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화면이 뜨자, 순간 내 얼굴은 굳어 버렸다. "'복지'가 족발이야? 밥만 먹여주면 다야? 희망은?"이라는 제목을 읽자마자 그때 이미 내 볼은 마치 족발에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순식간에 불쾌감이 수직 상승해 버린 까닭은 네모난 상자 안에 갇힌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박근혜와 '1등급 복지'라는 낙인이 찍힌 채 나뒹굴고 있는 돼지 일러스트레이션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뒷목을 부여잡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 말도 안 돼!" 아직 내용도 보기 전이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서평 본문을 훑었다. 장문이었다. 분명 호의적으로 쓰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는 감만을 느낀 채, 내 눈은 허겁지겁 '박근혜'라는 글자를 찾았다.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등장할 만한 의미 있는 내용은 전혀 없어 보였다.

왜 "복지가 '족발'이야"라는 물음을 던졌는지도 금세 드러났다. 현재의 복지 논쟁이 장충동 족발집 원조 논쟁처럼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해 불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읽어 보니…


▲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 ⓒ플래닛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복지 논쟁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 깊은 반감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걸까?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열망을 상인들의 장삿속으로 치환해 버리는 이 과감한 상상력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서평을 반복해서 다시 읽어 봐도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평자 엄기호가 쓴 책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을 반박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이 글은 또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란 책에 드러난 엄기호의 정치관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되었다.

이 책에서 엄기호는 20대 대학생들을 향해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그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한 기성세대의 20대에 대한 비난은 부당하다고 말하며, 오히려 문제는 기성세대에게 있다고 화살을 되돌린다. 20대 대학생들에게 "너흰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기성세대가 20대 대학생에게 퍼붓는 비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우파의 비난으로 이들이 "힘든 일을 하기 싫어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좌파가 하는 비난으로 "완전히 탈정치화되었다"는 것이다. 우파의 비판에 대해서는 대학생들이 등록금을 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아느냐고 되물으면서 함부로 이들의 삶을 삭제하는 무례를 범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어서 그는 젊은이들이 탈정치화되었다는 좌파의 비난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정치의 전제조건이며, 따라서 탈정치화된 존재는 언어가 부재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언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그들의 언어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정리된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적 관심 안에서 형성된 무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지 말고,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면 젊은이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음이 보이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엄기호 자신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의 관점에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었다? 파괴든 것은 개인이다!

엄기호는 글의 서두를 애니메이션 <미래 소년 코난>에 관한 이야기로 열며 이를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근대적 대서사시"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면서 엄기호는 자신이 <코난>에 관한 이야기로 서두를 푼 이유는 이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다. 엄기호는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라는 말로 책의 대의를 전달하는데, 토니 주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받아들인 국가와 정부 아래에서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자체는 건재했고, 오히려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토니 주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가지는 확실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누구도 국가 자체를 축소하려 들지는 않았다. 마거릿 대처와 그녀에 뒤이어 등장한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 가운데 중앙 정부의 억압 기구 또는 정보 수집 기구를 옹호하는 데 주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CCTV, 도청, 미국의 국토안보부, 영국의 독립안보국을 비롯한 그 밖의 장치들 덕택에 근대 국가가 그들의 신민들에게 행사했던 전방위적인 통제는 오히려 확장일로에 있다." (113쪽)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 문장 속에서, 엄기호는 저자 토니 주트에 대한 근거 없는 선입견마저 드러낸다. 엄기호는 굳이 "꼬장꼬장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저자를 소개하는데, "꼬장꼬장하다"는 말에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의도적으로(무심결에 그랬다면 더 큰 문제다!), 그는 토니 주트를 젊은이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그들의 "탈정치화"를 우려하는 좌파 기성세대로 바라보고 있다.

꼬장꼬장한 기성세대의 젊은이 비판? 둘은 동세대다!

책의 내용을 짧게 소개한 후, 엄기호는 곧바로 문제 제기에 들어간다.

책 내용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 이유로 엄기호는 다른 책들이 다 거론하고 있는 것을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오로지 68혁명 세대에 대한 토니 주트의 평가를 반박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는다. 엄기호는 주트가 68혁명 세대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단히 가혹하다"고 말한다. 좌파 기성세대와 그들의 비난을 받는 젊은이라는 그의 도식을 떠올리게 하는 판단이다.

먼저 68혁명과 그 세대에 대한 토니 주트의 설명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후의 복지 국가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지만 그것은 부작용을 수반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국가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오고 있었다. 복지 정책에 수반된 무지막지한 획일성은 젊은 세대를 숨 막히게 했다. 또 참혹했던 전쟁과 전후의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은 60년대 세대는 이전 세대 개혁가들이 내세운 목표인 사회정의와 같은 대의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의 표현에 가해지는 제약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였다. '개인주의', 즉 모든 사람은 사적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 자신의 욕망을 어떠한 제한 없이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이 모든 권리는 사회에 의해 존중되고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점차 좌파의 슬로건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95쪽)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절대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98쪽)

토니 주트는 신좌파의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전후에 인기를 잃었던 보수주의자들이 '가치', '국가', '권위', '존경심' 등을 내세우며 문화 전쟁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본다. 68혁명이 내세운 개인의 자유와 욕망의 해방에 대한 요구가 보수주의의 부활과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엄기호는 주트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동의할 수 없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의 삶은 좀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기호는 마치 존재의 근간을 부정당한 사람처럼 주트의 비판에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주트의 분석에서 68혁명이 비판적으로 언급되는 자리마다 사회민주주의(또는 구좌파)를 집어넣는다. 아무런 설명 없이 모든 것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철저히 무능하고 무지한 사회민주주의자들 탓에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다는 어이없는 강변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엄기호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토니 주트(1948~2010년) 자신이 68혁명 세대라는 점이다. 엄기호의 시간 개념은 1차원적이다. 그에게서 모든 사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지 않고 마치 영화의 스틸 컷처럼 정지되어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세대로 정의될 수 없는 역사를 지녔다. 기성세대만이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다. 20대 사회민주주주의자들이 있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 가운데도 사회민주주의자가 있을 것이다.

68혁명에 참여했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제 60대 이상의 고령층이 되었다. 당시 스무 살의 청년은 지금 우리 나이로 예순네 살이다. 그들은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기성세대다. 68혁명에 참여했던 젊은이들 가운데는 좌파 지지자가 된 자들뿐 아니라 우파 지지자가 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극우파나 극좌파가 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가 된 자들도 있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68혁명은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대척점에 놓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68혁명 세대의 젊은이들은 엄기호의 머릿속에서 불로초를 먹은 듯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도로' 복지 국가? 역사의 시간은 흘러간다!

