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 사회학(김찬호, 문학과지성사)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은 곧 운명이 된다. - 칼 융




"인간은 행동을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을 약속할 수는 없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가령 일 년 후 어느 날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할 수는 있지만, 당장 내일 아침 그 사람을 어떤 감정으로 대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는 감정에 대해 무지하다. 학식이 높은 사람도 자기 감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26p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문제에 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고, 스스로 위장을 잘한다. 우리가 편치 않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잘 다룰 수 있는 감정으로 스스로를 위장한다. 즉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감정들이 한 감정의 가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화의 심리학 135쪽에서 인용) -27p


감성은 이성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강력하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 감정은 의식의 수면 아래서 나를 계속 움직인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나는 누구인가. 그 '타자'의 정체를 탐구함으로써 나다운 삶에 한 발자국씩 다가갈 수 있다. -29p


감정을 사회적인 지평에서 분석하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마음의 습관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덩어리들을 폭넓은 시선으로 조망하면서 상대화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여러 사회의 습속이나 관행을 입체적으로 대조하는 문화인류학적인 렌즈와도 일맥상통한다. 당연시되는 감정이 일정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정서의 얼개를 비판적인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행복을 도모하는 문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감정이 차원에서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 -36p


침팬지끼리 강간할 수는 있을지언정 성희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강아지를 두렵게 하거나 화나게 할 수는 있다. 질투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게 할 수도, 기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창피함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을까? -50p


수치심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 ...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52p


잠깐 겸연쩍은 심정으로 자신의 태도나 행위에 대해 반성하도록 이끄는 순기능적이고 건설적인 수치심이 있는가 하면,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자존감을 뭉개버리는 역기능적이고 파괴적인 수치심도 있다. 후자의 수치심이 자주 경험될수록 비인간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55p


'유희'와 '희롱', '노는 것'과 '놀리는 것' 사이의 간격은 의외로 좁다. -57p


상대방이 진정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결함을 지적하고 꾸지람을 하되 그가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특히 학교 교육과 자녀 양육에서 그 지혜와 요령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와 관한 좋은 사례가 있다. 한 아이가 교실에서 벌을 받던 중 오줌을 참지 못하고 그만 그 자리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때 교사가 아이에게 물을 끼얹으면서 "이놈, 벌 받으면서 졸면 어떻게 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학생을 헤아리는 마음이 사뭇 섬세하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는 수치스러운 부분을 지니고 있다. 그 취약함을 서로 인정하면서 타인의 치부를 감싸주는 아량, 수치심을 자극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를 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미덕은 어떻게 함양될 수 있을까. 그것은 개인을 넘어 사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58p


모멸은 '모욕'과 '경멸'(또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절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 흥미롭게도 감정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를 경멸할 때는 심장박동이나 혈압 또는 뇌의 신경전달물질 등 생리적 반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시하는 표정이나 비웃는 눈빛, 퉁명스런 말투로도 간단하게 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67p


수치심은 중독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둘 다 단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겉돌게 만든다. 그리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들며 악순환에 빠져든다. -77p


모멸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파괴한다. 그래서 모멸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극도의 적개심으로 무장하기 쉽다. -81p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그 동력은 부러움이라고, 박민규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소설에서 말한다. -89p


('잘산다'의) 한국에서의 실제 뜻은 'rich'이다. 마찬가지로 '못산다'를 영어로 번역하면 'poor'이 된다. 

...'잘사는 것'을 경제적인 부유함으로 등치시키는 어법에서는 한국인의 생활 경험과 가치관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 언제부터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최근 몇 십 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의식이 매우 강하게 투영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113p


이렇듯 한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격변은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빠르게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자각적인 청산이 아니었다. 봉건적 신분제에 억눌려 있던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루어낸 성과도 아니었고, 구체제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진 지배세력이 스스로 개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불발로 끝났고,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산업화의 물결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낡은 질서가 깨져나갔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권력의 시스템이나 사회구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거나 논쟁하지 못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전을 창조하면서 현실과 맞붙어 싸운 경험이 박약했다. -125p


