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묘지에 사는 남자
피터 S. 비글 지음, 정윤조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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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묘지에 사는 남자, 라는 제목을 보면서 대체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라는 호기심이 절로 일어났다. 그 어느 장소든지 사람이 사는 것에 대해서 들어본적이 있는 듯 했지만 공동묘지에 사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한 적이 없는대다가 수 많은 장소 중에서 대체 왜 공동묘지여야만 했는지에 대한 물음이 이 책을 펼쳐보게 만든다.

 "묘비만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아무 데나 묘비를 세워놓고 그 아래 엄마가 묻혀 있다고 말해주면 하나같이 그냥 믿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묘비뿐이에요. 묘비만 있으면 다들 그 돌덩이 앞에 가서 '미안해요, 엄마. 내가 나빴어요.' 하고 울먹거리죠. 진짜 무덤이 아니라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아요." -본문

 망자에게는 안식을,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먼저 떠나간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마련되어 있는 묘지는 하나의 공간 안에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는 독특한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죽음의 강을 건너본 적 없는 우리에게 있어서 공동묘지라는 공간은 세상을 등진 누군가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이며 그들의 기억을 오롯이 담아 두는 지구상의 마지막 장소가 될터인데 그럼에도 때론 그 장소는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을 뛰어 넘는 유령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내는 두려움의 공간으로도 변모되는 곳이기에 그리움과 두려움이 함께하는 묘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산 사람에게 있어서 공동묘지는 해가 떠있는 시간에만 허락되는 장소처럼 여겨지고 어스름이 지는 무렵에는 살아있는 이들이 있어서는 안될 곳으로 생각되는 곳이기에 이 공동묘지에 19년이나 살왔다는 조너선 리벡은 그야말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묘령의 한 남자로 등장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물론 그에게 일용한 양식을 전해주는 까마귀와도 소통이 가능한 남자인데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그는 어떤 사연을 안고 이 안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키며 살았던 것일까.

 처음에는 나름대로 알차게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이내 인생을 낭비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이클 모건이라는 인간의 존재를 구성했던 모든 요소를 기억해내고, 하나하나 세어보고, 무게를 달아보았다. 각각의 요소들은 저마다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그 요소들을 한데 모아놓은 존재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가도, 조금 뒤에는 그 반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죽은 덕분에 ㄷ그는 지금껏 겪은 일들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한때는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버렸다. -본문

 꽤나 유명한 약제사였지만 사람들의 삶에 조금씩 스며들어가며 약제사를 넘어 사람들을 치료하려했던 그는 오히려 세상에 버림을 받게 된다. 사람들을 치유하고자 했던 순간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격리 당했던 그는 조용히 공동묘지에 들어서게 되었고 그렇게 19년 동안 숨죽이며 공동묘지에서 살아가는 동안, 리벡은 까마귀와 친구가 되고 수 많은 유령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최근에 이 곳에 들어온 아내의 독살로 억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마이클과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서 이 안에 묻히게 된 로라를 통해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어떻게 떠오르게 되는지에 대해 그들을 통해 자세히 그려놓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상상이 담겨진 것이겠지만, 로라와 마이클을 통해서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막연한 그들의 이야기는 애틋하면서도 때론 그들 나름의 삶이 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전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리벡은 클래퍼 부인을 만나게 되면서 세상을 등지고서 살았던 그의 19년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보며 앞으로 이러한 삶을 계속 살아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계속된 상념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묵직하기만 하다면 고루한 이야기로 치부되겠지만 이 안에는 담긴 이야기는 유쾌함과 그 안에 담긴 나지막한 삶의 이야기를 가볍게 담아놓고 있어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기게 된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지금의 나는 어디에 서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살아있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의 경계는 명확하게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 의미를 넘어 이 이야기는 구태여 그것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 않다. 생과 사의 중간, 그 안에는 모든 이들의 삶이 담겨 있다.

 

P.S. 이 책을 읽는데 물리적인 시간은 1주일이 걸렸으나 실제 읽는대는 3시간 남짓이 소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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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 찰스 디킨스저 


 

 

독서 기간 : 2015.04.1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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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의 초상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6
로버트 네이선 지음, 이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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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덜터덜 길을 걷고 있던 한 남자의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난다. 재잘재잘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고 있던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을 보노라면 요 근래에 아이들이 입고 다니는 옷의 느낌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신고 있었던 구두마저도 지금의 것이 아닌 이전의 것 같다는 알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갈 때 즈음 소녀는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홀연히 사라지게 된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가 뭔지 아시겠어요?” 소녀는 물었다.
몰라내가 대답했다.
소망놀이랍니다.”
가는 그 애가 가장 소망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제가 자랄 때까지 선생님이 기다려 주셨으면 해요.” 소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진 않으실 테죠, 아마.” 눈 깜짝할 새 소녀는 돌아섰다. 그러고는 몰 가 아래로 조용히 되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거기 서 있었다. 이윽고 나는 더 이상 소녀를 볼 수 없었다. –본문

