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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 0~3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34
제인 커브레라 지음, 김향금 옮김 / 보림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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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귀엽고 앙증맞은 고양이가 있어요.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야옹이래요. 누군가가 야옹이에게 물어요. 넌 이 색을 좋아하니, 아니면 저 색을 좋아하니. 한참동안 여러가지 색들이 뭉텅이로 눈에 보이지만 야옹이는 다 별로래요. 이렇게 까다로운 야옹이라니. 강아지에게 묻는게 좋겠단 생각은 잠시 참아주세요. 아직 야옹이에게 더 물을게 있거든요. 마지막 장을 펼치면 야옹이가 좋아하는 색이 나오는데, 그때서야 아, 야옹이의 까다로운 안목이 결코 괜한게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을거에요.  

 그 색은 진짜니까요. 

 이 책은 아마 다른 알라디너의 서재에서 보고선 리뷰가 너무 좋아 보관함에 넣어뒀다가 옥찌에게 사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3살 정도의 아이에게 읽어주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금은 옥찌가 물고 찢어서 거의 너덜너덜해진 수준이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좋으니까. 물감으로 쓱쓱 그린듯이 투박한 그림이 원색으로 펼쳐지면 옥찌랑 나도 정말 야옹이가 좋아하는 색은 뭘지, 여러번 읽어서 어떤색일지 뻔히 알면서도 첫장을 넘길때면 마치 처음 본 듯이 설렌다.  

 아이들은 원색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잘 믿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니까, 다이어트 감량 선전 같다. '처음엔 저도 잘 믿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몇달 써보니'로 시작하는. 그런데 정말 좋아한다. 특히 정말 파랗고, 정말 빨간 색들이 쑥쑥 튀어나올때면 옥찌가 손뼉을 치며 당장에라도 색을 삼킬듯이 환호했다. 아이가 좋아하면 나는 점점 말소리를 낮추거나 높이며 정말 야옹이는 무슨 색을 좋아할지 궁금해서 못견디겠단 포즈를 취하는데 옥찌는 이모의 과장이 하나도 어색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아해준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건 동화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같이 흠뻑 빠져들게 만드는 옥찌의 리액션에 있을테고, 리액션이 가능하도록 만든 책의 따뜻하고 포근한 색감과 이야기에 있을 것 같다.  

 아이랑 대화하면서 읽어주는게 제일 좋을 것 같지만 너무 강요하지는 말길... 동화책 읽는 습관 중에 제일 나쁜건 계속 아이에게 질문하고, 대화하기를 강요하는거니까. 그저 동화책 읽는 사람도 즐겁게 읽으면 아이는 금세 알아챈다. 다른걸 하다가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소리와 색이 펼쳐지는 곳으로 북북 기어오거나 아장아장 걸어올테니까. 아마 눈은 첫장부터 즐거워지고 맘은 저도 모르게 스르르 따뜻해지고 말것이다. 

 사족을 붙이자면,(스포일러일지도 모르겠으나) 모든 동화책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엄마 아빠를 가정하는건 일반적인 입장이란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선 폭력적이다. 결손 가정이란 말을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다양한 관계들을 조명한다면 아이들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은 물론 좀 더 깊고 넓게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까? 


한핏줄 책 - 물감으로 그린 느낌은 아니지만 강한 색대비로 아이들의 흥미를 끌 수 있다. 물론 주제도 야옹이랑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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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 사이코 북스 18
그레이엄 뮤직 지음, 김숙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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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콘북스의 사이코 시리즈를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읽어서 무해한 것을 떠나 나무 낭비가 아닌지,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집어던질만한 책인지, 혹은 혹해버릴 책인지에 대한 그 어떤 소개도 없었다. 그래서 약간은 마루타가 된 심정으로 책을 샀다. 사이코 시리즈라 명명된 책자의 제목 자체가 쫄깃쫄깃하게 호기심을 잡아끌어서일 수도 있다. 나르시시즘, 공포증, 히스테리, 리비도, 성도착(오호), 환상, 에로스(오예), 불안(으흠), 노출증(끄응), 무의식, 초자아 등의 제목은 충분히 읽고 싶게 만들었고, 사려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게 했다. 게다가 반값 할인이라는데 불이 붙고야 말았다. 

