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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대단한 아이디어 뱅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한 선출직 공무원이 있다. 그는 선출직 공직에 당선된 직후부터 본인의 '끼'를 마음껏 발산해왔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날이 갈수록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고, 그래서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당선자의 생각을 묻자 그는 대번 대답했다. "쌀로 국수를 만들어서 먹으면 되지!"

이 선출직 공무원이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이라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쌀 생산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말하는 자리에서, 현실적으로 통용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 이익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으로 갈 것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는 '아이디어'만을 내놓는 그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혀를 찼다. 2008년 초, 이명박 대통령이 아직 당선자 신분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논리 구조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싼 담론에서도 사실상 동일하게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쌀농사가 힘들면 쌀국수를 먹으면 되지, 라는 말처럼, 인문학이 위기라면 '희망의 인문학'을 하면 되지, 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논리 구조는 대동소이하다. 구조적 변화에서 비롯한 위기 앞에서 '시장성'의 재고를 강조하는 것 말이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위기'라는 현상 그 자체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 담론들의 모습이 더욱 문제적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그 위기에 대한 이 반응만큼은 분명히 한국적이며, 그 자체가 사실상 더 큰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야기를 좀 더 풀어놓기 위해서는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고병헌 옮김, 이매진 펴냄)을 펼쳐들 필요가 있다.

'희망의 인문학'은 현재 대한민국의 인문학 관련 논의에서 '지배 담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문학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대학의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 자신의 효용을 적극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내용을 그 골자로 놓고 본다면 분명히 그렇다. 애초에 노숙인을 상대로 제기된 그 발상은 이제, 당장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취약 계층뿐 아니라 대기업 CEO까지 모든 사람들이 어떤 '쓸모'를 위해,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돈을 잘 벌기 위해 인문학을 배워야만 한다는 수준으로까지 격상되어 있는 지경이다.

가령 <프레시안>에 실린 고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의 칼럼 제목은 "돈 벌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을 공부하라"였다. 이와 같은 발상이 버젓이 매체의 지면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있었던가?

대학생들은 "인문학도 스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스티브 잡스 같은 CEO나 그런 이들을 동경하는 직장인은 "인문학을 접목한 아이템이 히트 친다"는 발상 하에, 인문학에 대한 게걸스러운 관심을 보이는 시절이다. 한국연구재단 역시 2006년부터 '열림과 소통'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매년 일주일씩 '인문 주간'을 진행한다. 인문학으로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하겠다는 발상은 가히 모든 이들에게 상식처럼 공유되고 있다.

<희망의 인문학>이 이런 모든 변화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인문학'과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싼 담론들의 지형을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른바 '강단 인문학'에 대항하는 개념, 즉 '희망의 인문학'을 제시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한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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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인문학>(얼 쇼리스 지음, 고병헌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왜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하게 사는가? 이 해결되지 않는 질문 앞에서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인 얼 쇼리스는 한 가지 답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의 빈곤은 물질적 결핍과 숱한 도덕적 좌절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성 그 자체"라고 정의내린 후, 그는 "전적으로 소득에만 기초한 빈곤선은 중산층의 삶을 발견한 사람들로부터 빈민을 가려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55쪽)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참석한 향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리스토데모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던 아폴로도로스가 길 위에서 만난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액자 형식의 작품인 <향연>에서, 정작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여사제 디오티마였듯이, 얼 쇼리스 역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어떤 여성의 입을 통해 전달한다. 그는 비니스 워커라는 여성 제소자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어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그 핵심적인 부분을 펼쳐보자.

비니스는 대화의 주제가 실제로 자녀 문제로 넘어갈 수 있도록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빠르지만 리듬감 없는 어투로 입을 얼였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moral life of downtown)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 "그렇게만 하면, 그 애들은 더는 가난하지 않게 된다니까요!" (…) "길거리에 방치된 그 애들에게 도덕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168쪽)

일반적으로 볼 때, 가난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노동이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혹은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적·도덕적 고양. 클레멘트 역시 그와 같은 긍정적 효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볼 때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무력(force)'에 의해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일을 하면 일을 할수록 가난해지고 무기력해진다. "빈곤의 포위망 안에서 하는 노동은 무질서하기 짝이 없"으며, "그런 식의 노동은 또 다른 무력을 낳게 되고, 포위망 안의 혼돈은 점점 더 심해져 가"(117쪽)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에 대한 해법은 노동 혹은 노동운동을 통한 단결이 아니다. 중산층과 같은 정서적·도덕적(moral) 힘을 기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부유하고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러한 결론을 정당화한다.

내가 만났던 빈곤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모두 무력의 포위망에 대해 일종의 창조적 대항, 적극적 대응을 했으며, 이것은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보다는 운명에 대항하는 자유의 성장과 더 많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161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 주목해보자. 얼 쇼리스는 1990년대 미국의 상황 속에서 노동운동을 통한 단결과 노동 조건 회복 및 정서적 고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인문학'을 통해 개인이 그 유연화된 노동 속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준다. 노동의 유연화는 불가항력이지만 그 속에서 '자력 구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얼 쇼리스와 '희망의 인문학'은 어떤 측면에서 볼 때 1970년대 이후의 신보수주의와 기본적인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3) 계속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클레멘트 코스의 역사를 마저 개괄하기로 한다.

이와 같은 사상적 기반에서 출발한 클레멘트 코스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졸업 뒤 6개월이 지났을 때 정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거나, 전일제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두 가지 다 해당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는데, 그는 "뉴욕 라디오 방송국에 비정기적으로 원고를 쓰면서 바드 대학에 다시 한 번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269쪽)었다. 책에 따르면, 클레멘트 코스를 이수한 17명의 졸업생들은 정규 대학에 진학하거나 정규직이 되었다. 예외는 단 한 명뿐인데, 그나마도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발적 실업'에 속한다.