평범한, 아니 그보다는 가난한 화가였던 이벤은 미지의 소녀인 제니를 만나고 나서부터 화가로서의 명망을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제니를 화폭 안에 담고 나서부터 변화된 것으로 희한한 일은 제니는 나타날 때마다 우리가 아는 시간의 진리를 거슬러 너무도 빠르고 신기할 정도로 훌쩍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까 그녀는 처음에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에서 소녀로, 소녀에서 숙녀로 급작스럽게 변화하게 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이벤의 모습은 거의 변화되는 것 없이 상대적으로 제니만 변화되는 모습은 무언가 신비스러움을 전해주게 된다.

비록 내가 그녀를 만나지 못해 쓸쓸하긴 했어도, 또한 그녀에게 도달할 수는 없었다고 해도 내가 전혀 그녀 없이 지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기억이 점차 더욱 날카로워졌음을 발견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억이 내게 속임수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과거 속에 살기 시작했다기보다 오히려 과거가 더욱더 뚜렷하고 실제적인 현재의 형태를 취하고 나의 대낮의 사고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반대로 현재는 점차 조금씩 몽롱해져서 나로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본문

폭풍을 넘어 허리케인이 몰아치던 날, 제니와 이벤은 마주하게 된다. 무언가 더 애틋함으로 가득하길 바랐던 그들의 만남은 안타까움을 가득 남긴 채 종결되어 버린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지? 라는 냉철한 질문 따위는 던져버리곤 그저 애잔함을 남기게 하는 이 이야기를 보며 그 무엇도 이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겠지만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오히려 그들을 처연하게 만든다. 이벤과 영원히 함께 있을 때 돌아오리라 약속했던 제니는 이제 이벤의 마음 속에서 평생 함께 하는 것일까? 이 풀리지 않을 이야기가 답답함을 느낄 틈도 없이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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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 / 츠츠이 야스타카저 


 

 

독서 기간 : 2015.03.2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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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 대한민국 스토리DNA 1
이광수 지음, 이정서 편역 / 새움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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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를 넘어 세계의 역사를 돌아본다고 해도 이토록 통탄할 역사가 없었을 것이라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보면서 계유정난의 일을 국사 책 속에서 배우긴 했다만 그 문제에 대해서 무언가 심도 있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 듯 하다권력 앞에 눈이 먼 수양대군의 폭군과 같은 모습에 두려움에만 떨었던 것이 잠시그 이후에 나는 조용히 교과서를 덮고서는 그 이후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역사 속의 한 사건으로만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재작년 개봉했던 영화 <관상속의 수양대군의 역할을 했던 이정재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포악했던 모습이 스크린 속에서는 오히려 부각되는 것을 보면서 그저 환호성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볼 것이 아닌 실제의 그 날을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이 책을 조심스레 펼쳐보게 되었다.

왕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두 학사는 무슨 말씀이 계실 것이라 여겨 자연스럽게 왕이 좌우로 한 걸음쯤 뒤쪽에 섰다왕은 몸을 돌려 두 학사를 그윽이 바라보다 말했다.
 “
경들에게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나를 섬기던 충성으로 이 어린 손자를 섬겨 다오.”
 
그 목소리는 심히 무겁고도 슬픈 빛을 띠었다왕의 두 눈에는 눈물까지 빛나는 듯하였다그에 젊은 두 학사는 전신이 찌르르하여 굽힌 허리를 오래 들지 못했고목이 메러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본문

 세상이 더 없이 축복이 가득한 원손의 탄생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마냥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그도 그럴 것이 현재의 세자가 효심 가득한 장손이기는 했으나 그의 몸이 병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세자의 아우들 중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존재의 위험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 세자와 원손의 세상이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그렇기에 세종은 이 축복 가득한 순간뒷날 드리울 암흑과 같은 그날을 염려하며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대신들에게 자신의 손주를 자신과 같이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나지막이 던지고 있을 것이다.

