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명 작가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의 마지막 구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히 상실의 경험을 극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자기이다. 중요한 것(사람)을 떠나보내고도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는 새로운 나를 만나는 것이 애도의 과정이며 이를 통해 나를 재정비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애도란 과거의 나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나를 죽이기 위해서는 슬퍼하기로 시작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슬픔을 감추려고 한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니다. -7쪽


치유란 상실로 인한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기로 시작하는 애도의 과정을 거쳐 받아들이는 것이다. -8쪽


매력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누가 뭐래도 내 나름의 삶이 있다. 시대의 중력은 우리를 짓누른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이른 것은, 고비마다 시대의 중력에 맞서 하나씩 선택해 걸어왔기 때문이다.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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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책임 - 레옹 블룸, 알베르 카뮈, 레몽 아롱… 지식인의 삶과 정치의 교차점
토니 주트 지음, 김상우 옮김 / 오월의봄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지식인... 늘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으로 인해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바늘같은 존재... 한국의 지식인 하면 누가 떠오르나요? 김수영 시인. 리영희 선생... 몇 분 떠오르는데 생존인물 중에는 딱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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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카이로스총서 16
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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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담론의 르네상스 배경에는, 통합이나 동화보다 정체성과 차이의 문제를 부각시키려던 좌파들의 시도와,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리 요구를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특수한" 것으로 매도하려는 우파들의 노력도 자리 잡고 있었다. -19쪽

관용에 대한 비판 역시, 정치적 입장을 초월해 제기되고 있다. 문화적 우파가 관용을 동성애 지지의 표현이라고 비판할 때, 문화적 좌파는 관용이 동성애자에 대한 '동등한 권리 보장'을 대체하는 빈곤한 개념이라고 비판한다. (...) 이와 유사하게 기독교 우파가 "관용의 과잉"이 불러온 도덕성의 붕괴를 비판할 때, 몇몇 진보주의자들은 관용적 다문화주의가 여성의 음핵절제나 무슬림 소녀들의 히잡 착용 같은 억압적인 문화적 실천에 유보적 태도를 보인다며 관용을 비판한다.-20 쪽

소수 종교, 소수 종족, 소수 섹슈얼리티에 정체화한 이들은 국가로부터 형식적 평등을 보장받음과 동시에 사회적 관용의 대상으로 구성되는데, 이때 이들은 형식적 평등을 통해 정치적으로 포섭되는 와중에도, 관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변적 지위에 재각인된다. 이런 식으로 관용은 국가가 내건 법적 평등주의로 인해 위태로워질 수 있는 헤게모니적 규범을 사회적 영역에서 재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23 쪽

통치성의 실천으로서 관용은 (...) 정치적 주체의 형성에 관여하고,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시민권, 정의, 국가 그리고 문명의 분절에 기여하고 있다. 더 나아가 관용은 자유주의의 혀식적 자유와 평등의 대리보충으로 기능함으로써 실질적인 평등과 자유의 추구를 노골적으로 방해하기도 한다. 때에 따라 관용은 위기에 빠진 권력의 질서를 뒷받침하고, 흔들리는 제국주의를 위한 방패막이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심지어 인종주의나 동성애 혐오를 유통시키고, 인종주의적인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관용이 동원되기도 한다. -31~32쪽

관용의 대상은 대부분의 경우 관용 행위 그 자체를 통해 비정상적이거나 주변적인 것 혹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표지되기에, 무언가를 관용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관용받는 상대방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9쪽

우리가 중고등학생들에게 각자의 인종, 종족, 문화, 종교, 성적 지향의 차이를 관용해야 한다고 가르칠 때, 여기서 문제가 되는 차이와 정체성은 실은 사회적,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그 자체로 권력과 헤게모니적 규범, 그리고 특정 담론들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41쪽

관용이 점차 서구, 자유민주주의, 계몽, 근대성 같은 개념들과 동의어가 되면서, 관용은 이제 "우리"와 "그들"을 구별해주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43쪽