토니 주트는 복지 국가의 건설을 주도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유산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오류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평하고 있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끝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엄기호는 주트의 주장이 결국 "'도로' 복지 국가"에 불과하다고 단정을 짓는다.

이어서 엄기호는 68혁명이 결국 보수주의의 도래에 일조했다는 주트의 평가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신자유주의를 초래한 주범은 사회민주주의라는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펼치면서 사회주의와 어깨동무를 한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성공을 거두었다는 주트의 단언에 조소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야말로 사회민주주의가 실패한 결과가 아닌가? 신자유주의와 대결하였다가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무릎을 꿇은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냐는 사회주의자들의 조소가 들려오는 듯하다."

정말 사회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조소를 보낼까? 엄기호는 다시 역사의 시계를 19세기 후반의 수정주의 논쟁으로 돌려놓고 거기서 시계 바늘을 멈춰 세운다. 굳이 주트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1989년부터 연쇄적으로 일어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충격적인 몰락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이러한 사태가 서구의 좌파에게 심각한 정치적 부담감을 안겼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구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의 시민들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질 높은 삶을 누리고 있고, 서구의 대다수 선진국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언제든지 집권당이 될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엄기호는 자신의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을 사회주의자들의 당연한 생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서둘러 책에 대한 판결문을 내린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은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서평으로서는 최악의 악담이지만, 이미 엄기호가 사회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음을 말해 버린 마당에 다른 결론은 내려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로써 사회민주주의의 수용을 전제로 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복지 논쟁이 그에게 "무의미"한 이유도 밝혀진 셈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무능하고 무지하고, 개인들의 삶에 무관심하다?

엄기호는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한 68혁명의 구호가 자본주의의 구세주가 된 이유는 "구좌파들이 이것을 사적인 것으로 폄훼하면서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못한 철저한 무능과 무지의 결과이지 68혁명의 귀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반면 68 세대가 한 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 이미 정치적으로 구획된 그 정치를 해체하려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였으며 "그들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사회 밖으로!'를 외쳤다"고 추켜세운다. 그러면서 엄기호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 국가가 만개한 상태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더욱 깊게 생각해 봐야 하며, 역사를 되돌아봐야 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들이 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했는지, 그리고 그 삶의 요구에 대해 당시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리고 무관심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엄기호에게 반문하고 싶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정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인가? 또 "사회 밖으로"를 외칠 때 기본적으로 국가라는 공동체에 주어진 권력은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그리고 토니 주트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책 속에서 충분히 되돌아보고 있지 않은가? 1960년대 후반부터 젊은이들이 사회 복지와 공공 의료 정책의 무지막지한 획일성에 숨 막혀 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주트는 68혁명의 의도가 아니라 그로 인해 초래된 두 가지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는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을 앞세우는 그들의 정서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 등장한 우파의 감정과 일치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좌파가 감정의 분출과 해방에 몰두한 나머지, 반대급부로 보수주의자들이 '가치', '국가', '권위' 등을 주장하며 문화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하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결국 정치적 헤게모니를 그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엄기호는 토니 주트가 68혁명에 지나친 비난을 퍼부었다고 보고, 68혁명에 지워진 책임을 사회민주주의에 뒤집어씌우려 애쓰며 근거 없는 주장을 계속한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서문에서 둘 다 젊은이들을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두 책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하고 그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여론조사는 정치인과 정치 제도에 대한 냉소적인 혐오감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독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꾀하면서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행동이 낳을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136쪽)

하지만 이어지는 논의에서 두 책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토니 주트는 정치적 무관심이 초래할 치명적인 위험을 경고하는 반면, 엄기호는 반대로 젊은이들이 정치에 냉소적인 이유를 천작하고 정치가들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와 정치인이 20대에게 다가가야 하는 방식에 대해 엄기호가 제시하는 모범답안은 충격적이다.

엄기호는 정치에 냉소적인 20대가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때는 따로 있다고 말한다. "정치가 사기라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움직일 때는 정치가 오락이 되거나 혹은 정치가 오락을 방해할 때이다." "진정성이 아니라 재미, 오락"만이 이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20대는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라면 정당과 정치인들은 오락 기계가 되는 셈이다.

여기서 엄기호는 20대를 정치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재미가 있으면 반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반응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소비하는 수용자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엄기호가 젊은이들의 정치적 언어라고 주장하는 "정치적 관심 안에서 형성된 무관심"의 실체이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정치적 능력의 주체로 설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고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시키면서, 엄기호는 위로와 격려를 해준다는 책의 의도와 달리 사실상 이들을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확정짓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0대 또한 언젠가는 30대가 되고, 40대, 50대의 기성세대가 될 것이다. 20대에 오락으로 즐기던 정치가 나이를 먹으면 과연 다른 정치가 될 수 있을까?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인가, 만화적 상상력인가?

지난 몇 달간 복지 논쟁은 아주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울 시장은 무상 급식을 둘러싸고 시의회와 맞붙어 싸웠고, 여러 정당과 유력 정치인들은 복지에 대한 정강과 정견을 앞 다투어 밝혔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정치인들은 표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여론의 동향에 민감하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 논쟁은 정쟁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을 통해 드러난 민심의 발현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복지는 차기 정권 창출의 명운이 걸린 핵심 의제로까지 대두되었다.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라는 용어가 익숙해질 만큼 복지 수준을 어디까지 높여야 하느냐에 대한 백가쟁명이 일어났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복지 망국론과 포퓰리즘 공세도 이어졌다. 언론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기호는 장충동 족발집들의 원조 논쟁처럼 "무의미하다"는 한 마디로 복지 논쟁을 일축한다. 정치적 냉소주의에 관해서는 학생들이 아니라 엄기호 자신이 더 문제인 듯하다.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냉소와 혐오의 늪에 빠져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엄기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으로, 복지에 대한 주장만으로 아무런 현실적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대체 복지에 대한 백가쟁명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실적 차별성이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한 번도 사회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설사 백 번 양보해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엄기호의 말처럼 '도로'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을지라도, 어쨌든 우리에게는 '도로'가 아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동안 벌어진 논쟁을 두고 엄기호는 우리 모두가 "복지주의자"가 되어 버렸다고 조롱한다.

