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절판


다들 열성적으로 채웠다. 그러더니 번쩍 일어나서 다른 트레이를 잡았다. 현장 주임이 내 뒤로 걸어왔다.
-자
그는 나를 가리켰다.
- 이 사람은 벌써 생산량을 맞추고 있어. 두번째 트레이를 반이나 했잖아.
나는 아직 첫번째 트레이를 하는 중이었다. 현장 주임이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하는 건지 감이 오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앞서 있다고 하니 느긋하게 하기로 했다.-86쪽

한편 조이스와 제라늄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내가 버틸 수 있는 한 2백만 번은 해야했다. 조이스와 파리떼와 제라늄. 나는 야간 근무로 열두 시간을 일했고, 조이스는 낮 동안에 어떻게든 한번 하려고 나를 주물러 댔다. 그녀가 손으로 해주는 동안 나는 졸다가 깨다가 했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든 하긴 해야 했다. 이 불쌍한 여자는 미쳤으니까.-87쪽

새 두마리가 새장 문을 보았다. 저것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할까, 못할까. 저 조그만 머리들이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음식과 물이 여기 있긴 한테 저 열린 공간은 뭘까? 빨간 새는 훨씬 더 오래 망설였다. 새는 초조하게 새장 바닥을 거닐었다. 결정하려니 머리 터지겠지. 인간이건 새건 모든 것은 이런 결정을 해야 한다. 어려운 게임이다. 그래서 이 빨간 새는 서성거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노란 햇빛, 윙윙나는 파리떼,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개, 무엇보다 하늘, 그 모든 하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빨간 새는 철사 쪽으로 풀쩍 뛰어 올랐다.
3초.
휙!
새는 사라졌다.
피카소와 나는 빈 새장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잉꼬쪽

미국 전역 사무실에는 일종의 놀이가 있다는 거야. 사람들이 지겹거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사무실에서 로맨스 놀이를 하는 거지. 대부분 시간 죽이는 것 말고는 별 의미가 없어. 가끔은 부수적으로 한두 번 붙어먹기도 하지. 하지만 그때도 볼링이나 텔레비전, 신년 파티처럼 되는 대로 여가를 즐기는 식이야. 그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상처받지 않을 거야. 내 말 알겠어?-조이스에게쪽

그동안 잰코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이 자식은 나를 죽이고 있었지만 나는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했다. 그때까지 거쳐 온 다른 직업들을 떠올려 보았다. 매번 미친놈들이 달라붙었다. 그들은 나를 좋아했다.-162쪽

그날은 무지막지하게 힘든 일요일이었다. 페이의 친구들 몇몇이 놀러왔는데, 소파에 앉아서는 자기들이 정말로 위대한 작가라는 둥, 이 나라에서 최고라는 둥 떠들어댔다. 그들 작품이 발표되지 않는 이유는 오직 작품을 투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들 말로는 그랬다. 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커피를 마시고 킥킥거리면서 도넛이나 뜯는 처지들이 생긴 대로 글을 쓴다면 작품을 보냈든 처박아 놓았든 별로 달라질 바가 없을 것이다.-184쪽

어쩌면 페이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침착한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더러운 접시를 씻지 않고 놔둔 것과 <뉴요커>나 보며 빈둥댄 것과 작가 워크숍이나 다닌 것 모두를 용서하기로 했다. 이 나이든 여자는 이 무관심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존재일 뿐이었다.-191쪽

<존스톤을 물에 빠뜨리자는 계획을 말하는 모토>
모토는 똥구멍부터 눈썹까지 활짝 웃었다.-231쪽

어쩌다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난 아이 양육비도 내야 하고, 술값, 집세, 신발, 양말 따위도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중고차라도 있어야 하고 입에 풀칠도 해야 하고 자질구레한 무형의 필수품도 필요하다.
여자들이라든가.
아니면 경마장에서 보내는 하루라든가.
그렇지만 모든 것이 위태롭고 빠져나갈 출구가 없으면 그런 생각조차도 들지 않는다. 우정 사업 본부 건너편 거리에 주차를 하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길을 건넜다. 회전문을 밀었다. 자석에 끌려가는 철 조각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2층이었다.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있었다. 우정사업 본부 직원들. 한 여자는 불쌍하게도 팔이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 영원히 있겠지. 나처럼 늙은 주정뱅이가 되는거나 다름없다. 뭐, 다른 동료들이 말하듯이 어디에서라도 일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게 노예의 지혜였다.-232쪽