빈민들이 개인적으로 삶의 원동력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적어도 이 책 <희망의 인문학>에 등장하는 사례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고 모범적이다.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일군의 사회운동가 및 학자들이 한국에서도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 운영 중이다. 성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 글쓰기 교수인 최준영에 따르면,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인 성프란시스 대학의 1기와 2기 졸업생 20여 명 중 대부분은 노숙 생활을 청산했으며 "앞으로 최소한 자기 자신만큼은 책임지는 삶을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하기)

개인적인 자립은 한낱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다. 얼 쇼리스의 책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빈민들이 합법적 권력의 범주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러고 나서 게임의 잔혹성과 맞선다면, 그들은 기존에 확립된 사회 질서에 진정한 위협이 될 것"(428쪽)이라고 확신한다. 자존감을 회복한 빈민들이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위험'한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얼 쇼리스가 주창하는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의 위기'에 맞서 현재 진행 중이다.

3

얼 쇼리스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교편을 잡고 있던 시절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 줄여서 '스트라우시안'(Straussian)들은 몇 가지 사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 고전에 대해 대단히 큰 경외심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플라톤을 열심히 읽는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레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비의적(秘儀的)인 방식으로 엘리트주의적인 정치사상을 감춰두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한들, 실질적으로 국가를 지배해야 한다는 내용이 플라톤의 텍스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을 그렇게 해석하였고 그의 제자들은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제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앨런 블룸(Allan Bloom)이며 그와 얼 쇼리스는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 얼 쇼리스는 회상한다.

블룸 교수와 나는 4년 동안의 대학 교육과정 대부분이 '위대한 고전들(Great Books)'을 읽는 것으로 구성된, 허친스 총장 시대의 시카고 대학교를 다녔다. (…) 레오 스트라우스(Leo Staruss)는 블룸 교수를 우파로 끌어들였고, 이 세상은 나를 좌파로 인도했다. (186~187쪽 각주)

'희망의 인문학'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스트라우시안 좌파'의 작품이다. 앨런 블룸은 <미국 정신의 종말>을 통해 인문학을 통한 고전 교육이 선택받은 엘리트의 전유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얼 쇼리스는 비판한다). 얼 쇼리스는 그 프로젝트의 거울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을 통한 '개인'의 육성과 도야라는 측면에서 앨런 블룸과 얼 쇼리스의 생각은 같다. 다만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논의가 나누어지고 있을 뿐이다. 앨런 블룸은 스트라우스의 뜻에 따라 비의적 텍스트의 저술가인 플라톤을 숭배한다면, 얼 쇼리스는 바로 그 플라톤의 손아귀에서 진정한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구해내고자 한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할 겁니다. <변명(Apology)>, <크리톤(Crito)>의 일부분, <파이돈>에서 몇 쪽, 아마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학생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을 것입니다." (234쪽)

왜 얼 쇼리스는 '변명', '크리톤' '파이돈'의 '몇 쪽, 일부분'만 읽으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는 플라톤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학생들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서 그의 의도는 너무 극명하게 드러난다. 플라톤에서 시작한다면서 플라톤의 독창적인 영역은 건드리지도 않는다. 보다 못한 디오티마, 아니 비니스가 한 마디 첨언한다.

"뭔가 빠뜨린 게 있는데요." (…) "'동굴의 비유'요. 그걸 빼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철학을 가르치려고 하죠? 동굴이 바로 빈민 지역이고, 빛이 교육인 거죠. 가난한 사람들은 분명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 (234~235쪽)

쇼리스가 플라톤의 핵심 저작인 <국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인 '동굴의 비유'를 빼놓았던 동기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과 중기 대화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는 전적으로 플라톤의 작품일 뿐 소크라테스의 실제 행적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니스가 올바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상대가 가난한 사람들이건 아이비리그의 귀공자들이건) 플라톤 철학을 가르치면서 동굴의 비유를 생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얼 쇼리스가 플라톤, 혹은 플라톤을 비의적으로 해석하고 숭배하는 앨런 블룸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스트라우시안 우파'와 '스트라우시안 좌파'의 대립으로 바라보지 않는 한 쉽게 인식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열광, 근대 및 근대 철학자들에 대한 포괄적인 반감, '정치적 삶'에 대한 강조 등, 얼 쇼리스는 자신이 증오하는 앨런 블룸과 매우 많은 지점을 공유한다. 동시에 그는 그로부터 비롯한 문제점들도 함께 가져갈 수밖에 없다. 앨런 블룸이 플라톤을 비의적 엘리트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적인 것처럼, 얼 쇼리스가 플라톤의 저술에서 오직 소크라테스만을 읽어내는 것도 온당한 독해의 방식은 아니다.

얼 쇼리스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바를 살펴보면 인문학에 대한 그의 입장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을 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소크라테스, 혹은 인문학을 배워 '힘'을 얻게 된 사람에 대한 영웅주의적 묘사와 숭배는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와 같은 작품들의 영향을 고려할 때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 가능하다. 앨런 블룸의 것과는 다른 방향이지만, 어쨌건 '희망의 인문학' 역시 어떠한 종류의 '미국 정신'인 것이다.

<희망의 인문학>에 내재된 인문학적 시각은 결코 그 자체로 지적 권위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희망의 인문학'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헌신과 열정에 대한 존경심과는 별개로, 얼 쇼리스가 제시하는 인문학에 대한 관점은 전적으로 옹호되기에는 무리가 많다. 우리가 정말 인문학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면, 얼 쇼리스의 '인문학' 역시 그 반성적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4

이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누군가의 내면적 주체성을 북돋워줌으로써 그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왜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보다 인문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자살하고 있을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왜 '희망의 인문학'이 승리하는 가운데, 인문학자들은 절망하고 좌절하여 목숨을 끊고 병에 걸리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가?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클레멘트 코스를 수강하는 그 누구보다도 인문학에 푹 빠져 산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건 미국에서건 마찬가지이다. 매우 기초적인 삼단논법에 따라 생각해보자.

