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
션판 지음, 이상원 옮김 / 황소자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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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에 관심을 갖게 되니 중국책이 땡겼다.  

모든 것은 관심에서 출발하는가 . 관심을 가지니 그냥 중국에 관한 

모든 것이 흥미롭다. ^^

 

불과 얼마전 까지만 해도 중화티비 후져서 못보겠다였는데 요즘은 

중화티비가 제일 유익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ㅋㅋ

같은 드라마의 재방송을 여러번 하니 그 조차도 복습의 효과가 있어서 좋다. 

 

수년전 앞부분 수십쪽 읽다가 덮어두었었는데 

지난 주말 한달음에 읽고는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그동안 묵혔다니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사실. 흥미니, 재미로 표현했지만 '문화 대혁명'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쉽게 꺼내지 못할 상처가 아닐까 싶다. 10여년 동안 그 이상한 혁명이 

휩쓸고 지나갔으니... 인구는 좀 많나.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내상을 생각하면 

마오아저씨도 미래의 어느날, 부관참시(으쓰쓰) 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몰라.  

 

소비에트와 달리 경제가 성공했으니 그럴일은 없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렀던 그 이상한 운동은 훗날 국가의 이름으로 사죄해야 하지 않을까. 

책의 저자는 천신만고 끝 자유를 얻었지만 양심의 자유를 유린당하고,  

또, 스스로 양심을 기만하면서 오로지 살기 위해 혁명사상에 동참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잃어버린 청춘과 삶은, 누가 돌려주나...ㅉ 

 ....

12살부터 서른무렵까지의 한 중국 수재의 성장소설로 읽어도  좋다.  

풋풋한 소년의 절재된 사랑의 감정이, 아름답다. ^^  

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중국 관리들의 부패 ,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고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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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범의 파워 클래식 1 -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신 클래식 강의
조윤범 지음 / 살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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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범. 그를 떠올리자면, 참여정부 초로 기억되는데, 모 방송에서 <학력인가? 학벌인가?>라는 주제로 다수의 출연자와 방청객이 어우러진 대 토론회가 생각난다. 그때 토론의 결론은 압도적으로, 아무리 학력(실력)이 있어도 대학(학벌)은 졸업해야 되는 것으로 났었다.

고졸 출신의 어느 잘생긴 대기업 다니는 남성은 자신이 그 기업에 입사하기까지의 성공담을 술술 매끈하게 얘기했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대학은...’ ‘저렇게 실력과 당당함이 있으니 더더욱 학벌 한줄 넣어주면 금상첨화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토론을 보면서 대학을 가지 않고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쪽의 의견이 형편없이 힘을 잃는 것이 안타까워 토론을 보는 내내 맥이 탁 풀렸었다. 당시 대부분의 젊은 층들이 ‘그래도 대학은...’이라고 말할 때 나이든 축의 참가자들이 ‘살아 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라 실로 중요한 것은 이러이러한 것....’하면서 여타의 길을 제시해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튼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던 그때 긴 생머리를 도사처럼 뒤통수에 묶은 록 음악가처럼 보이는 청년이 대학 안가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며 ‘열변’을 토했다. 자신은 대학에서 이것저것 배우며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오로지 (바이올린) 연습에만 매진하기 위하여 대학을 거부 한다고 하였었다.

에끼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록음악이나 문학 등 여타 그와 비슷한 거라면 몰라도 클래식 기악을 스승 없이 배운다는 것이 가능한가,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전 음악계가 학벌타령이 좀 심한가. 그 같은 동네에서 밥 벌어 먹고 살자면 아니꼽고 치사해서라도 대학간판 한줄 쯤이야 그냥 넣어주고 말지 웬 고집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는 인상적이었다. 교육부 장관이 해야 될 말을 그가 하고 있었다.

그 후 몇 년 세월이 흘러, 예당TV에서 <조윤범의 파워 클래식>을 보게 되었다. 아, 저 말총머리! 그는 무대전면을 뚜벅뚜벅 왔다 갔다 하며 예의 몇 년 전 토론회 때처럼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금방 호기심이 일게 그는 설명을 참 재미있게 하고 있었다.