일반적으로 관용은 인간적 차이 혹은 "다른 의견이나 행동"에 대한 존중으로 정의되는데, 이러한 정의 어디에서도 규범과 주체의 구성, 그리고 관용 담론에서 문제가 되는 문명적 정체성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이 정의는 관용 가능한 대상과 관용 불가한 대상 혹은 관용의 주체와 불관용의 주체를 가르는 분할의 정치학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한다. -46쪽

과거 냉전 시대에 서구 사회의 모든 정치적 갈등이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환원되었다면 오늘날 탈냉전 시대에 모든 정치적 갈등은 문화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다. -49쪽

(조지 W. 부시 같은) 이들 자유주의적 입장은 인권의 문제를 문화적 제국주의와 무관한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인권이 필요하다고 적반하장 격으로 주장한다. -51쪽

관용은 ("차이"와 관련되기에 비자유주의적이며, "본질적이기에" 비정치적이라고 여겨지는) 문화적 정체성과 이러한 정체성 간의 충돌을 규제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도구로 기능한다. 이 과정에서 관용은 이러한 정체성 주장 및 정체성 간의 충돌을 탈정치화하는 동시에 스스로 단지 양심의 자유나 정체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도구로, 즉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유주의적 통치의 도구로 내세우는 것이다. -54쪽

관용은 잠재적으로 해로울 수 있는 차이를 포용하는 덕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차이로 재현된 위협을 관리하는 방식이다.-62쪽

관용에는 두 종류의 경계선 긋기와 하나의 자격 부여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관용은 먼저 어떤 문제가 관용이 필요한 문제인가라는 유관성의 범위와 이 범위 내에서 어떠한 부분까지 수용이 가능한가라는 도덕적 범위를 구획한다. 자격 부여 행위는 이 경계선 내부에서 어떠한 행위가 관용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65쪽

관용은 자유주의적 평등의 형식주의로 해결되지 않는, 특히 자신이 사회, 문화, 종교적 삶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는 자유주의적 법치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회, 문화, 종교적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 형식적 평등이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관용은, 그 집단을 주변화해 온 규범의 헤게모니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주변 집단을 내부화하고 그들의 요구를 관리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이것은 자유주의 담론 하에서, 오직 관용만이 행할 수 잇는 중요한 임무이다. -75 쪽

관용을 서구 문명의 전유물로 만드는 행위는, 결국 서구를 문명의 편에서 "불관용"을 규제할 수 있는 전도사로 만들고, 이는 현재 해방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77쪽

관용은 이러한 일련의 믿음과 경험, 실천을 대변하는 정체성들 간의 공존을 보장하는 동시에, 이들 정체성 간의 관계를 내재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로 구성한다. 정체성이 타인의 진리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진리의 장소로 여겨지는 한, 각각의 정체성은 다른 이들이 가진 진리와 그것의 절대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83쪽

관용 담론은 사회질서를 '관용하는 이들'과 '관용되어야 하는 이들'로 은밀히 이분화하는데, 이때 관용되어야 하는 이들은 규범에서의 일탈을 통해 개인화되며, 이 개인화 과정에서 자신의 진리를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관용담론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규율적 전략으로 기능하는 방식이다. -86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그들의 "차이"를 드러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적이고 탈정치화된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한에서만, 즉 이를 정치적 주장으로 연결시키지 않는 한에서만, 관용 가능한 대상이 된다. (...) 관용은 차이를 본질화하고 세규얼리티, 인종, 종족의 문제를 물신화함으로써 세규얼리티, 종족, 인종이라고 불리는 차이들을 생산해 온 역사와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또한 관용은 문화적으로 생산된 차이를 태생적이고 본성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차이를 불평등과 지배의 장소로 파악할 수 없도록 만든다. -88~89쪽