 책의 소개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이 우리의 일상 생활과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나 깊이 관련되는지를 보여주고 '정상적인'사람이 누구나 지닐 수 있는 '비정상적인'면들을 조명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한발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전문적인건 아니지만, 미친 사람으로 예외가 된 사람들뿐 아니라 '정상'이란 범주에 있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경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소리다. 100여쪽에 달하는 분량으로는 소기의 목적에 도달하진 못했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발제와 예가 실려 있으며, 인간의 감정에 대한 앎의 시작에서 유의미한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건 안정적 애착에 관한 부분이다. 

 태어난 지 일 년 정도 지난 아기들에 대한 실험에서, 실험자는 엄마들에게 갑자기 방에서 나가 보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에 대한 반응으로, 어떤 아기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당황했지만, 다른 아기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흔히 '회피적 애착 avoidantly attach'이 형성된 경우라고 일컬어지는 후자의 아기들은 엄마가 돌아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안정적 애착 securely attach'이 형성된 아기들은 엄마의 모습을 보자 따스한 품을 찾아 엄마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두 집단의 맥박수와 아드레날린, 코티솔 등을 측정해 보았을 때, 두 집단의 아이들 모두 엄마가 사라졌을 때 비슷한 생리적 반응을 나타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런 사실은 일반적인 관찰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며, 분명 회피적 집단의 아이들은 자신의 느낌들과 '접촉하지 touch'않는다. 이런 집단의 아이들에 대한 많은 연구가 수행된 결과, 흥미롭게도 이런 아이들은 자라서도 감정을 읽어 내는 능력이 부족하며, 자신의 느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고,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신체적.감정적으로 긴밀한 유대를 잘 형성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입증되기 시작했다.  

 회피적 애착을 갖는 아이도 엄마와 떨어지면 마찬가지로 불안해하고 걱정하지만 표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위악을 떠는 사람, 혹은 시니컬한 사람, 감정을 표현하거나 느끼는데 서툰 성인의 맘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어린 아이가 엄마와 떨어진다는 사실로 인한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회피적 애착으로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는게 안타까웠다. 물론 책에서 인용한 도교 현인의 '좋은 말은 하루에 백 리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경구와 마찬가지로 심리치료사의 '정상'이라는 관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인격 유형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전문 심리서적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깝고, 멋진 구절도 여럿 발견된다. '감정'을 읽으면서 프로이드의 책에 대해서도 좀 더 여유를 갖고 들춰볼 수 있는 힘이 생길 듯하다. 과연 지금까지의 심리학은 왜 행복해질 수 있는 것보다, 슬픔을 어떻게 치유하려 하는데 집중했는지, 네거티브 전략의 문제는 뭐가 있는지도 다뤄진다. 이 책은 감정에 대해 정리할 수 있다기보다는 어떤건가란 호기심을 충족하는데 의미가 있으며,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알고 싶어지는 부가적인 기능도 충족하고 있다. 게다가 시리즈물의 저자가 각자 다르기 때문에 주제의 차이뿐 아니라 관점의 미묘한 차이에서 어긋하는 마찰음을 듣는 재미도 있다. 지금 '공포증'에 대해 읽고 있는데 저자는 프로이드를 화살을 쏜 후 과녁을 그리는 선무당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어떻게 그 둘이 화해를 할런지, 화해는 커녕 결말이 날런지 모르겠지만 무리없는 가격에 부담없는 무게라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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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5-0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웃기웃하다가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끄응) 예의일 것 같아서 댓글을 남깁니다. 아참 이 책에 관한 땡스 투 하나는 접니다.

Arch 2009-05-06 22:04   좋아요 0 | URL
쥬드님^^
이게 아마 두번째 댓글일거예요. 아주 오래 전에 제가 무작정 쥬드님께 뭔가를 물어본 이후로.
땡스 투도 감사하고, (드디어 어른책으로도 땡스 투를 받다니!)댓글도 감사해요.
어딜 기웃기웃 하셨는지(끄응)
 
8월의 크리스마스
허수정 지음 / 예술시대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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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은 술렁이고 있었다. 군산에서 영화촬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학교가 있는 월명동에서 몇분 안 되는 골목에서. 그 당시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던 심은하와 접속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한석규. (내 기억의 연대기가 확실하다면) 영화 촬영을 보고 온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한석규는 평범하게 생겨서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구분이 잘 안 된다고 했지만, 심은하만큼은 너무 작고 예뻤다고 했다. 너무 작고 예쁜 여자가 나오는 영화는 어떨지 궁금했지만, 그다지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에 떠밀려 해야하는걸 싫어하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떼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군산의 어디가 나왔는지 얘기를 할때도 관심이 없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라니. 제목부터가 좀 유치한거 아냐?


