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는 별로다. 부가적인 즐거움이래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 뿐. 책으로만 보던 사람의 음성을 듣고 얼굴을 보고 그가 하는 말을 직접 듣는 것 말고 강연회가 책보다 더 지적인 자극을 준다고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정희진 선생님 강의는 직접 듣는다면 숑 반하겠지만) 하지만 한번쯤 엄기호씨의 강연은 들어보고 싶다. 강의를 진행한 내용으로 만든 책에서도 그가 하는 말이 또렷한데 실제로는 어떨까란 궁금증. 만날 기회는 요원하지만 이렇게 가끔씩 인터뷰 특강 형식의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정동 문예아카데미의 팔로우 특강에서 엄기호는 자신이 낸 시험문제를 통해 공부하는 방법과 공부를 경험하는 방식에 대해 얘기한다. 요약하느라 애썼다. 그만큼 어느 문장 하나 버릴게 없는 글이다. 호불호로 따지자면 엄기호, 정혜신, 정희진의 글이 좋았다. 김진혁씨는 그의 저작에서 더 나아간 내용이 없었고 강신주의 '매 맞는 아내가 어느 날 안 맞았더니 우리 남편이 기력이 쇠했나'란 생각을 하더란 부분에선 답답했다.(이것을 여성주의 시각으로만 재단하고 불편하게 본 건 아닐까란 생각만 하고 있는 중. 전체적인 맥락에선 무리가 없지만 깨어있지 않음을 꼭 이런 식으로 비유해야하는지 의문) 조국의 강연은 이슈화된 몇몇 내용만 다뤄 실속이 없었다.



  엄기호는 시험을 볼 때 오픈 북에서 전화찬스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시험을 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시험이 공부한 것을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공부를 압축적으로라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어떤 개념을 배웠는가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그 개념들로 나는 이 사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정말 이 사례를 살아 있는 언어로 배운 것인가를 정말로 점검하면서 쭉정이를 키로 까부르는 시간을 만드는게 그가 정의하는 시험이다. 다음은 그의 시험 문제다.


 가출을 해서 노숙자가 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가 돈이 떨어지면 또 연락을 해서 돈을 받는 일이 계속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굉장히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만나서 달라고 하다가 다음에는 전화로 달라고 하다가 그다음에는 문자로 계좌번호만 보내면서 돈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 돈을 빌리러 다니는 아이로부터 우리 시대의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동시대성이 보여 주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발견하고, 그 문화적 특성 속에서 어떤 조언이 필요한가를 쓰고 그 이유를 밝혀라.


 이 시험문제를 낸 이유는 이 친구를 ‘우리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예외적인 현상으로 볼 것이냐’를 묻기 위해서이다. 이 친구로부터 어떤 문화적 특성 또는 우리 사회가 경향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문화적 특질을 추출해 낸다면 그건 우리 사회의 경향성 문제이지만 이 친구의 개인적인 특성에 의한 것이라면 심리 치료나 정신의학적 치료가 훨씬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하이데거가 얘기한 ‘세계 내 존재’라는 의미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세계라는 건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는 게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주장이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세계가 창조된다. 이걸 응용해서 얘기하면 이 친구는 지금 사람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자기가 돈을 달라고 요청하는 친구들 사이에 있지만 이 친구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라는 건 오로지 돈과 문자, 즉 보편화되고 디지털화되어 있는 관계인 것이다. 시험문제의 그 친구에게 돈을 입금하면 그 친구가 받는 건 통장에 찍히는 숫자밖에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친구는 엄밀하게 얘기한다면 ‘세계 내 존재’가 아니다.


 들릴 권리, 권리는 관계의 방식이지 나 혼자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권리는 세계가 있을 때만 존재한다. 유령은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이다. 인권은 나의 고통을 사회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회에서, 내 고통을 드러냈을 때 내가 모욕 받지 않을 수 있는 사회에서 구현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상처와 고통의 위기와 위험은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을 드러냈을 때 어떻게 대접받는지의 여부이다.


  노숙자가 된 아이의 선배에게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일러줬다고 한다.