프랑스 유대인 부르주아들이 점점 더 자신을 프랑스인과 동일시하면서 이들과 다른 유럽 국가 유대인 간의 유대감과 연결고리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이 자신의 유대인성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 내 반 유대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삼갔으며, 주류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점차 정치적 사회적으로 보수화될 수밖에 없었다. (...) 관용받기 위해서는 종교적 정치적 믿음을 양보해야 했고, 동료 유대인을 외면해야 했으며 국가를 향한 대가 없는 충성을 약속해야 했다. -105쪽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기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차이를 내부로 편입시킴과 동시에 여전히 이들을 조절, 관리, 통제할 필요가 있을 때, 정치적 시민적 관용이 등장하게 된다. (...) 유대인의 경우는 (여성과)달랐다. 그들의 차이는 전체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특성[즉 하나의 민족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으며 관용은 이들의 해방 위에 덮여진 보호막과 같은 것이었다. -125쪽

성별화 담론은 여성에게 형식적인 정치적 평등을 부여하면서 실질적 불평등을 지속시키고, 더 중요하게는 국가가 표명한 보편성의 핵심에 자리 잡은 남성 중심적, 이성애적, 기독교적 규범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 동일자의 한복판에 불쾌한 타자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관용 담론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위협을 알리는 지표인 동시에 그것을 통합할 수 잇는 능력의 지표이기도 하다. 여성이 전형적인 남성의 공간에 들어가려 할 때만 관용의 언어가 등장하는 이유는, 여성이 자신에게 할당된 장소에 머무르고 여성의 신체가 이성애 구조에 의해 전유되어 사사화되는 한, 관용의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28~129쪽

관용은 헤게모니적 규범이 일탈적 타자를 손쉽게 식민화하거나 내부화할 수 없을 때 혹은 직접적 종속이나 편입보다는 새로운 주변화와 조절의 테크닉을 통해서만 지배를 유지할 수 잇을 때, 자유민주주의 사회 내부로 호출된다. (...) 이성애적 젠더는 관용의 대상일 수 없는 반면, 이성애 구조에서 일탈한 주체들은 즉각적으로 관용 담론을 소환한다. (...) 관용은 자유주의적 평등의 구호가 적용될 수 있는 경계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관용의 실천은 관용의 대상이 되는 타자가 정치적으로 시민권 규범의 외부에 놓여 있음을, 그 타자가 져전히 정치적 타자이며 자유주의 평등 담론 속으로 완전히 편입될 수 없고, 또한 종속을 유지시키는 분업 구조를 통해 관리될 수도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130~131쪽

관용 담론은 특정한 집단의 지배를 재생산하는 국가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은폐하며 이를 둘러싼 긴장들을 완화시키고 갈등의 방향을 전치시켜 버린다. -145쪽

차이의 장소를 사적인 영역에 한정함으로써 공적 차원에서의 차이와의 대면을 축소시키고자 한다. 즉 관용은 차이의 공적인 해결을 가로막고 차이가 가진 공적인 속성을 축소시키는 한편, 차이를 "문화"와 "본성"의 문제로 환원시켜 차이의 원인과 해결책을 탈정치화한다. (...) 이는 "차이"를 정치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을 막아 버려 "차이"를 지배와 불평등의 효과이자 도구로 계속 남겨 놓으며 더 나아가 "차이"를 통해 타자를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차이를 비난하거나 차이를 애써 외면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 역시 함께 막아 버린다. (...) 관용은 평등의 기획을 거부할 뿐 아니라 차이를 가로지르는 접속의 기획, 다시 말해 연대나 공통성의 문제마저도 포기한다. (...)정치의 공간은 더 이상 시민들이 참여를 통해 스스로 변화하는 공간이자, 차이가 정치적으로 생산되고 조정될 수 있는 공간, 즉 "차이"가 주체적인 문제가 되는 공간이 아니다. -151~152쪽

국가가 이러한 사회적 관용에 대한 호소를 통해 자신이 헤게모니적인 문화적 규범과 연결되어 있다는 폭로에 맞서 자신의 정당성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는 평등의 약속을 위반하고, 대립하는 운동 중 한 쪽 입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관용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을 메울 수 있었던 것이다. -165쪽