그는 "해방에 대한 요구"는 더 많아지고 커졌으며, "사회민주주의는 그 해방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능해서 신자유주의에 패배한 것이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하지만 엄기호가 "현존하는 모든 욕구들에 더 선도적으로 응답할 때 출현할 수" 있다고 보는 "정치적 상상력"은 그가 <미래 소년 코난>에서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를 목격했듯이 만화적 상상력에 가까운 몽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엄기호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는 아마도 각각이 독자성을 갖는 예술 작품처럼 자유롭고 완성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일 것이다.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말 그대로 "해방"된 삶 말이다. 그는 정치의 미학화를 꿈꾼다.

엄기호가 말하는 정치에는 정당의 이름이 적혀 있는 현판이 없다. 당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상상 속에서는 개개인의 이름이 정당이고, 개개인의 삶이 이념이다. 마치 개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예술 작품처럼 그가 말하는 정치는 개념 속에서 포착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68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68혁명에 대한 주트의 평가에 그토록 과민 반응을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거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68혁명에 대한 주트의 분석은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옳았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정치를 정치적 범주 속에서 상상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범주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해나가야 할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한다. 당연히 우리만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우리 앞 세대 또한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해 왔다. 거기에는 성과도 있었고 오류도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의 바탕 위에서 상상한다. 성과를 이어받고, 오류를 삭제하며 더 나은 삶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일이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과거는 항상 미래에 비해 더 밝은 빛 아래 놓여 있다"

엄기호가 말한 바처럼 아직도 정치는 기껏 "생존"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정치, 그리고 모든 이념은 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상상하고 주장하며 많은 피를 흘려 왔고, 오류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여기에 사회민주주의는 절대적인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많은 이들의 생존이 위태로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토니 주트는 사회민주주의를, 그리고 복지 국가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통제와 억압이 두려워 정치를 포기할 때, 우리는 어떠한 통제와 억압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생존"이 보장돼야 엄기호가 그토록 강조해서 말하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생존"의 보장, 정치와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일차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로운 사회라는 미명하에,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가난한 자들의 식판을 발로 걷어차 엎어버리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글은 지난 3월 11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30호에 실린 엄기호 교육 공동체 '벗' 편집위원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서평에 대한 반론이다. (☞관련 기사 : '복지'가 '족발'이야? 밥만 먹여주면 다야? 희망은?)

안성열 대표는 1969년생으로 자신을 "386 세대의 끝자락"이라고 규정한다. 자기 소개 부탁에 그는 "미학을 공부했으며 미술판을 잠시 기웃거리다 출판계로 흘러들어왔다"며 "40대 초반의 두 아이의 아버지로 NL, PD 같은 용어를 아직도 헷갈려 할 정도로 학생운동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정치적 관심이 고양 중"이라고 덧붙였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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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올바른 정치의 출발이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하는 일이라고 했다는데, 현대 정치 세계처럼 이름들이 혼란스러운 경우도 없다.

'민주주의'니, '자유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들이 쓰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른 뜻으로 쓰인다.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인민민주주의 체제만이 참된 '민주주의'라고 선전하는 식이다.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기표 안에 정반대 의미들이 경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치 수학의 세계처럼 학자들이 표준적인 정의(定義)를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 용어의 생산자는 학자들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생활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일보>가 아무데나 다 '좌파' 딱지를 붙인다고 해서 그것을 "무식하다"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차라리 세계 정치 용어 사전의 '좌파' 항목에 한국 보수 언론의 독특한 용법을 용례 중 하나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교통정리는 필요하다. 같은 기표의 이면에 자리한 동상이몽들을 일목요연한 지도(地圖)로 정리해주는 작업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생활인들이 이 지도를 참고삼아 좀 더 정돈된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다툼은 줄이고 토론의 격을 높이며 합의의 지대를 제대로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이야말로 민주 사회에서 정치학자들의 중요한 사회적 임무 중 하나다. 한국 자유주의의 역사적 계보를 그리는 작업을 벌여온 정치학자 이나미는 최근작 <한국의 보수와 수구>(지성사 펴냄)를 통해 이러한 정치학자의 과제를 충실히 수행했다. 이 책은 정치 용어 중에서도 특히 뜨거운 논쟁의 한 가운데에 있는 '보수'와 '수구'에 대해 친절한 지도를 제시하려 시도한다.

"현실을 지키자"는 보수와 "과거로 돌아가자"는 수구


▲ <한국의 보수와 수구>(이나미 지음, 지성사 펴냄). ⓒ지성사
저자는 결코 불편부당한 채 하며 이 과제에 임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첫 몇 쪽만 훑어봐도 저자가 기본적으로 진보파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대번 알 수 있다. 가령 자칭 보수파 치고 "진보는 인간의 특징이요, 보수는 동물의 특징이다"(13쪽) 같은 문장을 읽고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저자는 아주 솔직하게 당파적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보수와 수구>가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갈 독자층은 저자와 마찬가지로 진보파의 시각을 가진 이들이다. 이런 독자들에게 이 책은 이들이 극복해야 할 상대들에 대한 아주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 이 책은 300여 쪽에 걸쳐 한국의 보수 집단이 어떠한 이들인지, '보수'라고 불리는 게 적당한 이들과 '수구'라고 불리는 게 적당한 이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지, 이들의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지, 소상히 짚어나간다. 이 땅의 진보파에게는 <삼성공화국> 같은 책만큼이나 훌륭한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수단인 셈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흔히 '우파'로 통칭되는 정치적 흐름들 중에서 '보수'와 '수구'를 엄밀히 구별한다. 사실 이러한 구분은 한국의 정치 세계에서는 아주 중요한 관심사다.

많은 이들이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같은 극우 성향 신문들을 '보수' 언론이라 하기보다는 '수구' 언론이라 불러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보수'는 뭔가 합리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있음직한 한 흐름이라면, '수구'는 그런 사회 자체에 역행하는 암적인 존재를 뜻한다. 그래서 한나라당, 조·중·동, 재벌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우파 세력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일 뿐이며, 한국 사회에서는 반(反) 수구 투쟁이 현안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저자의 '보수'/'수구' 구분은 이러한 통상적인 용법과 차이가 있다. 어쩌면 이 차이, 통상적인 '보수'/'수구' 구분에 대한 이러한 개입이야말로 <한국의 보수와 수구>의 핵심 테마라 하겠다.

