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끈이란 오묘하여 미(美)를 추구하는 이에게 회색의 서슬퍼런 얼굴울 쥐어주기도 한다.

그렇듯 세상이 다 이런저런 이름으로 치유되는 역설은 인열을 얻지 못해 망망대해를 방랑하던

어느 오후의 슬픈 자아와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혼자 듣는 라흐마니노포의 파가니니 주제

에 의한 광시곡은 그런 인연을 이어 놓을 만큼 분절적이고 또 피상적이다. 아무런 마음을 지니지

못한 무심한 어느 스님의 발자욱 만큼 무서운 복수는 없으니, 아마 세상이 지금껏 이리도 휘몰아

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건 그런 복수와 치유의 자기 부정적 자유를 동반한 도피의 산물일 것이다.

그래서 가을의 열매는 푸른 산만큼 시고 또 가슴에 저리고 지리고 맴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소의 에밀은 아이들을 위한 인류의 지침서라고 불리울 만큼 사려깊고 따스한 책이다. 하지마 장자크 루소는 이 에밀이라는 책의 저자라고 불리우기 무색하게도 자신의 아이 다섯 명을 고아원에다 맡긴 인물이다. 근자에 읽은 광기와 천재라는 책이 말하길 루소의 이러한 부조리는 어른으로서 세상을 감당할 정신의 미성숙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희대의 천재 사상가에게 있어 정신의 미성숙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그의 정신적 범위가 형이상학적인 분야에 특화돼 있다는 면에서 볼 때 그의 세속적 정신의 굳셈은 타인에 비해 상당히 무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루소는 어릴 때 부터 조숙하여 어른과 비슷한 사고수준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숙함이 후기에 있어서 평균으로의 회귀 현상과 맞물려 점점 유아적 행태를 띄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균형점이 아닌 유아성의 양태에 더 가까운 정신의 편중현상은 낳은 원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루소의 이중성과 부조리함을 언급하는 이유는 사상적 천재에게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왜소함과 나약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광기와 천재라는 책에서는 루소 뿐만이 아니라 하이데거와 미셸푸코, 히틀러 등이 나온다. 파놉티콘이란 근대의 지적 발명품을 현대에 널리 전파시킨 미셸푸코에 대해서는 동성애라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조금씩 왜소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삶을 알 수 있었다. 히틀러 또한 어릴적 아버지로 부터의 학대와 그의 그림 실력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 그리고 폐인처럼 지냈던 청년기를 통해 그의 삶을 관통하는 비이성적 분노와 억압적 자기표출 기제에 대하여 알아 볼 수 있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비트겐 슈타인에 관한 것인데 그는 히틀러와 거의 동시대 살았으면서 또한 히틀러가 그렇게 싫어했던 유태인이였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워낙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서인지 열등감이라는 분노기제가 상대적으로 덜 했고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뼈대만 남은 진실에 관한 열렬한 욕망 뿐이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열등감을 가질 분야는 오히려 또 다른 천재들이라 부를 수 있는 그의 남매들 뿐이였다. 비트겐슈타인의 강한 자신감과 신적인 카리스마는 지극히 옳은 것에 천착하는 그의 강력한 지적의지와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자기 확신이 있었기에 형성 가능한 것이였다. 그 외에도 이 책에서는 많은 천재들을 언급한다. 물론 세상이 보기엔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고결하지 못한 군상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진정 천재만이 보일 수 있는 사회적 일탈과 더불어 나타난 사회와의 부정합성 이였다.