나는 몇 년 전의 ‘회의’를 버리고 그 당당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좋다. 주류에 똥침을 날리고 스스로 길을 개척해 깃대를 꽂고 새로움을 선사해주는 이런 사람들이 좋다.

<조윤범의 파워 클래식>(살림)은 조윤범식으로 전하는 서양음악이야기다. 바로크 시대부터 현대음악에 이르기 까지 그 특유의 화법으로 음악가들의 풍부한 일화들을 양념으로 썩어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음악 애호가들의 음악이야기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저자는 현재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현악 사중주단 <콰르텟 엑스>를 이끌고 있다. 그래서인지 현악사중주나, 피아노 오중주, 팔중주 등 현악중주에 대한 얘기들에서는 자신들의 연주와 연습 경험들을 소상히 들려준다. 이곡은 혹은 저곡은 연주자의 입장에서 막상 연주를 하거나 연습을 할 때 이런저런 점이 있다는 설명은, 현악기를 배우는 입장이라면 귀에 쏙 들어올 것 같다.

그저 음악은 아름답기만 하면 되고, 연주자들은 오랜 연습의 결과로 무슨 악보를 들이대도 그냥 저절로 손이 움직이는가 싶었는데 때론 더할 수 없는 ‘육체노동’이기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기야 유행가도 어려운 곡 하나 열창하고 나면 기운이 쪽 빠지는 데 쉼 없이 몇 십 분을 활을 당기고 밀고를 하자면 보통일이 아닐세.~

기교가 어려운 곡들은 연습할 때는 무지 힘들지만 연주하는 보람이 있는데 반해 청중도 좋아하고 연주하기도 쉬운 곡은 몸은 편한데 연주자의 흥은 그에 반하는가 보았다. 또, 듣는 이의 감동과 연주자의 감동이 일치하는 것만도 아닌가 보았다.

아, 윤이상.

특히 이 책에는 무엇보다 고 윤이상 선생에 대한 언급이 있어 좋았다. 끝내, 고국 땅을 다시 한 번 못 밟아보고 돌아가셨는데. 선생의 독일에서의 삶의 흔적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그는 살아생전에 4개의 오페라, 9개의 합창곡, 6개의 성악곡, 17개의 관현악곡, 5개의 교향곡, 10개의 협주곡, 9개의 실내 앙상블, 6개의 현악사중주곡 외에도 40여개의 실내악곡, 14개의 독주곡을 남겼다. -<본문 398쪽>

현대음악이라 하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한데 어쩐지 선생의 곡은 예외로 저절로 이해 될 것 같다. 광주의 아픔을 이야기한 관현악곡<광주여 영원하라>와 민주화 운동을 하다 스스로를 불태운 이들을 위한 교향시 <화염속의 천사>는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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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사춘기 - 명진 스님의 수행이야기
명진 스님 지음 / 이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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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무서운 세상. 민주주의의 시계가 계속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이 시절에, 그나마 명진 스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인가. 불의를 행하는 위정자에겐 거침없이 죽비를 내리치고, 하루아침에 공권력에 의해 삶의 터전과 핏줄을 잃고, 또, 감옥 보내고 우는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서는 스님도 그들과 함께 울었다.

눈물 닦는 사진과 동영상을 유독 많이 찍힌 스님을 보노라면 혹자는 속세를 떠난 구도자가 왜 저리 눈물이 많은가 오해 할 수도 있겠으나 알고 보면 스님의 눈물은 다 지극한 사랑이자 위로임에랴. 이 눈물 많은 스님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한권의 책을 세상에 내 놓았다.

<스님은 사춘기>(이솔). 덕분에 목적 없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삶속에서 잠시 쉼표를 찍고 스님이 던지는 삶의 의미, 존재에 대한 화두에 물음표하나 던지며 쉬어 갈수 있게 되었다. 스님은 어이하여 출가를 하였던가.