9/11 이후 진행된 이같은 국가 폭력을 시민적 관용에 대한 국가의 호소와 모순되는 것으로 단순히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러한 국가 폭력이 시민적 관용에 대한 호소를 통해 정당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70쪽

관용은 본질화된 차이라는 담론을 순환시킴으로써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며, 동시에 관용에 대한 호소는 국가 폭력에 의해 활성화된다. [각주] 갈등은 불관용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관용에 의해 해결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176쪽

관용의 탈정치적 효과 속에서 적대와 갈등을 구성하는 권력관계와 역사는 삭제되며 역사적으로 생산된 적대는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물화된다. 바로 "차이"의 이름하에 말이다. -183쪽

(우리와 다른 믿음과 행동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정의 하에서 인종주의와 동성애 혐오, 여성 혐오와 관련된 모든 사안들은 이제 타자의 "믿음과 행동을 수용"하는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환원 속에서 사회적 상처와 불평등의 지표라 할 수 있는 인종, 종족, 젠더, 섹슈얼리티는 "문화화"되어, 누군가의 믿음과 행동을 구성하는 요소로 간주된다. (...) 관용 그 자체는 정체성을 생산해 내는 정치의 외부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즉 권력이나 불평등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197쪽

다양한 믿음과 행동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차이를 인간성의 본질로 규정하면서 어떻게 도시에 하나의 도덕적 정치적 합의를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인가? 상이한 관점과 차이에 대한 관용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모든 이들이 하나의 올바른 도덕적 정치적 입장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할까? 차이에 대한 세계시민주의적 입장을 내걸면서 어떻게 보편적 진실의 외피를 쓴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210쪽

(관용-문명 계열화는) 야만인들에게 관용적인 세계관과 이러한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정치적-법적 장치들을 강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강제는 폭력이 아니라 야만인에게 사유를 가르쳐 주는, 따라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213쪽

"문화는 흡수될 수 있고, 종교는 개종할 수 잇지만, 인종은 오직 절멸될 수 있을 뿐이다." - 관용박물관 '홀로코스트의 집' 전시물에서-237쪽

(자유주의 담론 속에서) 비자유주의 세계의 사람들은 문화에 "지배"되며 자유주의 세계의 사람들은 문화를 "소유"한다. -245쪽

관용은 자율성이라는 선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시에. 역으로 이러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들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 미덕이 된다. -250쪽

유기체적 질서는 자유주의의 "절대적 타자"인 동시에 문명에 "내재하는 적"이다. 자유주의 적과 문명의 적이 결합하여 초국가적인 구성체로 등장 할 때 이들은 현존하는 최대의 위험이 된다. 19세기에 유대주의가 그랬고, 20세기에 공산주의가 그러했다. 오늘날 이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물론 이슬람이다. -268쪽

문화는 서구의 위대함의 일부분이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적 주체는 성숙을 위해 이 문화를 벗어던지고 "세계시민주의"의 입장에 서야만 한다. 문화를 가진다는 것이 뜻하는 이 대립적 함의-도덕적 진보와 도덕적 자율성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과 모순은 우연적이라기보다는 징후적이다. 이러한 모순은 자유주의와 근대성 간의 뿌리 깊은 결합, 그리고 자유의 기획과 이성 및 개인주의가 맺고 있는 유착 관계를 폭로한다. -273쪽

자유주의 하에서 문화와 종교는 사적인 것이고 사적으로 향유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 탈정치화된 것이다. 마치 가족이 그렇듯이, 문화와 종교는 정치적 인간과 경제적 인간의 "배경"으로서만 가능하다. -274쪽

자유주의는 문화를 정치적 권력과 분리된 영역으로 만드는 동시에 정치를 탈문화적인 영역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이중의 움직임은 자유주의 법질서를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 문화를 그 자체로 특수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에 종속되어야 하는 원칙에 따라 이제 정치에 ㅔ대한 문화의 종속적 지위가 정당화된다. 이러한 방정식은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이 문화적 제국주의의 형태를 띠지 않은 채 보편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보편적인 것으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은 특정한 문화를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75쪽

