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거 몇 개월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필요한 데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나온다." 야권의 차기 대권 주자 부재 문제를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적용되는 경우가 많은 명언이다.

천안함 문제를 취재하면서 기자의 머릿속에는 DJ의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국면마다 민군 합동조사단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국내는 물론 미국에서, 일본에서, 캐나다에서 들려올 때마다 어찌 이런 '물건'들이 나올까, 곱씹고 또 곱씹었다.

<천안함을 묻는다>(강태호 엮음, 창비 펴냄)는 바로 그 '물건' 당사자들이, 혹은 그 '물건'과 대중을 연결했던 기자들이 모여 만든 책이다. 서재정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교수, 이승헌 버지니아 대학교 교수,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김종대 <D&D 포커스> 편집장, 박선원 브루킹스연구소 초빙연구원 등등.

아직 끝나지 않은,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지 모르는 천안함 사건 4개월 반의 기록은 달리 말하자면 이 책의 필자들이 활약했던 기록이다. 전문성과 정의감을 무기로 한 이들의 활약은 결론을 미리 내놓고 얼렁뚱땅 끼워 맞추면 될 거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한 정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 <천안함을 묻는다>(강태호 엮음, 창비 펴냄). ⓒ창비
"나는 한나라당 지지자고,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다. 그런데 내 양심에 비춰볼 때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나."

<천안함을 묻는다>의 필자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책의 곳곳에 인용되어 있는 이종인 알파잠수공사 대표. 해난 사고 전문가인 그 역시 천안함이 낳은 '물건'으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좌초론을 주장하는 이 대표는 토론회 같은 데에 나오면 우선 자신의 정치 성향부터 밝힌다. 자기는 오로지 양심만으로 움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부 입장에서는 누구보다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어디에 꿇릴 것도, 아쉬운 것도 없어 보이는 자유인 이종인 대표는 현장 전문가답게 글 같은 건 쓰지 않는다. 대신 인천 앞바다에 금속 조각을 묻어 부식 실험을 하고, 직접 배를 몰고 천안함 사고 해역을 탐사한다.

역시 필자로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책에서 수차례 언급되는 캐나다 매니토바 대학교 지질과학과 양판석 분석실장도 빼놓을 수 없다. 양판석 박사는 이승헌·서재정 교수가 시작한 흡착 물질 논쟁에 다소 늦게 뛰었지만, 곧장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들어가 합동조사단을 쩔쩔매게 했다. 에너지 분광(EDS) 분석 전문가인 양 박사는 천안함 및 어뢰에 흡착된 물질이 비결정질 산화알루미늄이라는 합동조사단의 주장을 일축하고 알루미늄이 녹슬 때 나오는 수산화알루미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대한 합동조사단의 대응은 기상천외했다. <천안함을 묻는다>에 실린 기자의 졸고에 양측의 공방이 정리되어 있다.

양 박사는 2005년 황우석 사태 당시 인터넷 토론장으로 주목받았던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게시판을 '천안함 게시판'으로 바꿔 놓았다. 이 게시판에 가면 두 명의 '양판석'을 만날 수 있다. 합동조사단을 논박하는 진짜 양판석과 '위니(winnie)'란 대화명으로 '소설 천안함'을 쓰는 양판석이다. 두 경우 모두 그의 전문가적 견해와 상상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천안함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았던 지질학자가 이슈의 주역으로 떠오를 줄이야, DJ의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다.

기왕 '천안함과 사람들' 얘기로 흐른 마당에 꼭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다. 노종면 YTN 전 노조위원장. 낙하산 사장을 거부하며 정부 및 사측과 싸우다 결국 해고됐지만 그의 DNA에는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기자 정신이 있는 모양이다. 노종면 전 위원장은 한국기자협회·한국PD연합회·전국언론노조가 구성한 '천안함 조사 결과 언론 보도 검증위원회'를 이끌며 천안함과 관련한 각종 쟁점들을 집대성해 깎고 다듬는다.

언론 검증위원회를 대상으로 지난 6월 29일 국방부가 마련한 설명회에서는 노종면 전 위원장의 진가가 그대로 드러났다. 흡착 물질, 스크루 변형, 물기둥 목격 진술 등 각종 쟁점에서 그는 합동조사단의 허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이 책의 필자들과 이종인 대표, 양판석 박사가 분야별 전문가라면 노 전 위원장은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합동조사단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반론이라면 아무 것이나 무작정 갖다 쓰지 않는다는 점도 무섭다. 냉정과 자제를 잃지 않고 합동조사단과 맞서는 반론에 대해서도 검증하고 또 검증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하루 빨리 원래의 일터로 돌아가야 할 기자다.

이들은 왜 이토록 천안함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6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 들어서 추락하는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의 교차로에 천안함 문제가 놓여 있다고 말했다. 천안함의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라고 했다.

취재 과정에서 접한 <천안함을 묻는다>의 필자들, 그리고 이 글에서 소개한 인물들은 그 중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때가 어느 땐데 그렇게 허술한 논리로 국민들을 무시하느냐는 것이다. 결론을 먼저 내리고 근거는 대충 끼워 맞추고, 그래도 안 맞는 부분은 "천안함 사건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된 현상"이란 '용감한' 말로 건너뛰는 것은 유권자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다. 상식과 합리주의를 위한 싸움이다.