별로 달라진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곧 깊은 바다에서 너무 빨리 나온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특수한 유형의 잠수병이었다. 나는 조이스가 길렀던 빌어먹을 잉꼬들과 다를게 없었다. 새장 안에 갇혀 살다가 문이 열리자 날아 올랐던 것이다. 마치 천국으로 쏘아올린 총알처럼. 그런데 빠져나간들 천국일까?-사직 후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연회는 별로다. 부가적인 즐거움이래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 뿐. 책으로만 보던 사람의 음성을 듣고 얼굴을 보고 그가 하는 말을 직접 듣는 것 말고 강연회가 책보다 더 지적인 자극을 준다고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정희진 선생님 강의는 직접 듣는다면 숑 반하겠지만) 하지만 한번쯤 엄기호씨의 강연은 들어보고 싶다. 강의를 진행한 내용으로 만든 책에서도 그가 하는 말이 또렷한데 실제로는 어떨까란 궁금증. 만날 기회는 요원하지만 이렇게 가끔씩 인터뷰 특강 형식의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정동 문예아카데미의 팔로우 특강에서 엄기호는 자신이 낸 시험문제를 통해 공부하는 방법과 공부를 경험하는 방식에 대해 얘기한다. 요약하느라 애썼다. 그만큼 어느 문장 하나 버릴게 없는 글이다. 호불호로 따지자면 엄기호, 정혜신, 정희진의 글이 좋았다. 김진혁씨는 그의 저작에서 더 나아간 내용이 없었고 강신주의 '매 맞는 아내가 어느 날 안 맞았더니 우리 남편이 기력이 쇠했나'란 생각을 하더란 부분에선 답답했다.(이것을 여성주의 시각으로만 재단하고 불편하게 본 건 아닐까란 생각만 하고 있는 중. 전체적인 맥락에선 무리가 없지만 깨어있지 않음을 꼭 이런 식으로 비유해야하는지 의문) 조국의 강연은 이슈화된 몇몇 내용만 다뤄 실속이 없었다.



  엄기호는 시험을 볼 때 오픈 북에서 전화찬스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시험을 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시험이 공부한 것을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공부를 압축적으로라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어떤 개념을 배웠는가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그 개념들로 나는 이 사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정말 이 사례를 살아 있는 언어로 배운 것인가를 정말로 점검하면서 쭉정이를 키로 까부르는 시간을 만드는게 그가 정의하는 시험이다. 다음은 그의 시험 문제다.


 가출을 해서 노숙자가 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가 돈이 떨어지면 또 연락을 해서 돈을 받는 일이 계속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굉장히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만나서 달라고 하다가 다음에는 전화로 달라고 하다가 그다음에는 문자로 계좌번호만 보내면서 돈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 돈을 빌리러 다니는 아이로부터 우리 시대의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동시대성이 보여 주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발견하고, 그 문화적 특성 속에서 어떤 조언이 필요한가를 쓰고 그 이유를 밝혀라.


 이 시험문제를 낸 이유는 이 친구를 ‘우리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예외적인 현상으로 볼 것이냐’를 묻기 위해서이다. 이 친구로부터 어떤 문화적 특성 또는 우리 사회가 경향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문화적 특질을 추출해 낸다면 그건 우리 사회의 경향성 문제이지만 이 친구의 개인적인 특성에 의한 것이라면 심리 치료나 정신의학적 치료가 훨씬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하이데거가 얘기한 ‘세계 내 존재’라는 의미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세계라는 건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는 게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주장이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세계가 창조된다. 이걸 응용해서 얘기하면 이 친구는 지금 사람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자기가 돈을 달라고 요청하는 친구들 사이에 있지만 이 친구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라는 건 오로지 돈과 문자, 즉 보편화되고 디지털화되어 있는 관계인 것이다. 시험문제의 그 친구에게 돈을 입금하면 그 친구가 받는 건 통장에 찍히는 숫자밖에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친구는 엄밀하게 얘기한다면 ‘세계 내 존재’가 아니다.


