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허수정 지음 / 예술시대 / 1998년 1월
평점 :
절판


   

        


 

  학생들은 술렁이고 있었다. 군산에서 영화촬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학교가 있는 월명동에서 몇분 안 되는 골목에서. 그 당시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던 심은하와 접속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한석규. (내 기억의 연대기가 확실하다면) 영화 촬영을 보고 온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한석규는 평범하게 생겨서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구분이 잘 안 된다고 했지만, 심은하만큼은 너무 작고 예뻤다고 했다. 너무 작고 예쁜 여자가 나오는 영화는 어떨지 궁금했지만, 그다지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에 떠밀려 해야하는걸 싫어하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떼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군산의 어디가 나왔는지 얘기를 할때도 관심이 없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라니. 제목부터가 좀 유치한거 아냐?


 시나리오 수업 시간. 선생님께서는 주제 얘기를 하면서 이 영화를 언급하셨다. 이 영화의 주제가 뭔줄 아는 사람. 당연히 학생들은 아무것도 안 씌어진 노트를 뒤적이고, 니가 말하라며 짝꿍 옆구리를 찔러대기만 했다. 뻔한 수작이 나올줄 아셨던 선생님은 질문을 바꾸셨다. 이 영화에서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건 아마 파를 씻는 장면일거야. 혹시 기억나는 사람. 어떤 언니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공감을 표현했고, 학생들 사이에선 동요가 일어났다. 넌 기억나냐, 난 봤는데 기억이 안 난다. 술렁술렁. 나로 말할것 같으면 그때 두번이나 봤던 이 영화에 그저그런 평을 내린 상태였고, 물론 기억을 못했다.

 두번째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볼때까지만 해도 난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기껏 동적인 사건이래봐야 둘이 놀이 공원 간게 다인, 심심한 영화. 두번째 볼때까지만 해도 난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정원을, 그의 주위를 맴도는 다림의 맘에 다가가지 못했다. 사는게 퍽퍽한 것도 아니었다고 자부해왔는데 멜로랑은 뭔가 맞지 않는다는 잠정적인 결론까지 내려놓고 있었다.

 세번째 8월의 크리스마스.

 나는 분명히 정원이 꾹꾹 파를 씻는 장면을 봤고, 정원의 썰렁한 농담을 시작하려는 순간 다림이 그의 팔을 잡았을 때 나온 노래를 기억하고, 그 순간 내 팔이 움찔거렸던 느낌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림이 놀이공원 가면 공짜로 놀 수 있다는 말을 흘리며 맥주를 마시는 장면을 살풋거리는 맘으로 봤고, 만땅 3000원에선 어깨를 들썩였다. 다림이 정원보고 왜 자기만 보면 웃냐고 묻는걸 보고, 자는척 하고 있다가 차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드는걸 보고, 다림인 꽤 앙큼하구나란 생각도 해보았다.

 나는 정원이 그의 아버지에게 리모컨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분통을 터트리는 순간을, 동생과 수박씨 멀리 뱉기를 하다 그 둘 사이에 흘렀던 침묵을, 술먹고 죽자고 해버린 정원을, 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며 그들 각자가 가진 쓸쓸한 표정을, 웃으면서 영정 사진을 찍은 정원을 기억한다.

 나는,

 다림이 파견근무 나간 곳을 찾아가 그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만 봤던 정원의 손을 기억한다. 흐려진 손은 내내 잔상으로 남아 모든 순간의 배경이 되어 살아나고, 살아질 것을 안다. 다림의 사진이 사진관에 오랫동안 걸려져 있을 것처럼.

-선생님, 파를 씻는 장면이 왜 중요한가요?

- 죽음 앞에서 일상의 작은 일들, 너무 사소해서 따로 관심도 두지 않았던 일들이 소중해지는 얘기를 하니까. 삶의 촉수들이 작은 빨판을 곤두세우며 자신에게 말을 거니까.

 세번째 8월의 크리스마스로 난 아마 한동안은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허준호의 모든 영화를 봤지만, 그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그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풀어놓은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물론 봄날은 간다는 참 좋았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보여준 아릿거리는 풋풋함보다야 못했다. 너무 일찍 와버린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어느 날 너무 일찍 내게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삶과 사랑,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죽음 후에는 추억 상자도 사라질텐데 그때 남는건 과연 뭘까, 무언가를 남기려는 시도는 무용한게 아닐까.  

그런데 심은하, 너무 예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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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2009-04-02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역의 신구가 자는 척 하며 침을 꿀꺽 삼키는 장면이 너무나도... 우리는 다들 죽는데 말이죠. 그걸 다들 잊고 살게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살아가는 건지도...

Arch 2009-04-02 01:23   좋아요 0 | URL
나무처럼님 반가워요.
아, 그 장면이 생각날듯 말듯, 전 다시 네번째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봐야겠어요.
모두가 다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일이 아닌 듯 사는게 나은건지 아닌지는 좀 더 두고봐야겠어요.

turnleft 2009-04-02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이 영화, 어제 읽은 <쓸쓸함의 주파수>랑 맞닿아 있네요. 손에 닿을 듯 비켜간 인연의 애뜻함이랄까...

Arch 2009-04-02 03:14   좋아요 0 | URL
새벽이 아니죠, 거긴?
턴레프트님, 그 영화 제목은 처음 들어보지만 으응, 그럴 것 같아요.

turnleft 2009-04-02 03:24   좋아요 0 | URL
여기는 이제 오전 11시랍니다 ^^;
영화는 아니고 단편집이에요. 오츠 이치.

Arch 2009-04-02 03:2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읽었다란 말까지 읽어놓고선 영화 어쩌고 해버렸으니... 새벽 세시에 바람은 안 불지만 제 머리가 좀 비어가는 중이라.
우리 사이엔 9시란 강이 흐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