이나미는 서구 근대 형성 과정에서 등장한 '보수'와 '수구'의 분기(分岐)에 주목하며 그 보편적인 맥락에서 한국 사회 지배 이데올로기의 '보수'적 요소와 '수구'적 요소를 식별한다. 그에 따르면, '보수'는 "현실을 지키자"는 보수주의(conservatism)이며, '수구'는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반동주의(reactionism)다.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실리주의/실용주의, 반공주의 등의 저류에 흐르는 것이 보수의 계보이고, 반면 수구의 계보는 반자유주의, 국가주의, 유교/기독교 근본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단순화해보자면, 보수는 근대 자본주의의 지배 계급(자산 소유자들)이 현상 유지를 위해 선택하는 정치적 입장들을 뜻하며, 수구는 이미 역사의 유물이 된 이데올로기 자원들(군주제, 종교 근본주의 등)을 바탕으로 근대의 모순들에 대결하려는 나름대로 저항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경향들이다. 보수파는 실용인들이고, 수구파는 이념인들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수구는 몰라도, 적어도 보수에 대해서는 우리의 시야를 밝히는 힘을 갖고 있다. 보수의 관심사는 오직 현상 유지이기에 보수파는 그것에 이롭다면 어떠한 변신도, 궤도 수정도 감행할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와 여성의 참정권에 반대하던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위협 앞에서 보통선거권을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그 사회주의의 위협이 역사 속 기억으로 사라진 우리 시대에는 다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고전 자유주의가 회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재벌 언론, 족벌 언론이 취하는 입장은 보수인가, 수구인가? 저자 자신은 직접 말하지 않지만, <한국의 보수와 수구>의 논리대로라면 이들은 수구라기보다는 보수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좌파'라고 질타하다가도 때로 복지 제도 확대를 주장하는 이들의 갈지(之)자 행보에서 일관된 것은 결국 이 사회의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좋다는 단 한 가지 준칙이기 때문이다.

즉, 조·중·동을 지배하는 것은 신앙이라기보다는 실리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이들에 맞선 싸움이 신앙 대 신앙의 그것일 수 없으며 이제는 기생적이 된 어떤 사회 세력을 극복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조선일보>의 '좌파' 딱지 붙이기에 맞서 '수구' 딱지 붙이기에 열중할 일이 아니라 기득권 연합의 전략 구사를 분석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좀 더 파고들었으면 좋았을 물음들

그런데 <한국의 보수와 수구>는 보수론에 비해 수구론이 좀 미완의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흥미 있는 분석이나 시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한국 수구 이념의 중요한 한 구성 요소인 국가주의를 다룬 부분이 그렇다. 이나미는 이 점에서 이승만의 일민주의,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 더 나아가 김일성의 주체사상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일민주의라는,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독재 이념이 주체사상과 놀랍도록 닮았었음을 확인하는 것은 분명 한반도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의 기회다.

하지만 수구론이 보수론에 비해 파편적이라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저자는 한국 수구 이념의 주요 요소들로 반자유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유교/기독교 근본주의 등을 지적하는데, 그 담지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각 요소들 사이의 연관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시원한 설명이 없다.

오히려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보수 이념의 담지자로 지목한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고스란히 수구 이념의 담지자로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수와 수구를 엄격히 구분하려는 저자의 의도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보수 이념과 수구 이념이 엄연히 다른데, 한국에서는 보수파가 수구 이념의 담지자이기도 했던 것인가? 이 책에서 아쉬운 것은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보수파가 수구 이념을 일정하게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쾌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한국 사회 지배 계급의 특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국가를 중심으로 위로부터 육성된 탓에 일본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일제말의 군국주의(더 나아가 만주국의 '파시즘+스탈린주의' 복합체까지)로부터 이어받은 국가주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보수-수구 융합의 중요한 한 배경일 것이다. 그리고 현 지배 계급의 위신을 높여줄 이데올로기 자원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점이 유교 자본주의론이나 기독교 근본주의 같은 억지를 동원해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무래도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방향을 잡도록 자극하는 점만으로도 <한국의 보수와 수구>는 나름대로 제 몫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보수'는 괜찮고 '수구'는 안 된다" 유의 시각에서 한 발 앞서 나아가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은 중대한 기여이고 뚜렷한 성취다. 이 책을 계기로 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사회 세력 간 관계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들이 더 활발히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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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보는 순간 내게 딱 맞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차와 본문을 훑으면서 띄엄띄엄 건너뛰다 보니 그 첫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은 그 제목처럼 내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음식'과 '요리'에 관한 책이었으며, 그에 대한 상세한 과학적 해석을 담아 놓은 것이 그 첫 인상의 원인이었다.

아무리 흥미로운 책일지라도 1300쪽이 넘는 크라운판의 베개 같은 책을 단숨에 읽어치울 방법은 없다. 해롤드 맥기의 <음식과 요리>(백년후 펴냄)는 일종의 전문 사전으로 참고용 책이기에 그렇게 단숨에 읽으라는 책도 아니다. 요리나 음식을 하며 필요할 때에, 또 궁금한 사항이 있을 때 해당 부분을 찾아서 보라는 일종의 공구서이다.

우선은 가장 궁금한 '고기'를 다룬 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책 고기의 장은 색깔이 흰 고기와 붉은 고기의 차이부터 시작한다. 단기간에 많은 힘을 낼 수 있는 근육은 흰 고기이고, 꾸준히 힘을 낼 수 있는 근육은 붉은 고기라는 설명부터 나온다. 근육을 구성하는 섬유의 그림까지 그려져 있다.


▲ <음식과 요리>(해롤드 맥기 지음, 이희건 옮김, 백년후 펴냄). ⓒ백년후
거기에 우리가 먹는 동물들, 인간의 식육 역사, 사람들이 고기를 좋아하는 이유, 육식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고기 섭취를 통한 감염, 광우병, 사육 동물을 통한 호르몬과 항생제의 섭취, 인도적인 고기의 생산, 근육 조직과 고기의 질감, 지방이 골고루 분포된 것이 고기의 맛과 관련이 있는지, 가축으로 기르는 동물들, 야생동물의 고기, 도축과 숙성, 포장과 보관, 방사선 조사, 고기를 적절한 질감을 지니도록 조리하는 방법, 고기를 조리하는 여러 가지 불에 관한 문제, 고기의 내장, 뼈, 가공한 고기 제품, 훈제나 건조 또는 소금에 절인 고기, 발효와 같은 끝도 없는 고기 이야기가 이어진다. 고기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은 다 이 책이 있다는 듯이.

물론 이것들이 고기에 대한 지식들의 전부일 수는 없다. 지역별로 다른 고기 요리들을 죄다 다룬 것도 아니며, 개별적인 지역 사람들의 고기 선호에 대한 지식도 이 책에는 없다. 고기에 관한 지식 가운데 가장 밑바탕에 깔린 이야기는 고기에 관한 과학적 지식이다. 이 과학적인 지식은 실제에도 아주 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지식이다.