비자유주의체제는 문화나 종교가 "지배"하는 곳으로 재현된다. 반면 자유주의 체제는 법이 지배하고 문화는 단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탈정치화된 영역일 따름이다. (...) 자유주의 법질서가 관용을 장려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이며,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관용적인 시민을 양육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 (...) 자유주의 하에서는 거의 모든 실천이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강제된 실천들은 관용의 대상이 아니며 문화나 종교에 의해 지배된다고 여겨지는 체제는 말할 것도 없다. -276~277쪽

문화와 정치, 개인성과 유기성을 분리시키려는 자유주의적 시도의 (풍요로운) 실패를 인정하고, 자유주의를 자신 안에 이미-항상 존재하는 혼종성을 의식하고 수용하는 체제로 변환시키는 작업 (...) 이 작업은 자유주의로 하여금 '우리'와 '그들'이라는 절대적인 이분법, 즉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라는 깃발 아래 제국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 온 가장 중요한 전제 중 하나를 포기하는 길로 이끌 것이다. -282쪽

"나는 관용적인 사람이다"라는 선언은 주체에게 품위와 예의 바름, 절제와 아량, 세계시민주의와 보편성 그리고 폭넓은 시야를 안겨주는 동시에,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부적절하고 무례하며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이들로 구성한다. [각주] 반면 "그녀는 관용적인 사람이다"나 "그는 관용적인 사람이다"는 말은 이간은 계열화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이같은 차이는 스스로가 관용적이라는 자기 확신적 관용이 권력의 효과이자 권력의 전달수단, 즉 지배의 표현인 동시에 지배를 확장하고 정당화하는 요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85쪽

관용은 또한 기독교 및 자본주의 문화와 자유주의 사상이 맺고 있는 긴밀한 관계를 은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관용의 가치는 실제로 기독교 및 자본주의 문화를 보호하고 장려하지만 이 둘과의 유착관계는 부인한다. -301쪽

상이한 믿음과 행위에 대한 관용이 자율성 이외의 다른 가치들, 예컨대 개인의 자유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성과 차이 혹은 문화적 보존 등의 가치와 연결될 수 있다면 어떨까? 혹은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개인적 자유를 문명의 상징에서 탈중심화시켜, 이를 단지 인간 존재의 풍부함과 가능성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이해하면 어떨까? 아마도 이러한 인식은 비자유주의적 관용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줄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자기 확신과 의심스러운 궤변에서 벗어나 자유주의의 실천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318쪽

결국 우리의 입장을 "관용 반대"나 "불관용 지지"의 틀로 가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신에 우리는 대안적인 정치적 발언과 실천을 통해 관용의 현대적 배치가 가지는 탈정치적이고 규제적이며 제국주의적인 효과들과 싸워 나가야 할 것이다. -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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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추리 - 대추리 주민들의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 투쟁기록
대추리 사람들 엮음, 박래군 글 / 사람생각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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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다 모인 모양인데 뭐가 그리 무서운 게 많은지, 방호벽을 둘러싼다, 2부제를 한다, 테러 특급 경계령이다, 생 난리다.  G20 말이다.

얼마 전에 미군기지 때문에 쫓겨난 대추리 주민들이 새로 이주한 마을에서 연 마을잔치에 다녀왔다. 미드에서 봄직한 이쁜 집, 넓다란 정원... 그래도 참 씁쓸했다.

거기서 대추리 주민으로 살며 함께 싸웠던 문정현 신부는 "대추리 투쟁은 과연 우리에게 정부란, 국가란 뭔가?"를 되묻는 투쟁이었다는 말을 했다.  

과연 우리에게 국가란, 정부란 무엇인가? 작금의 서울 풍경만 보면 그야말로 큰 도적놈이란 생각만들 뿐이다.  