 들릴 권리, 권리는 관계의 방식이지 나 혼자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권리는 세계가 있을 때만 존재한다. 유령은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이다. 인권은 나의 고통을 사회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회에서, 내 고통을 드러냈을 때 내가 모욕 받지 않을 수 있는 사회에서 구현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상처와 고통의 위기와 위험은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을 드러냈을 때 어떻게 대접받는지의 여부이다.


  노숙자가 된 아이의 선배에게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일러줬다고 한다.


 찾아올 때마다 밥은 주겠다. 밥 한 끼라도 얻어먹으려면 사람을 만나야 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만나서 배려의 말, 아니 잔소리라도 들어야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너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고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고 했다. 유령 상태에서 벗어나기 말이다.



이어 책의 취지에 맞는 공부 자체를 경험하는 것에 대한 내용.


 경험은 보편화, 일반화되는 것에 굉장히 격렬하게 저항하는 걸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매체를 거치지 않고서는 무엇을 향유할 줄 모른다. 여행을 가서 내가 감상을 하고 향유를 하고 너무너무 좋아서 돌아서기 싫은 안타까운 마음에 사진을 찍었을 때 그게 진짜 사진이 된다. 진짜 경험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우연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연을 우리 삶에서 추방하고 있다. 내 삶에 우연이 개입했을 때 흐트러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스케쥴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우리가 주체가 된다는 것, 뭔가를 경험하고 향유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는 게 불안하다.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우리 삶에서 우연이라고 하는 걸 추방하고 싶어 한다. 경험에는 우연이 개방되어 있기에 가장 핵심적인 위험은 바로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경험은 체험이 아니다. 체험은 새로운 걸 알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

 

 우리의 경험이 우연에 열려 있을 때 우린 극단적으로 경험이 없는 걸 경험한다. 그걸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건 ‘경험’그 자체다. 아무것도 못 했다는 것에서 경험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경험할 수 있는 것 말이다. 두렵기 때문에 경험이 죽어 버린 시대를 살 수 밖에 없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경험을 했을 때는 추상화가 될 수 없다. 지나가 버리는 것에 격렬히 저항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격렬히 저항해도 그 순간은 지나가 버린다. 그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게 바로 죽음이고 결국 영원한건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우연의 순간이, 경험의 때가, 카이로스의 시간이 희박하다. 그런데 이런 순간이 내 삶에 왔을 때, 내가 허투로 보내는 게 아니라 그걸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갈고 다듬을 수밖에 없다. 공부를 하기 위해선 공부 자체를 경험해야한다.  산들바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깨어 있어야 한다.



 














덧붙여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란 책 제목의 의미


- 너희가 말하는 청춘은 도대체 언제 가능한가. 청춘은 도대체 뭔가. 그 조건을 말하지 않으면서 청춘이 아니라고 말하는건 얼마나 권력적이고 폭력적인지 반성하라.


- 왜 꼭 청춘을 물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가 이 모양 이 꼬라지인 건 동시대 모두의 문제. 20대가 투표 안 해서 벌어지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결국 동시대의 짐을 같이 나누어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젊은 사람들한테 책임 회피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엄기호의 새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작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경험하며 그러한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쓴 글이길 바란다. 요즘 읽고 있는 '육아전쟁'은 경험을 언어화하는 측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는 그야말로 최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머큐리 2012-03-2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박스에 있는 시험문제 얘기는 '우리가 잘못산게 아니었어'에서도 나온는 이야기에요...^^ 신촌 숨책에서 만난 엄기호씨는 수줍으면서 지적으로 보이는 청년 이미지던데... 엄기호를 잘 아는(?) 친구 말로는 굉장히 까불까불(?)하다는...ㅎㅎ

Arch 2012-03-28 09:47   좋아요 0 | URL
그래요? 그럼 '우리가 잘못산게 아니었어'를 읽었다면 뭐야, 엄기호씨 울궈먹은거? 이랬겠네^^ 수줍으면서 지적이다니! 후와~ 그런 타입 참 좋은데~ 까불이, 까불이. 그런 면도 좋은데요. 어쨌든 당분간은 그냥 책으로만 그 사람을 아는게 좋을 것 같아요.