고기는 어린 동물의 고기가 부드럽다고 선호하지만, 실제로는 풀을 뜯은 나이 든 동물의 고기가 풍부하고 깊은 맛을 낸다는 점, 또 우리가 흔히 '마블링'이라 부르는 근육 사이에 지방이 골고루 분포된 고기가 반드시 맛있는 고기가 아니라는 점과 같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편견을 깨뜨릴 수 있는 지식들을 이 책은 공급한다. 또한 숙성이란 근육 효소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며 일정한 정도 숙성이 되어야 맛이 좋아진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어떻게 하면 즙이 풍부하고 너무 익혀 푸석푸석해진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는지 구체적인 열과 요리법에 대한 지식들도 친절하게 전해준다. 고기에 익혀진 색깔을 예시하면서 고기에 일어난 화학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데에는 주방에서 고기를 굽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나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읽는 독자가 거기까지 나아가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냥 건너뛰고 맛있는 고기의 빛깔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만 읽어도 무방하다.

실제로 주방에서 사용하는 여러 요리의 기술들은 요리사들이나 음식을 하는 사람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 지식이다. 선대에서 내려온 지식들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경험을 통해 터득한 기술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식들이 전부 옳으냐에 대한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왜냐하면 여러 요리사들의 기술이 다르고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조리의 기술들에 과학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숙련된 요리사라면 거부감을 느낄 만도 하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이렇게 과학적 지식을 조목조목 요리의 과정에 대입한다는 것은 새로운 창의성을 위한 큰 발판을 마련하는 일이다. 과학은 때에 따라 변하지 않는 지식을 전해주기에, 새로운 시도가 논리적 합당성이 있어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를 미리 예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원리를 알고 그 응용을 넓힌다면 요리사의 요리는 한층 더 발전할 소지가 충분해지는 것이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서양 사람의 관점이 뚜렷하게 보인다. 박학다문의 저자는 서양의 것만이 아닌 우리의 김치나 젓갈들도 다루고 있고 꼭 서양의 것만이 아닌 지구촌 곳곳의 음식들에게도 일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젖과 유제품에서 시작해서 와인, 맥주와 증류주로 끝나는 순서는 서양의 음식들을 대표한다. 자신의 관점에서 음식과 요리를 다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1984년에 발간된 초판에서 생선은 고기의 한 부분으로 다뤘다는 점도 서양 중심의 관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생선 애호가의 권유에 의해 고기에서 생선을 따로 분리해서 서술했듯이, 서양 중심의 <음식과 요리>는 차츰 전 세계를 아우르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음식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양의 음식들이 동쪽으로 밀려들었지만 이제는 동쪽의 음식도 서쪽으로 번져가며, 음식의 재료뿐이 아닌 조리의 방식이나 형태들도 서로 활발하게 교환하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지역의 음식들은 존재하지만 퓨전의 거센 물결은 차츰 그 위력을 더해가고 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서양 음식이니 동양 음식이니 하는 구분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으로는 재미를 꼽을 수 있겠다. 오랜 동안 출판에 종사하며 수많은 책들을 펴낸 이 책의 번역자 이희건을 만났을 때 이 방대한 책의 번역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꼭 1년 전에 번역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수와 편집에 걸린 시간을 빼면 거의 7~8개월에 번역을 마쳤다는 뜻이다.

그렇게 빨리 번역을 마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원저의 재미에 번역자가 빠져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피곤한줄 모르고 미친 듯이 번역에 몰두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여느 공구서와는 다르게 책 읽는 재미에 빠져들 수 있다. 원저자의 문장은 마치 솜씨 좋은 문필가의 글처럼 유려하고 지식 전달에만 급급한 기색이 전혀 없다. 아마도 이 책의 원저가 장기간 잘 팔린 책인 것을 보면 지식의 내용도 좋지만 저자의 글 솜씨에 힘입은 바도 크다고 짐작할 수 있다.

옮긴이도 오랜 편집자 경험에서 우러난 매끄러운 번역에 상을 주고 싶다. 이 책의 더 큰 강점은 공구서인 책의 특성에 맞게 꼼꼼하게 공을 들인 색인에 있다. 색인 작업은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 품은 들지만 빛은 나지 않는 작업이다. 애써 만든 색인이 몇몇 오자 때문에 독자들의 항의를 받기 일쑤인 그런 작업이다. 하지만 이 책은 보통 색인의 몇 배나 더 힘든 입체 색인까지 곁들였다. 한 항목만이 아닌 곁가지 항목들을 배열하여 독자가 원하는 항목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렇다면 이 두껍고 비싼(?) 책에 맞는 독자들은 과연 누구일 것인가? 직업이 전문 요리사라면 이 책은 자신의 요리를 발전시키고 설명할 수 있는 든든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남들의 입맛에 자신의 생계와 명예를 거는 요리사라면 음식과 요리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 할 수 없을 것이며, 고객들에게 자신의 요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항상 곁에 두고 탐닉해야 할 책이다.

그리고 요리에 관심이 많고 요리에 대한 즐거움을 아는 분들이라면 떠돌아다니는 레시피를 섭렵하기보다는 이 책 한 권이 요리에 대한 기초를 확실하게 다져줄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호기심만 가득한 나와 같은 독자라면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이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나, 음식의 유래나 역사에 관한 보다 깊은 지식이 아쉽다. 하지만 한 권의 책에서 어찌 이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으랴.

지금 구제역이 창궐하여 축산 농가가 피해를 입고, 옆의 일본 열도가 지진과 해일로 온통 비탄에 빠진 이때에 <음식과 요리>에 관한 이 글을 쓰는 일에 죄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는 그래도 먹어야 산다는 것이 우리네 슬픈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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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최준석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책의 명성은 오래 전에 접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서점에 가보니까 절판 상태였다. 도서관에서 빌릴까? 하다가 다른 급한 일에 정신이 팔려버렸고, 책과의 만남은 한 차례 실패하고 말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잖은가. 이 책과의 인연이 만만찮은 것 같다. 최근에 출판사를 달리하여 책은 재출간되었고, 일부 종이 신문이 소식을 전했고, 그러나 종이 신문을 거의 보지 않는 나는 재발간 소식조차 몰랐다. '프레시안 books' 팀장의 전화를 받은 것은 지난주 월요일 오후였다. 여러 일상의 독서가 있지만, 거의 최상급의 집중력 있는 독서가 서평 쓰기를 전제로 할 때가 아닌가.