그런 그들에게 '친북'이니 '빨갱이'니 딱지를 붙이는 것을 보면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을 찍은 젊은이들은 북한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고위 당국자의 말이 상징하듯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을 합동조사단을 믿는 쪽과 안 믿는 쪽으로 나누는 '두 국민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런 야만의 논리가 더 이상은 발붙이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천안함을 묻고 또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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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장과 대학 교수.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 <이끼>를 봐도 마을 이장은 산전수전 다 겪어 이문에 밝은 동네 어른이고, 교수는 현실에서 약간 물러나 세계를 조망하는 이미지를 갖는다. 더군다나 그 교수의 전공이 경영학이고, 동네에서는 농사꾼이며, 아파트 건설에 반대하는 이장이라면 고개가 더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다.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 교수' 겸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1리 전 이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런 '갸우뚱함'을 안고 시작됐다. '생태'와 '환경'을 외치는 목소리는 꾸준히 커져왔다. 하지만 이를 경영의 관점에서 볼 경우 인본주의를 외치며 실제로는 자본주의에 충실한 기업들의 허울 좋은 구호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는 기업의 성과를 위한 학문을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움에 어떻게 적용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시골 마을의 콘크리트

7월 26일 푹푹 찌는 날씨 속에 조치원역에 내렸다. 택시를 타고 5분여를 달리니 주위의 회색 건물이 사라지고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철길 세 개를 건너 신안1리에 도착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처음 마주한 풍경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마을을 둘러싼 야산이 무색할 정도로 높게 지은 아파트다.

지난 2007년 첫 삽을 떴지만 약 1100여 세대 중 15채만 분양되면서 지난해 하반기 공사가 중단됐다. 뼈대에 콘크리트만 굳힌 채 시간이 멈춰버린 구조물의 텅 빈 유리창에는 아직 창틀에서 벗겨지지 않은 파란색 비닐들이 버려진 공사장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강 교수가 지난 5월에 쓴 <나부터 마을혁명>(산지니 펴냄)에는 마을 유지와 토건 세력, 관료가 영합해 개발 이익을 위해 전원 마을 한 복판에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마을 주민과 함께 이에 저항하던 그는 이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됐다. 마을에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오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풀뿌리 운동에 대한 그의 확신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됐다.

단지를 두른 펜스를 따라 오르막길을 5분 정도 오르니 벙거지 모자를 쓴 강수돌 교수가 보였다. 그를 따라 아파트 단지 맞은편 샛길로 들어섰다. 샛길을 오르는 중간에 고인 샘물로 얼굴을 씻으니 더위가 조금 가셨다. 산 중턱에 그가 직접 지은 흙집이 보였다.

최근에 낸 책 <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지성사 펴냄)와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생각의나무 펴냄)에서 경제의 양적 성장을 넘어 인간의 삶의 질과 생태와의 조화를 꿈꾸는 그는 개발·교육·노동 등 사회 현안에도 목소리를 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흙집에 앉아 그와 나눈 이야기들은 콘크리트 빌딩 숲에 갇혀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들이 음미할 가치가 있다.

자본주의가 만든 사회적 DNA

-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생태나 환경에 주목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프레시안(최형락)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받았던 일차적인 느낌은 '이건 내가 배우고 싶었던 공부가 아닌데'라는 것이었다. 그 느낌의 뿌리를 파고보니 결국 이 학문이 추구하는 합리성이라는 건 결국 생산의 효율성이었다. 투입은 가급적 줄이고 산출은 늘리는 과정에서 사람과 자연이 망가지고 심지어 영혼까지 상처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돈벌이 경영에서 오는 뒤틀림 현상인 것이다. 경영학은 기업 단위의 분석을 많이 하는데 주로 경영자 입장에서 관리·정책 지침을 만드는데 치우쳐 있다. 그런 방법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노동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삶의 경영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돈의 경영 패러다임에서 보면 전혀 말도 안되는 이야길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 생태와 삶의 질을 외치는 목소리는 꾸준히 늘어왔다. 기업들도 제각기 나름의 '인간 중심 경영'을 표방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했을 때 따르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워낙 돈의 패러다임에 오래 젖어있다 보니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평소에 자주 쓰는 말인데 '사회적 DNA'가 그렇게 변해버린 상태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쟁의 바다'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10년 전과 비교해서 현재가 조금 더 쾌적해지고 행복해졌는지, 아니면 가면 갈수록 경쟁이 격렬해지면서 피폐해지는지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늪에 빠졌는지 해방의 길로 가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받아들인 경쟁 패러다임이 점점 늪에 빠져들고 있다. 이 물결을 원천적으로 부정해서 진공 상태로 살아갈 순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직접적인 타격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을 쳐야한다. 다른 패러다임의 실현이 가능하다면 해내야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소위 '대안 언론'도 경쟁의 물결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진 않지만 그 자체가 답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무자비한 광고 자본에 빠져들지 않으려 애쓰는 것 아닌가?"

"풍요가 해방을 억압한다"

강 교수가 말하는 '다른 패러다임'의 정체는 뭘까? 현재 인류가 구축한 풍요로움을 이제는 배분하는 데 신경 써야한다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풍요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 지금까지 진보적인 이론 입장에서는 물질적인 풍요가 전제될 때 사회 관계의 해방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물질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또는 물질적인 풍요가 지나쳐 오히려 억압받는 것 같다.

일례로 지금 현재 첨단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위치 추적 기술이 노동 현장을 감시하는데 사용된다. 물적 진보, 과학 진보가 이루어지는 커다란 맥락이 자유나 해방보다는 명령과 순종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론에서 말하는 물질적인 풍요는 현실의 풍요와는 질이 다르다. 지금까지 진행된 물질적 풍요의 규정은 결국 자본이나 권력이 정했다.