한국 사회에서는 상해나 살인 등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에는 매우 민감하지만, 무형의 폭력에 대해서는 둔감한 편이다. 오만과 모멸의 사회체제는 그런 무딘 감수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137p


사회적 결속이 느슨해지고 사적인 영역에서도 친밀한 관계가 어려워지는 상황, 그렇다고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도 아니어서 타인의 시선에 늘 전전긍긍하는 삶은 모멸감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 얼개는 이러하다. 고립된 개인들이 자기 정체성이 박약한 가운데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행복과 불행, 오만과 콤플렉스 사이의 왕복을 거듭한다. -143p


사람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과 감각이 어떻게 프로그래밍되어 잇는가를 종종 해부해보아야 한다. 널리 공유되는 상식의 문법과 행동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그 문화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를 되묻고, 문제가 있는 부분은 수정해야 한다. 그 리모델링은 성찰에서 시작된다. 내가 무심코 반복하는 언행이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 타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관행에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감수성이 요구된다. -222p


손상과 기능 제약은 의학적인 과제지만, 핸디캡은 사회적 과제다. 차별하는 제도를 바꿔야 하고 편견에 맞서 싸워야 한다. -245p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258p


때로는 타인의 모욕을 받으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도 있다. 경멸은 자기 정체를 비춰주는 시선이 될 수 있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2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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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 장자크 루소 저, 박은수 역, 2013년, 올재


가족은 이를테면 정치 사회의 첫 모델이다. 우두머리는 아버지를 닮았고, 국민은 자식을 닮았으며, 다 평등하고 자유롭도록 태어났기에,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밖에는 자신의 자유를 양도하지 않는다. -24쪽

=가족 내에서 구성원은 모두 불평등하지 않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대전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자기 힘을 권리로, 복종을 의무로 바꾸지 않고서는, 가장 강한 자도 늘 주인이 될만큼 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가장 강한 자의 권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 그러니 힘이 권리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정당한 권력들에밖엔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자. -27~28쪽


어떤 사람도 자기 동포에 대한 타고난 권위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또 힘은 어떤 권리도 낳지 않기 때문에, 약속들만이 사람들 사이의 권위 모두의 바탕으로서 남게 된다. -29쪽

='힘이 권리를 만들지 못한다'의 의미는?


다수결의 법칙 자체가 약속의 소산이어서, 적어도 한 번은 전원 일치가 있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34쪽


"공동의 힘을 다해 각자의 몸과 재산을 지켜 보호해주고, 저마다가 모든 사람과 결합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해, 전과 다름없이 자유롭도록 해주는 그러한 형식을 찾아낼 것." 사회 계약이 그 해답을 주는 근본 문제란 이런 것이다. -35쪽


헛된 법전이 되지 않기 위해 사회 계약은, 그것만이 다른 약속들에 효력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약속을, 일반 의지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나 다 단체 전체의 강요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것이다. 이는 그가 자유로워지도록 강요당할 것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각 '시민'을 조국에 넘겨줌으로써 그를 모든 개인적인 종속으로부터 막아 주는 조건이니까. 정치 기관의 장치와 활동을 낳는 조건이고 시민의 약속들을 합법화시키는 유일한 조건이어서, 이것 없이는 그 약속들이 터무니없는 압제적인 것이 되어 엄청나게 악용되기가 일쑤인 그러한 조건이니까 말이다. -40쪽


사회 계약으로 잃게 되는 것은 그의 타고난 자유와, 그를 유혹하고 그가 얻을 수 있는 것 모두에 대한 무리한 권리다. 사람이 얻게 되는 것은 시민의 자유와 그가 지닌 것 모두에 대한 소유권이다. ... 힘의 경과나 먼저 차지한 자의 권리에 불과한 점유를 확실한 권리증만이 근거가 될 수 있는 소유권과 구별해야만 한다. ... 사람을 정말로 자신의 주인이 되게 해주는 유일한 것, 즉 도덕적 자유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만에서 오는 충동은 종노릇이고 스스로 정한 법에의 복종은 바로 자유이니까. -41쪽

=타고난 자유/(일반의지에 제한 받는) 시민의 자유를 구별, 점유와 소유를 구별


=논의를 '사회 계약'-주권-시민권-토지소유권으로 진행. 왜?