참 부끄럽게도 이 책의 본문 디자인을 내가 맡게 되었다(표지는 내가 안 해서 근사하다). 단행본으로는 두 번째로 디자인을 맡은 책이지만 출간은 이게 먼저 되었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잡지 디자인(사실 디자인이랄 게 없는 잡지이지만)을 맡은지 2년, 그래도 초보 티가 팍팍 나서 이 책을 들여다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편집과 디자인을 하는 동안 자꾸만 내 머릿속은 대추리를 향하고 있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아니면 여명 즈음 검문검색이 없는 곳을 찾아 대추리 주변을 빙빙 돌던 일, 빈집을 철거하던 포클래인과 울부짖던 주민들, 허물어진 대추분교에 쌓여있던 눈.  

주민들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고 용서하지 않고 있다. 불과 몇 해 전 이른바 참여정부란 것이,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제 나라 국민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를 기억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야 하리라.

미국을 비롯한 선진자본국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앞잡이로, 때로는 그들의 배후로 암약하고 있는 자본들은 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2010년 오늘도 어떤 책으로 기록되고 기억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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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승자>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사랑의 승자 - 김대중, 빛바랜 사진으로 묻는 오래된 약속
오동명 지음 / 생각비행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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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유명한 사진가 로버트 카파는 너무나 유명한 말을 했다.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라."  

그게 쉽다면 누구나 카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파 같은 사진가는 많지 않고 그런 사진기자는 한국에는 거의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오동명은 그런 사진가였나?  

 

표지에 등장하는 사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시절 시위 현장에서 어느 전경이 던진 최루분말을 얼굴에 맞고 걸어가는 사진이다.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저자 오동명은 그때 자신도 최루분말을 맞았으나 다행히(?) 어느 가정집에서 얼굴을 씻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그러지 못했다. 전두환, 노태우의 저택이 있던 서울 연희동 골목 어느 집도 김대중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김대중은 그의 참모와 한참을 고통스러워 하며 돌아다녀야 했다고 한다. 이 한 장면은 마치 김대중의 고난한 삶을 압축해놓은 것 같다. 이 특종감이라고 생각되었던 사진은 중앙일보 데스크에서 거절당하는 것으로 또 한 번 모욕받게 된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피사체가 된 사진마저도 차별의 대상이 되고 배제가 되어야 했던 정치인.  

저자 오동명은 그를 화장실에서 만난 이후 신문에 실리지 않는 그의 일상을 기록했다. 단순히 피사체로 카메라 앵글에 담은 것만이 아니라 피사체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찍었고 찍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기에 이 사진집은 한 사진기자가 찍은 정치인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사진기자가 묻고 정치인이 답했던 대담과도 같이 읽힌다.  

저자는 지난해 노무현과 김대중의 죽음 이후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읽으며, 그리고 김대중이 국립현충원에 묻힌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오래된 사진을 찾아 이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한 권의 위인전이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책을 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연히 졸고 하품하고 딴청피우는 인간적인 김대중의 사진들이 들어있다. 또한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여러 오해(대부분 악의적인)에 대한 해명과 저자의 생각이 담겨있고 전직 대통령이자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하고 뛰어났던 한 정치인에 대한 저자의 아쉬움과 불만까지 가감없이 실려있다.   

책을 덮으며 저자가 사진기자가 아니었다면, DJ를 비토했던 중앙일보에 몸을 담고 있지 않았더라면, 중앙일보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 만남이 어떤 모양새로 기록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 둘은 만나지도 못했을 것 아닌가.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콤플렉스를 한 몸에 가졌으며(그는 호남이었고 첩의 자식이었으며 상고 출신이었다) 수많은 비방과 흑색선전에 시달렸고, 사형수였으며 장애인(그는 박정희 시절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고 죽기 직전까지 신장투석을 받는 만성신부전증 환자였다)이었다.  

그가 역사 속의 인물이 된지 1년, 그에게는 참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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