주거나 먹을거리 등 생존의 문제로부터 해방되면 여유로운 문화 생활이 가능해지고,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개성을 살리는 창의적인 생활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더욱 더 빨리 인간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기술,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추출해나가는 기술이 주도적으로 발전했다. 돈 되는 고급 아파트는 넘칠 정도로 많이 짓지만 빈민을 위한 임대주택은 몇 채 짓지 않는다."

인류가 구축한 풍요가 정당한 과정을 통하지 않았다고 해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평한 분배를 통해 이익을 나누고 바람직한 성장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번에도 강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풍요가 아니다. 빈곤 문제의 해결은-가난이라는 용어가 부담스럽다면-모두가 검소하게 사는 식으로 되어야 할 것 같다. 이미 마하트마 간디부터 시작해 많은 이들이 설파한 것처럼 전 세계가 미국의 중산층 수준으로 생활하려면 지구가 5개 있어도 부족하다.

현재도 이미 석유처럼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지구촌 사람들이 남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전쟁하는 모습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검소해져야 된다. 일부터 찌들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소박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가난함이 가르쳐주는 것이 많다. 두려워할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 가난을 풍요로 해결하려는 것은 인류의 미래가 아니다."

- 이야기하고 있는 '검소함'은 결국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는 뜻인가.

"오히려 자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필요에 충실하게 감응하는 상태, 그게 자율이고 책임이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흙집 거실에는 30년 전에나 나왔을 구형 선풍기가 덜덜거리는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파이의 원천은 생태"

- 그런 '검소함'이 생태나 환경이라는 대안으로 나타난다는 건데, 사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사회적 DNA' 때문인가? 일례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그게 환경과 생태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정부가 표방하는 일련의 정책 방향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도 있다.

"환경과 생태 문제는 경제나 정치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4대강 사업을 예로 들었는데 1차적 우려는 식수 오염이다. 식수 오염은 바로 경제적인 문제이면서 생태적인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식수가 오염되면 물을 사다 먹는 방법밖에 없다. 이미 생수 사업이 시작된 지 20년 가까이 됐다.

<살림의 경제학>(인물과사상사 펴냄)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주류 경제학의 성장 패러다임은 파이의 크기만 문제 삼고 있다. 파이의 크기만 무한정 키우면 저절로 나눠진다고 했지만 지난 수십 년의 경험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파이의 성장이나 분배냐는 차원에서조차도 파이의 원천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없다. 결국은 생태다. 성장은 경제적 문제이고 분배는 사회적 문제인데 생태는 이 두 가지를 다 아우를 수 있다. 파이를 아무리 키우고 공정히 나눠도 각 조각이 자연 훼손과 오염을 전제로 한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회·문화·교육 측면에서 얼마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가가 핵심 문제다. 그 답이 '노(no)'라면 갈 길이 아닌 것이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측만 문제인 건 아니다. 샛강에 들어가는 온갖 오염물질들은 가정과 공장에서 나온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지만 강물은 수천년지대계 아니겠나. 잘못된 것을 고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4대강 사업처럼 진행할 건 아니다. 오염의 원천을 없애고 이미 오염된 것을 조심스런 형태로 정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재의 4대강 사업은 말 그대로 '사업'의 일종이지 '살리기' 운동은 아니다."

- 다시 한 번 검소함으로 돌아가서 현대인들은-'사회적 DNA'에 따르면-이미 소비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데 익숙하다. 검소함으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무엇이 있나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이 표현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집 <월든>에 나오는 표현인데 이만큼 중요한 게 없다. 책이나 대화, 사색 또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 정체성, 삶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는 여행. 이런 게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무엇이 자신을 만족시킬지 몰라 일시적인 소비로 채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만남이다. 다른 이와의 만남. 소모임이나 풀뿌리 모임은 사회 변화에 중요한 요소다. 종교적으로 수양, 마음의 공부를 강조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사회 변화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어떤 모습의 삶, 자본 권력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주는 미래상이 아니라 참다운 인간상, 이웃과 자연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풀뿌리 모임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읽었던 책, 보았던 영화, 자기가 체험한 경험과 여행 등 모든 것을 포함해 이웃과 나누고 공감해야 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배우다 한 차원 고양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삶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소비를 통해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거나 자아실현을 한다는 착각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다른 패러다임의 다른 인간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실천력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잔업을 더 해서 번 돈으로 대형 마트에 가서 구운 소금을 사는 것보단 그 시간에 가족들과 모여 소금을 솥에 구워서 먹어보는 것이다.

멜라닌, 환경 호르몬, 아토피 등 식량 위기에 관련된 사안들을 보면 현재 우리가 먹는 건 독약에 가깝다. 경쟁 시스템 못지않게 이런 데에 무감하면 파멸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발을 빼는 게 필요하다.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대안을 고민하게 된다. 또한 한발 앞서 실천하는 사람들과 결합하면 그런 구조에 반복적으로 휘말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강 교수는 5년 동안 이장을 맡아오면서 아파트 반대 싸움만 해오지 않았다. 마을 주민, 인근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골목 축제를 기획했다. 마을 아이들을 모아 글쓰기 교실도 진행했다. 마을에 도서관을 꾸며 문화 교양 강좌도 열었다. 단순한 즐거움이나 배움을 넘어, 함께 어울려 소통하기 위해서다.


