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 비교하지 않고 만족스러운 삶 누리기
윌 보웬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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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복이 좋은 운수 혹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을 느끼는 상태라는 사전의 설명으로도 모든 것을 포괄하기에는 이 단어에 내포된 것들이 버거울 정도로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객관적인 지표로 나타낼 수도 없거니와 그 무엇보다도 내만이 느낄 수 있는 상태의 것으로 철저히 주관적인 느낌이기에 행복이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뚜렷한 의미를 알기도 전에 우리는 막연히 행복해지고 싶다 라는 바람으로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행복을 쫓고만 있는 형상이다.

행복해 지겠다고 결심한 만큼 행복해진다는 띠지 속 어린 소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저 나도 이 아이처럼 웃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 든 순간 나의 직장 동료는 나를 보며 서글프게 말했다.

책이 너무 슬퍼 보인다.”

행복하다는 주문을 외워야만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이 책을 골랐으려니 하는 생각 때문일지, 혹은 지금 내 자신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해 지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 책을 고른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 책을 집어 든 내 모습이 슬퍼 보인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녀의 안타까운 눈길을 접어두고서는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행복해지기 위한 처세술 정도로 이 책의 가치를 절하시키며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스스로가 나의 행복함의 수치를 깎아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TV속 광고를 보면 그 안에는 신제품이 출시 된 것을 혁명인 듯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만 가진다면 얼리어답터로서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누리며 풍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아름답게 나타나고 있다. 새로 출시 된 최신형 차, 핸드폰 심지어 먹거리까지 광고 속 제품을 하나라도 가지지 않는 경우 마치 우리는 이 시대에 제대로 편승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끼게 된다.

하나의 신제품을 구입했다고 하자. 그것을 가진 몇 일, 최대 몇 주 동안은 그것을 가진 것에 대한 뿌듯함으로 즐거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행복의 정도는 정점에서 다시 평균적인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이라는 정점을 맛보기 위해서 계속 무언가를 사거나 혹은 그것들을 구매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야만 하는 것일까?

2012년도 초 연봉협상으로 인해 작년보다 5% 정도의 인상이 결정되었고 그로 인해 인상된 첫 월급을 받은 그 달은 참으로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늘어난 금액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작년에 비해 이 만큼이 늘었으니 늘어난 금액 만큼이나 무언가를 더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는 생각에 마냥 달콤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2012년 말, 연초의 연봉 인상이 무색할 만큼이나 나는 또 다시 허덕이고 있었다. 그 간의 씀씀이가 더 커진 것도 있을 테지만 늘어난 연봉의 수치는 내 행복의 정도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사다리에 오르기 위해 시작한 몇 걸음에서는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지면과의 높이가 멀어질수록 추락의 공포는 점점 우리를 옥죄어 오게 된다. 사다리타기를 물질적인 것들의 풍족으로 비유하자면 내 것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것이 주는 기쁨은 찰나이지만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하는 시간이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그 이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얻는 것에 대한 기쁨보다는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의 고통을 더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고 싶어, 가 아닌 행복하다라는 자기 최면으로 우리 스스로 행복에 대한 자기 만족의 평균을 향상시키는 것을 저자는 권유하고 있다. 행복이란 실체를 우리 눈 앞에 어떠한 형상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처럼 환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공상과도 같은 것이지만 마음으로 그것이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행복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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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 역발상 리더 사각의 틀을 깨다!
남호기 지음 / 피그마리온(Pygmalion)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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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몸을 이끌고서는 오늘도 회사로 출근을 하고 몇 시간만 버티면 주말이다! 라는 생각으로 오늘을 힘겹게 보내고 만원인 전철에 몸을 싣고 돌아왔다. 명함과 출입증 카드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다짐했던 초반의 신념은 어디론가 슬며시 모습을 감추고 이제는 주중인 5일이라는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고 주말만이 오기를 기다리는, 어느 샌가 업무라는 무게에 눌려 활기는 잃어버린 내가 익숙한 직장인 3년 차다.

평생 직장이 아니더라도 직장 생활을 해 온 시간보다 해 나가야 하는 시간이 몇 곱절은 더 길지만 남아있는 시간에 대한 걱정 어린 우려가 깊어진다.