공동체가 개인들의 재산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개인들로부터 빼앗기는커녕, 그 재산의 합법적인 점유를 개인들에게 보증해주어, 횡령을 진짜 권리로, 수익권을 소유권으로 바꾸어줄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 같은 토지에 대해 갖는 주권자의 권리와 소유권자의 권리를 구별함으로써 쉽사리 설명이 되는 역설이다. ... 이 기본 계약이, 타고난 평등을 깨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이 사람들 사이에 마련한 육체적 불평을 도덕적이고 합법적인 평등으로 바꾸어주며, 그래서 힘이나 천분에 있어서는 불평등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약속에 의해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다 평등해진다는 사실이다. -44쪽


나쁜 정부들 아래서는 이 평등이 허울만의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가난한 자를 비참 속에, 부자를 횡재 속에 붙들어두는 데 소용될 뿐이다. 실상 법률이란 언제나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들에겐 해로운 것이다. 그 결과로 사회 상태는 사람들이 다 얼마씩 갖고 아무도 너무 갖지는 않은 한에서만 사람들에게 유리할 것이다. -44쪽 각주32

=결국 진정한 사회 계약의 실현은 유토피아에서만 가능한 것 아닌가? 대개의 정부는 나쁜 정부 아닌가?


일반 의지의 행사에 지나지 않은 주권이란 결코 양도될 수 없는 것이며, 하나의 집합 존재에 지나지 않은 주권자란 그것 자체에 의해서밖에는 대표될 수 없는 것이라고. 권력은 남에게 전해질 수는 있지만 의지는 그럴 수가 없다. -46쪽


가장 중요한 배려가 자기 보존에 대한 배려라면, 각 부분을 전체에 가장 알맞도록 움직이고 배치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보편적이고 강제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 자연이 사람 하나하나에게 그 팔다리 모두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주듯이. 사회 계약도 정치 단체에 그 구성원 모두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주는 것이며, 내가 이미 말했듯이 일반 의지에 이끌리는 이 지배력이 바로 주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다. ... 저마다가 사회 계약에 의해 내놓는 권력과 재산과 자유 모두가 단지 공동체에 쓰여 필요한 것 모두의 부분일 따름이라는 것은 시인되고 있는 사실이지만, '주권자'만이 그 필요성의 판단자라는 사실도 시인해야 한다. -52쪽


주권 행위란 본래 무엇인가?그것은 윗사람의 아랫사람과의 협약이 아니고 집단의 그 멤버 하하나와의 협약이다. -54쪽


사회적 권리를 해치는 악인은 다 그 죄악 때문에 조국에 대한 반역자, 배신자가 되며 조국의 법을 어김으로써 그 멤버이기를 그만두고, 조국과 싸우게까지도 되는 것이다.이렇게 되면 국가의 보전은 그의 보전과 양립될 수가 없어 어느 쪽이 없어져야 하며, 죄인을 죽일 때는 '시민'으로서보다는 적으로서 죽이는 셈이다. 소송 절차와 재판은 그가 사회 계약을 깨뜨렸다는, 따라서 이미 국가의 멤버가 아니라는 증거이고 선고인 것이다. -57쪽

=전체주의, 국가보안법적 발상이 아닌지... 자유주의 국가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자유민주주의?


법은 '시민'의 여러 '계급'들을 만들 수 있고, 또 그러한 계급들에 들어갈 자격을 정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 들어가도록 누구누구를 지명할 수는 없다. 왕정과 세습을 정할 수는 있어도 왕을 뽑지도 왕가를 지명하지도 못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개별적인 대상에 관계되는 기능 모두는 입법권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60쪽


폭동이 국민을 파괴시킬 수는 있어도 혁명이 국민을 복구시킬 수는 없어, 쇠사슬이 끊어지자마자 국민은 흩어지고 말아 이미 존재도 않게 된다. 앞으로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자이지 해방자가 아니다. 자유로운 국민들이여, 이 격언을 명심하라. 자유를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되찾을 수는 결코 없다. -69쪽 


입법의 힘이 늘 평등의 유지를 지향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사물들의 힘(형세)이 늘 평등을 깨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77쪽