대전제 :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힘'을 가진다.
소전제 : 인문학자는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결론 : 인문학자는 '힘'을 갖는 사람이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이와 정 반대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솟아오르는 동안, 정작 인문학의 근간이 되는 연구를 수행하는 소장학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문자 그대로 말라죽어가고 있다.

7월 4일 세상을 뜬, 대표적인 하이데거 전문가 고(故) 신상희의 사례를 살펴보자. 그는 하이데거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번역해온 사람으로, 후기 하이데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숲길>을 포함해 다수의 작품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하지만 대학들은 인문학 교수의 정원을 줄여나가기만 할 뿐이었고, 그는 늘 교수 임용에서 고배를 마셨다. 오랜 절망 끝에 헤매던 그는 50세의 이른 나이에 심장 발작으로 숨을 거둔다. <교수신문>에 따르면 고 신상희의 "아내는 남편의 깊은 사색 저편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오랫동안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잠시 접어두고, 대신 이 한 사람의 인문학자의 죽음에 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들이 인문학과의 정원을 줄이거나 폐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인문학 연구자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인문학 교수들의 철밥통이 깨지는 것'이라며 비아냥거린다. 지금까지 인문학자들이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을 잃었고, 그 결과 인문학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식의 해석 혹은 훈수도 빠지지 않는다(앞서 인용한 고원 교수의 "돈 벌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을 공부하라"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문제의 원인을 그와 같이 파악한다면, 클레멘트 코스와 같은 대중적인 인문학 강연의 수를 대폭 늘림으로써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사실이 그러할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클레멘트 코스에서 전제하는 '인문학'은 결코 인문학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줄 수 있도록, 그와 같은 목적으로 편집된 인문학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인문학적 관점이겠지만 그것이 전체 인문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인문학이 대중들의 삶에 희망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희망의 인문학'을 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져갈 때, 고 신상희와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위해 인문학을 교육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깔려있을 때, 나치에 협력한 혐의를 안고 있는 하이데거만을 연구해온 사람과 그의 작업들은 어떻게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얼 쇼리스의 입장과 같은 '하나의 인문학'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문학이 통째로 사라진 세상만큼이나 끔찍할 수 있다. 모든 인문학자들이 대중들에게 삶의 의미와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가르쳐야 하는 세상은, 모든 철학자들이 신의 은총을 찬미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해야만 했던 중세 시대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애초에 '인문학의 위기'라는 논의의 프레임 자체가 잘못되었다. 인문학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기초 학문의 연구가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되는 학문, 돈이 되는 학과로만 정부 및 대학들의 지원이 쏠린다. 해당 분야 내에서 충분히 인정받는 연구 실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더라도, 해외의 연구지에 등재되지 않으면 성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식의 협박이 횡횡한다.

이것은 인문학의 위기지만 인문학'만'의 위기는 아니다. 기초 학문 전체의 위기를 놓고 연대의 범위를 넓혀나갈 때 비로소, 한국 사회 내에서 대학이 갖는 위상과 그 대학 속에서 학문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고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우선 '인문학의 위기'라는 단어가 너무도 '핫'하게 떠올라버렸다. 그리고는 그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어떤 하나의 인문학적 해석 및 방법론이 마치 모든 문제의 해법인 것처럼 논의되고 주창되고 도덕적 우월성을 지니는 명제처럼 유통되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이여, 고매한 상아탑에서 벗어나 대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라!'

얼마나 쉽게 대중들의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구인가. 그리하여 인문학의 위기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대중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 연구실에서 파고들어야만 하는 철학을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은 쓸쓸히 잊히고 생계를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5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 자체가 지니는 가치는 쉽사리 폄하될 수 없는 것이다. 학문과 세상이 맺어야 할 올바른 관계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고, 그것을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책갈피마다 끼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린 '인문학의 위기'는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인 사태다. 대학이 '돈이 되는' 학문에만 자원을 집중하는 현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 뿐 아니라 모든 기초 학문들이 고사 직전에 몰렸다. 애초에 지원이 부족하던 인문학자들이 먼저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해서 사태의 본질이 오직 인문학에 대한 것으로 축소되지는 않는다.

<희망의 인문학>은 그 문제 중 일부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전체에 대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문제는 오직 이 책만을 혹은 이 책에 대한 소개만을 읽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내뱉는 목소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희망의 인문학>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촉발된 국내의 담론들은 한층 더 문제적이다. 고매한 상아탑의 학자들이 대중들과 지식을 나누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중, 그 연구자들이 적절한 수준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식 나눔', '배움의 공유' 같은 그럴싸한 단어들이 횡횡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과 노력을 들여 얻은 지식을 무료 혹은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배포하라는 목소리만 높아지고 있을 뿐이다.

얼 쇼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희망의 인문학>을 읽고 감동받았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자들에게 무턱대고 지적 자원봉사를 요구할 때,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그는 못을 박는다.

(…) 자원봉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름지기 대학 수준의 강의는 자원봉사자가 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코스 교수들은 일류 대학의 조교수들이 받는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 (23쪽)

인문학 하는 너희들이 지금까지는 너희들끼리만 통하는 소리 하고 시시덕거렸으니 좀 굶어도 싸다, 굶기 싫으면 '소통'해라, 이런 식의 폭력적인 요구가 적어도 <희망의 인문학>에는 담겨있지 않다. 국내에서 시행되는 '좋은 활동'들 중 상당수가 참여자들의 인내와 고통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다른 인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도 '상아탑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얼 쇼리스는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국내에서 통용되는 '희망의 인문학'에 대한 논의에는 이와 같은 현실적 고려가 얼마나 담겨있는가?

