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이다. 너무 좋은 종이가 좀 걸렸을 뿐이다. 다른 곳에 발표한 칼럼을 모아서 낸 무성의한 책도 아니다. 영화, 드라마를 통해 인권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실력도 보통은 아니다.

정직하게 자기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진솔함도 좋았다. '지랄 총량의 법칙'에 충실한 딸과 갈등하지만,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서 "부모라는 '직업'에 필요한 것은 자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지, 기대나 닦달이 아니라는 사실"(24쪽)을 깨닫는 과정을 솔직히 토로하는 것은 아무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서문에서는 자기 이야기를 책에 쓰는 걸 허락해준 딸에게 사랑을 전한다고 했다. 아직 중학생인 딸 이야기를 책에 쓰는 게 허락받을 일이라고 생각한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몸에 밴 배려와 따뜻함이다.

<불편해도 괜찮아>(김두식 지음, 창비 펴냄)는 동시 상영에 300원이나 500원쯤 했을 재개봉관부터 시작한 그의 영화 여행이 맺은 하나의 결실일 거다. 최소한 81편의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 청소년,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노동자,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 소수 인종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때론 직접 대면하기도 하고, 때론 영화나 드라마 속의 인물로도 만나지만, 저자가 이들을 만나는 방식은 한결같다. 따뜻한 시선, 겸손한 자세, 온유함과 배려의 마음이다. 몸에 밴 배려와 따뜻함은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불편해도 괜찮다며 끊임없이 이성으로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노력이 반복돼야 한다. 몸에 배려면 의식적으로 관성과 기계적인 반응을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


▲ <불편해도 괜찮아>(김두식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적지 않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았다는 것도 놀랍다. 내게도 재개봉관을 섭렵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처럼 꼼꼼하진 못했다. 조류, 포유류, 과일 시리즈(237쪽)처럼 체계적인 분류를 하지도 못한다. 내용이나 등장인물, 제목마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없다. 다만 무척 많이 봤다는 것만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부럽고 신기했던 것은 드라마다. 언제 드라마를 다 챙겨보았는지 의아했고, 놀라웠다. 영화야 기껏해야 2시간이면 되지만 드라마는 다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16부작, <아이리스>는 20부작이다. 내 수준에선 제목마저 낯선 드라마를 보고, 분석까지 했다. 그것도 인권의 눈으로. 트위터도 열심이고, 매일 일기를 쓰고, 주변 사람과 잘 논다면서, 몇 권의 저서에 연구 생활과 강의, 신앙생활과 가사 노동까지 다 한다면서 드라마까지 챙겨본다는 건 정말 놀랍다. 높은 성취다.

칭찬은 이쯤하고, 아쉬운 점을 짚어보자. 필자는 온통 주류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비록 서울대 앞에서 절망스러운 '끔찍한 기억'(36쪽)을 갖고 있지만, 명문 대학을 졸업했고, 사법 시험 합격, 검사 임용, 미국 유학, 변호사, 대학 교수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이 보통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실제로 살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그의 시선이 좀 더 독특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1명의 뛰어난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지만, 막상 그 뛰어난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골몰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로지 제 잇속만 차리는 엘리트란 사람들이 10만 명의 보통 사람을 위해서 한다는 소리라곤 기껏해야 아나운서가 되려면 '모든 걸 다 던져야 한다'는 희롱뿐이다. 그래서 좀 더 겸손하게, 불편한 것도 참으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은 남다르다. 좋아 보인다.

하지만 성공한 주류인 탓인지, 그가 소수자를 보는 방식은 좀 거슬린다. 저자의 눈에 들어 온 소수자, 약자들은 저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닌 사람들로 비춰진다. 불편해도 괜찮다지만, 결국은 저자와는 다른 어떤 사람들이고, 또 불편한 사람들처럼 여겨진다. 비록 친자식이어도 청소년이 그렇고, 성소수자나 여성, 장애인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도 노동자면서 노동자를 보는 시선도 그렇다. 병역 거부자나, 인종 때문에 차별받는 숱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타자화의 우려를 말하면서도, 스스로 소수자를 타자화시키는 것 같은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마치 <사랑의 리퀘스트>에 나온 사람들을 보는 것 같은 거리감과 불편함이 함께 하고 있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사람들은 남들과 조금 다른 하나의 특징이 도드라져 소수자의 지위를 갖게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든 도드라진 특성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너나없이 소수자의 지위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저자에 따르면 소수자들에게는 뭔가 불편하게 하는 게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참자는 건데, 이런 메시지는 불편하다. 인권이 뭔가를 꾹 참아야 하는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동안 너희들이 많이 힘들었구나!" 식의 접근은 저자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이타적 태도, 그리고 몸에 밴 배려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게 성소수자이든, 노동자이든 그는 소수자에 대해 쓸 수 있는 최선에 가까이 가 있다. 어쩌면 그래서 그의 주류적 시선의 아쉬움은 더욱 진하게 남는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이기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자기 행복을 위해 저마다의 이유로 살고 있다. 그래서 소수자에게 느끼는 주류의 불편함은 주류적 방식의 인식일 뿐이고, 그들 방식의 재구성일 뿐이다.

불편한데도 꾹 참는 것 말고, 좀 더 자연스러운 관계와 좀 더 편한 소통을 할 수는 없을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그들의 좀 다른 특성에 최소한의 관심조차 갖지 않고 '쿨'하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인권을 흔히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권리"쯤으로 정의한다.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인권이, 무겁고 아프기만 한 십자가처럼 여겨지는 건 곤란하다. 인권이 십자가라면 그건 비장한 지사형 운동가나 큰 깨달음을 얻는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될 게다. 그게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을 위한 가치이고, 동시에 수단이라면, 그 무거워 보이는 이미지부터 거둬내는 게 좋을 것이다.