그렇게 터덜터덜한 일상 속에서 다시 내 삶에 박수를 칠 수 있도록, 세상 속에 다시 힘을 내서 뛰어 들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주는 시원한 바람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식과도 같은 책을 만났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그저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라며 개혁과 혁신, 글로벌화를 외치기 전에 사각의 틀 속에 갇힌 생각을 깨야 한다 라는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봄직한 띠지를 두른 이 책은 상쾌해질 거만 같은 표지와 틀을 깨라는 조언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전력회사의 대표가 집필한 책으로 공기업 하면 들게 되는 고정적인 이미지, 정해진 틀 안에 보수적일 것만 같다는 편견이 팽배한 그 곳에 몸을 담고 있는 저자가 역 발상을 꾀하며 반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널리 퍼트리고자 한다.

어찌하면 이 책의 저자가 전력회사의 사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왠지 딱딱할 내용일 것만 같다는 우려 조차 이미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편견 가득한 시선일 것이다. 네모난 틀 안에만 세상을 가둬 점점 그 안에 벽을 쌓아가고 있는 듯한 내가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그를 만난 것은 오늘 같이 일에 치여 보낸 내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 할 수 없는 각성제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사장실의 풍경. 무언가 위엄 있으며 방 어딘가에는 사장이라는 직위에 어울릴 만한 고풍스러운 장식품들과 손님 맞이 소파가 놓여져 있을 듯한 풍경이라면 그의 사무실은 개인 책상도 없이 큰 회의용 테이블과 칠판만이 자리잡고 있다. 사장실이 사장을 위한 사무실이기 보다는 직원들과 함께 의견을 교류하는 곳이며 일을 하는 장소이기에 안락하고 편안한 휴식처가 아니라 일을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하여 그 스스로가 추구하는 사장실의 풍경이다.

때로는 낯설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인해 오래된 화석처럼 우리의 주변을 감싸고 있다. 어느 대학을 나오셨나요? 가 아닌 이 그림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나요?를 질문 할 수 있는, 무조건 네, 하며 주어진 그대로만이 아닌 왜?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잠시만 쉼표를 안고 눈을 돌리면 어제와 같은 평범한 하루가 아닌 새로운 오늘이 열릴 수 있을 거란다. 사각의 틀은 안전지대가 아니다. 서서히 우리를 잠식시키는 늪으로 변할 수 있다. 조금만 틀을 벗어나면 더 자유로워질 수도 더 즐거워 질 수 있다. 나의 오늘에 박수를 보낼 수 있도록, 나의 일에 좀 더 열심히 도전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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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레드 시간을 여행하는 소녀
케르스틴 기어 지음, 문항심 옮김 / 영림카디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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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여행하는 소녀, 그웬돌린 셰퍼드. 유령과 대화가 가능하던 그 소녀는 내 눈에는 비범한 무언가의 능력을 가진 소녀로 느껴졌지만 그녀의 집안에는 그저 한 명의 소녀일 뿐이었다.

 그웬돌린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유전자를 타고 났다는 샬럿의 뒤를 따라 다니며 그녀가 시간 여행의 문턱 앞에서 보이는 증세들 속에 혹여 샬럿이 사라질까봐 분필을 들고 다니며 종종거리고, 그녀의 단짝인 레슬리와 함께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10대의 발랄함을 가진, 이 소설의 조력자이자 주인공인 샬럿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소설의 화자로서만 그웬돌리를 바라보로 있었다.

 펜싱과 바이올린을 배우고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위해 교양은 물론 비밀 교육을 위해 일정시간만 되면 사라져버리는 샬럿은 그야말로 준비된 시간 여행자였으며 샬럿 역시도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첫 번째 시간 여행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의 운명을 뒤집을 폭풍과 같은 해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 꼬여버린 시간의 매듭은 그웬돌린과 샬럿에게 준비되지 않은, 아니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미래로의 초대장이 전달되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그웬돌린과 선택 받은 자의 삶을 준비해온 샬럿은 한 순간에 그들의 위치를 바꿔야만 하는, 체스의 폰과 퀸의 자리가 한 순간에 뒤바뀐 것이다.

너무나도 평범한, 그저 한 여고생이라 생각했던 그웬돌린은 시간 여행자들인 12명의 구성원 중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처음과 끝을 잇는 루비로서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녀가 보여주는 시간 여행 속 그녀의 모습은 아직은 어설픈 모습이다. 하루 아침에 평범한 여고생에서 시간 여행자의 구성원으로 중요한 임무를 띄게 되었으니, 그것도 준비되지도 않은 채 꿈과 현실 조차 구분 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온 혼돈의 시간을 겪고 있기에 미숙한 그녀의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게만 보인다.