필자는 한 선출직 공무원이 쌀농사에 대해 내놓은 '아이디어'를 비판하면서 이 서평을 시작했다. 쌀이 잘 안 팔리면 쌀로 국수를 만들면 되지. 이 발상은 현실성이 없다. 쌀로 국수를 먹은 사람이 또 밥을 먹는 게 아니니까, 전체적으로 쌀 소비량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쌀국수를 만드는 쌀과 우리가 밥을 해먹는 쌀은 종(種)이 다르다.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설익은 담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생을 바쳐 어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너 고매한 상아탑에서 머물지 말고 '희망의 인문학' 해봐 라고 말하는 것은 농민들에게 벼 뽑고 안남미 심으라고 하는 말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제에 대한 해법이 아니며, 오히려 문제를 가중시킬 뿐이다.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에 대한 국내의 담론에서 한 이정표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의 성공과 그 파장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현상은 매우 다양하고 중층적이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 하는 것 자체는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미약한 빛이 비춰지고 오직 그것만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법처럼 이해될 때, 누군가는 굶고 절망하고 죽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윤리가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는 것, 잊지 않고 거짓 해법에 열광하지 않는 것. 인문학이란 본질적으로 기억하고 되새기는 학문이니까. 다양한 논의와 해법이 오가는 가운데 진정한 '희망의 인문학'이 도래할 날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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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권한다!

"오늘날 격변하고 있는 세계의 핵심을 단 600쪽의 글을 통해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책을 읽으시라!"

이렇게 나는 권하고 싶다. 중국 부상론 또는 패권론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은 중국의 내면을 정교하게 읽어내고 그걸 통해 세계 질서 재편의 경향과 본질을 짚어내는 위력을 절감하게 해 줄 것이다. 그건 자료의 풍부함과 치밀한 논리 전개만이 아니라 중국의 변화를 읽어내는 틀 자체가 다르고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 마틴 자크는 영국의 좌파 잡지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편집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런던정경대학 부설 국제관계및외교전략연구소(LSE IDEAS)의 아시아 경제연구소 초빙 연구위원으로 영국 언론 <가디안>에 아시아 문제 전문가로서 기고를 해왔다.

그런 까닭에 꽤나 까다로운 이론적 성찰 위주의 <마르크시즘 투데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실증적 자료 제시와 세계 체제 전체에 대한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그런 이론적 토대가 굳건하게 있기에 변화의 속도가 빠른 세계 현실의 핵심을 명확하게 잡아내고 있기도 할 것이다.

경쟁하는 다양한 근대와 문명사


▲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마틴 자크 지음, 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부키
이 책의 덕목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변화를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결합해서 확대 재생산해내는 중국의 경제력에만 시선을 한정시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마틴 자크는 중국이 가지고 있는 문명사적 자산의 기반을 놓치지 않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중국이 중국형 발전의 길을 창출해내고 있는 지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시선은 서구의 발전 과정이 만들어낸 역사관이나 발전론 또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틀 속에서 중국을 설명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서구의 경험만이 유일한 근대적 선택이 아니라는 현실, 달리 말해서 "경쟁하는 다양한 근대적 선택들"에 대한 자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통치술의 지혜"를 가지고 정치적 안정을 지속시키는 면모도 서구 정치철학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중국의 현실적 요구를 전제로 파악해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그는 중국을 사회주의 혁명과 이후 실용 노선의 채택에 따른 자본주의화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존재하는 유교 문명의 저력을 깊이 응시한다. 이때의 유교 문명의 힘이란 낡은 고대의 정치철학이나 중세 봉건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치가 중국 인민에게 도덕적 덕을 갖춘 부모와 같고 따라 그 책임 또한 무한하다"는 면모를 이해하는 틀이 되고 있다.

이런 현실은 계약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서구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근대적 현실로 보이지만, 도리어 훨씬 그 책임의 수준이 높고 정치의 안정성이 보장되고 있다는 것을 주시한다. 물론 그는 이러한 정치철학 내면에는 그 책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때에는 역성혁명이라는 하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전제가 있음도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마틴 자크는 비교정치학자로서 명성을 누렸던 중국계 미국 정치학자 루시안 파이(Lucian Pye/중국 이름 바이루신·白盧恂)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중국인들을 결속시키는 것은 중국의 문화, 민족, 문명이지 국민국가라는 제도가 아니다."

중국이 만들어낸 중국의 길

루시안 파이의 이 말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제가 유럽의 국민국가를 국제적 현실로 만들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국가의 팽창을 지향했다면, 중국은 오랜 역사 속에 구축된 중국 문명이라는 체계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마틴 자크는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라는 두 단위의 결합 속에서 다른 나라를 이해하고 국제 질서를 분석하는 서구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중국만의 자산과 전통 그리고 사유방식을 알지 못할 경우, 잘못된 분석과 진단이 내려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결과 그간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중국이라는 나라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고 날이 갈수록 자본주의 양식에 흡수되어가며 결국 서구를 닮아가게 되든지 아니면 그러한 기획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19세기 청조 멸망의 과정에서 겪었던 이른바 "굴욕의 세기"를 통해 배운 역사적 교훈과 자신의 문명사적 자산을 중심에 놓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하나로 일치시켜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 해서 중국의 성장은 지금까지의 서구적 발전의 경로나 모델과는 다른 차원의 대안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마틴 자크는 언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국의 성장은 과거 식민지를 기반으로 산업화의 동력과 자원의 확보를 이루어냈던 서구 제국의 발전사와는 명백하게 구별된다는 것이다. 도리어 중국은 식민지적 현실을 딛고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하면서 자신의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중국에 대한 존경을 하나의 문명적 틀로 세워 그 안에서 중국의 성공 모델을 구축해내고 있음을 짚어내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이 전환기에 처한 세계적 갈등과 모순, 그리고 자원 전쟁을 격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헤게모니가 점차 쇠퇴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고 중국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있는 것도 분명한 현실 속에서 새로운 대안 체제를 모색하려는 인류에게 중국의 경우는 이제까지의 서구 위주의 모델 선택과는 차별성을 보이는 측면이 의미 있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의 자화상을 새로 구축해야

마틴 자크의 이러한 논점과 관찰은 세계 체제를 분석하는 최근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뚜렷한 경향을 대변해주고 있다.