 찬란한 조선의 역사를 꽃피운 세종대왕의 그늘이 사라지고 아버지였던 문종마저 사라진 지금. 5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에 단종의 힘이 되어줄 사람들을 모두 떠나 보내고서는 왕상의 자리를 홀로 지켜야 했던 단종이 느끼는 압박감과 두려움은 감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그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단종을 지키기 위한 김종서와 그의 측근들이 그의 주변에 있다고 한들권력을 가지고자 하는 탐욕으로 가득한 수양대군은 교묘히 자신의 세력을 점점 키워가고 있었고 왕좌에 앉아있는 것은 단종이지만 영의정을 넘어 병조이조판서를 동시에 위임하고 있는 수양대군은 조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점차 그의 야심을 키워나가는 것을 보노라면 권력 앞에 드러나는 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에 대해 마주할 수 있다.

“나더러 부왕께서 전하여 주신 왕위를 버리란 말이야그것이 대신이 할 말이야그것이 어느 성경현전에 있는 신하의 도리야정인지의 목에는 칼이 들어갈 줄을 몰라?
왕은 용안이 주홍빛이 되고 발을 굴렀다.
 “숙부가 이제 정인지를 시켜 이런 말을 하게 한단 말이냐? (중략요망한 늙은 것이 오늘따라 가장 충성이 있는 듯하기로 무슨 소리를 하는고 하였더니언감생심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냐이놈네가 선조의 녹을 먹고 고명하심을 받았거든 이제 이심을 품으니 천의가 없으리란 말이냐누구 없느냐이 역신을 끌어내는 놈이 없단 말이냐!” 하는 왕의 두 눈에서는 원통한 눈물이 흘렀다. –본문

수양대군의 야망을 이루는데 있어서 눈엣가시였던 이들은 한명회의 살생부 명단 위에 하나 둘 기록되면서 단종의 병풍으로서 자리하고 있던 이들마저도 점점 사라지게 된다뿐만 아니라 수양대군의 형제들은 수양과 같은 이단을 꿈꾸는 이를 척결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참혹하게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모습을 보노라면 과연 권력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먹먹함만이 밀려들게 된다.

 

 끝끝내 자신의 자리를 수양에게 넘겨 주어야 했던 단종은 결국은 영월로까지 유배 생활을 떠나게 된다한 나라의 왕이었던 그가 왕위를 빼앗긴 것으로 모자라 유배 생활에 올려져야 했고 그를 다시 왕의 자리로 복귀하려 노력했던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며 결국 수양의 손에 죽음의 길을 걸어야 했던 조선의 비운의 왕이었던 그는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한 채 차가운 강물에 던져져야만 했다.

 과연 그는 살아생전 큰 소리로 자신의 목소리를 지를 기회조차 있었을까그저 계유정난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바라보기에는 단종의 삶이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권력이라는 정치 놀음 속에서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던 그를다시금 깨울 수만 있다면그는 그의 삶을 뭐라 말할지책을 덮는 순간에도 먹먹함만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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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님 여의옵고 / 이광진저 


 

 

독서 기간 : 2015.03.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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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
앤 비티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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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을 읽다 보면 드는 생각. 그래서 그 뒤에 이야기는 어떻게 됐을까? 라는 풀리지 않는 호기심은, 더 이상 두드려도 아무도 나올 이 없는 덩그러니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 한 채를 마주한 느낌이다. 아무리 뒤져 보아도 더 이상 나타날 것이 없는 그 진공의 상태에 남겨진 듯한 기분이기에 단편은 늘 아쉬움을 함께 전해주는 듯 하다.

 이번 <온전한 나로 살지 않는 상처> 역시 단편을 묶어 놓은 책인데, 각 이야기마다 딱히 명확한 줄거리가 있다거나 그 안에 강렬한 사건이 있거나 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마지막이 정갈하게 정리된 듯한 느낌은 아니면서도 묘하게 이 책은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힘이 있다. 대체 뭐가 좋은 것일까, 라고 고심해 생각한다 하더라도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냥 좋다, 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이 이야기는 정형화되지 않은 그 만의 매력에 다음 이야기를 또 읽게 한다.

<온전한 나로 살지 않는 상처>의 주인공 엘런은 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남편과는 별거 상태에서 이혼을 위한 준비를 하나씩 해 나가고 있다. 당시 엘런의 여동생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던 대학생 샘과 매제와의 관계가 불편해짐에 따라 샘은 엘런과 함께 살게 되는데 30대의 엘런과 20대의 샘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무언가 색다른 광경 속에서 생경함과 신선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된다.