수요일 오후, 택배로 책이 왔다. 포장을 열어보니 600여 쪽에 가까운 두툼한 책이다. 살펴본다. 왜 '운디드니'라고 제목에 썼을까. 원제를 보니 'Wounded Knee'라고 띄어쓰기가 똑똑히 돼 있다. 제목 아래에는 부제가 있었다. '미국 인디언 멸망사'라고.


▲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저자 디 브라운은 소설가이다. 소설로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다. 1908년생인데, '새 천년'의 공기를 마셔보고 사망했다(2002년 12월). 일생 동안 25권 이상의 책을 썼는데, 대부분 미국 서부의 역사를 다룬 논픽션이었다고 한다. 아칸소 주립 대학,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각각 역사학, 도서관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일리노이 대학으로 옮겨 도서관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리노이 대학 농대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책 앞쪽 날개의 설명이 그렇다.

이제 책의 속지로 간다. '개정판 서문'이 나타난다. 2000년 어느 날에 쓴 글이다. 1971년 초에 처음 세상에 나온 자신의 책이 '대략 30년'이라는 한 세대를 지나 '두 번째 세대'를 맞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30년이라는 결코 만만찮은 시간의 검증을 통과했으므로 저자의 기쁨어린 감회의 표명은 당연하다. 책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다음 속지를 본다. '초판 서문'이 나타났다. 읽었다. 개정판 서문보다는 원고 분량이 두 배 정도다. 두 서문을 연속해 읽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겨우 책의 6쪽에 불과했지만), 번역에 대한 호감이다. 뭐라 콕 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한 문장 한 문장 번역자의 정성이 느껴졌다. 책에 대한 기대감이 서서히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총 18장으로 되어 있는 책이다. 1장의 제목은 '그들의 태도는 예절 바르고 훌륭하다'. 그런데 나는 막상 1장의 첫 두 쪽을 읽고 바로 책을 덮어야 했다. 더는 읽을 수 없었다. 가슴이 벌렁거려서다. '아, 아…' 하고 나는 연신 감탄음을 내며 대낮의 방에 펴져있는 게으른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마음이 아파서였고 또 말할 수 없이 슬퍼서였다. 아메리카 대륙 인근의 수많은 인디언 부족 중 하필 타이노 족의 이야기가 1장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 쪽 분량으로 요약되어 있는 타이노 족의 멸족 이야기에 상심하여 바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일본에 거주하는 미국인 반전 평화 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라는 이가 있다. 그의 책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펴냄)를 10여 년 전에 읽었다. 그리고 5년 뒤, 그의 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재독한 까닭이야 물론 책이 좋아서였다. 그런데 그 후 다시 5년이 흐른 지금, 두 번 읽은 러미스의 책을 돌이켜보면, 타이노 족의 운명을 다룬 빛나는 에피소드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콜럼버스가 신세계 대륙 근처 어느 섬에 맨 처음 도착했을 때, 섬에 '타이노'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콜럼버스와 그 일행들은 '여기는 에덴동산이 아닌가' 할 정도로 섬의 아름다움과 원주민들의 생활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타이노 족은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생활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작물을 함께 심어 풍족한 열매를 쉽게 거두는 뛰어난 농경법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일주일에 몇 시간밖에 그들은 일하지 않았고, 물고기가 먹고 싶으면 바다로 들어가서 곧장 필요한 만큼 힘들이지 않고 양껏 얻어내는 것이었다.

생존에 들이는 시간이 최소한이었고 나머지 최대한의 시간에 타이노 족은 무엇보다 음악을 하였다고 한다.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 연주를 하고…. 그리고 또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하고 손재주 있는 사람들은 머리장식, 목걸이, 귀걸이를 만들고, 즉 예술 활동을 다양하게 하며 그야말로 생을 즐기더라는 것이다. 콜럼버스 일행이 노동자로 부려먹고 싶어도 타이노 족은 돈을 벌겠다고 하루 8시간, 10시간의 노동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금과 은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타이노 족을 상대로 노예제를 만들고 플랜테이션 농업을 실행하고야 만다. 러미스의 간결한 필치로 된 타이노 족 에피소드의 마지막 문단을 옮기지 않을 수 없다.

타이노 족은 거의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칼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스페인 사람들이 몹시 두려웠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곧바로 노예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이노 족은 노예가 되려고 하지 않고, 자꾸 죽어갑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병으로 죽거나 또는 버티고 앉아서 죽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여튼 죽어갑니다. 울화병으로 죽기도 하고, 또는 아이들을 낳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노예로 사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이노 족은 100년 사이에 전멸하였습니다. 지금은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138~139쪽)

타이노 족의 멸족을 다룬 이 문단이 그 어떤 대량 학살 장면의 묘사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충격과 슬픔이 있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를 펼치자마자(단 두 쪽으로) 타이노 족의 멸족이 주는 충격과 슬픔을 또 다른 필치로 그려 보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단….

콜럼버스는 백인의 생활방식을 가르치겠다며, 친절히 대해주었던 타이노 족 인디언 열 명을 스페인으로 데려갔다. 인디언들은 스페인에 도착해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는데 그 직후 한 명이 죽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인디언을 처음으로 천당에 들어가게 했다고 즐거워했으며, 서둘러 그 기쁜 소식을 서인도제도로 퍼뜨렸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 18쪽)

30분을 쉬고 방바닥에서 일어났지만, 도무지 나는 책을 다시 펼칠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그날 하루는 다시 책을 열지 못했다. 이튿날, 이어서 네댓 쪽을 더 읽기는 했다. 어제와 비슷한 느낌이 왔다. 수십 년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엄청난 공력으로 쓴 디 브라운의 미국 인디언 멸망사, 이 책은 거의 1년에 걸쳐 내 마음이 어떤 이유로든 대단히 행복해서 강해졌을 때, 그렇게 조금씩 읽어야지, 아무리 서평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아, 어떻게 마감 전에 후딱 다 읽고 십 몇 매라도 서평을 쓸 수 있을까? 나는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주말에는 완독하고 주초에 서평을 써야지, 목요일 하루 내내 안절부절했다. 그런데 주말을 하루 앞둔 그 이튿날, 즉 금요일이다.

아시다시피 내 평생 처음 보는 최악의 사건이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하였다. 세계사를 뒤흔들, 즉 세계 정치를 뒤바꿀 끔찍하고도 의미심장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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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는 본문 시작 단 두 쪽 만에 나를 녹다운시켰고 하루 쉰 이튿날에도 네댓 쪽밖에 읽지 못하도록 한 무서운 책이지만, 그러나 생각해본다. 그래봤자 책은 책일 뿐이다. 날고 기고 해봤자 책일 뿐이다! 이 책은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정말 그렇다. 제 아무리 가공할 정도의 성실한 필치로 인디안 멸망사를 그려냈다고 한들, 한 세대를 넘어 살아남은 객관적 가치를 가진 책이라고 한들, 그래봤자다! 책 뒤표지를 보면,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뉴스위크> 등 세계 유수 언론의 편집자들이 쓴 찬사들을 읽을 수 있다. "이 애타고 가슴 저미는 책을 읽다 보면 정말로 누가 야만인인지!" "매혹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기록" "심금을 울린다.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다" "이 책만큼 나를 슬프고 수치스럽게 한 책은 없다" 등등.

