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아만 있어줘
조창인 지음 / 밝은세상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을 펼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보는 동안 또 얼마나 가슴이 아려올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지.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아이처럼 비쳐질 지언 정 왠지 모르게 나는 이 책을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
《가시고기》의 조창인 작가의 새로운 소설이래, 보면서 또 눈물이 나긴 하겠지만 보고 싶어서 라며 슬픈 소설을 읽겠다는 나의 의지와 읽는 내내 그 안의 슬픔에 풍덩 빠져 버릴까 염려하던 사랑하던 이의 걱정 어린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손에 넣은 지 4시간만에 독파했다.
우려했던 것처럼, 가시고기를 읽을 때만큼의 눈물은 쏟아져 내리지는 않았다. 이전에 가시고기를 읽었을 때는 표면적인 슬픔만을 읽을 줄 알던 나였다면 지금의 나는 그만큼이나 삶의 무게를 알게 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눈물로만 그들의 이야기를 쉬이 흘려 보낼 수가 없었다. 눈물의 양으로 슬픔의 깊이를 논하자면 가시고기가 더 깊다 하겠지만 ‘살아만 있어줘’ 이 작품이 그의 어느 작품보다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애격의 작품이라 감히 이야기 하려 한다.
삶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만 흘러가 주면 얼마나 좋으련만,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내가 보아도 그것은 그저 바람일 뿐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 소설 속의 그 누구에게도 왜 이토록 서로 가슴 아픈 일들을 만든 게냐고 그들을 원망할 수 없었다. 치기 어린 단순한 감정만으로 그들의 삶을 논하기에는 그들 스스로의 가지고 있던 각기 사랑의 행태가 가진 삶의 타당성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베일에 쌓인 베스트셀러 작가 은재, 그는 작가로서 널리 이름을 알렸지만 실상 그의 인생은 타인들이 꿈꾸는 크리스탈 같이 영롱한 삶이 아니었다. 그가 살아 남아야만 하는 이유를 남겨주고 먼저 떠나 버린 인희를 평생 가슴에 안고 그토록 사랑했던 인희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해나를 곁에 두고도 그는 고작 그들의 그림자로 만족하여 오늘을 살고 있다.
자신의 딸이 태어난 줄도 몰랐던 그는 해나가 태어났을 때 아이의 이름도 지어줄 수도 아이가 자라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해나의 엄마가 삶의 작별을 고한 1년 후 바로 그 날 자신의 딸인 해나가 스스로 다리 위에서 몸을 내던져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는 해나의 앞에 나타난다. 해나 부모님의 친구라는 명분이지만 자신의 핏줄을 지키기 위한 아빠의 마지막 간절함으로, 해나에게는 ‘키다리 아저씨’로 말이다.
해나가 울먹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마지막까지 엄마와 함께 있어줘서……”
그는 어둠이 밀려오는 하늘과 그녀의 묘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인희야. 나, 살고 싶네. 조금만 더 살아서, 해나 곁에 있고 싶네. 가족이란 걸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잖아 나는.
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름도 지어주지도 못했고, 품에 안아보지도 못했고, 아빠 대신 아저씨로 불려야 했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산다고 지나친 욕심은 아닐 거야. –P356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만난 아빠와 딸이지만 은재와 해나가 죽음에 대하는 태도만큼은 너무나도 다르다. 은재는 인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통제하여 오롯이 글로만 인희에 대한 마음을 넌지시 전달하며 하루 하루를 연명해 왔다. 죽지 못해 살아온 그가 딸인 해나를 마주하고부터는 해나와의 시간의 중첩을 위해서, 악착같이 내일이라는 생명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그 어느 즈음이 오늘이라는 시간이라면 이미 은재가 놓인 오늘의 지표는 죽음의 문턱이지만 그에게는 그 문턱 앞에서라도 해나와 함께할 수 있기에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그 일념 하나로 죽음에 처절하게 대항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사실을 알리 없는 해나는 자신이 아직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부인하여 하루빨리 죽음이 도래하기 만을 바라고 있다.
어디서부터 이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얽혀 버린 것일까. 서로에게 살아야 하는 의미로 남고자 맹세했던 은재와 인희의 학창시절에서부터 그 시간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기호의 반란 아닌 반란까지. 은재와 기호의 그들 나름대로의 사랑 방식과 그 중심에 서 있던 인희와 해나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부터 풀어야지 그들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었던 것 일까.
결혼을 약속했던 은재와 인희 사이에 불의의 사고가 없었더라면, 그 당시 사고를 감내하기 위해 은재가 그러한 희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그들의 사랑을 알고 있던 기호가 은재를 포기했더라면 그들 모두는 지금 웃고 있었을까? 그리고 해나는 자신이 모든 불행을 안고 있는 외톨이라는 굴레는 벗어나서 20대의 천진난만한 모습만을 가지고 살았을까?
그의 손가락을 펼쳐 그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낀다. 엄마가 살아있다면 제일 해보고 싶다던 손깍지.
“엄마한테 가서 말해줘요. 당신의 딸이 당신 대신 손깍지를 해줘서 좋았다고. 아주 좋았다고….”
그의 눈귀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또 해나의 말도 전해줘요. 해나가 아저씨 때문에 좋았다고요. 아주 좋았다고요.”-P375
그 모든 물음들을 뒤로하고 뒤틀어져 버린 현실들로 남겨진 오해가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넘어 그리움이란 화석으로 버린 그들은 만약에, 라는 질문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고 있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딸이 혼자서 헤쳐 나아가야 하는 앞날을 위해서 마지막까지 자신이 아빠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다만 살아만 달라는 당부를 하고 홀연히 떠난 인재와 인재가 세상에 사라진 것이라 믿은 그 이후부터 오롯이 그를 대신 할 수 있는 딸, 해나에게 혹여 기호의 눈엣가시가 될까 엄마의 마음을 다 표현 할 수 없었던 인희. 인희만을 바라보며 지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던 기호까지 그들 하나 하나를 다 헤아릴 수는 없다지만 그들 모두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은 자명했다.
그들로부터 각기 다른 사랑을 전달 받은 해나는 이제 홀로서기를 하려 한다. 이전처럼 죽음만은 쫓던 한 소녀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누군가의 간절한 사랑의 결정체라는 것을 알았기에 넘어진다고 해도 이전처럼 외롭지도 누군가를 탓하며 미움으로 가득한 시간들을 보내지도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해나의 바람대로 아빠처럼 멋진 남자친구를 만날 것이고 한 가정의 주인이 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해나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찬미 이모가 해나에게 언젠가 진실을 이야기 해 줄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그려보는 해나는 어떠한 모습이든 간에 방긋 웃고 있을 것이다. 그 모두의 바람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아직도 외롭다. 아직도 힘들고, 아직도 두렵다. 아직도 해나의 내부 어딘가에 깃든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내곤 한다.
그러나 해나는 알고 있다. 그때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그때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하고 그때마다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가 죽어가며, 안간힘을 내며, 필사적을 썼던 한 자 한 자.
겨우겨우 검지를 움직여 가며 쓰고 또 썼던, 해나를 향한 그의 마지막 소원.
넘어질 때마다 해나를 다시 일으키는 그의 간절한 외침
살. 아. 만. 있. 어. 줘.-P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