  정신적 문제를 가진 대부분의 천재에겐 대부분 유년의 트라우마나 애정결핍과 같은 심리적 기본 욕구가 불충족된 경우가 많았다. 천재의 특성은 아마도 어느한부분에 있어서는 현저히 떨어지는 그들의 불완정성일 테다. 괴테의 '천재를 꿈꾸며 고뇌하는 젊음에게' 라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젊은 베르테르의 아픔이 쉽게 전이된 이유는 그 시대의 사람들 또한 스스로를 천재라 여기며 그의 내면의 깊이를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불만족과 결합된 것 때문이 아닐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두가 치열하다. 삶을 위해. 삶이란 그저 자기 만족을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지만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쌓인 요즘 사람들에겐 전혀 다른 나라의 이야기다. 하나 둘 늘어가는 걱정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상위 집단에 속하기 위한 무차별적 흐름은 속세를 등지고 살았던 죽림칠현에 현세에 재림한다 해도 딱히 피해가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요즘 세상의 흐름은 너무 빠르다. 무엇을 위한 삶인지 모르는 아니 모르게 만드는 사회적 시스템 하에서 사람들은 외롭고 굶주리고 또 애정을 갈구한다. 성장이나 분배라는 정치적인 단어 대신 여유와 나눔이라는 단어가 주류 이데올로기가 됐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언젠가 나 조차 어느 사막에 떨어져 홀로 물을 찾는 방랑객이 되더라도 눈물 한움큼 흘리지 않고 일사병 걸린 군중들에게 참 도움을 주고 싶은 여행객이 되고 싶다.

 바람이 딱히 누구의 마음도 시원스레 하지 못하고 모랫바람만 날리게 하더라도 그 바람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가졌으면 한다. 낙타의 등 위에서 홀로 유람하는 가진자들에 대한 나같은 자들의 분노를 식혀줄 것은 오아시스의 물 한모금이 아니라 그런 바람에게 가지는 감사의 마음일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불행해지는 삶의 모순의 울타리에서 조금은 벗어나자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행복하다면 누군가는 상대적 빈곤감에 의해 갑자기 불행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모두가 조금은 기꺼이 불행의 몫을 나누어 가지자. 그리고 세상의 중심에서 다같이 한번 뛰어 올라 보는거다.

 혹시 아나.. 그러다 보면 지구의 내핵과 외핵이 그 발길질에 혼비백산하여 현 세계를 뒤집어 놓을지.. 그러면 다들 제가 뛰어오른 그 한움큼의 땅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선지자들의 지혜를 오롯이 가슴에 새겨 담을지.. 그러면 이 치열하고도 목적없는 물결속에서도 우리는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고즈넉히 살다가 고즈넉히 가면 그만인데 왜그리들 힘들게 사시는지..' 참 있어 보이는 말이다. 내가 한 말은 아니고.. 누가 한 말인데 속세를 초월한 듯한 그의 말투에 비위를 상하게 하는 거만함이 느껴진다. 편하기 위해 힘들게 사는 현대인의 역설을 그 사람은 아실지.. 아신다 한들 먹고 살만한 혼자만의 가업이 따로 있기에 그런 말을 내 뱉으시는지.. 아니면 뭔지. 

 아무도 개미의 노동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부러워 하는 것은 그 노동 뒤에 보장되는 따스한 겨울과 풍성한 식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밥 좀 빌어 먹자고 열렬히 치열한 군상들에게 독야청정 한듯한 식자들의 고담준론은 베짱이의 바이올린 무반주 소나타보다 더 저속할 뿐이다.

 그리고선 모두가 행복을 향해 나아간다.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판단의 일련의 모임들이 하나의 탑을 이루어 그들의 인생을 반추해볼 만큼 충분히 그 높이가 커졌을 때 개인은 생각한다. 과연 그때의 나의 선택은 정말 최선이였나.. 반성과 후회가 이웃하여 나란히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면 삶에 대한 열렬한 애정 보다는 무거워져 가는 어깨의 무게감에 한숨을 내쉬기 마련이다.

 그리고선 돌아갈 수 없는 옛 추억에 몸을 의탁해 하나 씩 현실의 무게를 줄여 나간다. 버리고 또 버리다 보면 시인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에 나오는 원전 형태의 자아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애절한 마음으로 누구도 보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승무를 춘다. 날아라.. 날아라.. 훨훨~ 얇은사 하이얀 고깔이 고이 접어 나빌리는 그런 애틋하고 아름다운 승무가 아니라 아이를 잃고 장이 뒤틀어 졌던 그 단장이란 고사의 주인공인 원숭이의 표정과 마음으로 승무를 춘다.