ⓒ프레시안(최형락)

한 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최근 펴낸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를 보면 외모나 말투에서 풍기는 느긋함보다는 날선 비판이 강하다. 한편으론 발을 빼고, 한 쪽 발은 담그는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그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밑바탕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 크게 보면 대학 선생인 나 자신도 노동하는 형태가 다를 뿐 마찬가지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노동조합 대의원들이 서로 물량을 더 끌어오려고 경쟁하는 것이다. 또한 돈만 된다면 잔업, 철야 특근을 마다하지 않는 풍조도 있다. 임금 단체 협상 과정에서만 명시적으로 시급이나 복지에서 더 나은 대우를 쟁취하는 듯 하지만, 결국 노동의 굴레 속으로 더욱 빠져들게 되는 꼴이다. 노동권을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굴레로부터 벗어날 권리까지도 포함해야 자유·해방이 가능하다.

궁극적으로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하고 노동을 하는 관계가 자기과 세상을 죽이는 관계 속에서 편성되어선 안 된다. 자아실현 과정이 노동이 되어야 하고 인간적인 유대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관계가 노동 현장에 구현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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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역시 하나의 담론 체계이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의제를 독자에게 제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 설정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이 '강남 형성사'에 대해 쓰고 싶었고, 또 그것을 실제로 써냈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촉수가 매우 민감하게 발달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의 강남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나 행정구역이 아니다. 그것은 압축 성장의 근대화가 만들어낸 뒤틀린 욕망의 표상 공간이자, 여타 지역의 거주민으로 하여금 강남적 삶의 방식을 끝없이 모방하고 선망하게 만드는 한국판 궁정 질서다. 그러니 세칭 '강남 공화국'이라는 표현은 현실에 대한 심각한 오인을 낳는다. 강남이라는 표상 공간을 형성하고 지탱시키며,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남에 대한 경쟁적이며 모방적인 삶의 투쟁으로 이끄는 힘과 의례와 역학은 사실상 민주주의와 무관하다.

서구의 근대를 추동해냈던 부르주아들이 궁정의 삶을 경멸하면서도 그것을 분열증적으로 모방해왔듯이, 황석영의 <강남몽>(창비 펴냄)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은 제 각각의 욕망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강남적 삶의 질서 속에 용해된다. 그러나 모방에서도 승자와 패자는 남는 법이며, 선택과 배제의 질서 역시 끈질기게 관철되는 법이다. 어떤 자들에게 강남의 형성과 성장 과정은 '황금광 시대'로 비치겠지만, 또 어떤 자들에게는 '악마의 맷돌'로 경험될 것이다.


▲ <강남몽>(황석영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강남몽>은 상대적으로 '황금광 시대'의 열정으로 충만해 있는 인물군상에 포커스를 집중하고 있다. 1장의 주인공인 박선녀는 "인맥과 금맥은 물처럼 바뀌는 것"이라는 세속적 성공 신화를 룸살롱과 나이트클럽과 같은 밤 문화의 교차로에서 체득하며, 부와 권력을 잔뜩 쥐고 있는 남성들 사이를 오가면서 복부인으로 승승장구한다. 2장의 주인공인 김진은 일제 말기 관동군 밀정으로 출발하여 해방 후에는 미군의 정보 요원으로, 이후에는 건설 업체 회장으로 변신을 거듭하는데, '권력의 교차로'에서 인맥과 비자금으로 정보의 흐름을 장악함으로써 기업가로서의 성공 신화를 창출하는 인물이다.

3장의 주인공인 심남수는 어떠한가. 박기섭과의 우연한 만남 끝에 기획 부동산업에 뛰어드는 인물인데 "길 가는 데 땅이 있고 땅은 돈이 된다"는 박기섭의 신념을 확대 재생산하는 인물이다. 공무원 및 관료들과의 유착과 로비를 통해서 강남 개발 계획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헐값에 원주민의 토지를 매입, 이를 '떼기' 등의 방식으로 호가를 높인 후에 되파는 방식으로 부동산 투기 및 거액의 매매 이익을 취득한다. 이러한 사업 수완 때문에 청와대의 정치 비자금을 형성하는 매개자 노릇도 하게 된다.

4장의 주인공인 홍양태나 강은촌과 같은 조폭들 역시 강남에 건설되는 호텔을 근간으로 한 유흥업소의 각종 이권을 독점하기 위한 기업형 조폭의 욕망을 실현해나가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윤무혁과 같은 중앙정보부 요원을 매개로 정치 폭력의 수행을 통해 일시적으로 밤의 대통령으로 성공 신화를 이루는 듯하지만, 결국엔 비정한 정치의 희생양이 되는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황금광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환기시키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5장에서의 임정아와 그 주변 인물이다. 이들은 1970년대의 평범한 민중들이 그렇듯 이촌향도의 대열을 따라 희망을 품고 상경하지만, '광주 대단지 사건'과 같은 도시 빈민의 헐벗은 삶의 질서 속에서 거듭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가여울 정도의 순정한 인간애와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지만, 희망의 실현은 멀고 아득하다.