빵가게재습격 2012-03-27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대박! 추천 백방 누르고 싶어요! 언니 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

Arch 2012-03-28 09:48   좋아요 0 | URL
빵가게님, 그럼 백방 눌러주세요.

이 댓글에 깜짝 놀랐지만 뭐가 최고인지 얘기를 해주셔야죠. 그래야 구체적으로 어깨도 으쓱하고 그러죠.

2012-03-27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8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뭐라도 되겠지 - 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서재에서 김중혁 붐이 일었다. 그때 나는 김중혁이 누군지 모르고 관심도 없었지만 '사람들이 저렇게 좋아하는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거야'라는 생각에 그의 책을 읽지도 않고 그의 유머에 담뿍 빠져들었다는 식의 글을 쓴적이 있다. (아치, 대체 왜) 기대보다 껄렁해서 재미 없었던 '대책 없이 해피엔딩'과 그의 단편집에서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의 면면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노력한다고 좋은점이 찾아지진 않았다.


 사람들이 김중혁을 웃기다고할 때, 나도 웃기는 부분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나 홀로 소주 한병씩 들이키며 달을 본건 아니고 우연히 이 책을 봤다. 단박에 그의 글이 좋아진건 아니지만 김중혁이란 사람이 궁금해졌다. 취미로 카메라를 사면서 이런 글을 쓰는 40대의 한국인 남자 말이다.


씀씀이의 규모를 생각하면 마땅히 싸구려 렌즈를 사야 했지만, 그리고 사진 실력을 생각하면 싸구려 렌즈조차 과분한 것이었지만, 나는 기어코 고급 기종의 카메라 렌즈를 사고야 말았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평생 동안 좋은 붓을 질릴 정도로 써봤기 때문일 것이라 확신하며, 셀 수 없이 많은 붓을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평필이 된 것이라 추측하며, 돈을 지불했다.


 다단계의 합리화와 그 합리화를 뻔뻔하게 수긍하지 못하는 미세한 균형감. 나와 다른 사람의 글이 좋아 열광 할망정 공감할 수 없는건 동 떨어진 어떤 세계는 내가 죽었도 깨나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남다은이 <감독, 독립영화를 말하다>에서 김곡(영화를 시나리오가 아닌 이미지로 인식하는 방식)과 인터뷰를 해도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계급 지향이나 사회적 지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의 글들을 읽을때면 다름에서 오는 긴장감이 좋지만 이해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김중혁은 살짝 다르다. 누구처럼 모르는 노래 얘기를 하지 않고 다른 누구처럼 미묘한 감성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책을 좀 더 읽어보기로 했다.


 김중혁은 빈 수레의 삶을 지향한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늘 그런 무소유의 정신으로 산다기보다는 항상 요란하니까. 요란하고 분주하고 시끄럽고. 그 덕분에 김중혁의 글은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잔치가 됐다. 말하자면, 소문난 잔치. 거기 먹을 게 있으려나? 아니, 이 책에 건질 게 있으려나.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추천사니 이렇게 쓸 수밖에. 건지겠지, 뭐라도 건지겠지. 마음이 착잡하다.


 애석하게도 김연수의 추천사는 이 책의 백미다. 이 책의 온도는 딱 이 정도 같다. 이 정도의 유머와 이만큼의 빈틈. 김중혁의 발명과 그라는 사람의 이야기. 조목조목 따지고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현실인식이 없는건 그나마 다행이다. 대한민국 40대 남자의 현실인식이라면 꽤나 낭만적일텐데 다른 나라의 아우라 강한 소설가들에 비하면 평이하다. 공감은 가되 작가의 태도에 푹 빠질 정도는 아니다.