정부란 무엇인가? 백성들과 주권자의 상호 연락을 위해 그 사이에 세워진 중간 집단이고 법들의 집행과 시민적인 자유와 정치적인 자유의 유지를 맡은 중간 집단이다. -85쪽


국가는 스스로 존재하고 정부는 주권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본질적인 차이 -88쪽


민주 정체 또는 민중 정체만큼이나 심하고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려 드는 정체도, 그 형태 유지를 위해 경계와 용기를 더 요구하는 정체도 없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내란과 내분이 일어나기 쉬운 '정체'는 없다는 말을 덧붙여 두자. 더구나 '시민'이 힘과 끈기로 무장하고, 폴란드의 어느 덕 있는 주지사가 국회에서 하던, "나는 평온한 예속보다는 불안스러운 자유를 택한다"는 말을, 평생을 두고 날마다 마음속으로 말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 정체에 있어서인 것이다. 신들로 된 국민이 있다면 민주 정체로 다스려질 것이다. 이토록 완전한 정부는 사람들에게는 알맞지가 않다. -96쪽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다스리게 되리라는 점만 확실하다면,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다수를 다스리는 것이 가장 낫고 자연스러운 질서이다. -99쪽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멤버들의 보호와 번영이다. 그럼 그들이 보호되고 번영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표적은 무엇인가? 그들의 수효와 인구이다. -113쪽


정치 생명의 근원은 '주권'에 있다. 입법권은 국가의 심장이고, 행정권은 국가의 뇌수로서 모든 부분을 움직인다. 뇌수는 마비될 수 있지만, 그래도 개인은 살 수 있다. 사람은 바보가 되어도 산다. 그러나 심장이 제 기능을 멈추면 당장에 동물은 죽는다. -118쪽


공무가 '시민들'의 주된 일이기를 그만두고, 시민들이 자기 몸으로보다는 자기 지갑으로 봉사하기를 더 좋아하게 되면, 국가는 이미 망하기 직전에 있다. 전투에 나가야 한다고? 그럼 시민들은 군대에 돈을 치르고 자기 집에 남는다. 회의에 나가야 한다고? 그럼 그들은 대의원들을 임명하고 자기는 집에 남는다. 게으름과 돈 때문에 마침내 시민들은 조국을 노예로 만들려고 군인들을 갖게 되고, 조국을 팔아넘기려고 대표자들을 갖게 된다. -124쪽


영국 국민은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주 잘못된 생각이며, 국회 의원들을 선거하는 동안밖엔 그렇지가 않다. 의원들이 뽑히자마자 국민은 노예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 자유의 짧은 기간 동안의 자유의 행사를 보면 자유를 잃어 마땅하다. -125쪽


자유는 노예의 뒷받침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양극은 상통한다. 자연 속에 있지 않은 것에는 다 불편이 있게 마련이며, 시민 사회는 더구나 그렇다. 남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자기 자유가 간직될 수 없고, 노예가 극도로 노예가 되지 않고서는 시민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는 그런 딱한 처지들이 시민 사회에는 있다. 스파르타의 처지가 그랬었다. 현대 국민인 여러분들로서는 노예를 갖고 있지 않지만, 여러분이 바로 노예다. -126쪽


국가에는 하나의 계약밖엔 없고, 그것은 결합의 계약이다. 이 계약만으로 다른 계약은 다 베제된다. -129쪽


저마다가 투표로 그것에 대한 자기 의견을 말하고, 표의 계산에서 일반 의지가 표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이 이길 때는 내가 틀렸다는 사실이, 내가 일반의지라고 본 것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뿐이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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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학 이론> 

- 데니스 스미스 지음


제1장


(역사사회학자들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지식과 새로운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가를 구분하는 수많은 견해를 평가하는데 지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간단히 말하면 역사사회학은 민주주의의 시민성을 함양하는 적극적인 추진력으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10쪽 


역사사회학의 목적 중의 하나는 바로 우리들의 앞날이 열려 있는 문인지 넘기 어려운 장벽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며, 그 벽을 넘어야 하는지 또 넘는다면 어떻게 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결과와 함께 그 벽이 제거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같은 쪽

= 지금도 그런 도움을 주고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


간단히  묘사하자면, 역사사회학은 어떻게 사회가 기능하고 변동하는가를 밝히기 위해 지난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13쪽


틸리는 제도화 과정을 통해 '학문 영역, 학술지, 강의과목, 또는 취업영역에서 역사사회학의 전문분야가 확보'되면 결국 그 연구의 효과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첫째, 역사사회학의 "분야" 자체가 지적 통합성을 결여하고 있는데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통합성을 결여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4쪽

= 역사사회학 분야 자체가 지적 통합성을 결여하고 있다?