<강남몽>의 시작과 끝은 실제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수미상관의 구조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 소설에서 제시되는 시간적 배경은 일제 말기에서 시작되어 1995년까지의 한국현대사의 거의 전시간대를 포괄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쉴 새 없이 스쳐간다. 일제 말기와 해방, 10월 항쟁과 제주 4·3 항쟁, 김구 암살, 4·19 혁명과 5.16 쿠데타, 광주 대단지 사건, 박정희 암살과 신군부의 대두 등의 사건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이 소설 속에서, 인과적 연계를 갖고 나타나지 않고 다만 등장인물의 가열한 욕망의 부침을 보조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기제로서 활용된다. 작가가 가장 공들여 묘사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김진, 김창수, 이희철과 같은 일제 당시 일본군이나 경찰에서 친일 인사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 변신을 거듭해 기업가나 권력의 실세로 등장하여 권력과 자본의 합종연횡을 연출하고 있는 인물이다(주인공도 아니면서 이례적으로 장황하게 박정희를 강직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자못 기묘해 보인다). 중반부를 넘어갈수록 윤무혁과 같은 중앙정보원 및 국가정보원 인사가 자주 등장하여, 권력과 자본의 치밀한 관리 및 이권거래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강남몽>은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이야기의 매력이 있다. 물론 이는 황석영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역량 탓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권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에 대한 묘사나 성공과 몰락에 대한 드라마틱한 압축적 구성이 일종의 영웅 신화의 구조, 더 정확히 말하면 소영웅들의 인생 극장 식으로 병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갓 헛꿈에 불과할지라도 가히 '황금광 시대'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의, 강남을 매개로 한 성공에 대한 가열한 열망과 절망은 시종일관 치밀한 책략을 통해 가동되고 있는데, 그것이 대중 독서의 차원에서 무협지와 같은 강렬한 흡인력을 끌어내는 것은 분명하다. 권모술수의 현실주의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독자들이 오늘의 강남을 형성시킨 한국적 압축 성장에 대한 입체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이해에 도달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반대로 대중적 차원에서는 결국 한국에서의 부와 권력, 그리고 폭력의 신성동맹이란 그저 힘 있는 세력들 간의 이해관계의 간통이나 유착에 불과한 것이고, 힘없는 대다수 서민들이란 소설의 끝에서 발가벗겨져 구조되는 임정아처럼 그저 언젠간 나아지겠지 하는 선량하지만 결국 막연한 희망으로 살아갈 뿐 아닌가라는, 별다른 의식의 충격 없는 일상적 냉소주의의 확인이나 감정의 휘발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등장인물의 인생의 부침이 대개 '우연'에 의해 출발한다는 것 역시 좋은 소설적 설정은 아니다. 소설의 묘사를 따르면 "쭉쭉빵빵 꽃"핀 몸매밖에는 없었던 여상 출신 박선녀는 우연히 모델로 발탁되고 또 새끼마담이 되고, 또 김진을 만나고, 또 심남수를 만나 부동산 투기에 눈뜬다. 김진은 어떠한가. 유년시절 우연한 계기로 김창수를 만나 밀정이 되고 특무기관에 차출되더니, 해방이 되어서는 서울 거리에서 다시 우연히 이희철을 만나 미군 특무기관원이 된 후 승승장구한다. 심남수는 또 어떤가. 군대 제대 후 취직 시험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군대 시절의 동료를 만나 만취해 통행 금지를 어겨 유치장에 갇히는데, 거기서 부동산 업자 박기섭과 "운명적으로" 만나 인생역전이 시작된다. 기자를 꿈꾸던 청년의 변신치고는 너무 돌연하다.

작가 역시 이러한 소설 구조상의 문제를 알고 있는 때문인지 '몽자류 소설' 등의 전통소설 양식을 거론하며 "서서히 몰락해가는 상류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현실 세계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를 드러낸다"는 시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강남몽>에 등장하는 가령 김진 류의 권력 해바라기형 인물은 현실 속에서 결코 몰락하지 않았다. 반대로 1997년 이후의 '거대한 전환'을 겪으면서 오히려 집단적으로 몰락하고 있는 사람들은 임정아와 같은 '하류가족'이라는 명백한 사실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강남 형성기에 단단히 한몫을 챙겼던 김진 류의 세력들이야말로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 이후에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강남 형성기를 일종의 성공 신화로, 황금광 시대로, 불패 신화로 생각하고 있는 편에서야 그것을 '강남몽'으로 인식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독자에게 그것은 이제는 도착의 형태로 굳어진 '헛꿈'이다. 소설 <강남몽>은 이런 '헛꿈'에 고통 받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는, 도착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진실로 그것을 물신의 꿈 혹은 유토피아의 실현으로 생각했던 뒤틀린 인간들의 사회생태학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옛 표현을 떠올리면, 부르주아적 리얼리즘의 고착화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 소설에는 진실로 '강남'의 너머에서, 오늘의 한국인이 꾸어야 될 '진짜 꿈'의 비전과 설계도가 생략되어 있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대중들로 하여금 '헛꿈'을 꾸게 만드는 현실의 세목은 부지기수로 널려 있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선망과 공포의 복합 감정으로 대중들의 내면은 구조화되어 있다.

작가를 포함하여 어떤 독자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벌거벗겨져 생환되는 임정아의 모습에서 희망이나 감동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나는 그녀에게서 무방비의 상태로 세계의 거대한 폭력에 가감 없이 노출된 이 시대의 선량한 호모 사케르가 자꾸 연상되어 착잡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졌지만, 그 사건 이후 자본의 욕망은 오히려 더 팽팽해져졌다. 그래서 나는 <강남몽>을 '지지할 수 없는 문제작'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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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 시(視)는 흡착성이 뛰어나서 제 앞에 다른 말과 붙어서 잘 쓰인다. 합성어를 쭉 훑어보면 시가 중·앙과 어울려 존중의 맥락으로 쓰이는 단어보다 경·냉·멸·천과 어울려 비하의 맥락으로 쓰이는 단어가 훨씬 많다. 우리가 서로 인정하며 살기기보다는 인정받지 못해서 고통 받으면 살아온 역사를 어휘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오죽했으면 후자를 아우르는 무시(無視)는 있지만 전자를 아우르는 유시(有視)는 없다. 무시라는 말은 우리가 잘 쓰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뜻이 심각하다. 뻔히 사람을 앞에 두고도 못 본척하거나 엄연히 일을 했는데도 깔아뭉갤 정도로 존재를 무존재로, 또는 건강한 사람을 병든 사람으로 만드는 인격 살인의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맹자는 동양 철학도 개념적 사유가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훗날 널리 쓰인 철학 개념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들어본 인의, 성선, 사단, 양지, 민본, 왕도와 패도 등을 동양 철학의 대표적인 개념으로 알고 있지만 이들 모두 맹자가 조금 손보아서 내놓았거나 새롭게 만든 것이다.