모든 스님, 신부, 수녀님들에겐 식상한 질문이겠으나 중생은 그것이 또 가장 궁금한 질문임에랴. 명진 스님은 6살 어린나이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만났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통해.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죽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죽음은 내가 삶을 투철하게 성찰하도록 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도 이른 나이에 죽음과 맞닥뜨렸다. 내가 처음 마주친 죽음의 대상은 불행하게도 어머니였다.>-본문 11쪽

뿐인가. 스님에게 죽음은 어머니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서로 의지했던 동생이 해군에 입대한지 불과 몇 달 만에 군함 전복사고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연이어 쉰이라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마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물 언저리 푸른 청춘에 피붙이 모두 떠나고 세상엔 스님 혼자만 달랑 남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화두를, 예기치 않은 시기라면 하나만 던져도 암흑이거늘 스님은 젊은 날에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 개 씩이나 받았다. 그러니까 익히 보이던 스님의 눈물은 수행의 미진함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중생의 아픔을 가슴으로 알기에 흐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구나. 흐르되 걸림은 없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허공이다? 스님의 변을 들어보자.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본래 허공과 같이 텅 비어서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다.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 한 물건을 마음이라고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어디 실체가 있는가.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슬픔이나 기쁨, 욕심이나 자비심 같은 모든 감정은 허공같이 텅 비어 있는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용이다....... 

냉철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서 내 마음이 허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 마음이 허공같이 텅 비어 공적한 것임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들이 하나의 작용일 뿐 실체가 없는 것임을 투철하게 깨달으면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 자유를 얻게 된다. 내 마음이 바로 허공인 그 자리는 능히 모든 것이 자유자재한 자리이다.>-본문 256쪽

노스님들은 명진 행자가 무서워~

스님의 걸음하면 법정스님의 빠르고 거침없는 걸음걸이가 생각나는데 명진 스님은 의외였다. 지난해 봉은사에서 뵌 스님의 걸음걸이는 평소 말씀이 거침없는 것에 비해 사뿐사뿐 한발 한발 새색시같이 내 딛으셨다. 그것이 참 인상적이어서 봉은사 신도인 친구에게 말했더니 절은 더 하다고 하였다.

“절은 또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시는 줄 아냐? 천천히 한배, 두 배... 시종여일하게 하신단다.”
“그렇게 해서 언제 하루에 천배를 다하신다니?”
“한 꺼 번이 아닌 아침 점심 저녁 중간 중간 나누어서 하시는 거지.”

아무튼 스님의 걸음걸이와 절하는 모습으로 유추해 볼 때는 스님의 행자생활도 지극히 새색시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했는데 웬걸. 스님은 행자세계의 문제아였다.(웃음) 스님의 파란만장한 수행담은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다른 스님들은 스스로 점잖아서도 못하고 무서워서도 못하는 질문을 명진 스님은 노스님들에게 거침없이 해댔다. 해인사 백련암 행자시절엔 일본어 배우라는 성철 스님의 말에 교학보다는 참선에 관심이 많던 스님은 일본어를 배워야 할 이유를 납득 못하였기에, 그냥 말도 없이 내뺐다.

‘남쪽에는 성철, 북쪽에는 전강’하던 그 시절에 성철 스님 눈에 단번에 들어 행자자리 꿰찼으면 일본어 아니라 더 한 것도 배우려 노력했으련만 스님은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 후로도 쭉 운수납자로 떠돌았다. 물론 가는 곳 마다 사건(?)도 일으켰다.

안동 봉정사에서의 일화 한 토막. 간염과 영양실조에 걸린 지인스님에게 소머리를 삶아 먹이려다 주지스님과 신도회장이 항의하자 스님 왈,

“그럼 스님 머리를 삶을 까요?”

주지스님과 신도회장이 아연실색했음은 물론이고 말리지도 못하였다. 결과는, 지인스님이 기력을 회복했다고.

그런가 하면 용맹정진기간에 졸음을 깨우기 위해 당번이 될 경우 보통 노스님이 졸면 모른척하는 게 관례하면 스님은 반대로 하였다. 젊은 스님이 졸면 모른 척 눈감아 주고 대신 노스님이 졸면 죽비가 부러지게 내리 쳤단다.

행자시절하면 보통 행자의 설움이 말도 못하게 큰 것으로 전해지는데 명진 스님의 경우는 행자인 명진 스님 보다 은사스님들이 더 힘들어 보였다.(^^) 아무튼 이 한권의 책에는 어느새 환갑이 된 지난 60년 스님의 인생이 시시콜콜 다 있다. 군부독재에 맞서고 불교개혁에 앞장섰던 것에서부터 스님을 짝사랑한 어느 여인의 이야기까지.