제5장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 중의 하나는 이탈이 사람의 생존기회를 증진시켜 준다는 것이다. 동생이 발견해냈듯이 과정에 대한 자기 통제와 지적 통찰력은 잠재적인 위협과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인간 통제의 정도가 가능함을 보여준 셈이 되었다. -230쪽


엘리아스는 역사사회학이 분석의 주제에 따라 개입이나 이탈 모두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연구자들은 인간 상황에 참여하게 되거나 감정이입을 시킨다는 의미에서 개입되면서 명확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하여 감정적인 반응들을 도외시한다는 의미에서 이탈된다. -같은쪽


(블로흐)는 구조의 형성과 재형성에 관여하는 인간 행위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구조적 제약과 기회를 통해 형성되는 선택의 결과와 이와 같이 의도되었거나 그렇지 않은 과정들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 어떻게 구분되는지 등에 대하인지하고 있었다. -231쪽


과학자에 해당되는 저자들은 개입을 희생시켜 고도의 이탈을 성취해낸다. 반대로 변호인에 해당되는 저자들은 이탈을 희생시켜 고도의 개입을 표현해낸다. -237쪽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수용과 지속의 문제가 전후 역사사회학 연구의 3단계 모두와 연결된다는 점과 서구 자본주의 민주국가들 내부에서 그리고 그 외적 관계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변화가 연속적 단계를 보여주는 역사사회학의 문제를 구체화시켰다는 두 가지 논쟁점이 제기되었다. -247쪽


미국과 더 유사해질수록 민족적 가치의 통합을 한편으로 하고 점차 분화되는 조직과 집단에서 발생되는 수요와 요구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 간에 상호조절이 기대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역사정치학적 인식이 형성되었다. -248쪽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방법론은 다음의 두 가지 연구에 의해 길들여졌고 더 나아가 점차 이 연구분야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국가기구가 시민적, 군사적 외관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형성하는 데서 생겨나는 현실적 기여에 대한 탐구가 그 첫째이다. 둘째는 이론적 설명에서 어떠한 형태의 권력에도 강조점을 두지 않고 '권력'의 대안적 표현으로서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다른 형태의 강제를 다루려는 태도이다. 스카치폴, 틸리, 브로델, 만, 기든스 모두의 공헌으로 역사사회학의 관심의 초점이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 -252쪽


우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국가의 흥망에 내재된 본질적 논리에 반하는 어떠한 행동 양식을 취할 수는 없다. -262쪽


흄은 그의 독자들을 '시장'의 수요자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인 자기 선거구의 '유권자'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흄은 독자들을 단지 동료로 생각했다. -263쪽


만일 역사사회학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에 유용한 공헌을 할 수 있다면 그 주된 관심 대상은 인간 행위의 특정 형태, 특별한 의도, 독특한 구조, 독특한 의미 등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홀은 보다 '철학적인 역사', 즉 '각기 다른 유형의 사회들을 구분하고 하나의 유형으로부터 권력의 본질과 인간 생존의 기회를 체계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다른 유형으로의 변환을 설명하는' 입장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고 있다고 보았다. -264쪽


은유로 설명하면 노예들은 그들의 생존기회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주인에 대해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 -266쪽