 시나리오 수업 시간. 선생님께서는 주제 얘기를 하면서 이 영화를 언급하셨다. 이 영화의 주제가 뭔줄 아는 사람. 당연히 학생들은 아무것도 안 씌어진 노트를 뒤적이고, 니가 말하라며 짝꿍 옆구리를 찔러대기만 했다. 뻔한 수작이 나올줄 아셨던 선생님은 질문을 바꾸셨다. 이 영화에서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건 아마 파를 씻는 장면일거야. 혹시 기억나는 사람. 어떤 언니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공감을 표현했고, 학생들 사이에선 동요가 일어났다. 넌 기억나냐, 난 봤는데 기억이 안 난다. 술렁술렁. 나로 말할것 같으면 그때 두번이나 봤던 이 영화에 그저그런 평을 내린 상태였고, 물론 기억을 못했다.

 두번째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볼때까지만 해도 난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기껏 동적인 사건이래봐야 둘이 놀이 공원 간게 다인, 심심한 영화. 두번째 볼때까지만 해도 난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정원을, 그의 주위를 맴도는 다림의 맘에 다가가지 못했다. 사는게 퍽퍽한 것도 아니었다고 자부해왔는데 멜로랑은 뭔가 맞지 않는다는 잠정적인 결론까지 내려놓고 있었다.

 세번째 8월의 크리스마스.

 나는 분명히 정원이 꾹꾹 파를 씻는 장면을 봤고, 정원의 썰렁한 농담을 시작하려는 순간 다림이 그의 팔을 잡았을 때 나온 노래를 기억하고, 그 순간 내 팔이 움찔거렸던 느낌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림이 놀이공원 가면 공짜로 놀 수 있다는 말을 흘리며 맥주를 마시는 장면을 살풋거리는 맘으로 봤고, 만땅 3000원에선 어깨를 들썩였다. 다림이 정원보고 왜 자기만 보면 웃냐고 묻는걸 보고, 자는척 하고 있다가 차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드는걸 보고, 다림인 꽤 앙큼하구나란 생각도 해보았다.

 나는 정원이 그의 아버지에게 리모컨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분통을 터트리는 순간을, 동생과 수박씨 멀리 뱉기를 하다 그 둘 사이에 흘렀던 침묵을, 술먹고 죽자고 해버린 정원을, 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며 그들 각자가 가진 쓸쓸한 표정을, 웃으면서 영정 사진을 찍은 정원을 기억한다.

 나는,

 다림이 파견근무 나간 곳을 찾아가 그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만 봤던 정원의 손을 기억한다. 흐려진 손은 내내 잔상으로 남아 모든 순간의 배경이 되어 살아나고, 살아질 것을 안다. 다림의 사진이 사진관에 오랫동안 걸려져 있을 것처럼.

-선생님, 파를 씻는 장면이 왜 중요한가요?

- 죽음 앞에서 일상의 작은 일들, 너무 사소해서 따로 관심도 두지 않았던 일들이 소중해지는 얘기를 하니까. 삶의 촉수들이 작은 빨판을 곤두세우며 자신에게 말을 거니까.

 세번째 8월의 크리스마스로 난 아마 한동안은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허준호의 모든 영화를 봤지만, 그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그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풀어놓은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물론 봄날은 간다는 참 좋았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보여준 아릿거리는 풋풋함보다야 못했다. 너무 일찍 와버린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어느 날 너무 일찍 내게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삶과 사랑,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죽음 후에는 추억 상자도 사라질텐데 그때 남는건 과연 뭘까, 무언가를 남기려는 시도는 무용한게 아닐까.  

그런데 심은하, 너무 예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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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2009-04-02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역의 신구가 자는 척 하며 침을 꿀꺽 삼키는 장면이 너무나도... 우리는 다들 죽는데 말이죠. 그걸 다들 잊고 살게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살아가는 건지도...

