가 많았다. 경찰은 남편을 의심했지만 뚜렷한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는 라이언이라는 불량스러운 청년에게 납치되어 동굴에 감금된 것이었다. 라이언은 데몬이라는 악덕 사채업자에게 빚을 끌어다 쓴 뒤 갚지 못하게 되어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만약 데몬의 빚을 갚지 못한다면 라이언은 죽은 목숨이었다. 라이언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납치였다. 바네사를 자신만 알고 있는 동굴에 납치 감금하고 몸값을 받아낸 뒤 풀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라이언은 납치 사건을 벌이기 얼마 전 술집에서 일으킨 상해사건 때문에 체포되고 만다. 라이언은 바네사를 납치해 동굴에 감금해두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그녀가 사망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가 무거워질 것을 우려해 결국 입을 다물고 만다. 


2년 반의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라이언은 다시는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진다. 전 여친이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성폭행 당했고, 어머니 역시 괴한에게 납치되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라이언은 데몬의 짓일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네사가 어떤 식으로든 동굴을 탈출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강박에 시달린다. 


한편, 바네사의 남편 매튜는 아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세월을 견디다 새로운 여성 지나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지나와의 관계가 점차 진전되던 어느 날, 그들의 주변에서 새로운 납치 사건이 일어난다. 지나의 친구 알렉시아가 과거에 실종된 바네사와 똑같은 형태로 사라진 것이다. 펨브로크셔 해안 공원 휴게소에 알렉시아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차 안에 키와 핸드백 등 소지품이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알렉시아의 남편 켄을 의심하지만 그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고, 지나가 원래 알렉시아 대신 펨브로크셔 해안에 가기로 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나의 전 남친도 용의선상에 올리지만 그 역시 혐의를 벗게되어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한편, 이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자 라이언은 또 다시 과거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상기하면서 음울한 상상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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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출생인 샤를로테 링크는 1985년 <크롬웰의 꿈, 또는 아름다운 헬레나>로 데뷔한다. <폭스 밸리>는 납치범이 몸값 협상을 벌이기 직전 체포되어 인질이 사망한 뒤 비슷한 범죄가 다시 일어난다는 플롯의 소설이다. 책 표지에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보아 넘긴 인물과 디테일에 주목하라! 그 안에 사건을 풀 열쇠가 들어 있다!" 라고 씌여 있지만, 사실 작가는 독자와 정당한 게임을 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사건의 범인은 알렉시아의 남편 켄이다. 알렉시아와 켄 부부는 겉보기와 달리 쇼윈도 부부였다. 일과 가정 모두를 완벽하게 관리하는 커리어 우먼을 꿈 꾸었던 알렉시아는 사실 점점 망가져 가는 경력과 남편에 대한 불만 때문에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독설을 퍼부어대기 일쑤였다. 반면 켄은 변변한 직장도 없이 네 아이를 돌보느라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차였다. 그런 시기에 아내 알렉시아가 술을 먹고 주사를 부리자 우발적으로 휘두른 폭력에 아내가 사망하자 과거 납치 사건을 연상케 하는 조작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데 가만. 분명 경찰은 켄에게 알리바이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작가는 독자와 공유한 이 정보를 '거짓'으로 만듦으로써 반전을 만들어 낸다. 미스터리 소설에서 독자와 정당한 게임을 벌이지 않으면서 반전이라고 우기는 것은 3류가 하는 짓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32090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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