안드레 군다르 프랭크가 <리오리엔트>(1998년)를 통해 아시아 문명의 기반을 주목하고 세계 체제의 변화를 새롭게 읽어낼 것을 주문한 것이나 조바니 아리기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2007년)를 통해 중국의 변화를 주목한 것과도 일치한다. 세계 체제 전체의 변화 과정을 통해 중국의 오늘을 읽어낸 점은 조바니 아리기와 동일하며, 아시아의 문명사적 바탕을 주시한 점에서도 안드레 군다르 프랭크와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마틴 자크의 특별한 장점이라면 이러한 이론적 지점을 바탕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지구적 사실들을 치밀하게 엮어 하나하나 분석해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책은 단지 세계 체제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국제 정세를 새롭게 읽어내면서 우리의 대응 전략을 고민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로서는 중국의 변화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과 어떻게 얽혀 한반도의 운명을 규정하게 될 것인지 역사적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계체제론의 역사 속에서 임마뉴엘 월러스틴의 자본주의 세계 발전사 500년 이론에 대한 반격은 꾸준히 이루어져왔다. 특히 과거 종속론의 대부격으로 활동했던 안드레 군다르 프랭크가 "문명사의 5000년"이라는 틀을 제기하면서 오늘날의 현실도 지구적 관점에서 문명의 거대한 저력까지 포함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와 베리 질이 함께 편집한 <세계체제론(The World System: Five Hundred years Or Five Thousand?)>(1993년)은 아직 국내에서 번역이 이루지진 않았으나 그런 각도에서 우리에게 상당히 풍부한 역사적 성찰을 주게 될 것이다.

국내에서도 이삼성이 2009년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한길사 펴냄)이라는 역저를 통해 중국에 대한 역사의 장기적 관점을 제시한 것이나, 김한규의 <천하국가>가 전통 시대의 동아시아 세계 질서를 책봉 체제 또는 조공 체제의 시선으로 접근해간 것도 모두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오웬 라티모어가 1972년에 출간한 명저 <투르키스탄으로 가는 사막의 여정(The Desert Road to Turkestan)>을 이런 문명사적 틀 속에 새로 읽고 동아시아의 현실을 재해석해나간다면 대단히 귀중한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1987년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성쇠(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를 통해 1500년에서 2000년의 세계사를 하나로 엮으면서 미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일본의 헤게모니가 부상할 것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구적 관점에서 경제와 군사의 측면만 보았던 결론인 것은 오늘날 분명해졌다. 문명의 거시적 역사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자산으로 삼지 않는 관점이 가지는 시선의 깊이는 아무래도 현실의 심층을 아는데 부족할 것만 같다.

마틴 자크의 책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 학자 리민치의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종말>(류현 옮김, 돌베개 펴냄)과 함께 읽어본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엄청난 자원을 빨아들이는 세계 공장으로서의 중국의 성공이 과연 세계 경제 체제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리민치의 시선과, 중국 자체의 고유한 문명사적 저력의 자산을 주목하는 마틴 자크의 비교는 우리에게도 던지는 시사점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산 대지진과 우리의 자화상

서평을 마치면서 한 가지 추가로 권할 것이 있다. 지난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본 펑 샤오캉 감독의 작품 <대지진(Aftershock)>이 개봉되면 한번 볼 것을 추천한다.

1976년 단 23초 만에 27만 명이 희생된 당산 대지진의 비극을 뚫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겪은 중국인들의 상처와 충격적인 정신적 외상, 그리고 이후 변모하는 당산과 중국의 모습은 오늘날 중국 자신의 자존심이자 자화상이며 저력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것이 문화 대혁명이라는 정치·사회적 대재앙을 뚫고 살아남은 자들의 자기고백이라면 우리는 중국의 내면에 대해 더 많은 이해와 이야기가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는 곧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중국이 다시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있다면, 우리는 어느 지점에 서 있는 나라가 될까? 또는 되어야 할까?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가 던져야 할 자문이다. 한반도의 전체적 현실에 대한 전망과 대응도 이 물음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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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거기에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

1923년 3월 18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조지 맬러리의 간결한, 그러나 의미심장한 이 한마디는 '왜 산을 오르는가'라는 오래된 우문에 아직도 가장 적확한 현답으로 받아들여진다.

맬러리는 1924년 봄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 북릉을 오르던 중 앤드류 어빈과 함께 사라졌다. 그로부터 29년이 지난 1953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영국 팀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진 노르게이 셰르파에 의해 드디어 인류의 발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맬러리와 어빈의 행적은 여전히 인구의 관심사였다. 만일 그들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나서 하산 중 사라졌다면 세계 등반사는 고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1999년 5월 초 맬러리의 시신이 에베레스트 북릉 8160m 지점에서 발견되었으나 그가 등반 당시 지녔던 카메라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행적에 관한 미스터리 역시 풀리지 않은 것이다.

'맬러리와 어빈은 과연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랐을까? 만일 그들이 정상을 올랐다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등정' 그리고 '증명'


▲ <신들의 봉우리>(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이기웅 옮김, 시작 펴냄). ⓒ시작
유메마쿠라 바쿠의 <신들의 봉우리>(이기웅 옮김, 시작 펴냄)는 바로 조지 맬러리의 행적을 좇아 시작된다. 1993년 일본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촬영 담당 대원인 주인공 후카마치 마코토는 등반을 마친 후 우연히 들른 카트만두의 장비점에서 맬러리가 1924년 등반에 휴대했던 코닥 폴딩 카메라를 구입한다.