역사사회학은 국가 간의 관계를 이용하는 데 만연되어 있는 환상과 공포를 대체시킬 합리성을 대중의 이해 속으로 진전시ㅣ는데 도움을 주었다. ... 역사사회학은 이미 포장되어 있는 해답 꾸러미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관된 문제와 증거자료를 포함하는 합리화 방법에 의해 그 모순의 틈바구니를 메꾸어야 한다. 이러한 예는 벤딕스의 언급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사회학자들은 인간 이성에 대해 굳건한 신뢰를 갖고 있어야 한다. ... 사회적 조작기술을 증진시키는 노력에 비하면 이러한 신뢰는 보다 인간적인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위대한 사회과학의 학문정통보다 가치있는 단 하나의 측면이다. 전체주의의 위협에 대항하는 학문적 방어력의 기반도 바로 이러한 신뢰에서 기인된다. - 267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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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은 참 긴 하루였다. 오전부터 포클레인을 불러 바닥 콘크리트(예전 집 기초)를 걷어냈다. 그랬더니 그 전 집의 전집 기초가 다시 등장했다. 예상보다 폐기물을 더 많이 버렸다. 


저녁 무렵에야 공사장에 필요한 임시 전기를 설치하러 전기업체에서 왔다. 그런데 한전에서는 아직 계량기를 설치해주지 않아 곤란해졌다. 당장 내일부터 전기를 써야 하는데 한전에 연락을 하니 다음 주에나 설치가 가능하단다. 짜증이 밀려왔다. 사연인 즉은 이렇다. 원래 철거 하기 전 집에서 쓰던 계량기가 있는데 그것을 임시전기 설치 시 사용하면 안 되냐고 문의를 했다. 돌아온 답은 안 된다, 일단 철거를 하면 계량기를 수거하고 임시전기 설치할 때 새로 계량기를 달아준다고 했다. 왜 그렇게 두 번 일하냐고 물으니 관련 법규도 없고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란다. 이런 탁상행정이라니... 결국 며칠 간은 도전을 하기로 했다. 




벌써 날이 저물어 어둑한 가운데 위태위태하게 전봇대에 올라 도전을 했다. 이것까지 이 사람들의 일이 아닌데 내가 괜히 미안해지는 순간. 



사실 28일 기초 공사를 해야 하는데 점심을 먹다가 김채일 대표에게 내일 비가 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김 대표는 거의 맨붕 상태. 포클래인과 레미콘 등 모든 일정을 조절해야 했다. 결국 11월 29일 다시 공사 시작. 


좁은 땅에서 포클레인이 곡예를 하듯이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기초를 팠다. 동결심(겨울철 땅이 얼고 녹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일정부분 이상 땅을 파야 하는 것)을 충분히 확보하니 걷어냈던 기초와는 확연히 다른 튼튼한 기초가 생겼다. 거의 30센티 이상 두께의 콘크리트 기초. 김 대표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때까지 그떡 없는 집이 될거라고 한다. 



한쪽에서는 설비팀에서 작업이 한 창이다. 주방과 화장실에서 나오는 물을 정화조로 보내기 위한 관을 설치하는 작업. 



작업이 끝난 뒤 뭔가 적혀 있기에 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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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설계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벌써 한 달 전이다. 주방 배치가 가장 문제여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다. 애초에 11자형에서 ㄱ자형, 다시 11자형을 거쳐 마침내 ㄷ자형으로 잠정 결론이 났다. 

상수도는 바꿀 수 있지만 하수도는 기초에서부터 결정되어 나중에 바꾸게 되면 출혈이 크다. 그래서 기초공사 때부터 주방 싱크대는 확정되어야 했다. 


견적서도 받았다. 예상보다 초과 금액이 크다. 그렇지만 막무가내로 낮추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설계를 맡았던 김정호 소장님과 시공사 김채일 대표의 호흡이 잘 맞아보여서 안심이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고민(?)이자 스트레스가 된 것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었다. 직간접적으로 집을 짓는데 관여해봤던 지인들은 다들 애정어린 조언을 해준다. 하지만 그것이 과할 때도 많다. 평당 건축비가 얼마니, 계약할 때 주의할 것이 무엇이니 등등 매우 구체적인 정보이지만 집도 집터도 사람도 다 제각각인 만큼 우리 상황과 무관하거나 거리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지하게 듣지만 너무 귀 기울이지 않기가 필요하다. 그만큼 평생을 건설 일을 하시고 본인의 집도 두 번이나 지어보신 장인어른이 "예쁘게 잘 지어봐라"라고 무심히 던지는 말씀이 참으로 고맙다. 