 찾아올 때마다 밥은 주겠다. 밥 한 끼라도 얻어먹으려면 사람을 만나야 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만나서 배려의 말, 아니 잔소리라도 들어야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너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고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고 했다. 유령 상태에서 벗어나기 말이다.



이어 책의 취지에 맞는 공부 자체를 경험하는 것에 대한 내용.


 경험은 보편화, 일반화되는 것에 굉장히 격렬하게 저항하는 걸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매체를 거치지 않고서는 무엇을 향유할 줄 모른다. 여행을 가서 내가 감상을 하고 향유를 하고 너무너무 좋아서 돌아서기 싫은 안타까운 마음에 사진을 찍었을 때 그게 진짜 사진이 된다. 진짜 경험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우연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연을 우리 삶에서 추방하고 있다. 내 삶에 우연이 개입했을 때 흐트러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스케쥴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우리가 주체가 된다는 것, 뭔가를 경험하고 향유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는 게 불안하다.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우리 삶에서 우연이라고 하는 걸 추방하고 싶어 한다. 경험에는 우연이 개방되어 있기에 가장 핵심적인 위험은 바로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경험은 체험이 아니다. 체험은 새로운 걸 알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

 

 우리의 경험이 우연에 열려 있을 때 우린 극단적으로 경험이 없는 걸 경험한다. 그걸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건 ‘경험’그 자체다. 아무것도 못 했다는 것에서 경험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경험할 수 있는 것 말이다. 두렵기 때문에 경험이 죽어 버린 시대를 살 수 밖에 없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경험을 했을 때는 추상화가 될 수 없다. 지나가 버리는 것에 격렬히 저항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격렬히 저항해도 그 순간은 지나가 버린다. 그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게 바로 죽음이고 결국 영원한건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우연의 순간이, 경험의 때가, 카이로스의 시간이 희박하다. 그런데 이런 순간이 내 삶에 왔을 때, 내가 허투로 보내는 게 아니라 그걸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갈고 다듬을 수밖에 없다. 공부를 하기 위해선 공부 자체를 경험해야한다.  산들바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깨어 있어야 한다.



 














덧붙여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란 책 제목의 의미


- 너희가 말하는 청춘은 도대체 언제 가능한가. 청춘은 도대체 뭔가. 그 조건을 말하지 않으면서 청춘이 아니라고 말하는건 얼마나 권력적이고 폭력적인지 반성하라.


- 왜 꼭 청춘을 물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가 이 모양 이 꼬라지인 건 동시대 모두의 문제. 20대가 투표 안 해서 벌어지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결국 동시대의 짐을 같이 나누어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젊은 사람들한테 책임 회피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엄기호의 새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작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경험하며 그러한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쓴 글이길 바란다. 요즘 읽고 있는 '육아전쟁'은 경험을 언어화하는 측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는 그야말로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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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2-03-2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박스에 있는 시험문제 얘기는 '우리가 잘못산게 아니었어'에서도 나온는 이야기에요...^^ 신촌 숨책에서 만난 엄기호씨는 수줍으면서 지적으로 보이는 청년 이미지던데... 엄기호를 잘 아는(?) 친구 말로는 굉장히 까불까불(?)하다는...ㅎㅎ

Arch 2012-03-28 09:47   좋아요 0 | URL
그래요? 그럼 '우리가 잘못산게 아니었어'를 읽었다면 뭐야, 엄기호씨 울궈먹은거? 이랬겠네^^ 수줍으면서 지적이다니! 후와~ 그런 타입 참 좋은데~ 까불이, 까불이. 그런 면도 좋은데요. 어쨌든 당분간은 그냥 책으로만 그 사람을 아는게 좋을 것 같아요.

빵가게재습격 2012-03-27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대박! 추천 백방 누르고 싶어요! 언니 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최고!!!!!^^

Arch 2012-03-28 09:48   좋아요 0 | URL
빵가게님, 그럼 백방 눌러주세요.

이 댓글에 깜짝 놀랐지만 뭐가 최고인지 얘기를 해주셔야죠. 그래야 구체적으로 어깨도 으쓱하고 그러죠.

2012-03-27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8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