후카마치는 이 카메라에 얽힌 사연들을 좇다가 한때 일본 산악계의 전설적인 존재였던 하부 조지와 조우하게 된다. 귀국하고 나서 그는 하부에 관해 조사하던 중 점점 그의 광적인 산에 대한 집념에 빠져들며, 다시 네팔로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동계 무산소 단독 등반에 동행한다.

647쪽에 이르는 장대한 스케일만큼이나 이 소설이 배경으로 삼는 무대 역시 광대무변하다. 일본의 산악 지대는 물론이고 유럽 알프스와 네팔 히말라야, 카라코룸 히말라야를 무시로 넘나든다. 등장인물 역시 당장이라도 숨을 헐떡이며 오버행 암벽을 넘어서 눈앞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으며 나타날 듯싶다. K2에서 눈사태로 숨진 천재 클라이머 하세 츠네오, 하부 조지의 등반 파트너 기시 분타로, 마지막 타이거 앙 체링 셰르파, 그리고 기시 료코….

지난 9월말 출간된 이 소설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작년 이맘때 같은 제목의 만화 <신들의 봉우리>(전5권, 애니북스 펴냄)로 이미 소개된 바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 만화는 원작의 배경이 되는 1920~90년대의 등반상과 일본의 산은 물론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산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고증을 통한 놀라울 만큼의 자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신들의 봉우리>에 더욱더 관심이 가는 것은 이 소설의 스토리텔링의 전개가 지금 우리나라 산악계에서 벌어지는 '등정'과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에 관한 논란과 대비되는 몇 가지의 유사점 때문이다.

'등반가 오은선의 캉첸중가 등정은 사실인가?'

지난 8월부터 시작된 오은선 캉첸중가 등정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맬러리와 어빈의 에베레스트 등정 가능성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할 물증은 없다. 맬러리와 어빈이 1924년 에베레스트를 등정 후 하산 중 사라졌다면 그들은 에베레스트 초등자가 된다.

맬러리가 정상에서 찍었을 카메라와 필름은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오은선이 캉첸중가 등정을 증명할 분명한 사진만 있었더라면 그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여성 최초의 8000m급 14개봉 완등자가 되었을 것이다. 바로 '세계 최초'의.

오은선의 등정 시비와 더불어 제기된 몇몇 유명 산악인이 스폰서를 독점한다는 상업 산악인 논쟁을 놓고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상황이 소설에 등장한다. 하부 조지가 스물여섯이던 1970년, 그가 속한 산악회에서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대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는 참가비 100만 엔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히말라야 행을 포기해야 했다. 그를 제외한 원정대가 출국한 후 그는 이렇게 분통을 터트렸다.

"결국엔 돈이야. 나는 지금까지 모든 인생을 산에 걸었어. 그런데 어떻게 1년에 50일도 산에 들어가지 않는 인간이 갈 수 있어? 무명이면 안 돼. 유명해져야만 해. 유명해지면 스폰서도 붙고 돈도 나와. 유명해지기 위해선 결국 아무도 하지 못한 걸 해내야 해"

우리에게도 '유명'하지 않은 그러나 산에 미친 스물여섯 살의 청춘들이 지금도 쭈뼛거리며 스폰서 업체에 등반 계획서를 내미는 일은 여전히 흔하디흔하다. 그것이 단번에 거절당하는 일도 역시 흔한 일일 뿐이다.

산을 오르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것이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처럼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개인이 산을 오르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물음처럼 허망한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물음은 인류가 산을 오르기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던져졌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혼자서 무산소로 오르는 하부 조지는 '왜 산을 오르는가'라는 진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온 힘을 다 쏟아부은 행위로 보여준다.

"거기에 산이 있어서가 아냐. 여기에 내가 있으니까야. 여기에 내가 있으니까 산에 오르는 거야."

"산에는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그건 자신의 내면이다. 무리인줄 알면서 산에 오르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에 잠든 광맥을 찾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 여행이다."

"이제, 있는 힘을 다했는데 이제 안 된다면 정말로 안 된다면 안 된다면 정말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상상해. 온 마음을 다해 상상해. 상상해"

등반가 스스로의 준엄한 잣대

1997년 처음 일본에서 출간된 이 소설에서는 현재에도 통용되고 있는 몇 가지 히말라야 등반에 관한 규범을 소개하고 있다.

- '동기 등반'은 12월에 산에 들어가서 등산을 개시해야 한다. 12월 전에 베이스캠프 설치나 그곳까지의 수송 작업 등 세부적인 준비를 실시해도 무방했지만, 베이스캠프 위로의 등산은 12월에 들어서고 나서 해야만 했다.

- '단독 등반'은 베이스캠프에서 위로는 일절 다른 사람의 협력을 받으면 안 된다는 암묵의 양해가 있었다.

- '무산소 등정'. 8000m 봉이라고는 하지만 8013m인 시샤팡마 정도의 낮은 산은 원래 무산소로 오르던 산이라, 새삼 '무산소'라는 의미가 없다. 즉, 8000m 봉 무산소 단독 등정으로서 의미가 있는 경우는 (1993년 이전까지 기록 중에서) 1980년 라인홀트 메스너의 에베레스트, 1981년 예지 쿠쿠츠카의 마칼루, 1983년 피에르 베겡의 캉첸중가, 1990년 토모 체슨의 로체 이 네 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등산은 '무상(無償)의 행위'나 '심판이 없는 스포츠'라는 말로 통용된다. 심판은 없지만 등반가 스스로가 그 행위의 가치에 대해 준엄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등산이 여타의 스포츠와 구분되는 우월성이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무산소'와 '단독'과 '최초'의 등반이 난무했었나. 13년 전에 발표된 이 소설에서는 이 규범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연하게 소개하고 있다. 무참할 뿐이다.