고마운 사람이 많다. 계속 자기 일처럼 봐주는 베짱이. 그리고 소나무. 현장에 있는 기존 주택을 철거해야 하는데 철거업체 선정에 애로가 많았다. 김 소장님도 김 대표님도 경험이 없어 여기저기 물어본 끝에 고물상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 계통에 있는 소나무가 소개를 해주었다. 전화 상으로 예측한 견적에 두배가 훌쩍 넘는 철거비가 나왔지만 그래도 소나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50만원 정도는 더 지출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래저래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11월 14일 마침내 기존 건물이 철거되었다. 오전 9시쯤 시작된 공사가 오후 4시가 되기 전에 끝났다. 집이 허물어지고 보니 집터가 좀 넓어보였다. 예상치 못했던, 거실 창문을 가릴 것으로 예상되던 전봇대의 위치도 한전과 협의 끝에 옆으로 옮기게 되어 좋다. 철거 공사 전날 부랴부랴 이웃집에 감 한 상자씩을 돌리고 양해를 구했다. 철거 과정에서도 동장님, 동네 교회 목사님을 비롯해 이웃들 대여섯 명을 만났다. 하루 종일 현장을 지킨 나름의 보람이랄까. 적어도 10년을 살 동네이니만큼 이웃과의 관계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마음가짐이 전세 살던 때와는 많이 다르다. 한편으로는 얇팍한 내 심사가 드러나는 것 같아 창피하기도 하고. 덧붙이자면 뒷 집과 불란의 소지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전봇대 문제도 나름 깔끔하게 처리된 것 같아 다행이다. 현재 전봇대를 살리려면 뒷 집 땅에 전봇대를 하나 더 설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전봇대를 옮기게 되었으니 불란의 소지 자체가 없어진 셈이다. 


11월 19일, 오늘 건축 인허가가 나왔고 구청에서 인허가 서류를 받아 근로복지공단에 가서 산재 신청을 했다. 내일은 측량을 한다. 모든 것이 다 난생 처음 하는 경험들이다. 


거실 쪽 데크는 계속 고민스럽다. 장도리와 강물의 도움을 받아 할 것인지, 업체에 맡길 것인지. 일단 거실 쪽 데크는 업계에 맡기고 나중에 마당에 평상이나 데크를 배워서 해보는 것이 어떨지... 결국 문제는 예산, 비용이다. 이건 막판에 결정해도 될 것 같다. 


 














고병권의 책을 읽고 있다. 요즘 내게 가장 많은 영감을 주고 있는 작가다. 이 두 권을 관통하는 것은 '(장애)운동'과 '앎과 삶'이다. 운동과 철학이 만날 때 지식과 실천이 어떻게 확장되고 생명력을 얻게 되는지 놀랍도록 구체적이고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게 집을 짓는 일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나에게 집짓기는 과연 어떤 만남, 지식과 실천의 확장을 가져다줄 것인가. 


그 사이 11월 11일 참으로 오랜만에 광화문에 나갔다.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러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반대 주민분들이 올라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다. 육아휴직을 하고 집을 짓는다고 아무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내심 불편하고 때론 한심하고 그렇다. 그런 면피라도 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밀양 주민분들이 올라오시니 꼭 가야만 할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미류와 덕진을 만나 술 한잔을 기울이고 싶었지만 차마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이것 또한 죄스러움인가.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만하고 계속 내년 3월 주택 완공시기 이후로 미루기만 하고 있다. 물론 3월 이후에도 집에도 손이 갈 것이고 아이들에게도 손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지 않다. 하여튼 최대한 시간을 내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김정호 소장님이 집 이름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마땅이 잘 떠오리지 않는다. 집 모양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그러면 사람들에게 의견을 적극적으로 물어야겠다. 어떤 그럴듯한 이름을 지을까 고민하다보니 결국 이름이란 불리워지는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럼에도 이름 짓기는 나와 나의 가족의 몫이겠지만. 


내일 측량에서부터는 현장에 사진기를 가지고 나가 꼼꼼히 기록을 해야 겠다. 수첩도 챙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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