 하나씩 벗기고 또 버리고 하다 보면 윤동주님의 싯귀에 나온 부끄럽고도 그리운 나의 자화상이 보인다. 그리곤 죽음보다 강렬한 나르시즘에 빠져 야상곡에 귀를 기울이며 해가 좀 더 늦게 뜨길 기원하며 이불을 몰아쥔다.

 가끔 그런 잡생각에 머리가 아파 잠이 깰 때는 이런 통속적인 글귀에 마음의 비계 덩어리를 실어 이글이글 구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덜 굽혀도 내 살이고 바싹 타도 내 살이기에 햇살 맑은 날 다시 보면 비록 역겨워 지더라도 그런 화식(火食)을 빙자한 인육의 카니발도 썩 괜찮은 행위다. 그리곤 맘의 홧톳불에다 대고 이렇게 얘기하면 오늘의 숙면은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고기는 익혀 먹되 야채와 같이 먹는 습관을 들이며 될 수 있는한 많이 씹어 위에 부담이 되지 않게 하고 탄 부위는 먹지 말아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flotsam 2007-09-02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계붙은 삼겹살.
잘 얻어먹고 간다ㅡ
 

 리뷰하나 쓰는 동안 방문자수가 60명이 되었다. 어떻게 된건지 몰겠다. 누가 날 스토킹 하고 있나 보다. 예전에 용호가 나를 기쁘게 해준다며 나 몰래 내 싸이 방문자수를 300여명 가까이로 만든적이 있었다.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100번 정도 해서 그렇게 했다던데.. 이것도 용호가 하는 짓인가? 근데 글을 수정하는 10여초 사이에 30여명이 늘고 다시 무엇을 검색하다 새로고침 해서 30여명이 방문한걸 보면 용호 혼자만의 소행은 아닌 것 같다. 뭐지.. 그나저나 방학이 끝나간다. 나는 담주엔 제주도로 놀러간다. 남들은 취업 공부한다고 하루에 12시간씩 공부한다는데 나는 취업에 관련된 공부는 한달에 12시간씩 하는 것 같다. 이번달 들어 전공책을 펼쳐 보지 않았으므로 8월 한달간 만은 그럴법 하다. 남들 공부하는 시간에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은 안들지만 너무 안일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고등학교 때 2년 동안 영어 공부를 바짝한 이후로 영어 공부도 거의 안하고 있다. 오늘 네이버 보니까 영어 실력이 소득 격차와 연관이 있다던데.. 영어 공부를 안한게 아마 수능때 영어 셤을 망친 이후로 잘 안한 것 같다. 만점자가 수두룩 할때 상위 10프로 안에도 못드는 성적이 나온이후로 영어공부를 할 때마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발작하는게 아닐까 한다. 교내 영어 경시대회에서 1등도 하고 텝스 성적도 800점 가까이 나오던 시절이라서 영어는 다 맞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난 셤 운이 없는 것 같다. 모의고사에서 하나만 틀려도 스스로에게 화가 났던 시절에 그렇게 셤을 망쳤다는 건 정말 운이 없는 것 같다. 그때 이후로 영어 공부를 하루에 한시간 씩만 했어도 영화대사를 거진 다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영화 대사를 알아듣기는 정말 어렵다. 예전에 굿모닝 팝스 들었을때는 안들려서 대사를 다 외우곤 했는데 요즘은 그러기도 귀찮다~ 어이야 뒤야~~

 아무래도 내가 이렇게 띵가띵가 거리고 놀고 있는건 그래도 프리토킹까지는 가능한 영어 실력과 잡다한 것에 대한 지식과 글빨과 더불어 혼자 자랑스레 생각하는 내 센스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들 공부하라고 그러는데.. 난 놀면서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회나가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일이다. 영혼의 피폐함은 부의 증식을 낳고 육체적 쇠락을 낳을 터인데.. 돈되는 공부를 정녕 해야하나.. 몰겠다. 케익 먹은게 이제 소화된 것 같다. 이제 잘 수 있겠다. 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