인권을 아주 쉽게 정리한다면 결국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장받기를 원하는 그 권리들을 다른 사람들도 보장받도록 하는 것이 민주 시민이 가져야 할 올바른 덕목입니다. (88쪽)

내가 남에게 하나의 특성이 도드라져 보여, 다른 어떤 특성은 다 제쳐두고 오로지 그것만으로 하나의 정체성으로 판단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남을 그렇게 판단하면 안 된다. 강의 중에 했던 어쩌면 별 것 아닌 이야기에도 민감하게 반응(92쪽)하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늘 조심스러운 태도(95쪽)를 지니고 있으며, 진지한 성찰(108쪽)을 하는 저자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시각일 게다.

더 가까이 그들에게 다가가라는 게 아니다. 애써 그들을 외면하라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주목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봐 달라는 거다. 적지 않는 경우, 아예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무관심한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거다. 물론 그게 외면이 아니라면 말이다. 영화 <300>이 페르시아 사람들을 '적 이미지'로 타자화한다고 지적하면서도, 정작 저자가 소수자들을 불편해도 함께 가야 할 사람으로 타자화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인권 감수성을 '불편함'이란 단어 말고 '의식'이나, '생각'(생각 없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등으로 고쳐 썼다면, 소수자를 타자화한다는 의심에서는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형사법 교수답게 저자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를 변용해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라며 기억할 만한 원칙(183쪽)을 제시하고 있다. 맞지만,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인권의 실현은 의심스러울 때만 아니라, 언제나 약자의 이익을 우선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승복하기 어려운 선거 패배를 당한 멕시코 좌파의 선거 구호는 "모든 이를 위해 가난한 이(약자)를 먼저!"였다.

지금까지의 문제제기는 그야말로 문제제기를 위한 문제제기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높은 안목을 지녔다. 인권운동가의 입장에서도 흠잡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었다. 솜씨가 좋았다. 무한도전식의 경쟁 체제와 제도 교육의 성공 사례로 꼽힐 만한 범생이가 이룬 성취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독서, 그의 영화 관람, 그리고 그의 인식과 글쓰기는 훌륭했다.

김두식 교수의 <불편하지만 괜찮아>는 메시지가 분명하되, 잘 읽히는 책, 충실한 자료에 근거해 쓴 책, 읽고 나서는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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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를 끝으로 사라질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명절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한 귀성행렬도 지금 시골을 지키는 60~70대가 세상을 뜨고 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고향'이라는 단어 또한 서서히 사어(死語)가 되어갈 것이다.

아파트 숲에서 태어나 아파트를 오가며 살다가 자신이 태어난 최초의 아파트 단지를 찾았을 때 이미 새로운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된 콘크리트 더미를 보며 고향의 추억이니 정취니 하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심히 민망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서울을 빠져나가는 톨게이트 입구에서, 혹은 서울역 대합실에서 방송사의 인터뷰에 응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좀 힘들긴 하지만, 고향에 간다고 생각하니 행복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대학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들의 소감, "잠은 여덟 시간 푹 잤고,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말처럼 상투적이면서 믿기 어려운 진실이다.

오늘날 귀성이란 그저 어찌할 수 없는 혈연과 사회적 습속에 떠밀린 고달픈 유랑의 대열이 아닌가. 이미 고향의 산천도 인간관계도 해가 갈수록 낯설어져만 갈 것일진대, 여인들에게는 며칠간의 거북스런 눈칫밥과 강제 노동의 나날이기가 십상일 텐데, 말이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정겹지만, 며칠만 있어도 돌아오고 싶은 맘이 솟구치는 곳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고향이 아닌가.

나는 바로 그 고향에 되돌아와 지금 9년째 살고 있다. 삭풍이 몹시 불던 1월 어느 날 내가 찾은 낙동강은 눈을 뜨기 힘든 어마어마한 모래바람이 날리고 있었다. 낙동강을 따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준설토에서 날아온 모래먼지가 폭풍이 되어 온 강변을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할퀴고 있었다.

이곳 밀양은 4대강 사업이 진행되면서 또 동남권 신공항의 주요 후보지로서 부산 가덕도와 명운을 건 혈전을 치르고 있다. 온 도시는 현수막으로 도배가 되었고, 공항 유치에 실패하면 도시가 결딴날 것 같은 긴장감마저 감돈다. 천혜의 옥토 500만 평이 졸지에 활주로가 되고, 수십 개의 산봉우리가 비행기의 이착륙을 위해 깎여나가야 하는 참혹한 환경 파괴에 대해, 거기서 쫓겨나는 농민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뜬금없다는 눈빛을 만나게 된다. 얼마 전에는 밀양역 앞에서 신공항 유치 반대 유인물을 나눠주던 한 농민에게 밀양 시장이 다가와서는 '너는 밀양 사람도 아니다' 어쩌고 하면서 주먹을 휘둘렀다고, 맞았다는 농민이 병원에서 기자 회견을 열기도 했다. 사실 여부는 곧 확인되겠지만, 이런 정도의 분위기가 있다.

지금 고향은 고향이 아니다. 망가졌고, 신음하고 있다. 고향에는 여전히 수십 년 이래 토호라는 세력들이 주름잡고 있으며, 풀뿌리들의 민주주의는 없다. 이념적으로는 극우, 경제적으로는 토건업자 혹은 행정공무원, 그리고 '형님과 아우님', '사바사바'들이 지금도 고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파헤쳐지지 않은 곳이 없고, 파헤쳐지기만을 기다리는 땅들이 널려있다.

생각해보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고향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현재를 설명할 수 없을 때 결국 더듬게 되는 것은 과거와의 연쇄이다.