유메마쿠라 바쿠는 이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하는데 20년이 넘게 걸렸다고 밝혔다. 그리고 작가 후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전부 토해냈다. 힘이 미치지 못해 아쉬운 대목도 없다. 구석구석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열 살 때부터 산에 오르면서 몸 안에 쌓아둔 걸 전부 다 꺼내고 말았다. 그것도 정면에서 맞서 싸우듯이 전력을 다해 산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이 이야기에 변화구는 없다. 직구. 온 힘을 다 쏟아부은 스트레이트. 이제 산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쓸 수 없으리라. 이게 최초이자 최후다. 그런 이야기를 쓰고 말았다. 이만한 산악 소설은 아마 더 이상 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무나 쓸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제 항복할 텐가."

이 소설은 이 땅 모든 산악인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장 한복판을 향해 던지는 쾌속 스트라이크다. 정말 항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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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오건호 박사가 심상정 의원실의 정책 보좌관으로 근무할 때,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으로 몇 달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 오건호 박사가 의원 보좌관과는 잘 맞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의원 보좌관은 정확성보다는 순발력이 요구되고, 특히 선정적인 언어 구사 능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오 박사는 차분한 성격으로 늦더라도 정확한 내용을 중요시했고, 좀처럼 '오버'하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나는 오건호 박사가 그때그때 주어진 사안에 1회성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특정 과제를 놓고 중장기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는 일이 더 맞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최근에 펴낸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레디앙 펴냄)를 읽고 나서 나는 당시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오건호 지음, 레디앙 펴냄). ⓒ레디앙
진보 진영 정책 분야의 큰 약점 중 하나는 숫자에 약하다는 점이다. 인권, 평화, 생태, 복지 등 비 경제 분야는 상대적으로 많은 전문가를 보유한 반면, 조세·재정 분야의 전문가 풀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숫자를 다루는 회계사나 세무사는 직업상 자본가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고, 재정학자나 계량경제학자 중에서도 진보적 성향의 학자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 진영에서 복지나 환경 분야의 사업 확대를 요구할 때, 재정경제부 관료들이나 보수 진영의 학자들이 복잡한 숫자로 가득한 예산 문제를 들고 나와 진보 진영의 요구를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들의 투정 정도로 치부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오랫동안 진보 진영의 정책통으로 일했던 오건호 박사 역시 이러한 서러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오 박사의 이번 책은 진보 진영의 이런 서러움을 날려버릴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제1부는 국가 재정의 기본 개념과 구성을 설명한 다음, 국제 비교를 통하여 우리나라 재정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1부를 읽고 나면 우리나라 재정 현황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어 재정 분야를 공부할 의욕이 솟는다.

예를 들자면, 매년 복지 재정이 큰 폭으로 증가한다는 보수 언론의 논조에 속아 우리나라 복지 수준이 제법 높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복지 재정은 GDP 대비 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20%에 비해 11%나 낮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10조 원을 복지 재정에 더 써야 OECD 평균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만큼 갈 길이 멀다.

이런 숫자를 확인하면, 현 단계에서 보수 진영이 '복지 재정 확대는 복지병을 불러올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한 번에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그동안 이러한 우스운 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에 화가 나 재정을 공부해야겠다는 의욕이 일어난다.

2부에서는 예산이 어떻게 전략적으로 짜이는지를 설명하면서 복지 재정에 숨겨진 진실을 폭로한다. 주택 구입자에게 주택 구입 융자금을 보조할 목적으로 조성된 국민주택기금이 복지 재정으로 분류되는 것은 그 한 예이다. 복지 재정을 부풀리기 위한 이런 교묘한 술수에 한 번 더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증가된 복지 재정은 국민연금 지급 등 자연 증가분에 의한 것이지 일반 복지 사업은 오히려 축소되었다는 진실도 폭로한다. 오 박사의 예상대로라면, '부자 감세'와 '4대강 사업'으로 커진 재정 적자를 메우고자 복지 재정은 앞으로 더욱더 축소할 가능성이 크다.

오건호 박사는 이에 대한 진보 진영의 대응책으로 '지출 통제 프레임'에서 '세입 확대 프레임'으로 전환을 말한다. 그는 이 책의 3부에서 간접세와 직접세의 계급적 성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이런 전환의 구체적 방향을 제시한다. 앞으로 간접세보다는 직접세의 비중을 늘려서 세입 기반을 확충하는 것이야말로 진보 진영의 과제라는 것이다.

4부에서는 주요 쟁점별로 국가 재정을 설명한다. 성(性) 인지 예산 문제, 지방 재정 부족 문제, 민간 투자 사업 문제 등 민감한 사안을 놓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진보 진영의 접근법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또 그동안 정치권과 학계에서 논란이 된 국가 채무 규모를 놓고 오 박사는 정부 측과 학계의 계산법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제 기준에 맞춰 재분류한 국가 채무 규모를 제시한다. 이 부분에서 그의 특유의 정교함이 돋보인다. 그가 제시한 국가 채무 규모는 GDP 대비 60%로 정부 제시 33.2%와 큰 차이를 보인다.

제5부 결론에서는 제1부부터 4부까지 제기한 각종 문제점에 대한 진보 진영의 대안과 대응책을 정리한다. 이 부분이 이 책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은 책은 문제점 제시에서 그쳐 아쉬움을 준 반면, 이 책은 앞에서 제기한 문제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에 대한 진보적인 대안 제시로 결론을 내린다. 물론, 독자의 시각에 따라서, 오 박사가 제시한 대안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진보 진영에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토론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진보 진영의 약점이었던 재정 분야를 놓고 진보적인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책이다. 물론, 예산 감시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와 각 정당 등에서 조세 및 재정 등에 대하여 보고서 형태로 나온 문건은 여러 개가 있지만, 대부분 사안별 이슈에 그쳤지 이처럼 재정 전반에 대하여 그림 그리듯이 체계적으로 접근한 책은 본 기억이 없다.

