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천안함 사태와 관련하여 석연치 않은 해명과 이에 대한 의심, 그리고 의심에 대한 비난이라는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는 주장과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믿느냐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과연 어떤 주장이 옳을까? 의심은 건전한 인관관계를 해치고 불신으로 가득 찬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악덕인가? 아니면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게 해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미덕인가? 믿음과 의심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가? 아니면 상호보완적이고 건설적인 작용을 하는가?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루터파 신학자인 피터 버거와 네덜란드의 사회학자·철학자인 안톤 지더벨트의 책, <의심에 대한 옹호 : 갈피 없는 현대를 살아가기 위한 사회·철학적 의심의 기술>(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은 종교 철학에서 출발해 윤리학을 거쳐 사회·정치 철학으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지적 여행을 하면서도 의심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독자들의 일상적 경험과 문제들의 끈을 놓지 않는 길잡이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오랫동안 현대 사회의 특징들을 종교학·철학·사회학의 입장에서 연구해온 저자들은 의심과 믿음, 상대주의와 근본주의라는 얼핏 보거나 논리적으로 따져도 반대되는 두 개념들이 실제로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하면서 이들은 서로가 대립되어있으면서도 서로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며 단계적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각 장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의심에 대한 옹호>(피터 버거·안톤 지더벨트 지음, 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 ⓒ산책자
제1장 '근대성의 여러 신들'은 근대의 신앙과 신학이 가지는 특징에서 출발한다. 근대에 일어난 종교의 세속화와 다원성이 상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 개인이 직접 자신의 종교를 쇼핑하는 미국과 같은 다원적 사회를 지적하면서 종교가 더 이상 사회적 전통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관용이라는 근대의 미덕이 역설적으로 상대주의의 철학적 기반 위에 위험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제2장 '상대화의 동학'에서는 근대적 현상인 상대주의의 명암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상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관용의 정신을 고양시키기도 하지만 공통의 잣대가 없기 때문에 판단을 유보하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대성의 부담'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에 현대인들에게 강요되는 수많은 선택은 일종의 저주로 인식되고,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합리와 광신에 스스로 몸을 맡기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모든 상대주의에는 절대의 재래를 기다리는 광신이 있으며, 모든 광신에는 모든 절대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는 상대주의가 있다."는 표현처럼, 이러한 심리적 기제로부터 에리히 프롬이 일찍이 말했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일어나는 것이다. 억압은 자유를 원하게 하지만 자유는 다시 억압을 갈망하게 만든다. 이는 민주화된 이후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고 과거 독재의 유령에 스스로의 영혼을 파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제3장 '상대주의'에서는 상대화라는 객관적 현실과는 달리 종교적·도덕적·정치적 입장으로서의 상대주의를 설명하고 있다. 극단적 상대주의는 필연적으로 모든 가치를 허용하고 따라서 무정부주의적 상황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이는 니힐리즘이고 데카당스로 귀결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라는 말 자체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상대주의의 역설에서 벗어나려는 상대주의자의 전략을 엘리트의 진리 독점으로 설명한다. 광신도나 공산주의자들 모두 이와 같은 전략을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4장 '근본주의'에서는 상대주의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근본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전통을 당연시하는 전통주의와는 달리, 20세기 초 개신교에서 발원한 종교적 근본주의는 자신이 생각하는 당연함이 흔들릴 때 출현해서 그 당연함을 회복하려고 의도적으로 시도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근대성이 가지는 상대화의 역학을 포용하지만 근본주의는 이를 배척한다고 하면서 이 둘의 관계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고 있다. 근본주의는 재정복 모델과 하위문화 모델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구성원들에게 정체성을 강요하지만 전자는 실현 불가능하고 후자는 하위문화를 형성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5장 '확실성과 의심'에서 저자들은 진리와 광기, 확실성과 의심은 상호작용을 하고 연쇄적으로 변증법적 발전 과정을 거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데카르트-베이컨-칼 포퍼의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심의 긍정적인 힘을 비판적 사고의 전통이라고 말한다.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는 다른 모든 것들은 의심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의심하지 않는 점에서 일관성 있고 진지한 의심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끊임없는 반증에도 살아남은 것을 잠정적으로 진리로 여기는 태도야 말로 확실성과 의심의 변증법을 거친 중용의 길인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중도적 입장의 선결 조건을 다음 일곱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자기 입장의 핵심 부분과 좀 더 부수적인 부분 사이의 구별, 2) 현대 역사학 방법론을 자신의 전통에 개방적으로 적용하는 일, 3) 근본주의의 거부와 짝을 이루는 상대주의의 거부, 4) 특정한 신념의 공동체에서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의심을 수용, 5) '타자'를 '우리와 같은 세계관을 갖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하며 '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6) 평화로운 논쟁과 갈등 해소를 가능하게 하는 시민사회의 제도들을 개발하고 유지하는 일, 7) 경험적 사실만이 아닌 도덕적 가치의 문제에서 선택을 수용하는 자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제6장 '의심의 한계'에서 저자들은 의심의 도덕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검토한다. 