이 말은 맹자의 것이라기보다 동양 철학의 것으로 더 알려져 있다. 또 '공자왈 맹자왈'이라고 해서 맹자를 공자와 같은 등급으로 쳐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 뜻이 영 아니다. 이 말은 책상물림의 공리공담을 가리키니 시대의 아픔을 누구보다 아파했던 맹자가 들으면 기절초풍하고도 남을 일이다.


▲ <맹자 :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장현근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왜 이렇게 서두를 시작할까? 맹자도 '우리'처럼 철학사와 한국의 인문학 풍토에서 무시에 가까운 대접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약간 다혈질에다 언변이 뛰어났던 맹자가 살았더라면 제 스스로 인정 투쟁이라도 했겠지만 죽었으니 다른 사람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근래에 나온 장현근의 <맹자 :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한길사 펴냄)는 맹자의 그런 억울함을 풀어줄 만한 책으로 볼 만하다.

이 책의 얼개를 간략하게 더듬어보자. 먼저 맹자의 삶과 시대를 전식으로 내놓는다. 이어서 10가지 반찬을 만들어서 각각을 요령 있게 풀이하고 있다. 예컨대 공자의 사상을 인의로 압축하고서 그것을 힘의 정치를 반대하다로 여기고, 당시 사상계를 휩쓸던 개인주의자 양주와 국가공리주의자 묵적의 주장을, 맹자의 말을 빌어서 군주를 인정하지 않고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짐승으로 안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후식으로 맹자의 후예들이 맹자를 높이 받들었던 이야기와 참고할 만한 자료를 내놓고 있다.

지은이는 왜 이처럼 풍성한 맹자 밥상을 차리려고 했을까? 서너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맹자> 원문을 통해 맹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살펴보고, 맹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유가 사상의 원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통 시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추구한 왕도의 진수를 이해하려고 한다. 아울러 현대 정치의 병폐에 대응한 유용한 방안과 대안의 단서를 제공하려고 한다.

책의 구성을 보면 먼저 배경 설명을 하고 다음으로 원문 번역을 제시하고서 마지막으로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책에서는 지은이보다는 맹자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그 결과 맹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겠다는 전략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령 없이 <맹자>를 끝까지 읽겠다며 첫 장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실패한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읽기 전략은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과 번역 그리고 해설로 이어지는 10가지의 반찬을 쭉 훑어 내린다면 유가 사상의 원리라든지 왕도의 진수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지은이가 해설과 이해를 방점을 둔 탓에 10가지 반찬을 어떻게 골라먹고 떠먹는지에 대한 안내가 약하다. 이 원인으로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10가지 반찬의 논리적 연관성이랄까 유기적 상호관계랄까 이에 대한 배려가 약하다. 반찬이 다 좋은 줄은 알겠지만 그것이 우리 몸에 들어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해설을 넘어선 지도의 제시가 있었으면 좋은데 없다.

예컨대 맹자의 사상을 첫째 규범의 근원과 근거, 둘째 인간의 자각과 지각, 셋째 개인적 노력과 넷째 사회적 실천으로 나누어보자. 첫째는 천명·인의·성선이, 둘째는 사단·양심, 셋째가 양기·지언·군자, 넷째가 의전·왕도·권도 등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구분을 따른다면 사람은 도덕적 인간이 되어서 도덕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천명과 동일선상에 있는 성선으로서 인의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식에 현전하는 사단(도덕의 싹)과 양심을 자각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같은 사람도 때에 따라 다르므로 기(氣)를 기르고 말의 의미를 구분하는 등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의 결실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도록 하기 위해서 정의로운 전쟁을 사양하지 않고 상황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왕도를 현실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개념적 지도를 그리게 되면 맹자의 사상은 입구와 출구가 다 갖추어지지 않을까 싶다.

다음으로 현대 정치의 병폐에 대안 제시는 만족스럽지 않다. 이 부분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예컨대 힘의 정치를 반대하는 인의를 보자. 지은이는 <맹자>가 각각 인의와 이익을 대변하는 맹자와 양혜왕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에 주목을 하고 있다. 아울러 맹자는 모든 것에 이익을 앞세운 정치가 파멸적인 경쟁으로 치닫는 것을 힘주어 경고하고 있다. 여기까지 읽으면 우리는 맹자와 양혜왕을, 현실의 인물과 현안으로 대입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의료보험 민영화, 4대강, 자유무역협정, 해외 파병 등을 떠올 수 있다. 맹자의 과거와 우리의 오늘날을 한 줄로 꿰매는 생각 보따리를 떠올리는 것은 철저하게 읽는 사람의 몫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은이가 책으로서 <맹자>나 인물로서 맹자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두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객관적 거리는 나와 맹자를 나누어보려는 인식의 준비 자세이다. 준비 동작을 하지 않으면 나는 맹자와 자꾸 닮아져서 하나가 되는 것을 과제로 설정하게 되지 맹자의 장단점을 나누어서 보려는 시도를 하기 어렵게 된다. 그 결과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이 놓지 않은 실수를 하지 않았나싶다. 이런 주문이 이해와 해석에 목적을 설정한 지은이에게 엉뚱하게 해석과 비판을 하지 않았느냐고 트집으로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비판적 책 읽기를 위해서 사족을 하나둘 그려보고자 한다. 하나는 들어가는 말의 제목을 성인이 아닌 맹자를 만나자라고 해놓고 그곳과 후식에 해당되는 부분에서 전통적인 평가를 받아들여 맹자를 버금 성인(아성)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모순으로 보인다. 그리고 너무 맹자를 인간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런지 성인으로서 맹자 이미지를 너무 급하게 지우려고 하고 있다.