나는 내 고향을 무대로 한 김원일의 장편 소설 <전갈>(실천문학사 펴냄)을 꺼낸다.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3대가 겪은 슬픈 인생 유전이다. 거기에 우리들의 고향이 왜 이렇게 가망 없는 땅으로 망가져왔는지를 설명해주는 회로가 숨어 있다.

독립운동가 집안 3대의 인생 유전


▲ <전갈>(김원일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실천문학사
할아버지 강치무는 왜정 초기, 일제가 저지르는 참상을 보고 분연히 만주로 떠난다. 거기서 고향 선배인 약산 김원봉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으며, 대한독립군의 일원으로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적군에 의한 자유시 참변을 겪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무력하게 떠돌던 그에게 고향 친구가 활동을 권유한다. 그러나 일제의 밀정에게 붙잡혀 죽기까지 고문을 당하고, 친구의 존재를 누설하고, 부끄러움으로 혀를 깨물어 '혀짤뱅이'가 된다. 이제 그에게 인생의 의미는 그저 하늘을 향한, 친구와 역사를 향한 부끄러움 속에서 짐승처럼 웅크린 삶이다. 강치무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만주 731부대의 초병으로 반병신 반벙어리로 산다.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강치무는 세상과 연을 끊고 지낸다. 그런데 거물급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 약산이 그를 알아보며 '이제 향토를 위해 일하자'고 격려한다. 여기에 힘입은 강치무는 자신감을 되찾고 당시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던 농민들의 쟁의와 미군정 반대 싸움에 앞장선다. 결국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산악 지대까지 쫓긴 그는 좌익 게릴라가 되어 처절하게 싸우지만, 동료들은 모두 죽거나 떠나고, 그는 경찰 간부인 인척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만 건진다. 그리고 그는 다시 벙어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세상과 담을 쌓고 강태공으로 지내다 죽는다.

아들 강천동이 있다. 그는 가족을 건사하지 않은 부친에 대한 한없는 적의만 가득하다. 고향에서 벌어먹던 그는 산업화 초반의 울산으로 간다.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제일 밑바닥 자리에서 밥을 벌던 그는 손목이 잘리는 재해를 당한다. 아버지는 고문 끝에 혀를 깨물었는데, 아들은 기계에 손목이 잘려 고무손이 되었다.

강천동은 술과 폭력 속에서 아내를 떠나보내고, 강간으로 한 울산 어촌의 처녀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그는 딴에는 살아보겠다고 공장의 맹독성 산업 폐기물 처리 요원으로 일하지만, 산업 폐기물의 존재 자체를 숨기려는 정보기관에게 엄청난 구타를 당하고 또 한 번 좌절한다.

결국 강천동이 하는 일이란 굴뚝 청소에 행상에, 개장수에 무시무시한 개백정이 되어 인륜 따위는 생각지 않는 막장의 삶을 산다. 그의 폭력과 광기의 근원에는 아버지가 물려준 좌절의 기억과 자신이 겪었던 거듭된 실패로 체득한 신경증이 있다. 결국 그는 술김에 사람을 떠밀어 죽이게 되고, 감옥살이 끝에 기가 푹 꺾인 채 아버지처럼 고향집에서 산송장으로 지내다 죽는다.

이제 손자 강재필이 있다. 그의 유년은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 때문에 지옥과 다름없었다. 그도 아버지의 광기와 우울증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가 기댄 것도 결국 폭력이다. 밀양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소년 주먹쟁이였던 그는 결국 서울로 가서 퍽치기, 도둑질로 청춘을 지내고, 자살 충동과 우울증을 견디는 방책으로 택한 마약으로 감옥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된다.

겨우 30대 청년이 인생의 막장까지 치달았을 때, 문득 할아버지 강치무의 혼백이 그를 찾아온다. 그에게도 희미한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독립군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그는 할아버지의 삶과 연관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한다. 출소 후, 그는 여든다섯이 된 할머니가 자신의 아들이자 증손자인 종호를 키우며 죽음을 기다리는 밀양 고향집을 찾아온다. 거기에서 시립도서관으로 출퇴근하며 가열차게 공부한 끝에 조금씩 할아버지의 삶을 글로 옮기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옭아맨, 그 어찌할 수 없었던 굴레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강재필에게 뱀처럼 칭칭 감겨드는 유혹이 있다. 감방 동료 나 회장은 친일파의 자손으로, 온갖 개발의 이권에 끼어들어 거대한 부를 축적한 악한이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 회장의 청부 폭력 요구를 보기 좋게 따돌리며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자신의 세대에서 복수를 감행한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시절, 제국주의의 침략의 발톱을 피할 수 없었던 이 고장에서도 정의로운 인간들이 살아 있었다. 잡히면 고문 끝에 불구가 되거나,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는 끔찍한 공포를 견디며 불의한 세상을 직시하고, 인민의 삶을 연민하며 싸우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은 모두 죽거나, 어디론가 떠났다."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통일운동가인 안재구가 고향을 방문하여 행한 강연을 통해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고향의 후배들 앞에서 칠순의 노혁명가는 이렇게 말을 이어 갔다.

"내 소년 시절, 이 고장에는 참으로 훌륭한 이들이 많았다. 정의감이나 인품이나, 학식까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해방 공간의 몇 년 동안 모두 죽거나 지하로 숨어들었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리고 이들을 잡아 족치며 활개 치던 사람들이 있었다. 무장투쟁을 하던 빨치산들을 잡아와서는 작두에 뉘어놓고 서슴없이 목을 자르던 자들이다. 몇 십 년 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 자들이 내 고장에서 유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밀양 출신의 사상가 신영복의 인터뷰에서도 보았고, 이문열의 소설 <변경>에도 등장하는 장면, 잡혀온 빨치산들의 머리를 잘라 '뱃다리거리'라 불리던 시내 중심가에 철사에 꿰어 걸어두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아직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실감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나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 이곳이 왜 그렇게 답답하게 느꼈던 것인지를. 반공 웅변대회를 격려하기 위해 연단에 앉아있던 불콰한 얼굴의 지역 유지라는 어른들을 떠올려본다. 똑같이 술 마시고 비틀대는 고등학생을 놓고서도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아이에게는 호통을 치던 어른들이 생각난다. 남성 가부장, 극우 이념, 속물근성과 전체주의로 작동하는 이 세상 수많은 고향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리라.