과장된 찬사가 아니라 상당한 진심을 담은 말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나는 순간 냉소해버릴 수 있다. 당신들 나라 대통령들이 취임 인사를 할 때, 단 한 번이라도 당신들 땅의 진정한 주인들에게 사죄의 말을, 의례적으로라도, 한 적이 있는가. 당신들 자녀들에게 인디언을 멸망시킨 미국의 참혹한 건국사를 제도 교육을 통해 얼마만큼 가르치고 있는가. 1970년이라는 비교적 최근의 시기에 출간되었고 제 아무리 실감나는 필치로 인디언 멸망사를 그려냈다고 한들, 몇 백 년 전의 비극을 그린, 결국에 안전한 책일 뿐이지 않느냐. 안전하니까 당신들이 이제라도 자기 양심을 위무하는 것에 불과한 그런 찬사를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의심이 드는 것이다.

설사 정말 위험천만한 책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래봤자 책일 뿐이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되었고 지금 이 시각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 원자력 발전소 사태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된다.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유력 국가들의 에너지 정책은 세계 정치의 거의 모든 것이다. 현대사의 수많은 전쟁이 에너지를 둘러싼 약육강식의 벌거벗은 욕망 때문이었다. 세계 정치를 뒤바꾸는 계기가 될 엄청난 사건이, 통신 수단이 인류 역사상 가장 발달한 이때에 벌어졌는데, 몇 백 년 전 인디안 멸망사를 다룬 책이 다 뭐람!

정말 그렇다. 지금 내가 책을 읽을 정신이 어디 있는가. 나는 금요일 오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일본 후쿠시마 사고에 내 정신을 완전히 다 바치고 있다. 나만 그럴까. 이번 사건 이전부터 원자력 발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 일주일을 넘기고 있는 후쿠시마 사고는 정말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 이런 책을 읽으며 마음 아파하는 일상의 시간이 다시 내게 오기나 할까? 반핵운동은 남은 내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말 중대한 사회운동이구나, 나는 새삼 깨닫는 중이다. "더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 증설은 절대 반대"가 온 인류의 구호가 되어야 함을 내 평생 어느 때보다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깨닫는 절실한 시간 속에 나는 있다.

600쪽에 육박하는 책,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 나는 서평이랍시고 지금 이렇게 쓰고 있지만, 고백하자, 책의 총 18장 중 1장과 18장만 읽은 상태다. 말도 안 되는 부실한 독서를 겨우겨우 하고 글을 쓰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뭐라 평할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둘러싼 배경 지식이랄까, 하나만 더 하자. 인디언 원주민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흉포한 유럽인들이 어떤 짓을 하였나. 수천 만 마리의 버펄로가 인디언들의 안정된 생존 근거인 것을 알고 그야말로 광기어린 살육에 나서지 않았던가. 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5000 만 마리가 넘던 버펄로가 수십 년 만에 8000마리로 줄어들지 않았나. 이 책은 아우슈비츠의 광기에 가까웠던 그 참혹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일 것이다. 자, 이 정도면 됐다. 저자의 개정판 머리말 두 쪽만 읽어도 한국어 번역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또 저자의 문장의 밀도에도 신뢰할 수 있다. 이 정도만 말하는 것으로 그치자.

이 책을 나는 언젠가는 완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세계 역사와 세계 경제는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류가 지금보다 몇 백 배 더 심각한 환경과 에너지 참사를 피하기 위해 지금 후쿠시마 사고가 조금 더 악화되기를 하는 악마 같은 유혹까지 들 정도다. 그만큼 에너지 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의식 전환을 강제할 절체절명의 기회인 것이다.

이 사태가 잘 마무리되어 미국과 유럽의 정치 지도자가 "원자력 발전소 증설 반대"를 공식 선포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대안으로 서남아시아 석유를 향하여 미친 개처럼 다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체르노빌 사태를 보고 충격을 받고 지금은 반핵 환경 사상가가 된 고르바초프가 최근 어떤 기고문에서 "미국 정부는 1947년부터 1999년까지 원자력 분야에 260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 반면, 풍력과 태양광 발전에는 불과 55억 달러밖에 지급하지 않았다"고 밝혔듯이, 인류의 죽음만 앞당길 뿐인 원자력 발전이 아닌 오직 유일한 대안인 재생 에너지 개발과 연구에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달려들 수 있다면(정말 지구상의 인간이 살 길은 오직 그뿐이므로!) 그때에서야 희망찬 새 마음으로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를 힘차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욕망 반성이 에너지 문제뿐이겠는가. 몇 백 년 전 미국 대륙에서 벌어진 살육의 역사도 똑똑히 알아둬야 할 용기가 생길 것 같다.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서평 아닌 이 정체불명의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눈물이 난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 정년퇴직한 기술자들이 피폭 방사선량이 생명에 위태로울 정도인데도 더한 참사를 막기 위해 자진하여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한다. "내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라고 남편은 말하고 "어서 가시라"고 그의 아내가 말했다고 한다. 운행 중에도 늘 위험천만한 사고가 언제 닥칠지 모르고 또 제 아무리 안전 운행을 하였다 하여도 처치 곤란한 악마 같은 핵폐기물을 남길 뿐인 원자력 발전이지만, 선량한 수많은 사람들의 평생 직장이기도 했다. 자식 키우고 교육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 직장이 있어서였다.

지금까지의 후쿠시마 사태만 해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기에 더 이상의 참사는 피했으면 싶다. '차라리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때 죽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무서운 것이 방사능 피폭 후유증을 앓는 이들의 평생에 걸친 고통이다. 지상에 원자력 발전소가 즐비하게 된 것이 우리 모두의 공업(共業)이라고 하여도 그 누구보다 퇴직 원자력 발전소 기술자들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다. '원전 결사대'라고 찬사하려고 함이 아니다. 더한 참사 피해를 막아라, 당신들은 거기서 죽어라, 나를 핵발전소에 묻어 주오, 하고 죄 없는 인디언처럼 외쳐라! 그리고 조금도 억울해 하지 말아라.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기막힌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가 너무도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기 때문일 뿐이다. 말했듯 우리의 공업 탓이다.