책을 펼친 순간에 내가 10대 소녀가 된 것마냥 책 속으로의 시간여행에 갇혀 버린 느낌이다. 왜 이 책을 펼쳐 보았을까. 기디언과 그웬돌린은 달달한 이야기는 어떻게 될 지, 그웬돌린의 외할아버지가 알고 있다는 녹색기사는 무엇인지, 그리고 백작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지. 게다가 루비가 가진 능력은 무엇일지. 끊이지 않는 물음만 남겨두고 그웬돌린은 사라져버렸다. 언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런지. 시간 여행에 그녀와 함께 나마저 빠져버린 기분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빨리 펼쳐지기만을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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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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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린 중고 서점의 책장 여기저기를 뒤지다 발견한 이 책은, 글쎄 그 어떠한 화려한 표지보다도 제목만으로 끌려서 구입하게 된 책이었다. 짧지만 놀라운 삶이라, 대체 어떠한 삶을 그린 것일까 라는 막연한 호기심과 제목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화려하면서도 멋스러운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에 쉽사리 집어 든 책이었는데 보고 나서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너무 쉽고도 만만하게 보았다는 것을 말이다.

 소설로 치부하기에는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렇다고 현실로 믿기에는 되려 믿고 싶지 않은, 믿기에는 너무 거북스러운 것들이었다. 픽션과 논픽션의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이 소설을 이해하기에는 나는 그들의 삶에 대한 배경 지식이 턱 없이 부족했고 읽어 내려가는 내내 내심 대체 이러한 일들이 지구상에 아직까지 현존할 수 있단 말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의구심으로 현실과 상상의 딜레마에 빠져 꽤나 고된 시간들이었다.

 푸쿠. 그들은 그들이 지나왔던 그 어둠의 터널을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어두운 장막 속에서 마수와 같이 그들의 삶을 짓누르는 그 모든 것들을 저주,  푸쿠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단순히 푸쿠라는 두 글자에 담기에 그들이 겪어야만 하고 지내온 삶이 너무도 가혹하다 만은 그들 스스로는 단지 푸쿠일 뿐이야 라는 태도로 그들의 삶을 꿋꿋이 이어오고 있었다.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그 곳에서 태어났기에 그들이 마주할 수 밖에 없었던 생을 이어오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하거나 피할 수 없었기에 이미 내 손에서 해결 할 수 없는 저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달관한 듯이 그들은 오늘을 살고 있었다.

 원하는 버튼을 누르는 것 마냥 내가 살고 싶은 나의 삶을 고를 수만 있다면야 그 누구든지 역경 없이 평탄한 삶을 고를 것이며 그들 역시 지금이 푸쿠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닌 평이한 인생을 누리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생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푸쿠라는 것이 그들과 떼어낼 수 없는 하나가 되어 버림으로써 이미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만약 그들로 태어났다면 나 역시 이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에 대해 수 차례 반문해보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푸쿠를 그저 한낱 푸쿠로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모두 독재자인 트루히요의 소유가 된다. 그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이것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 정해지는 운명인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트루히요에게서 지키기 위한 한 남자이자 아버지인 아벨라르는 나름의 운명을 저항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보았지만 그에게 남겨진 현실은 황망하기만 하다. 사랑의 결실을 원하던 벨리에게 돌아온 것은 사탕 수수밭에서의 끈질기고도 모진 매질이었으며 그 아들마저 벗어날 수 없었던 푸쿠의 되물림은 오스카에게 이어진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암담했던 역사를 되새김질 하며 그 안에서 살았던 그 이야기를 하는 유니오르는 저자를 대변하면서도 철저히 그 시대를 살았던 증인으로서 그들의 삶을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다. 너무도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음에서도 그 스스로는 되려 별거 아니야, 라는 식의 어조는 되려 강하게 뇌리에 스치게 된다. 대체 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닐 수 있는 거지? 그들에게 있어서 끔찍한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대체 무엇이길래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세상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라는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스카를 처음 만난 그 시점부터 그를 보내야 하는 때까지도 멈출 줄 몰랐다.