수없는 강치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없는 강천동과 강재필들이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망가져 갔을 것이다.

60년이 흘렀다. 두 세대의 삶이 지나갔지만, 고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억은 벌써 박제가 되어버렸으나, 강치무를 유린한 힘들은 박제가 된 역사 위에 똬리 틀고 앉아 여전히 또 한세상을 구가하고 있다.

사람들이여, 더 이상 고향을 찾지 마라. 지하에 있을 수 없는 강치무와 강천동의 넋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갈 수많은 강재필들에게 술 한 잔 올리고 싶은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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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전5권, 래리 고닉 지음, 이희재 옮김, 궁리 펴냄)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는 또 다른 만화책을 떠올렸다. 오바 츠구미, 오바타 타케시의 <데스 노트>. 래리 고닉의 책 역시 만화책이라서만은 아니다. '데스 노트'와 '세계사'의 공통점은 천재만이 감당하고 쓸 수 있는 책이라는 데 있다.

단지 "하버드 대학교 수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여 학업 성적이 우수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파이베타카파 회원이 되었으나, 하버드 대학원에서 수학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과정을 밟다가 홀연 그만두고 전업 논픽션 만화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무시무시한 이력 때문에 래리 고닉을 '천재'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전5권, 래리 고닉 지음, 이희재 옮김, 궁리 펴냄). ⓒ궁리
그가 이 책 이전에 유전학, 통계학,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 등의 전문가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통계학>,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유전학> 등의 만화책을 냈고 이 책들이 하버드 대학교, 버클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에서 부교재로 활용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는 사실도 아니다.

그의 천재성은 세계사를 다루는 특유의 균형잡힌 시각에서 드러난다. 이 5권짜리 세계사가 다루는 내용은 우주의 탄생, 빅뱅에서부터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까지 다루고 있다. 그의 책의 제목을 빌자면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난삽하거나 어렵지 않고 무엇보다 치우쳐 있지 않다.

문명과 문명은 어떻게 이어졌나?

오히려 놀라운 것은 이 책이 대부분의 세계사 교과서나 '만화 세계사' 등의 책에서 병렬적으로 나눠 정리하고 있는 각 문명 간의 '교섭'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로서 래리 고닉의 능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1200년 대를 보자. 메카 순례는 어떻게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이어질까?


▲ 역사의 각 장면을 매우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려내는 힘을 느낄 수 있다. ⓒ궁리

"서아프리카에 자리잡은 이슬람 국가 말리의 만사 무사왕은 1324년 메카로 순례를 떠났다. 수천 명의 사람과 수없이 많은 낙타가 산더미 같은 짐과 물 자루, 넉넉한 황금을 잔뜩 짊어지고 요란하게 사하라 사막을 가로 질렀다. 도중에 몇 명이 죽었는지 몰라도 마침내 그들은 이집트에 도착했다. 말리 순례단은 기념품을 사러 노천시장에 갔다. 카이로 상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황금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은 본 적이 없었다. 가난한 상인 중에는 순례단에 바가지 요금을 씌우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만사 무사의 탕진으로 왕국은 재정이 파탄났다. 몇 년뒤 말리는 이웃한 송가이 제국에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벼락부자들이 생겨났다. 돈이 넘쳐나니까 덩달아 물가도 올라갔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아 빈민은 물론 서민도 카이로에서 살기 힘들었다. 말리 순례단이 다녀간 지 10년이 지나도록 이집트는 물가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당시 많은 이탈리아인이 이집트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의 높은 물가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벌었다. 결국 만사무사가 가져온 황금은 이탈리아 상인이 거둬들였다. 이집트에서 벌어들인 황금은 이탈리아 은행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이탈리아에서 화려한 르네상스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든든한 자금 덕분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시대도 심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래리 고닉이 서양 중심의 역사만이 아닌 세계 각지의 역사에 고른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사와 아프리카, 인도 남미 등 서양 이외의 지역의 역사도 자세히 소개하면서 이들의 역사에 무관심한 기존의 역사 풍토를 비판하기도 한다. 아프리카의 역사를 다루기에 앞서 나온 작가의 말을 보면 이렇다.


▲ 래리 고닉은 아프리카야말로 다양한 문화의 보고라고 강조했다. ⓒ궁리
"애석하게도 아프리카의 역사를 덮어놓고 오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도무지 마음을 안 여는기라! 아프리카는 미지의 '검은' 대륙이라는 거지. 밀림으로 뒤덮인 '흑인'의 본고장, 배웠다는 사람도 겨우 이 정도 밖에 생각을 못해요! 말도 안 되지!

아프리카의 역사는 보기보다 풍성해요. 아프리카 대륙에는 온갖 기후와 풍물이 모여있고, '흑인종'이란 건 애당초 없다, 이 말씀이야! 아프리카는 어떤 대륙보다도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어. 왜냐고? 인간이라는 '종'이 아프리카에서 태어났거든. 아프리카인에게는 다양성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졌다 이 말씀이야! 그러니 우리 제발 편견을 버리자고요! 새로운 생각은 받아들이고, 낡은 선입견은 떨쳐버리기 위해서!"