타협하지 않고 언제든 자유인으로 당당히 돌아서는 스님의 당당함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행자시절부터 쭈욱 견지하고 있던 초지일관의 한 단면이었다. 후후~ 우좌간 스님은 그 순수한 야성을 잃지 마시길.

<불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끝없는 ‘물음’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종교이다. 냉철한 이성으로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탐욕과 어리석음이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 무한한 자유와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본문 262쪽

정말 그런 것 같다. 불교는 끝없는 물음을 통해 스스로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종교라기보다 ‘사상’이다. ‘자유’에 이르게 하는 사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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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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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영화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 읽게 되었는데  

영화는 책을 충실하게 따랐고나. 

(책의, 100여년 전 풍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탁월하게 재현해 낸 

영화의 미술, 의상 담당자들의 노고에 다시금 경의를~~~ )

 

영화가 있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영상이 떠올라 읽고 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런 충만을 느꼈다. 

 

특히,  

영화에서는 마지막 한 장면일 뿐이었지만(영화의 마지막도 물론 뇌리에 오래 남는...) 

책의 마지막 34장은 아처 뉴랜드에 대한 심리묘사가 탁월하고도 탁월하였다.

.... 그 저린 마음의 허허로움은 내 모세혈관에도 전이되어 꺼이꺼이...... 

10여장이 넘도록 세세히, 담담히 아처의 마음을 설명해 주어서  

그나마 이 책과 이별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가 놓친것이 있다면 인생의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얻기 어렵고 가망없는 것이어서,  

복권에서 1등을 뽑지 못한 것처럼 놓쳤다고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희미하고 미약했으나,  

그 환상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어 본 적이 없었다. ... 

결혼에서의 일탈은 추악한 욕정과의 투쟁이 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이 여기는 한편으로 슬퍼했다.  

어쨌거나 흘러간 옛날이 좋았다." 

 

영화에서 '메이'가 위노나 인것이 별로 였는데 책을 보니 저자와 닮아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키 차이가 너무 나서  영화 찍는 내내 힘들었다던데 

보는 나도 힘들었음^^ 올렌스 부인도 미쉘 파이퍼가 아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물론  

연기는 잘 하였음) 

원작이 워낙 좋으니 최근의 <제인 에어>처럼  내 평생에 이 책이 한번더  영화로 되는것을

보고싶다. ^^  생각만 해도 체온 급상승~ 

 

이디스 워튼, 저자의 이름을 나의 해마에 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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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리의 만돌린
루이스 드 베르니에 지음, 임경아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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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서너번 보기가 쉽지 않은데  <코렐리의 만돌린>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케팔로니아 섬의 자연이 한목했던것 같다. 

소설은 어떨까.......무척 궁금했는데 소설 역시 따뜻하다.  유머가 있고 잔잔하다. 

그리고 접경지역을 사는 사람들의 신산이, 

흔들리는 땅(지진)위에서도 뿌리내리고 살아야 하는 이들의 삶의 역사가 눈물겹다.  

 

하여 의사선생이 케팔로니아의 역사를 쓰려한다는 소설의 설정이 참으로 지당하게 

다가온다. 이 땅의 역사를 어떻게 쓸것인가. 의사는 종이를 구기고 또 구긴다. 

그런데 그 구김이 절망이 아니라  넘 웃긴다.ㅋㅋ 그속에는 낭만과 여유,그리고 그럴수 없이 써내겠다는 '돌팔의'의 야심이 있다.^^ 의사도 '짜가'로 하는데 역사가는 몬할소냐. 

짜가를 면하고 싶어도 그시대에 어디서 뭘 배우나. 독학한것만으로도 그동네 제일가는  

선생일세~~ 

 

아무튼, 영화와 소설, 거의 같은 분위기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영화를 다시보니 

한장면 한장면이 다 새롭다.  

펠라기아와 안토니오의 해후가 조금 다를뿐. ㅋㅋ  

영화가 펠라기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한 채 끝났다면 소설은 좀 코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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