한 편의 소설이라기 하기에는 정제되지 않은 거친 물을 마시는 기분이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마시고는 있지만 마시는 내내 왠지 더 숨이 턱턱 막혀 오는 듯한 느낌이다. 푸쿠를 동반자로 하여 암울했던 시대를 살았던 그들의 삶을 소설로 각색하여 미화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천연 그대로의 빛을 만날 수는 있으나 그 빛이 영롱해 지기까지는 내 나름의 이해를 위한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도미니카의 푸쿠. 과연 지금은 사라졌을까? 오스카처럼 그 누군가의 인생은 푸쿠로 인해 멍에를 안고 살지 않기를, 그들의 살아야만 하는 삶이 오스카처럼 굳건히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푸르게 빛나길 바라며 그들의 푸쿠가 이 소설에서 마지막 등장이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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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의 연구실 - 우주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상상의 요람 데이바 소벨 컬렉션
데이바 소벨 지음, 장석봉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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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동설과 지동설. 과학 시간에 단 몇 페이지의 분량으로 배웠던 이 교과서 속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되살아났다. 현대의 과학으로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이 옳다는 것이 이미 밝혀진 진리이기에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변모하는 그 역경의 시간에 대한 것보다는 결과론적으로 지동설이 옳다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그 근거들을 배우는 대만 급급한 시간을 지나왔다. 천동설이 굳건히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수 많은 시간을 비집고 지동설이란 씨앗이 발아하기까지의 그 험난하면서도 격정의 순간들에 참관의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레티쿠스 :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라고 여호수아가 했던 말을요.

코페르니쿠스 : , 물론이지. 누구나가 아는 구절이 아닌가.

레티쿠스 :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멈추어라!”

함께 : “태양이 머물렀도다!”

레티쿠스 : 맞습니다. 참사회원님. 태양이 머물렀지요. 그리고 그게 그의 요점입니다. 왜냐하면 참사회원님이 말씀하신대로 태양이 이미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 여호수아가 태양이 머무르도록 명령을 내릴 수 있었겠습니까? –본문

 

나라의 운명이 행성의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던 시대였다. 세계는 흙, , 공기, 불로 이루어졌으며 달이나 다른 천체는 에테르라는 변화하거나 파괴되지 않는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들고 프톨레마이오스를 존경해 마지않던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상을 뒤집어 지구는 우주의 한 조각으로 고정되지 않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품기까지 그 스스로는 엄청난 혼돈의 시간을 보냈을 터이다.

 움직이는 지구에 서 있는 것은 그 혼자만이었다. 모두가 지구를 중심으로 이 세계가 움직이는 것이라 성경을 기반으로 하여 이미 진리로 받아들여져 있는 그 당시에 참사회원인 그가 그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만으로 지구 속의 세계뿐만 아니라 그가 믿고 있던 세계는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지동설이 맞다 라는 것을 오랜 시간의 관찰로 밝혀냈으나 그는 쉬이 그 내용을 세상에 알릴 수 없었다. 교구의 외압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반대론자인 루터파들에게도 이 내용은 그저 한낱 우스개 소리에 불과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천동설을 의심하지 않고 천명이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코페르니쿠스이 밝혀낸 진실은 유포되어 세상에 빛을 바라기엔 그 당시의 세상은 그의 속도에 비해 너무 더디게 돌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유일한 제자였던 레티쿠스의 만남이 희곡의 대본과 같은 형식으로 쓰여져 있었는데 이 부분은 읽는 내내 그들의 진실을 향한 긴장되면서도 설레이는 현장에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레티쿠스 : 모든 별들이 움직였습니다. 별들이 돌고 도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코페르니쿠스 : 아니야, 별들은 움직이지…..

레티쿠스 : 굉장했어요.

코페르니쿠스 : 돈 것은 바로 자네야. 별들이 돈 게 아니지. –본문

 코페르니쿠스를 만나 세상의 이치를 다시금 깨닫고 배우는 그 순간들, 레티쿠스는 그가 그 동안 알고 있던 세상을 변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내가 알아왔던 세계가 실은 허구였다는 것을 어떻게 하루 아침에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들을 마주하면서도 그는 마지막까지도 움직이지 않잖습니까!” 움직였다면 바람으로 느끼거나 자신 스스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믿을 수 없다며 끝까지 항변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수 백 년의 진리를 진리가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밝혀내기까지 코페르니쿠스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관찰하고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의 제자를 이해시키는데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세상 모두를 이해시키기까지 그 몇 갑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숙고한 동안 창조주가 창조한 세계의 움직임을 철학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하여 연구를 매진하게 되었다는 그의 담대한 고백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는 세상에 대한 도전이자 대항이었다. 한 줄의 진리가 자리잡기까지 그가 홀로 버텨온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진정 제대로 돌고 있는 지구 안에 자리잡고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일 게다.   한 문장의 과학이 탄생하기까지 시간을 역행하여 지동설의 산고를 몸소 느끼며 그 동안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마주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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