▲ "역사가들은 원주민은 대부분 전염병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을 한다!" "어쩐지,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몰상식했을리가 없거든요!" ⓒ궁리

이러한 공정한 시각은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물론 래리 고닉은 모든 침략과 살육에 비판적인 사각을 견지한다. 래리 고닉은 4권에서 백인들이 정착하기 전에 살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이 이룬 멕시코 문명, 잉카 문명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국의 파괴에 대해 이런 고찰을 내놓는다.

"멕시코에서 벌어진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사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원인과 결과를 알아내고 평가하고 저울에 달고 분석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역사가 심판을 할 수 있을까? 알아서들 판단하시라. 그렇지만 한 가지는 꼭 묻고 싶다. 무차별 학살과 탄압과 한 문명이 이룩한 문화적 위업을 깡그리 부순 것에 대해서 어떻게 달리 반응할 수 있겠느냐고. 그 파괴자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시대도 심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보다는 좀더 이성적이고 인간적이고 덜 편협해지도록 만들어나가야 한다."


▲ 래리 고닉은 "우리는 그들의 시대도 심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글 밑에 이런 그림을 그렸다. 이것이 역시 비평에 대한 우리 자신의 냉소적인 태도인지 모른다. ⓒ궁리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쏠쏠한 재미다. 가령 처음으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사람은 포르투갈 태생 페리드난드 마젤란이 아니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남아메리카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간 엔리케 말리카라는 필리핀 출신 노예라는 사실이 그렇다. 또 러일전쟁 당시 미국 은행가 제이콥 시프가 일본에 전쟁 자금으로 2억 달러를 융자해준 것이 국제 유대인 음모론의 기원이 됐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것은 마젤란이 아니라 그의 필리핀 노예 엔리케 말라카였다. ⓒ궁리

"붓다는 80세에 식중독으로 열반에 들었다"

그의 가차없는 시선은 종교라고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그는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종교도 인간에 의한 하나의 역사로 기록한다. 그는 각 종교가 내세우는 가치와 함께 이들의 오류투성이의 현실도 함께 전한다. "붓다는 80세에 식중독으로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예수를 두고는 "메시아의 일은 힘들었다. 예수는 신경 과민의 조짐을 보였다"고 풍자하기도 한다.


▲ 루터는 "내가 방귀를 끼면 로마까지 냄새가 가는 모양입니다"라고 독설을 쏟아냈다. ⓒ궁리
종교의 뒤에 숨겨진 재미있는 풍경도 많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면죄부 장사를 비판하는 글을 교회 문에 붙이고 논쟁을 시작했다. 로마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독일의 수금액이 기대에 훨씬 못미친다는 소식을 듣는다.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부르지만 신학교수는 아프다는 핑계로 독일에 남아 교회를 공격했다. 루터는 "내가 비텐베르크에서 방귀를 끼면 로마까지 냄새가 가는 모양입니다!"라고 비아냥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풍자에 눈살을 찌푸릴지 모른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어느 종교에나 같은 잣대를 대는 래리 고닉에게 섭섭하지는 않을 법하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에는 종교의 가치를 앞세운 오류가 너무나 많았다! 래리 고닉의 말대로 십자군 전쟁이 일으킨 참상은 "말할 나위도 없다."


▲ 래리 고닉은 십자군 전쟁에 통렬한 비판을 내놓는다. ⓒ궁리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충분히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다는 점이다. 그는 각 시대에서마다, 마치 그 시대의 만평가인 것처럼 풍자와 유머를 한껏 불어넣는다. 프랑스 혁명 당시 발명된 기요틴을 지켜보던 시민 중 하나는 "단두는 역시 손맛인데"라고 말하는가 하면 핵무기 폐기를 위해 만난 미국의 레이건과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댁이나 나나 히피가 딱인데"라는 농담을 주고 받는다.


▲ 심지어 래리 고닉은 인류사가 시작되기 전 페름기의 파충류에게도 풍자와 유머를 아끼지 않는다. '만화 우주 역사(The Cartoon History of The Universe)'라는 제목처럼 그의 관심은 역사와 과학을 넘나든다. ⓒ궁리

그러나 그의 유머가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그의 시선 덕분이다. 그는 여성, 노예, 원주민 등 약자의 시선에서 강자를 풍자하고 '강자'의 시선에서 역사를 이야기해온 역사가들을 꼬집는다. 편견과 독설, 공격이 유머가 되는 시대에 '공정함'과 '정의'도 유머가 될 수 있을까? 이 유쾌하고 천재적인 만화가는 답을 갖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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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lkjl 2012-07-05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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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6일, 영국 옥스퍼드의 어느 병원의 외과 응급실은 여름방학의 주말답지 않게 적막했다. 평소 같으면 상처가 나고 팔다리가 부러진 아이들 70~80명으로 북적거려야 할 주말 응급실에 환자가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일까? 마녀들이 나타나서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지 못하게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하는 마법이라도 부린 것일까?

마녀 대신 마법사가 나타났다. 그날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인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가 출간된 날이었다. 이 책은 당일에만 900만 부가 팔렸다. 이날 아이들은 놀이터나 수영장을 찾는 대신 소파에 얌전히 앉아서 책을 읽느라 사고 칠 시간이 없었다. 또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 가기보다는 꾹 참고 해리 포터를 읽었다.

과연 그래서 응급실이 평온했을까? 호기심을 느낀 의사들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인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이 출간된 후 첫 주말인 2003년 6월 21~22일의 진료 기록을 살펴보았다. 이날의 응급실 환자도 평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해리 포터와 골절 환자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다. (오호! 독자들을 사로잡는 좋은 책이 많이 나오면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악화를 막을 수 있다!)

종의 기원을 읽고 열 받는다고? 천만에!

해리 포터만큼이나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 책이 1859년 11월 24일 발간되었다. 발매 당일 초판 1250부가 매진될 정도로 뜨거운 반향을 일으킨 그 책의 이름은 <종의 기원>.