엘런은 샘의 방을 청소했다. 샘이 로스쿨에 입학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기꺼이 청소를 맡았다. 샘은 정리할 시간이 없으니까. 또 다시 남자 뒤치다꺼리를 할 마음은 없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샘은 청소를 해 주면 매우 고마워했다. 처음 엘런이 청소를 해 주었을 때 샘은 다음 날 꽃을 선물하면서 그러실 필요 없다고, 거듭 고맙다고 말했다. 바로 그 점이 달랐다. 엘런은 해 줄 필요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샘이 고맙다고 말하면 엘런은 청소를 더 해주고 싶었다. –본문

 이들의 이야기가 질척거리는 사랑이야기로 변모되었다면 아마도 읽는 내내 불편했을 것이다. 그들이 집이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있고 서로에게 위로를 전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플라토닉 사랑을 맺고 있다고 말하는 엘런의 말처럼, 엉뚱한 샘과 그런 샘으로부터 자신을 위안해가는 엘런은 조금씩 정상이라는 궤도 속에 자신들을 올려 놓을 수 있도록 서로를 다독여주고 있다. 사랑, 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미적지근하고 그렇다고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적당히 따스한 이들의 이야기는 시도해 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어요?” 라는 대담한 메시지를 전하는 샘의 방랑으로 인해 끊어진 듯 하지만 여전히 서로의 마음 속에는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먼 음악소리>의 잭과 샤론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는 연인이다. 아직 잭이 샤론에게 함께 살자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잭이 어머님의 유품을 그에게 선물하는 것은 함께 살자는 말보다도 더 큰 의미를 전해주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게 믿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도 거스 그릴러를 통해 잭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삐걱거리게 되는데 분노로 점철되어야 할 이 상황을 생각보다 차분하게 대처하는 샤론과 잭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이란 이름의 또 다른 면을 마주하게 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이혼하지 않는 거야?”
부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전부 다 이혼해야 된다고 생각해? 나만 논리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게 아니야. 당신도 이런 하수구 속에 살면서 악몽이나 꾸는데도 여기서 벗어나려 들질 않잖아.”
그건 달라.”
잭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이혼 생각 안 했어. 미라는 엘파소에 있어. 나를 떠났다고. 그걸로 끝인 거지.”
그럼 이혼할 거야?”
그럼 나랑 결혼할 거야?” –본문

 뉴욕을 벗어나기 싫어하던 샤론과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잭은 서로가 더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기를 원치 않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았던 것일까. 이제는 가끔 연락만 하고 지내는 그들의 추억 속에 남겨진 서로의 기억들이 다음 사람에게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사랑은 사라졌을 지 언정 그들의 추억은 또 다른 곳에서 움트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나는 아버지가 죽어 가고 있는 줄 몰랐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 알았지만 죽음이 뭔지는 몰랐다. 단순한 일을 쉽게 이해한다. 낯선 이가 건네주는 편지를 읽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일이나 힘이 없는 사람을 친절하게 도와주는 일은 쉽다. 나는 아버지가 허리를 구부리던 모습을 기억한다. 통증으로 구부정해진 등.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 돌아가셨는데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항상 겨울눈처럼 창백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본문

 <당신은 나를 모른다>의 이야기는 서로 함께하고는 있지만 미적지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린과 마틴의 모습과 바니스의 고백을 보면서 순간순간을 나누고 함께한다고 해서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가까이 여겼던 이들, 예를 들어 부모님, 남편, 애인 등과 같이 나와 바로 곁에 있는 이들일수록 오히려 그들에 대한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많다는 것으로 늘 곁에 있기에 안다고 여기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는 것은 사뭇 서글프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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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빌라 / 전경린저


 

 

독서 기간 : 2015.03.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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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
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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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눈알사냥꾼>을 읽고서는 그 동안 안고 있던 스릴러 소설에 대한 편견을 모조리 벗어 던졌기에 그의 새로운 책인 <차단>을 너무도 고대하고 있었다. 과연 이 안의 이야기는 무엇이 담겨 있을지, 또 다시 그의 이야기에 빠져 놓치고 있던 단서가 마지막에 가서야 아! 하는 감탄과 함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한 줄의 문장도 허투로 넘기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집중해서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궁금증이지만 과연 이 사회는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탄식이 점점 커져만 간다.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법이기에 그 안에는 허점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은 했다. 그러나 이 안의 이야기를 바라보면 볼수록, 가해자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철저한 보호를 받고 있는 반면 피해자는 법의 테두리 안에 있기는커녕 오히려 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아니 법이라는 이름의 무력함을 고스란히 마주하고서는 감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삭혀야만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과연 이 모든 것이 괜찮은 것인가, 라는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이야기가 한 권의 소설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치부하기에 내가 땅을 딛고 사는 이 사회가 드러내는 추악한 현실은 모른 척 이 모든 것들을 넘기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헤르츠펠트가 주의를 끌 만한 발견에 대해 그의 동료들에게 막 알려주려던 찰나, 숫자 아래로 여섯 개의 작은 알파벳 글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미경을 통해 공포 반응을 관할하는 뇌의 부분인 그의 편도체 안으로 곧바로 뛰어 들어왔다. 맥박이 뛰었고 이마에 땀이 흘렀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와 동시에 헤르츠펠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제발 우연이기를.’
 