사람들을 하나의 단위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자 주위가 달라 보였다. 저 사람은 어떤 단위로 쓸 수 있을까. 잘 걷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이름(홍길동이라고 치자)을 단위로 쓰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야, 나 오늘 밖에 나갔다가 38길동이나 걸었잖아. 죽는 줄 알았지 뭐야.


 물론 이런 깜찍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정말 '종종' 보인다. 뭐라도 되겠지라며 태평한 생각을 하다간 이곳저곳을 떠돌다 객사할 것 같은 세상에서 이렇게 한가한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다. 그런데 바꿔 생각하면 모두가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덤벼도 누군가는 낙오되는 시스템이라면 한가하게 잡담나누는 것도 방법 같다. 김선우의 책을 읽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어떨까란 생각을 해봤다. 하고 싶은게 없으면 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우는거다. 실패자들의 벤치마킹이 이뤄지고 너도나도 실패해보겠다고 경쟁을 한다면? 먹고 사는 문제를 공동체가 해결해준다면? 그리고 그리고......


 뭐라도 되겠지, 빈수레 김중혁의 글에선 건질만한게 없다. 안타깝게도 그와 나는 취향이 다르다. 다만 그의 책을 읽고나니 한가한 생각들,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요란한 빈수레다. 





사족: 책이 좋다는 글은 거리낌없이 쓸 수 있는데 좋지도 싫지도 않은 글은, 좋아하는 사람이 다수인 작품에 대해선 뭐라고 말해야할지 애매하다. 책 읽는게 다인 독자랍시고 평점을 매기는게 미안하고 같잖지만 별세개를 줬다. 최근 G씨의 에세이를 읽다  뒷목 잡고 쓰러질 정도의 언해피함을 느낀터라 상대적으로 이 에세이가 괜찮아 보였다. 출판사에서는 별로인 에세이를 이름값으로 출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름값 못하는 에세이' 같은 페이퍼도 괜찮겠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2-03-2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목 잡고 쓰러지게 만든 G씨...는 누굽니까? 나한테만 살짝 알려줘봐요.

Arch 2012-03-27 14:35   좋아요 0 | URL
아휴, 다락방. 비판은 아주 섬세하고 조목조목 수긍가게 해야하는데 제가 그럴만한 소질이 없어서 실명 쓰는걸 망설였어요. G면 김씨는 아니겠죠? 이럼 다락방이 다 알겠구만.

다락방 2012-03-27 15:09   좋아요 0 | URL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요!!


2012-03-27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7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7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7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03-27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G씨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가 아니라 알 것 같아요 ㅋ
저는 아치님과는 달리 <뭐라도 되겠지> 정말 좋게 봤답니다. 그러니가 초반부에는요.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면서, 와 이 사람 정말 대책없이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생각했어요. 복잡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답니다. 억지로 뭔가 하려고 하기보다는 지금 이 시간들을 즐기는 그만의 방식이 좋아요. 물론 딱히 건질 것이라고는 없는 책이라고 저도 생각하지만...^^;;
그래도 지치고 심심할 때 지하철에서 읽기에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Arch 2012-03-27 15:58   좋아요 0 | URL
진짜요? G씨가 뭐라하면 어쩌죠!

저도 편했어요. 너무 편해서 강박처럼 책을 끝까지 읽던 것도 잊고 2/3쯤 읽다 그만뒀지만. 책을 읽고 뭔가를 남겨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이 책을 안 좋아하는거라면 그건 좀 아니다란 생각이 들면서도 그 정도 강박도 충족시켜줄 수 없는 책쯤이야란 콧방귀도 뀌고 싶지만 난 그렇게 대찬 독자가 아니니 살짝 물음표만 동동.
술술 잘 읽히고 가끔씩 귀여운 부분은 있었어요. 그럼요!