지은이가 동양 사상의 성인이 초월적인 존재로 보면 서양의 신과 비슷하지만 현실의 삶 속에서 탁월한 성취로 보면 신과 다르다고 본다. 차라리 성인을 신과 대비시키기보다는 동양 사상에서 맹자 이래로 누차 강조해온 성인과 범인(보통 사람)의 소통성에 주목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이익을 넘어서 인의의 길로 들어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 맹자이기도 하지만 성인 맹자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기성을 유보하고 호혜성 나아가 공동선을 말하고 그곳에 나아가려면 이해에 갇힌 자연인을 부분적으로나마 넘어서는 것이고 그것이 양혜왕을 질타하는 맹자의 목소리에 가까우리라 생각된다.

다음으로 지은이는 인간 맹자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제자백가만이 아니라 명청 시대 사상가 심지어 현대 연구자의 성과를 끌어들이기도 있다. 아쉽게도 현대 연구자는 국적을 나누기는 좀 뭣하지만 본인을 제외하고서는 대만 출신 연구자에 집중되어있다. 꼭 연구의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각을 위해서도 백민정의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이혜경의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 등 <맹자> 연구 단행본 정도는 비평이 아니면 소개라도 해주었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무시 받았던 맹자의 누명을 해원해주었다면 오늘날 고군부투한 동업자의 신원 운동도 그에 못지않게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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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그 중의 한 명이지만, 교육 문제를 다루는 글들은 대개 통탄과 비분강개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통탄은 경우에 따라 적실한 감동이 있기도 할 것이고, 그래서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겠지만, 대개는 마음 아픈 사람 마음 한 번 더 아프게 하고 표표히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한국 교육을 칭찬하는 사람은 버락 오바마 한 사람 뿐인 것 같고, 좌파건 우파건, 교사건 학생이건 학부모건 어느 누구도 지금처럼 놔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참으로 기묘한 것은 누구나 저주를 퍼붓는 이 극악한 체제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탄탄하다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화할 조짐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프랑켄슈타인이 된 아이들


▲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김종휘 지음, 양철북 펴냄). ⓒ양철북
이런 와중에서 만난 김종휘의 책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양철북 펴냄)를 꽤 반갑게 읽었다. 김종휘는 문화평론가이면서 서울시 대안교육센터인 '하자 작업장'에서 오랫동안 10대들과 부대끼며 '노리단'이라는 한국 최초의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을 일구어낸 경험을 바탕으로 청년들의 사회 경제적 삶에 대한 대안을 논하고 있다.

김종휘가 바라보는 오늘날 청년들의 현실은 '불효자는 놉니다'는 말 하나로 집약될 것 같다. '건국 이래 가장 높은 학력을 가졌지만, 건국 이래 가장 일상화된 불안에 사로잡혀, 건국 이래 가장 많이 놀고 있는' 바로 그 청년들 말이다. 이렇게 살아봤자 청년들은 '좀비'가 될 뿐이다.

그래서 김종휘는 외친다. "이제야말로 청년들이 손을 잡고 제대로 한판 놀아봄으로써 인생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이다. 동감한다. 죽음의 트라이앵글(수능-내신-논술)을 돌파해서 대학을 가 봤자 스펙 5종 세트(학벌-학점-토익-연수-자격증)가 기다리고, 그 정글을 헤쳐 대학을 졸업해봤자 기다리는 것은 청년 실업이거나, (맥도날드 점원처럼 규격화되고 기계적인 단순 노동으로 채워지는) '맥잡'뿐이니깐. 그래도 공교육 학교 선생 노릇하며 근 10년간 한숨만 쉬면서 살아온 나 같은 인간에 비하면 김종휘는 꽤 자신만만하다. 그는 확실히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본 것 같다.

김종휘는 우선 아이들의 '정보적 신체'에 주목한다. 예컨대, 물건이 고장 나면, 농경 사회의 신체를 가진 이들은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았고, 산업 사회의 신체를 가진 이들은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지만, 정보적 신체를 가진 오늘날 청년들은 개인 미디어를 통해 연결된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비슷한 문제를 겪어본 타인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2004년 당시 어느 포털 사이트에 개설된 280만 개의 카페 중에 10대가 개설하였거나 운영자인 카페가 100만 개를 넘었다고 한다. 하긴, 아이들이 아이폰을 쓰는 모습을 옆에서 볼라치면 참 놀랍기 그지없다. 물론 나는 이런 식의 '정보화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과 찬탄과 바탕을 둔 이러저러한 규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지만, 어쨌든 이런 아이들을 30년, 40년 전과 똑같은 교실에 가둬놓고 정석 문제나 풀게 하고, 야간 자율 학습 빠졌다고, 머리 안 깎는다고 야단치고 속박하는 것은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종휘는 오늘날 아이들이 '프랑켄슈타인' 같다고 말한다. 부모 자신이 가진 온갖 욕망의 조각을 아이에게 덕지덕지 갖다 붙여 조잡하게 꿰매어 놓으니 그야말로 프랑켄슈타인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에게 '미래의 주인공'이라고, '누가 뭐라든 너를 응원한다'고, '네 맘대로 할 자유를 주겠다'고 속삭인다.