토막 난 시체 머리에서 꺼낸 쪽지에 쓰인 알파벳들을 조합하면 하나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나(Hannah).’
그리고 그것은 그의 열일곱 살 된 딸의 이름이었다. -본문

 연방수사국의 법의학자인 파울 헤르츠펠트는 무거운 몸을 안고서 검시소로 들어서게 된다. 잉골프 폰 압펜과 함께 부검을 집도하는 그는 어제의 일로 컨디션이 정상 궤도에 있지 않은 그에게 드리운 시체는 무참하게 살해된 한 여성으로 그럼에도 그는 덤덤히 오늘 그가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가 그 안에서 캡슐을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범죄의 단서라 생각했던 그가 캡슐을 열어보는 순간, 이혼 후 오랜 동안 떨어져 살았던 딸이 심상치 않은 일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번호를 누른 그는 자신을 향해 구해달라 애원하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서는 그는 모든 이성은 놓아 둔 채 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그는 길을 나서게 된다.

 그렇게 서두르지 말아야.”
앤더가 그녀를 다시 불러들였고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뽑아 들었다. 거기에는 병원 전체 열쇠뿐만 아니라 만능키 한 개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문이 열리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이렇게 막무가내로…..”
 
그녀가 침입이라는 단어를 말하기도 전에, 엔더가 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린다에게 그를 따라 들어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 사항이 없었다. -본문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남자친구였던 대니 하크의 지독한 집착과 스토커에 벗어나기 위해 헬고란트란 섬에 들어 온 린다가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곁을 맴도는 것은 물론 점점 그녀를 옥죄어 오고 있다. 두렵다 못해 섬뜩한 그의 행태들을 신고한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오빠의 조언대로 섬에 들어오게 되지만 샤워를 마친 후 그녀가 마주해야 하는 상황은 여전히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아득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뛰쳐나간 그녀는 바닷가 근처에서 한 구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고 그 가방 안에 있던 휴대 전화 속 전화 목록을 따라 통화를 시도한 끝에 그녀는 헤르츠펠트와 함께 이 사건 속으로 함께 들어오게 된다.

 딸을 구해야 하는 헤르츠펠트의 간절함이 린다를 이 사건에 발을 들이게 하게 된다. 그리하여 린다가 발견 한 시체 속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힌트는 헤르츠펠트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로 돌아보게 하는 것은 물론 그 동안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의롭게 살아왔던 그로 하여금 과연 법은 무엇이며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계속 던지게 한다.

 하지만 채팅방 과거연결기록 중 마르티넥이 지난 며칠 동안 지속적으로 여러 번에 걸쳐 연결을 시도했던 곳이 하나 더 있는 걸 볼 수 있었어요.” 
 
거기에 대해 헤르츠펠트가 추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잉골프가 이미 터치스크린 상의 링크 하나를 두드렸으며, 회전하는 모래시계가 모니터 중간에 나타났다.
 
연결이 성공적으로 구축되었다고 알려주는 명쾌한 신호음이 들리기까지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최초의 눈 내리는 듯한 장면들이 화면에 보이기까지 10초였다. 
 
그리고 헤르츠펠트가 벙커처럼 생긴 지하방을 보고 숨이 막힐 듯한 비명을 지르기까지도. –본문

 세금을 탈세한 이들에게는 그에 준하는 형벌을 내리지만 성범죄 범죄자들, 특히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끔찍한 죄를 짓는 이들에게는 그 범죄자들이 안고 있던 트라우마를 기반으로 형이 감량되고 때론 형벌조차 면제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과연 이 사회가 말하는 법과 정의는 무엇인지에 대해 되물어 보고 싶어진다. 빙빙 돌아가는 린다와 헤르츠펠트의 이야기는 붸붸 꼬여버린 이 사회의 단편을 보여주기에도 부족하다는 듯이 빠르게 이야기는 전개되고 그 이야기들을 넘겨 볼수록 먹먹한 분노만이 치밀어 오르게 된다.

 실제 판결문이 인용된 기사들을 보며 과연 이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끓어오른다. 죄를 지은 이들에게 그에 맞는 철저한 형벌이 내려지기를, 그리고 더 이상 고통 받는 이들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본다.

 

 

아르's 추천목록

 

눈알사냥꾼 / 제바스티안 피체크저


 

 

독서 기간 : 2015.03.05~03.08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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