비로그인 2012-03-27 22:09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2/3쯤 읽다가 덮었어요. 누구라도 그래도 되는 책인 거 같아요 이 책은...
작가님이 좀 실망하시려나... 아마 알고 쓰셨을 거에요 ㅋㅋ

Arch 2012-03-28 09:59   좋아요 0 | URL
그래도 혹시 이 글과 댓글을 본다면 속상할 것 같아요. 아마 안 보겠죠?

2012-03-27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8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윤상 작곡, 김이나 작사

 

 MV가 근친상간을 상징하는게 아닌가란 논란도 있지만 아이유 팬까페에 가보면 조목조목 그게 아닌 이유가 나온다. 그닥 와닿진 않지만. 은유적이고 아름다운 가사와 오랜만에 보는 윤상이 반갑다.

아이유의 다른 노래 뮤직비디오 때깔도 좋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참 예쁘다.

남들 다 좋은날 듣고 다닐 때 좋으면 얼마나 좋겠냐 했는데 뒷북답게 요즘에서야 하나, 둘 준비한 다음 내지르는 3단 고음에 빠져있다. 이럴줄 알았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2-03-26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7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옥찌들과 잘 지낸다고 자신할 수 없다. 이 문제는 a와 b, 관심을 보이는 몇몇의 사치스런 관점과 원만한 눈길에 따라 종종 다른 결론을 보여준다. 김규항은 단순하게 보수적인 부모는 당당하게 학원을 보내고 진보적인 부모는 불편한 낯으로 학원을 보낸다며 이 둘을 가른다. 그의 글이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너무 확고하다. 그런데 생활과 사람 맘이 무 자르듯이 명쾌하게(무, 생각보다 잘 안 잘린다) 잘릴 수 있을까.


 얼마 전부터 지희는 '이 색이 무엇이냐'란 질문을 영어로 어떻게 하는지 묻는다.(What color is it? 인데 What color it is?라고 알려준 아치) 영어 시간에 원어민 선생님이 와서 영어로 말을 하는데 자기는 하나도 모르겠다고, 아이들은 어느 정도 하는 것 같다며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거였다. a와 b는 당장 학원에 보내자고 했다. 아이가 친구들에게 기가 죽고 상처받으면 안 되니까. 영어 수업하기 전에 지희에게 3학년이면 영어를 배울텐데 방과후 교실이나 다른 기관에서 하는 영어 공부를 할거냐고 물어본적이 있지만 지희는 영어를 공부하기 싫다고 했다. 지희는 영어 공부가 싫지만 영어 수업시간에 창피하니까 영어 공부를 하려는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럴땐 어떻게 해야할까.


 모든 아이들이 선행학습을 받고 부모들은 내 아이가 옆집 아이만큼(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지만)은 하길 바란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 아이에게 뭘 해줘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를 때가 더 많다. 학벌사회니까 아이들을 경쟁시켜야 한다는 사람도 많겠지만 한편으로는 내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다만 경쟁을 선택했다면 최신 메뉴얼로 갱신된걸 눈 딱 같고 따르면 되지만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 이러 저러한 상황마다 뭐가 최선인지 헷갈린다.

 

 














 내가 선택한, 혹은 선택할 수 없어 주어진 인생이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고민이다. 귀농을 한 농부시인 서정홍의 산문집을 보다가 정말, 이럴 때는 어떡하나 싶다.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가난 때문에 아이가 친구들과 영화 한편 보지 못하고 얼버무리며 집으로 돌아설 때, 그 부모 맘은 어땠을까. 내가 농담처럼 시골 들어가서 산다고 할 때마다 현실감각 있는 친구는 누가 갑자기 아프면 어떡할건지, 아이를 낳는다면 어떻게 할거냐고 묻는다. 궁리해낸 답은 있다. 불안은 보험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아이를 안 낳을거란 말은 못하겠지만 아이의 행복에 관한 것도 기준의 문제라고. 어쨌든 궁리를 해야한다.