당시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했을까? 혹자는 신이 7일 동안에 모든 생물 종을 지금 모습 그대로 창조했다는 믿음을 단칼에 부인한 찰스 다윈의 주장에 열 받은 노인 독자들이 고혈압 증세로 병원을 찾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종의 기원>을 실제로 읽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 입학해서 가장 먼저 구입한 책 두 권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종의 기원>이다. 아무도 그 책들을 읽으라고 강요하거나 추천하지 않았다. 단지 대학 1학년이면 그 정도는 읽어줘야 사람 취급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높은 가격의 책을 한꺼번에 두 권을 산 것이다.

졸릴 것만 같은 이른바 <해전사>는 학교에서 틈틈이 읽고, 흥미진진할 것 같은 <종의 기원>은 집에서 집중해서 읽으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해전사>는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이틀 만에 다 읽었고, 노트를 만들었고, 친구들과 열띤 토론을 하였다. 생각해 보면 <해전사>는 학력고사보다도 내 인생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런데 <종의 기원>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끝내 다 읽지 못했다. 이후에 독일어와 영어로도 시도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불과 4년 전에야 <종의 기원>을 마쳤다. 다윈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너무 조심스러웠고, 도대체 그가 뭘 말하려는 것인지 내게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나마 20년이 지난 후에야 <종의 기원>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진화 이론에 관한 책을 이미 여러 권 읽은 다음이라서 가능했던 것 같다.

1859년의 영국의 지식인이라고 크게 달랐겠는가? 그들도 무지 졸리고 헷갈려 하며 오랜 시간 동안에 읽느라고 급하게 혈압이 오르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한 주 걸려 읽은 <버스트>


▲ <버스트>(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김명남 옮김, 동아시아 펴냄). ⓒ동아시아
최근 출판된 <버스트>(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지음, 강병남·김명남 옮김, 동아시아 펴냄) 역시 우리나라 병원 응급실에 특별한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다. 나는 <종의 기원>을 읽는 데 20년이나 걸리기는 했지만, 보통 과학책을 읽는 데는 2~3일이면 충분하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버스트>를 읽는 데는 꼬박 한 주가 걸렸다.

재미가 없다거나 내용이 흥미롭지 않아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일단 책은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것도 유수의 학술 잡지에 실려 그 독창성을 인정받은 논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구성이 매우 낯설다. 과학 이야기와 역사 이야기가 홀수와 짝수 챕터에 번갈아가면서 나오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게다가 그 역사라는 게 처음 들어보는 16세기 헝가리 십자군 이야기다. 도대체 왜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전개되는지는 끝까지 다 읽은 다음에야 이해되었다. 이 역사 이야기만 없었다면 이틀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랬다면 번역자도 훨씬 작업이 편했을 것이다. 난해한 구성에 불구하고 번역은 매우 훌륭하다!)

역사 이야기를 간추리면 이렇다.

어떤 추기경이 교황이 되고 싶었지만 교황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여기에는 복잡한 암투가 있다. 그 암투의 결과, 이야기에서 교황은 사라지고 죄르지 세케이와 이슈트반 텔레그디라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십자군 원정대 대장인 세케이는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도중 귀족들로 구성된 아군 기병대의 공격을 받자 반란을 일으켜 농민군을 이끌고 싸우다 처형된다. 한편, 또 다른 주인공인 텔레그디는 농민들로 십자군을 모을 때 반대했다. 텔레그디는 세케이의 십자군이 반란군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세케이가 변덕스런 역사의 희생물이 될 것을 예견했다.

<버스트>의 저자가 이 복잡한 이야기를 (장장 14장이나) 책에 끼워 넣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과학이 역사까지 예측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던 것이다. 세케이는 역사의 무작위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하고, 텔레그디는 예언와 예측 가능성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동은 예측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무작위성, 표준분포곡선, 예측 불가능

난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가 싫었다. 솔직히 재미없었다. 재미있으면 공부가 아니라 놀이 아닌가? 그 와중에도 화학과 물리 수업은 '가끔' 기다려졌다. '주기율표'로 모든 결합을 설명하는 화학 선생님과 'f=ma'라는 간단한 공식으로 모든 것을 예측하는 물리 선생님이 신기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9개월 후에 화성에 로봇이 착륙하도록 위성을 발사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정확히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물리가 재미있었다. 두 선생님을 통해서 우리가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묘사하고, 정량화하고, 예측할 수 있으며, 결국 통제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웬걸! 대학에 들어오니 물리학은 이제 예측 가능한 세계를 다루는 게 아니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입자의 위치를 더 정확히 알려고 할수록 입자의 속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둘 다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전자에서 사람까지 세상의 모든 물체에 적용되는 원리다.

이제 모든 것은 확률로 이야기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미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종 모양의 표준분포곡선에 익숙해 있다. 학급 아이들의 성적, 키, 몸무게, 가정의 소득수준, 100m 달리기 시간 등 모든 것들은 정규분포곡선을 보인다. 이것은 무작위성의 결과다.

우리의 행동도 마찬가지일까? 인간은 확률적으로 행동할까? 만약 그렇다면 인간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폭발성, 멱함수, 예측 가능

책의 원제는 "인간의 행동 속에 숨겨진 법칙(The Hidden Pattern behind Everything We Do)"이다. 번역서는 그 숨겨진 법칙의 정체를 제목으로 삼았다. "버스트(Burst)". '버스트'란 폭발이다. 인간 행동의 패턴은 '무작위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확률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대안으로 '폭발성'을 제시한다. 잔잔한 생활 와중에서 사건이 가끔 폭발한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프레시안> 사이트를 매 시간 들어오지는 않지만 일단 들어오면 몇 건 내지 수십 건을 폭발적으로 열람한다. 이메일을 일과 시간 중에 일정한 비율로 보내지 않는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이메일을 발송한다.