물론 이 모든 속삭임은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고. 이러니 아이들은 스스로 감각의 문을 닫고 어른들의 물음에는 '몰라요, 그냥요, 싫어요'라는 한 단어짜리 답변만 주억거리고는 자신들만의 세계로 숨고 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경험을 돌려주라

김종휘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경험 세계'가 아이들의 성장 코스에서 깨끗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자기 힘으로 직접 크고 작은 일상사를 진행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촛불을 들고 세상 앞으로 나올 만큼 성숙한 판단력을 갖고 있으나, 늘 관리당해 왔고, 거기에 복종하고 자발적으로 순종해온 기억이 압도적이었을 뿐 '날 것 그대로의 세계'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안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어 외부의 작은 충격으로도 인생이 유리잔처럼 금이 가고 깨져버'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종휘는 이 책 곳곳에서 아이에게 '경험을 돌려주라'고 수없이 외친다.

십대들을 정답과 모범으로 짜여 있는 교실에만 있게 하지 말고 우연한 일들의 연속인 현실에서 직접 문제들과 만나게 하고, 그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주라. 그러면 십대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며 살아있는 이야기를 만들게 될 것이다. (60쪽)

그는 이 책에서 아이들이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수많은 실험을 들려준다. 그 자신이 기획하고 참여한 노리단의 예가 있다. 다섯 명의 30대 공연 전문가와 다섯 명의 10대가 만나 시작한 놀이패 '노리단'에서 10대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성장하여 지금 20대의 공연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노리단은 공연, 조형, 교육, 미디어 분야에서 무려 66명이 함께 일하는 유망한 청년 사회적 기업이 되어 있다.

3년 동안 오직 여행을 통해 직접 다리품을 팔아 세상을 만나고, 그 속에서 가슴 뻐근한 만남과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을 키워나가는 여행 학교 '로드 스콜라', 20대 지적 장애 청년을 가장 잘 웃고 인사성 밝은 요리사로 키워내는 사회적 기업 '오르가니제이션 요리' 이야기, 그리고 이 실험의 모델이 된 영국의 세계적인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사 양성 프로젝트 '피프틴 레스토랑', 그리고 소년원에 가게 될 소년 범죄자 두 사람을 소년원 대신 한 명의 지혜로운 노인 봉사자와 짝을 지어 2000킬로미터를 함께 걷게 함으로써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시켜내는 프랑스 '쇠이유 협회'의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다.

이런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김종휘는 무척 신이 나는 것 같고, 실제로 이런 대목들이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가장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는다. 이들을 통해 김종휘가 주장하는 핵심은 '집 나가서 개고생을 해야 사람이 된다'는 믿음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동기는, 다른 존재를 진정으로 만나 겪어보지 못한 세계를 접했을 때, 그 순간의 충격과 감정의 동료로써 빚어지는 법이다. 나와 다른 그와 몸으로 부대끼면서 같이 몸고생을 해 보는 경험이다. 여기서의 몸고생을 노동이라는 말로 달리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144쪽)

지적하고 싶은 몇 대목

이 책은 오늘날 지옥같은 교육 현실에 고통받는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몇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김종휘는 이 책에서 여러 번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직접 '사회 경제적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는데, 나는 이런 발상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건 결국 '돈' 얘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직접 사회 경제적 활동을 하면서 돈을 버는 체험을 통한 자립과 성취감만큼이나 고려되어야 할 것은 '돈'의 압도적인 장악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종휘는 놀고, 일하면서 직접 돈을 벌어 자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놀고, 일하며, 자립하는 모든 원체험을 근원적으로 구속하는 힘을 가진 것이 또한 '돈'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또 하나, 김종휘는 이 책에서 청년의 '비물질, 초월적인 욕구'에 바탕을 둔 대안을 역설하고 있다. 물론 '잘 노는 것'이 오늘날 교육 현실에서 가지는 전복적인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중요한 것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삶'의 기초이다. 예컨대, 오늘날 청년 세대가 10년 뒤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닥칠 가장 큰 장벽은 단연코 식량 문제와 연동되는 농업 문제, 그리고 에너지 문제 따위가 될 것이다.

노리단의 공연이 없어도 우리는 살 수 있지만, 밥과 된장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오르가니제이션 요리'에서 양성된 멋진 요리사가 있어도, 먹을거리가 없으면 요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물질적 삶의 기초, 농업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 교육 담론이란 결국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전복적인 문화 담론으로서 부분적인 의의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청년에게 힘껏 노는 것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농사짓고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배움인 것이다.

물론 김종휘가 이런 대안까지 모두 제출해야할 의무는 없다. 다만, 나는 그가 오늘날 청년 세대의 예민하고 분방한 청년 에너지를 '스티브 잡스와 마더 테레사가 결합된 창의적인 사회적 기업가 정신'으로 이끌고 싶어 하는 기색을 이 책 여러 대목에서 드러내 보이는 것에 대한 우려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대단히 흥미롭게 읽었다. 그의 사유와 경험들이 더 넓고 깊은 곳으로 향하면서 생각하면 정말 눈물 날 것 같은 암담한 청년들의 삶에 청신한 한줄기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많은 분야가 또한 그러하지만, 교육 문제에서는, 그리고 오늘날 청년들의 삶의 영역에서는 그야말로 '혁명'이 필요하다. 그의 책을 읽으며 '놀면서' 이루어질 혁명을 잠시나마 꿈꾸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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