Arch 2009-04-02 01:23   좋아요 0 | URL
나무처럼님 반가워요.
아, 그 장면이 생각날듯 말듯, 전 다시 네번째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봐야겠어요.
모두가 다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일이 아닌 듯 사는게 나은건지 아닌지는 좀 더 두고봐야겠어요.

turnleft 2009-04-02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이 영화, 어제 읽은 <쓸쓸함의 주파수>랑 맞닿아 있네요. 손에 닿을 듯 비켜간 인연의 애뜻함이랄까...

Arch 2009-04-02 03:14   좋아요 0 | URL
새벽이 아니죠, 거긴?
턴레프트님, 그 영화 제목은 처음 들어보지만 으응, 그럴 것 같아요.

turnleft 2009-04-02 03:24   좋아요 0 | URL
여기는 이제 오전 11시랍니다 ^^;
영화는 아니고 단편집이에요. 오츠 이치.

Arch 2009-04-02 03:2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읽었다란 말까지 읽어놓고선 영화 어쩌고 해버렸으니... 새벽 세시에 바람은 안 불지만 제 머리가 좀 비어가는 중이라.
우리 사이엔 9시란 강이 흐르네요.
 
한 아이 1 - 아동교육 심리학의 영원한 고전 한 아이 1
토리 헤이든 지음, 이희재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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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잘님의 우국충정 리스트가 비록 한회에 끝날지라도 그 첫회에 빛나는 책의 리뷰를 보고선 맘이 동해버렸다. 책에 대한 내용은 아주 특이할만한게 없었으나, 굳이 우국충정이란 칭호까지 내리며 골라준 미잘표 리스트라는데 의미가 있었고, 미잘님이 재미있다고 하면 그가 추천한 책을 아직 한번도 읽은적이 없으니 '정말?'이러면서 반신반의하게 됨에도 취향의 쫀쫀함을 맞춰보고 싶은 욕망이 무럭무럭 자라난 것이다. 옆구리 찔러 받아낸 책을 조금씩 아껴가며 다 읽어내려갔다. 처음에 뭐라고 써야할지, 쉴라의 이름을 먼저 불러봐야할지. 남들도 느끼고, 나도 잘 아는 감정 과잉과 내식대로의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틀이 아닌 것으로 써내려갔으면 좋겠다란 바람도 생겨났다. 

 아동교육 심리학의 영원한 고전이란 책 표지의 문구는 약간 낯뜨겁고 지난 30여년 동안 베스트셀러였다란 부분은 지난 30년을 살아온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풍겼다. 책을 읽기 전에 교육이나 논픽션의 이야기들은 어쩜 하나같이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로 끝나는지 도식적인 플롯을 전수받는건 아닐까란 선입견과 아이가 일으키는 문제가 어마어마해야 선뜻 동의가 된다는식의 역시 도식적인 나의 입장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장을 넘겼고, 마법의 주문이 씌어지기라도 한듯이 마지막장까지 아껴가며 책을 다 읽었다. 

  토리는 특수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의 반을 맡아서 가르치고 있다. 이 아이들만으로도 버겨워 쩔쩔매고 있는 토리 앞에 어느 날 신문에서 다른 아이에게 불을 질러 다치게한 6살날 꼬마 쉴라가 배정된다.

 내가 파악한 정보에 비추어볼 때 쉴라의 신체활동은 정상이었다. 그래서 내가 감당해야할 싸움이 더 힘겨워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게 우리 손에 달려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쉴라를 바르게 이끌지 못했을 경우에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자폐증이나 뇌손상 같은 그럴싸한 방패막이가 없었다. 전적으로 우리 책임이었다. 적개심으로 가득찬 그 눈 너머에는 인생은 결코 즐겁지 않다는 사실을 달관한 어린 꼬마 소녀가 있었다. 더 이상 거부당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가급적 반감을 사는 행동을 일삼는 것이다. 그러니 쉴라가 보이는 애정결핍 증상은 본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치는 그렇게 간단했다. -43p

 고함을 지르고, 금붕어의 눈을 연필로 파내고, 다른 아이들을  위협하는 쉴라, 토리 선생님은 쉴라의 과격한 행동 너머에 있는 따스한 내면을 아직 접하지는 못했지만 쉴라의 놀라운 지능과 이 아이가 겪어왔던 일들을 떠올리며 기다려준다. 마침내 그녀가 토리에게 맘을 열어준 아주 짧은 순간을 목격한다.