저자는 폭발성을 수식화하는 '멱함수'로 행동 패턴을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폭발적인 행동 패턴이 '우선순위'를 두고 행동하는 생활 방식에서 왔음도 보여준다. 글머리에 제시한 2005년 7월 16일의 응급실 상황도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인간 행동을 예측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데이터다. 최근에는 수백만 명의 행동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시각 정보까지 기록한 데이터베이스 몇 가지를 컴퓨터 과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경제학자들이 분석하고 있다. 그들의 결론은 "우리 행동 대부분은 자연과학 법칙만큼이나 재현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패턴, 메커니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일일이 매핑(mapping)한 작업을 토대로 성장한 회사가 바로 야후와 구글이다.


▲ 종 모양의 정규분포곡선을 보면 링크의 개수가 아주 많거나 적은 노드의 수는 적고 평균값의 링크 수를 갖는 노드들이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멱함수 분포 곡선에 따르면 대부분의 노드들은 링크의 수가 적은 반면 구글, 야후, 아마존처럼 극히 많은 링크가 있는 극소수의 허브들이 있다. 이런 허브들을 '척도 없는 네트워크'라고 한다. ⓒ동아시아
바라바시의 경고

이 책의 저자는 1999년에 '척도 없는(scale-free) 네트워크'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하였던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다. 2002년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링크>(강병남·김기훈 옮김, 동아시아 펴냄)를 통해서 복잡계 네트워크 과학을 소개한 장본인이다. 이 책은 <링크>의 후속작이다.

<링크>가 공간적인 요동 현상에 의해 나타나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를 소개했다면, <버스트>는 시간적인 요동 현상으로 숨 돌릴 수 없이 밀어닥치는 폭발 현상 이면에 멱함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면서 인간의 행동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인간역학(Human Dynamics)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바라바시는 "전 세계의 역사, 사건 등은 네크워크화되어 있으며 미래 행동은 예측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현대는 블로그, 트위터 등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 인터넷과 GPS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수집 데이터의 양이 늘어나 행동 패턴 분석과 예측이 점차 더 쉬워지고 있다. 바라바시는 "미래에는 프라이버시 박탈 위기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생각해 보니 나도 트위터 덕분에 어느 총각 물리학자가 이번 주말에 할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트위터하기가 부담스러워진다.

사족

<버스트>가 출판되자 많은 신문들이 서평을 실었다. "인간 행동의 이면에 숨어있는 법칙을 자신의 가계의 유래를 모티프로 삼아 픽션과 역사와 과학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팩션"이라는 숱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절묘한 결합이 전혀 아닌 것 같다. 바라바시가 자신의 가계를 탐구한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을 억지로 독자들에게까지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만약 내가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읽겠다.