당신들부터 거기서 죽겠다고 각오하라! 내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퇴직자라면, 나라도 당신처럼 현장으로 달려간다! 때문에 이렇게 지독하게 말할 수 있다. 사태를 마무리해다오. 그 후 우리가 배우겠다. 당신들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싸우겠다.

부디 인디언 멸망사를 읽으며 눈물을 흘릴 아름다운 시간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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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교본>(배수아 옮김, 워크품프레스 펴냄)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만든 제2차 세계 대전 사진첩이다. 그는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 나름의 안목으로 보도 사진들을 뽑아내고, 사진의 주석으로 자신이 '사진시((Fotoepigramm)'라고 부른 4행시를 달았다. 이는 진실을 재구성 하는 작업이었다.

"속임수를 강요하고 사람들을 혼돈에 휩싸이게 하는 시대라면, 사색하는 자는 자신이 읽고 들은 정보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읽거나 들은 사실을 낮은 목소리로 함께 따라서 얘기해 본다. 그러는 사이 그는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한 문장 한 문장에 나타난 진실하지 못한 진술을 진실한 것으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이런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그는 어느새 올바르게 읽고 듣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브레히트, '진실의 재구성')

브레히트는 우리에게 '사진을 읽는 방법'을 가르치려 한다. '진실'을 말하는 4행시는 그 사진이 원래 실렸던 매체의, 우리를 '혼돈에 휩싸이게 하는' 맥락과는 반대이다. 이를테면 연합국 측에는, 우리에게도, 전쟁의 영웅인 영국 처칠 수상의 사진에 달린 시.

"나는 갱들의 법칙을 알지 식인종들과도 /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잘 지내왔다네. / 그들은 얌전하게 내 손에서 고기를 받아먹었으니, 나보다 / 더 나은 문화의 보호자는 아마 찾기 힘들 걸."

또 '평범한 일상의 복원'이라는 제목의, 미국 군정청 장교들이 시칠리아 민간인들에게 미국산 밀을 팔고 있는 사진에 대한 시.

"우리는 밀과, 그리고 왕도 한 명 데려왔으니, 받아라! / 누구든지 밀가루를 받는 자는 왕도 함께 받아야 할 테니 / 장화를 핥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 계속해서 굶주리는 일이 마음에 들어야 하리라."


▲<전쟁교본>(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배수아 옮김, 워크품프레스 펴냄). ⓒ워크룸프레스
브레히트가 그 사진에서 본 것은 제목과는 다른, 미국 거대 식품 기업의 대박 장사였다. 책 뒤에 실린 해설에 따르자면 그 기업들이 잉여 농산물을 국제 원조 단체에 팔아치웠으며, 그 대금은 미국 국민들이 세금으로 치렀다. 원조품은 '경제 전문가', '정치 고문단'과 함께 유럽에 건너와서 유럽 국가들의 정책을 미국 대기업의 이익 맞춤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에게도 눈에 익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긴박감으로 떨리는 사진에서 손에 총을 들고 바닷물을 헤치고 나오던 미군 병사는 자기가 유럽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줄만 알았다. 제가 들고 있는 총이 '사실상 스탈린그라드에서 출발하는 자(같은 연합군인 소련군)를 겨눈' 줄은 몰랐다. 유럽에서 빈약한 배를 타고 탈출하여 피난처의 해안에서 난파한 유대인들은 해안에 있는 이들이 알기만 한다면 도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음을, 익사해가는 유대인들은 몰랐다.

반세기도 지나 이 사진첩을 보게 된 우리는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된 충격을 느끼지는 않지만, 곧바로 우리가 빠져있는 현재의 혼란이 있을 것이다. '영국 공군의 블루'천으로 섹시한 드레스를 지어 입고 전쟁 훈장으로 치장했던 그때의 할리우드 여배우는, 오늘날 우리가 환호하는 연예인 혹은 존경하는 석학일 수도 있다. 자동차에 소형 제단을 장착하여 나치 군부대를 돌아다니며 예배를 드려주던 그 기동식 교회의 신이 지금 우리가 기도하는 신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진실을 간파한 이가 브레히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침략에 동원되었던 젊은이들이 '살기 위해서' 전선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 군수품 공장에서 장갑차와 장갑차를 꿰뚫을 총탄을 한꺼번에 만들던 남성 노동자들, 흰 두건을 쓰고 집중하여 폭탄을 용접하던 여성 노동자들도 같은 이유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독일 폭격기의 승무원들마저 '공포 때문에'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것. 본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도 알고 있다. 우리가 그렇다는 것. 제 나라의 군사 무기 수출 물량이 많다고 문제 삼는 국민이 어느 나라건 얼마나 될까? 수출해서 경제에, 먹고 살기에 허덕이는 서민들의 경제에 도움만 되면 단가? 그것은 쓰인다.

"여기 우리가 있다, 너희가 무찌른 대상들이. 승리 만세!"

브레히트가 이런 시구를 단 사진의 주인공들은 다치고 굶주린 어린이들이다.

"오, 정글용 탱크에서 발견된 가엾은 요릭! / 네 머리가 탱크 손잡이에 꽂혀 있구나 / 너는 도메인 은행을 위해 불 속에서 죽어갔는데 / 네 부모는 아직도 그 은행에 빚이 많구나."

불타버린 일본군 탱크에 미군들이 얹어 놓은 한 일본군의 해골 사진에 달린 이 시는,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점령군으로 죽음마저 무릅쓰는 여러 국적의 병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재래식 무기 중 '집속탄'은 민간인에게 피해를 가장 많이 끼쳐서 피해자의 98%가 민간인이라고 한다. 때문에 국제적으로 금지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 금지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주요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최근에는 국산 자주포의 수출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할 때 우리도 살기 위해서(국익) 그랬고, 공포(대미 관계, 북한 핵)에 질려 있었다.

반세기 전의 사진첩을 보면서 우리는 세월 이상의 것에 부딪친다. '정확한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의 의미, '올바르게 읽고 듣는다는 것'의 결과 말이다. 매체의 속임수에 속지 않고 정보를 제대로 걸러내는 기술은 관건이 아니다. 이 책은 진실을 대면하는 용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 브레히트가 신문과 잡지에서 보도 사진을 오리고, 사실의 기록인 보도 사진에 시로 주석을 달았던 것이다. 풍부하고 다양한 정보와 간편하고 효율적인 컴퓨터를 갖추고 있음에도, 우린 그보다 위축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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