 쉴라가 커다랗고 끈적끈적한 덩어리를 마지막으로 고물에 묻힌 다음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쉴라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번지면서 아랫니 빠진 자리가 드러났다. - 80p 

 토리는 내가 책에서 봐왔던 다른 선생님과는 다르다. 뛰어나게 전문적이지도 않고, 헌신적이거나 사람의 능력 이상을 지닌 것처럼 위대한 사람도 아니다. 도리어 내가 아이들을 접할 때와 마찬가지로 어쩔줄 몰라하고, 쉽게 상처 받으며, 순간 순간 고민한다. 쉴라를 대할때도 이 아이를 완전히 바꾸겠다거나, 깊은 절망으로 자신을 몰아내며 흥분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다른 관계를 바라보듯이 쉴라를 보며,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신도 성장해 나간다. 토리 선생님의 면면은

  나는 진정한 사이가 좋거든. 내 눈에 정직해 보이는 사람은 어린아이 아니면 미친 사람뿐이었어. 그러니 여기가 마음에 들 수 밖에. -214p 

라며 휘트니에게 털어놓는 마음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난 쉴라만큼 토리 선생님이 좋아지고 말았다. 헐리우드 영화처럼 극적인 화해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점층적인 갈등이 대단원의 막을 향해 달려가는 것도 아닌, 한 아이만의 논픽션이 함의하는 장점을 의도적으로 직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투박한 구성마저 맘을 두드렸다.  

 아동교육 심리학의 고전이란 말은 잠시 잊어도 좋다. 교육학의 면모를 보는게 아니라 쉴라를 따라 내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치료되고,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테니. 누구에게도 맘을 주지 않을 작정으로 반감을 살만한, 다른 누군가를 상처줄 수 있는 가장 지독한 방법을 터득한 쉴라는 조금씩 변해간다. 자신의 상처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말하는 모습, '너도 결국은 나를 떠날게 아니냐.'라며 토리 선생님을 윽박지르는 모습, 성폭행으로 갇혀있던 몸을 내려놓고 엉엉 울던 모습은 층위는 다르지만 마찬가지의 상처와 기억을 갖고 있는 내 몸과 마음에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쉴라가 자신의 말들을 풀어가며 사람들이랑 친해지면서 이 아이 안에 얼마나 많은 영롱한 빛깔의 에너지가 있는지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 선생님이 옆에 있으면 난 좋아질텐데 왜 못그러겠다는거죠? 

- 널 좋게 만드는건 내가 아니라 너니까 그렇지. 내가 여기 있는건 네가 올바르게 사는지 안 사는지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너한테 알려주기 위해서였어. 네 생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단다. 난 어딜가나 너한테 관심을 둘거야. - 296p

 쉴라와 토리 선생님은 어린 왕자를 읽어가며 자신들의 관계를 책에 비추어 성장해간다. 어린왕자를 많이 읽어온 내 눈에도 이토록 생생하게 삶 속에 깃든 책이란 의미에서 내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 심장은 늘 뛰어왔고, 내 가슴은 늘 떨려오고 있었지.   

 그건 우리가 서로를 길들였기 때문이에요. 책에 그렇게 나와있죠? 여우를 길들이느라고 어린 왕자가 고생고생했는데 나중에는 어린 왕자가 떠난다고 여우가 막 울었잖아요....... 언제나 밀밭을 생각하면 되니까 괜찮다고 여우가 나중에 말했구요. 맞죠? - 297p 

 아무도 서로를 길들이지 못할거라고 믿어왔고, 나 역시 누구에게도 길들이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누구보다 더 길들임을 당하거나 길들이고 싶었더란 것을 쉴라를 통해 알게 되었다. 길들임에는 책임이 따르겠지만 고생고생해서 길들였는데 헤어지면 막 울어버리고 무너지겠지만 길들이는 관계란 기억을 먹고 한뼘쯤 자라날 것을 믿는다. 쉴라가 그랬고, 쉴라를 보는 아주 오래된 아이인 나도 그렇고. 어린 왕자를 통해 관계를 조명하는 한 아이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쉴라가  토리 선생님의 생일날 선물을 준 부분이 아닐까 싶다. 토리 선생님은 생일날인데도 다른때보다 더 떠들고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 때문에 다른 날보다 더 울적해있어서 아이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으라는 벌을 준다. 이제 조용히 할 수 있는 사람만 고개를 들라고 말을 했는데, 

 쉴라는 머리를 숙인채 가만 있었다. 