1. 강병남 교수의 해설과 김명남 선생님의 옮긴이의 글을 읽는다.
2. 과학 이야기(홀수 챕터)를 모두 읽는다.
3. 마지막 챕터(28장)의 뒷부분(383쪽부터)을 읽는다.
4. (흥미가 생기면) 역사 이야기(짝수 챕터)를 읽는다.
5. <버스트>의 전작인 <링크>를 '꼭'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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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천안함 사태와 관련하여 석연치 않은 해명과 이에 대한 의심, 그리고 의심에 대한 비난이라는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는 주장과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믿느냐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과연 어떤 주장이 옳을까? 의심은 건전한 인관관계를 해치고 불신으로 가득 찬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악덕인가? 아니면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게 해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미덕인가? 믿음과 의심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가? 아니면 상호보완적이고 건설적인 작용을 하는가?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루터파 신학자인 피터 버거와 네덜란드의 사회학자·철학자인 안톤 지더벨트의 책, <의심에 대한 옹호 : 갈피 없는 현대를 살아가기 위한 사회·철학적 의심의 기술>(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은 종교 철학에서 출발해 윤리학을 거쳐 사회·정치 철학으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지적 여행을 하면서도 의심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독자들의 일상적 경험과 문제들의 끈을 놓지 않는 길잡이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오랫동안 현대 사회의 특징들을 종교학·철학·사회학의 입장에서 연구해온 저자들은 의심과 믿음, 상대주의와 근본주의라는 얼핏 보거나 논리적으로 따져도 반대되는 두 개념들이 실제로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하면서 이들은 서로가 대립되어있으면서도 서로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며 단계적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각 장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의심에 대한 옹호>(피터 버거·안톤 지더벨트 지음, 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 ⓒ산책자
제1장 '근대성의 여러 신들'은 근대의 신앙과 신학이 가지는 특징에서 출발한다. 근대에 일어난 종교의 세속화와 다원성이 상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 개인이 직접 자신의 종교를 쇼핑하는 미국과 같은 다원적 사회를 지적하면서 종교가 더 이상 사회적 전통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관용이라는 근대의 미덕이 역설적으로 상대주의의 철학적 기반 위에 위험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제2장 '상대화의 동학'에서는 근대적 현상인 상대주의의 명암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상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관용의 정신을 고양시키기도 하지만 공통의 잣대가 없기 때문에 판단을 유보하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대성의 부담'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에 현대인들에게 강요되는 수많은 선택은 일종의 저주로 인식되고,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합리와 광신에 스스로 몸을 맡기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모든 상대주의에는 절대의 재래를 기다리는 광신이 있으며, 모든 광신에는 모든 절대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는 상대주의가 있다."는 표현처럼, 이러한 심리적 기제로부터 에리히 프롬이 일찍이 말했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일어나는 것이다. 억압은 자유를 원하게 하지만 자유는 다시 억압을 갈망하게 만든다. 이는 민주화된 이후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고 과거 독재의 유령에 스스로의 영혼을 파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제3장 '상대주의'에서는 상대화라는 객관적 현실과는 달리 종교적·도덕적·정치적 입장으로서의 상대주의를 설명하고 있다. 극단적 상대주의는 필연적으로 모든 가치를 허용하고 따라서 무정부주의적 상황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이는 니힐리즘이고 데카당스로 귀결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라는 말 자체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상대주의의 역설에서 벗어나려는 상대주의자의 전략을 엘리트의 진리 독점으로 설명한다. 광신도나 공산주의자들 모두 이와 같은 전략을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4장 '근본주의'에서는 상대주의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근본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전통을 당연시하는 전통주의와는 달리, 20세기 초 개신교에서 발원한 종교적 근본주의는 자신이 생각하는 당연함이 흔들릴 때 출현해서 그 당연함을 회복하려고 의도적으로 시도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근대성이 가지는 상대화의 역학을 포용하지만 근본주의는 이를 배척한다고 하면서 이 둘의 관계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고 있다. 근본주의는 재정복 모델과 하위문화 모델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구성원들에게 정체성을 강요하지만 전자는 실현 불가능하고 후자는 하위문화를 형성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5장 '확실성과 의심'에서 저자들은 진리와 광기, 확실성과 의심은 상호작용을 하고 연쇄적으로 변증법적 발전 과정을 거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데카르트-베이컨-칼 포퍼의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심의 긍정적인 힘을 비판적 사고의 전통이라고 말한다.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는 다른 모든 것들은 의심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의심하지 않는 점에서 일관성 있고 진지한 의심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끊임없는 반증에도 살아남은 것을 잠정적으로 진리로 여기는 태도야 말로 확실성과 의심의 변증법을 거친 중용의 길인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중도적 입장의 선결 조건을 다음 일곱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자기 입장의 핵심 부분과 좀 더 부수적인 부분 사이의 구별, 2) 현대 역사학 방법론을 자신의 전통에 개방적으로 적용하는 일, 3) 근본주의의 거부와 짝을 이루는 상대주의의 거부, 4) 특정한 신념의 공동체에서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의심을 수용, 5) '타자'를 '우리와 같은 세계관을 갖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하며 '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6) 평화로운 논쟁과 갈등 해소를 가능하게 하는 시민사회의 제도들을 개발하고 유지하는 일, 7) 경험적 사실만이 아닌 도덕적 가치의 문제에서 선택을 수용하는 자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제6장 '의심의 한계'에서 저자들은 의심의 도덕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검토한다. 의심은 위험하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문화적 요새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헌법적 보호막이 있어야 건전한 의심이 보장될 수 있기에 의심의 행진은 자유와 인권의 발 앞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제7장 '중용의 정치'는 저자들의 중심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다. 의심과 확실성, 상대주의와 근본주의 간의 중용이라는 핵심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광신자들은 유머를 확실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유머가 없지만, 유연한 의심과 사고를 가진 사람은 유머가 넘친다는 사실을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도자 헬렌 수즈먼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공식화한 민주주의의 삼각형에서 국가, 시장경제, 시민사회의 꼭짓점을 기준으로 좌파는 국가에로, 우파는 시장에로 경도된다고 말한다. 이 세 꼭짓점으로 지나치게 기우는 것은 각각 시장만능주의, 전체주의, 전통사회로의 복귀로 귀결된다. 모든 문화가 도덕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다문화주의와 같은 정치적 상대주의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종교를 벽장 속에 가두려는 근대의 기획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사실 과학은 종교를 산 속으로 보내고 스스로 종교화되는 이중성을 보여 왔다. 이는 종교는 종교이고 정치는 정치일 뿐이라는 일부 종교인과 정치인들의 주장이 얼마나 자기 기만적인가를 깨닫게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종교의 무신론화와 무신론의 종교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신념인 이상 무신론도 하나의 종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적 불확실성과 도덕적 확실성이 어떻게 양립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해답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을 거울로 북한이 얼마나 종교적인 사회인가 확인할 수 있으며, 피라미드 상조직이 가지는 종교적 색깔의 의미와 효율성(?)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정치와 비즈니스에도 종교적 성향은 중요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종교 철학의 영역을 인식론, 사회·정치 철학에 확대했을 뿐 아니라 종교, 사회, 정치,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근대정신에 대한 총체적 분석서이다. 근대 이후 이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고 어떻게 유사한 기제에 의해 움직여왔는가에 대한 문화비평적 성격도 띠고 있다.

특히 상대주의와 근본주의가 자유와 억압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끊임없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역사를 진행시켜왔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 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라는 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들의 결론은 의심과 확신 사이의 중용이지만,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의심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건전한 의심의 힘은 비판적 사고 능력과 성향으로 통하는 것이다. 강요된 믿음이나 무의식적으로 세뇌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아주 가까이 우리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충분한 토론과 협상의 과정 없이 무조건적인 다수결만을 외치는 의회는 비판적 사고와 의심의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권력의 거수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부각되고 있는 심의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저자들은 결론에서 맹목적 상대주의와 극단적 근본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중용을 취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 중용의 길을 찾고 유지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한다. 중용이라는 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 책에서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지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그나마 저자들이 제 5장에서 제시한 중도적 입장의 일곱 가지 선결 조건들이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추상적 수준의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번역은 깔끔하고 읽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용어 표현에 있어 '오염' 대신 '전염', '허무화' 대신 '무력화', '변증' 대신 '변증론'이 더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광신도들은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신은 완전하니까 신을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완전한 신을 믿을지라도 우리의 믿음 자체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완전한 신에 대한 불완전하거나 잘못된 믿음이 존재하고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이 우리의 불완전함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결함에 대해 스스로 눈멀게 할 뿐이다. 우리는 언제든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물론 동시에 그 오류를 수정하고 진리로 조금씩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건전한 '의심'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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