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을 부탁받고 책을 읽는 내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 블로그에 쓰는 사사로운 후기가 아니거늘, 이런 책에 대한 서평은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일까?

소설이라면 플롯의 적절함을 논하거나 문장의 아름다움을 평하고, 사상과 이론을 논증한 것이라면 그 논리 전개를 반박하거나 옹호할 것이다. 하지만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눈길에 대한 차분한 기록이라면, 과연 서평자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글쓴이가 가진 경험의 폭과 성찰의 깊이가 서평을 하는 이에 비해 압도적이라면?

지난 20년 동안, 신경과 전문의로서의 임상 진료 활동과 '시민운동가'로서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활동을 해온 김진국이 <우리 시대의 몸·삶·죽음 : 첨단의학과 삶의 문제에 대하여>(한티재 펴냄)를 펴냈다. 의약 분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2000년 '의료 대란' 시기 이후 다양한 사회문제를 놓고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대구의사신문>, <대한신경과개원의협의회지>에서 <말>, <당대비평>, <녹색평론>은 물론 <사람의문학>에 이르기까지, 이 다양한 매체들의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글쓴이가 인간 사회에 가진 폭넓은 관심과 그 내공을 짐작해볼 수 있다.


▲ <우리 시대의 몸·삶·죽음 : 첨단의학과 삶의 문제에 대하여>(김진국 지음, 한티재 펴냄). ⓒ한티재
스스로 머리말에 밝혔듯, 이미 지난 글들, 심지어 10년 전의 글들을 오늘날 책으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문제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다가 자꾸만 뒷장을 넘겨 글이 처음 발표되었던 날짜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오늘 아침 신문에 실렸다 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새롭게 밀려드는 사건 사고들 때문에 앞서의 일들은 머릿속에 남겨놓기조차 버거운 한국 사회에, 이건 좀 제발 기억하고 더 이야기해보자는 간절한 부탁일 수 있다.

제1부 '문학과 의학'은 문학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 질병의 풍경, 보건의료 현장과 의사들의 모습을 찾아내 그 의미를 반추하고 있다. 이를테면, 근·현대 소설들을 통해서 살펴본 '한국 의학 100년의 흔적'은 정규 의사학(醫史學)과는 다른 생생함을 전달해주고, 요절 시인 기형도의 '엄마 생각'에 덧붙여진 저자의 해석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젊은 나이에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이 시인이 지금 배고픔보다 더 잔혹한 외로움과 그리움에 시달리는 아이들, 부모들로부터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았더라면, 그의 시 마지막 대목은 가난했지만 엄마가 있어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으로 고쳐졌을지도 모른다."

또 난·쏘·공에 그려진 풍경과 오늘날을 비교하며, "이 나라에 없는 것은 정신 하나뿐이다. 그 밖의 것은 언제나 풍성하다"는 글쓴이의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제2부 '의·과학 전문가와 건강'에서는 소위 전문가들의 (충분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담론 주도 현상을 비판하며 '소비자 주권'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 소비자 주권이란 '내 돈 냈으니 그에 걸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사고야 말겠다', 혹은 '손님은 왕이니 의사들이 서비스 정신 발휘해서 환자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봐라'는 개념은 아니다. 그보다는 "의학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 버린 건강과 생명에 대한 가치, 몸에 대한 문화를 바로잡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쓴이가 문화와 가치 같은 추상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일상을 구속하고 있는 제도와 정책에 대한 개혁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인문학적 성찰은 말의 성찬에 그칠 우려가 있다"며 근본적 고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현실에 딛고 선 구체적인 대안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전문 영역을 벗어난 전문 지식의 폐해를 다루며, "특히 의료 행위는 약물이든 수술이든 사람의 몸에 침습하여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므로 의료 행위에 있어 최종 결정은 몸의 주인인 '내'가 한다. 의료행위에서 의료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설득과 권유이지 강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마지막 제3부 "정치·사회·문화와 건강"에서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젠더와 의학, 장애, 전문가와 일반 시민의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 하나같이 무겁고, 어찌 보면 전문적인 주제들이지만, 글쓴이의 실제 경험과 그로부터 비롯된 성찰의 결과물들이기에 독자들은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글쓴이가 어떤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까칠한 시선, 때로는 흠칫하게 만드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시선을 두지 못했거나 외면했던 것들을 다시 찬찬히 고민해보라고 부추길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누가 읽어야 할까?

우선 가장 권하고 싶은 이들은 의과대학 학생과 의사들이다. 매우 동질적인 사람들끼리, 좁은 공간에, 그것도 오랜 기간 함께 머물다보면 인간이 우물 안 개구리로 변태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깊은 우물 바닥은 심지어 어둡기 때문에,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개구리인지 알아차리기조차 어렵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의료계와 의사들, 서양 의학 문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동료 의사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우리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어야 한다. 의료계 내부를 향한 까칠한 시선 때문에, 어떤 이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한편으로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스스로의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못했던 의대생이나 젊은 의사들이라면,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눌 선배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위안과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의료인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미 첨단의학은 모두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일반 시민'들은 기술적 용어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스스로의 몸, 삶과 죽음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주체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는 역설을 마주하고 있다. 이 책은, 현재의 맥락 속에서 몸,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사의 보편적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지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이 생활의 터전에서, 진료 공간에서, 또 의학 교육 현장에서 더욱 많이 읽히고 회자되었으면 좋겠다. 그 내용이 상찬이어도 좋고, 열렬한 반대라도 좋다. 그리고 이 책이 제기한 고민의 깊이를 넘어서는 글들이 더 많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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