- 쉴라, 너도 일어서야지. 

 하지만 쉴라는 머리를 감싸안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 옆으로 가서 앉았다. 

- 선생님도 이젠 화가 풀렸어. 일어나서 놀아도 된다니까. 

- 여기 있는게 선생님한테 드리는 제 선물이에요. 나머지 시간은 여기서 조용히 있을래요. -303p

 우리 맘을 건드리고, 손을 뻗게 만드는건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작은 몸의 쉴라는 내 안에 들어와 지금 바로 사소한 몸짓을 해보라고 충동질 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네 안에 예전에 나와 같은 마음이 있었구나, 그런데 조금 불편해하는거 같구나.'라고 무심하게 말을 건넬 뿐이다. 내 안에 있는 쉴라가 가끔씩 내게 무심하게 말을 걸어올때면 나도 그녀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겠지. 사랑을 받지 못한 쉴라가 나중에는 어떻게 사랑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된다. 사소했을 만남을 구원한건 바로 그 '사소함 자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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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03-3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름드리미디어에서 상 받아야 할 거 같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반 어거지로 책 읽히고, 리뷰받아내고.
ㅎㅎ 생각해 보니까 속지에 '아치님께 드림'도 못 썼네요.
음.. 좋은 리뷰 잘 읽었어요. ^^

Arch 2009-04-01 00:24   좋아요 0 | URL
아름드리미디어말고 내가 상 줄게요. 밥상? 영상? 진상? 그 중에서 제일은 진상이니 가끔씩 제 진상을 받아주셔요.
쑥스럽게^^
 
달님 안녕 하야시 아키코 시리즈
하야시 아키코 글ㆍ그림 / 한림출판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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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동화책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같이 좋아하면서 보면 좋겠다란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면에서 지희에게 처음으로 사준 이 동화책은 나중에 사준 어떤 동화책보다 예쁘고 맘에 든다. 특히 군더더기없는 그림과 몇글자 안 되는 내용 속에서 나름대로 내용이 완성되어가는 모양은 이미 여러번 동화책을 봐서 어떤 내용인지 훤히 아는데도 자꾸 다음장을 넘기게 만든다.

 지희가 아이였을 때 가만히 누워 꼬물거리며 몸을 움직이면 나는 그 옆에 가만히 누워 이 책을 읽어주곤 했다. 멀뚱거리며 책을 보던 아이가 달님이 나타나 '안녕'이라고 말하자 알아듣기라도 한듯이 방싯방싯 웃는다. 그럴때면 이건 책이 아니라 아파트 숲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달님이 정말, 아이에게 살짝 귓속말을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달님의 자리에 아이 이름을 넣어서 부르거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 

지희 안녕, 

이모 안녕,  

누구누구 안녕, 

 안녕이란 말은 Hi보다 울림이 크다. 안녕이란 말을 해줄 때면 이 울림이 목언저리를 간지럽힌다. 간지러워 웃다가보면 정말, 내가 인사를 건넨 누군가가 반가워지고만다. 안녕은 만날 때, 헤어질 때, 어색할 때, 무진장 반가울 때도 쓰이며 가만히 나에게 속삭이는 달님을 끌어안고 싶을 때도 해줄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어린 지희가 자기 전에 꼭 읽어주곤 했다. 달님을 끌어안듯이 작은 너를 이렇게 꼭 껴안아주고싶어. 안녕, 지희야.

 한글을 익히는 나이가 되면서 나랑 지희는 내가 한권, 지희가 한권씩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고르는건 전적으로 지희 몫이었다. 그럴때면 자기 책은 주로 글자가 없는 아주 꼬맹이였을때 읽었던 것을 집어오고, 내가 읽을건 글자가 그야말로 바글거리는 책을 가져오는 아이. 이 책은 지희가 자신이 읽을 것으로 많이 가져온 책이기도 하고, 내가 그거 읽으면 구름 아저씨 목소리 정말 잘 낼 수 있다며 지희에게 나도 한번 읽자며 많이 조른 책이기도 하다. 

 안녕, 자기 전에 인사해요. 

 달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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