의심은 위험하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문화적 요새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헌법적 보호막이 있어야 건전한 의심이 보장될 수 있기에 의심의 행진은 자유와 인권의 발 앞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제7장 '중용의 정치'는 저자들의 중심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다. 의심과 확실성, 상대주의와 근본주의 간의 중용이라는 핵심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광신자들은 유머를 확실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유머가 없지만, 유연한 의심과 사고를 가진 사람은 유머가 넘친다는 사실을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도자 헬렌 수즈먼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공식화한 민주주의의 삼각형에서 국가, 시장경제, 시민사회의 꼭짓점을 기준으로 좌파는 국가에로, 우파는 시장에로 경도된다고 말한다. 이 세 꼭짓점으로 지나치게 기우는 것은 각각 시장만능주의, 전체주의, 전통사회로의 복귀로 귀결된다. 모든 문화가 도덕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다문화주의와 같은 정치적 상대주의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종교를 벽장 속에 가두려는 근대의 기획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사실 과학은 종교를 산 속으로 보내고 스스로 종교화되는 이중성을 보여 왔다. 이는 종교는 종교이고 정치는 정치일 뿐이라는 일부 종교인과 정치인들의 주장이 얼마나 자기 기만적인가를 깨닫게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종교의 무신론화와 무신론의 종교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신념인 이상 무신론도 하나의 종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적 불확실성과 도덕적 확실성이 어떻게 양립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해답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을 거울로 북한이 얼마나 종교적인 사회인가 확인할 수 있으며, 피라미드 상조직이 가지는 종교적 색깔의 의미와 효율성(?)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정치와 비즈니스에도 종교적 성향은 중요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종교 철학의 영역을 인식론, 사회·정치 철학에 확대했을 뿐 아니라 종교, 사회, 정치,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근대정신에 대한 총체적 분석서이다. 근대 이후 이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고 어떻게 유사한 기제에 의해 움직여왔는가에 대한 문화비평적 성격도 띠고 있다.

특히 상대주의와 근본주의가 자유와 억압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끊임없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역사를 진행시켜왔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 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라는 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들의 결론은 의심과 확신 사이의 중용이지만,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의심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건전한 의심의 힘은 비판적 사고 능력과 성향으로 통하는 것이다. 강요된 믿음이나 무의식적으로 세뇌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아주 가까이 우리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충분한 토론과 협상의 과정 없이 무조건적인 다수결만을 외치는 의회는 비판적 사고와 의심의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권력의 거수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부각되고 있는 심의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저자들은 결론에서 맹목적 상대주의와 극단적 근본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중용을 취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 중용의 길을 찾고 유지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한다. 중용이라는 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 책에서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지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그나마 저자들이 제 5장에서 제시한 중도적 입장의 일곱 가지 선결 조건들이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추상적 수준의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번역은 깔끔하고 읽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용어 표현에 있어 '오염' 대신 '전염', '허무화' 대신 '무력화', '변증' 대신 '변증론'이 더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광신도들은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신은 완전하니까 신을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완전한 신을 믿을지라도 우리의 믿음 자체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완전한 신에 대한 불완전하거나 잘못된 믿음이 존재하고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이 우리의 불완전함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결함에 대해 스스로 눈멀게 할 뿐이다. 우리는 언제든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물론 동시에 그 오류를 수정하고 진리로 조금씩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건전한 '의심'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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