 

 며칠 전부터 미술 수업을 받는 지민. 누나도 옆에 있겠다, 가끔 이모도 보이니까 맘이 놓였는지 이름으로 캘러크래피 만드는걸  끝내놓고 교실에서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지민이가 돌아다니니 다른 아이들도 돌아다닌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될까. 선생님은 칭찬 스티커를 안 주는 벌을 준다.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했더니 원래 첫시간엔 안 그러는데 (지민이가 유별나다란 말을 빼고)... 지민인 왜 그럴까, 왜 그럴까. 그러다 이 책을 봤다.


 어렸을 때부터 산만했다는 김중혁씨. 그는 산만함 때문에 꾸중을 들어서 산만해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단다. 그러다 그 역시 고미 타로의 책을 보고 띵한 충격을 받았단다.

 

고미 타로<어른들(은, 이, 의) 문제야>

‘저는 마음이란 산란해지기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란해지지 않는 마음은 이미 마음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마음 심이라는 글자를 좋아하는데, 특히 그 글자의 생긴 모양이 시선을 모읍니다. 권이나 군 같은 글자는 획들이 모두 확실하게 붙어 있지만 심은 각각 떨어져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산만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마

음을 갖지 말라는 뜻이며, 깜짝 놀라고, 두근거리고, 용기 없이 우물쭈물하는 등의 인간적인 감정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민이의 산란한 마음. 나랑 선생님이, 주위에 있는 어른들이 재미있게 본다면 좋지 않을까, 란 민폐 돋는 생각은 잠시. 지민에게 또 돌아다니면 미술 못한다고 겁을 주었다. 


 지희에겐 가끔 영어 동화책을 읽어준다. 처음에 영어가 너무 배우고 싶다고 한 것에 비해 열의는 사그라들었다.(옥찌는 나의 분신) 자기는 영어 선생님 제임스 티쳐랑 노는게 좋다고, 맨날 영어 시간이면 좋겠단다. 고민은 크고 구체적으로 살아나가는 일들은 게을러지기 일쑤다. 대안을 찾을 수 없고 즐겁게 지낼 궁리도 안 떠오른다. 결국 이런 페이퍼가 나온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인 2012-03-21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제가 고미 타로의 팬인 이유가 있다니까요. ㅎㅎ

Arch 2012-03-21 14:28   좋아요 0 | URL
^^ 산란한 맘을 이해해주는 어른들이 많았음 좋겠어요.

치니 2012-03-2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김규항 글을 그다지 잘 읽지 않는 이유를, 저기 든 예에서 깨달았다면, ㅎ 좀 과장이긴 하죠? 단순하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쉽지만, 경계에서 어그적거리는 느낌을 주지 않아서 시원하지만, 마음이 동하지는 않아요. 김규항 트위터 팔로우하다가 만 이유도 거기에 있는 거 같아요. (본문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얘기만 계속 하는군요, 제가. 아이고)

학원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고 안 보내는 채로 죽 아이를 키웠는데, 지금 이 글을 읽고 보니 저 자신 신념이 확고해서라기 보다는 아이가 먼저 학원 가고 싶다고 한 적이 없어서, 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학원 안 가도 재미있는 게 일상에 많으면 대부분의 아이는 만족하는 거 같아요. 하지만, 학원 = 경쟁, 이라는 식은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학원에 가야만 아이가 즐겁다면야, 그 또한 아이 의사를 존중해줘야죠. 물론 우선 좋은 학원을 고르는 데 엄청난 힘이 들겠지만. ^-^;

Arch 2012-03-21 14:36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신념이 확고하고 의지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고민하지 않았겠죠. 내가 잘 하는걸까, 혹시 고집을 피우는건 아닐까란 생각이 드니까 헷갈리고 그러거든요. 김규항의 확고함은 답답하지만 때론 이런 저런 이유로 합리화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도움이 되는 것 같고...

저도 한쪽으로 생각한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선행학습이나 교과를 알려주는 학원이 아닌 악기나 운동 학원엔 호의적이었구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건 아이란걸, 가끔 까먹어요. 학원을 고르는 데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는데서, 갑자기 피곤함이...^^

아, 진중권의 아이콘을 보는데 김규항씨 부분에서 스믈스믈 웃겼어요. 추천해준 치니님 고마워요. 다른 꼭지도 괜찮았거든요.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진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