나 역시 조세·재정 분야에 대하여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공부한 사람으로 나름대로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이 책의 저자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책이 진보 진영 정책 전문가의 약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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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부탁받고 책을 읽는 내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 블로그에 쓰는 사사로운 후기가 아니거늘, 이런 책에 대한 서평은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일까?

소설이라면 플롯의 적절함을 논하거나 문장의 아름다움을 평하고, 사상과 이론을 논증한 것이라면 그 논리 전개를 반박하거나 옹호할 것이다. 하지만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눈길에 대한 차분한 기록이라면, 과연 서평자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글쓴이가 가진 경험의 폭과 성찰의 깊이가 서평을 하는 이에 비해 압도적이라면?

지난 20년 동안, 신경과 전문의로서의 임상 진료 활동과 '시민운동가'로서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활동을 해온 김진국이 <우리 시대의 몸·삶·죽음 : 첨단의학과 삶의 문제에 대하여>(한티재 펴냄)를 펴냈다. 의약 분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2000년 '의료 대란' 시기 이후 다양한 사회문제를 놓고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대구의사신문>, <대한신경과개원의협의회지>에서 <말>, <당대비평>, <녹색평론>은 물론 <사람의문학>에 이르기까지, 이 다양한 매체들의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글쓴이가 인간 사회에 가진 폭넓은 관심과 그 내공을 짐작해볼 수 있다.


▲ <우리 시대의 몸·삶·죽음 : 첨단의학과 삶의 문제에 대하여>(김진국 지음, 한티재 펴냄). ⓒ한티재
스스로 머리말에 밝혔듯, 이미 지난 글들, 심지어 10년 전의 글들을 오늘날 책으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문제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다가 자꾸만 뒷장을 넘겨 글이 처음 발표되었던 날짜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오늘 아침 신문에 실렸다 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새롭게 밀려드는 사건 사고들 때문에 앞서의 일들은 머릿속에 남겨놓기조차 버거운 한국 사회에, 이건 좀 제발 기억하고 더 이야기해보자는 간절한 부탁일 수 있다.

제1부 '문학과 의학'은 문학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 질병의 풍경, 보건의료 현장과 의사들의 모습을 찾아내 그 의미를 반추하고 있다. 이를테면, 근·현대 소설들을 통해서 살펴본 '한국 의학 100년의 흔적'은 정규 의사학(醫史學)과는 다른 생생함을 전달해주고, 요절 시인 기형도의 '엄마 생각'에 덧붙여진 저자의 해석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젊은 나이에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이 시인이 지금 배고픔보다 더 잔혹한 외로움과 그리움에 시달리는 아이들, 부모들로부터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았더라면, 그의 시 마지막 대목은 가난했지만 엄마가 있어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으로 고쳐졌을지도 모른다."

또 난·쏘·공에 그려진 풍경과 오늘날을 비교하며, "이 나라에 없는 것은 정신 하나뿐이다. 그 밖의 것은 언제나 풍성하다"는 글쓴이의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제2부 '의·과학 전문가와 건강'에서는 소위 전문가들의 (충분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담론 주도 현상을 비판하며 '소비자 주권'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 소비자 주권이란 '내 돈 냈으니 그에 걸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사고야 말겠다', 혹은 '손님은 왕이니 의사들이 서비스 정신 발휘해서 환자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봐라'는 개념은 아니다. 그보다는 "의학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 버린 건강과 생명에 대한 가치, 몸에 대한 문화를 바로잡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쓴이가 문화와 가치 같은 추상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일상을 구속하고 있는 제도와 정책에 대한 개혁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인문학적 성찰은 말의 성찬에 그칠 우려가 있다"며 근본적 고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현실에 딛고 선 구체적인 대안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전문 영역을 벗어난 전문 지식의 폐해를 다루며, "특히 의료 행위는 약물이든 수술이든 사람의 몸에 침습하여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므로 의료 행위에 있어 최종 결정은 몸의 주인인 '내'가 한다. 의료행위에서 의료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설득과 권유이지 강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마지막 제3부 "정치·사회·문화와 건강"에서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젠더와 의학, 장애, 전문가와 일반 시민의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 하나같이 무겁고, 어찌 보면 전문적인 주제들이지만, 글쓴이의 실제 경험과 그로부터 비롯된 성찰의 결과물들이기에 독자들은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글쓴이가 어떤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까칠한 시선, 때로는 흠칫하게 만드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시선을 두지 못했거나 외면했던 것들을 다시 찬찬히 고민해보라고 부추길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누가 읽어야 할까?

우선 가장 권하고 싶은 이들은 의과대학 학생과 의사들이다. 매우 동질적인 사람들끼리, 좁은 공간에, 그것도 오랜 기간 함께 머물다보면 인간이 우물 안 개구리로 변태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깊은 우물 바닥은 심지어 어둡기 때문에,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개구리인지 알아차리기조차 어렵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의료계와 의사들, 서양 의학 문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동료 의사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우리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어야 한다. 의료계 내부를 향한 까칠한 시선 때문에, 어떤 이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한편으로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스스로의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못했던 의대생이나 젊은 의사들이라면,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눌 선배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위안과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의료인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미 첨단의학은 모두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일반 시민'들은 기술적 용어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스스로의 몸, 삶과 죽음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주체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는 역설을 마주하고 있다. 이 책은, 현재의 맥락 속에서 몸,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사의 보편적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지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이 생활의 터전에서, 진료 공간에서, 또 의학 교육 현장에서 더욱 많이 읽히고 회자되었으면 좋겠다. 그 내용이 상찬이어도 좋고, 열렬한 반대라도 좋다. 그리고 이 책이 제기한 고민의 깊이를 넘어서는 글들이 더 많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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