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이야기이다. 나는 당시 남녀공학의 중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다.
3월의 어느 평일 3교시 수업시간. 늘 하던 대로 교탁에 있는 컴퓨터 본체에 cd를 넣으며 출석부에 사인을 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Alt, Ctrl 과 Delete를 동시에 눌러 강제로 컴퓨터를 끈다. 전원이 꺼지자마자 다시 전원 버튼을 누른다. 역시 묵묵부답, 되살아날 기미조차 없다. 다급해진다. 컴퓨터가 없으면 수업하기가 몹시 힘들어지는데, 곤란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언제부터 그랬니?”
“1교시 때부터 그랬어요. 다른 시간에도 컴퓨터 사용하지 못했어요.”
“오늘은 힘든 하루가 되겠군.”
점심시간에 겨우 짬을 내어 컴퓨터 담당자를 불러 원인을 물어본다.
“아예 작동을 안 하는데요. 아무래도 cpu 쿨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cpu 쿨러? 그게 무엇인가요?”
“컴퓨터 보조 장치인데 그게 없으면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왜 없을까요?”
종례시간.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루 종일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했다며 담임인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무래도 학생 중에 누군가 cpu 쿨러를 빼갔을 것 같다. 교사보다 컴퓨터에 해박한 게 요즘 아이들이다. 게다가 개교한지 얼마 안 된 신설학교여서 교실, 책상, 교탁, 칠판, 컴퓨터 등 모든 것이 새것이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컴퓨터에 손을 댄 사람은 양심껏 내일까지 원상 복구해놓기 바라. 그러면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할게. 부탁이야.”
다음 날. 컴퓨터는 그대로 먹통 상태. 전날 간절하게 호소했건만 달라진 건 없었다.
종례시간. A4 용지 여러 장을 4등분하여 45명의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
“우리 반 컴퓨터 cpu 쿨러에 대해서 알고 있거나, 본 게 있으면 지금 나누어준 종이에 간단하게 적어. 아는 사실이 없으면 그냥 ‘모르겠다’ 라고 써도 돼. 이름은 안 써도 되니까 솔직하게 적어줘. 자수하면 더 좋고.“
급조한 설문지를 두 번 접게 한 후 뒤에서 걷어오게 한다. 설문지를 다 모은 후 짧게 종례를 마무리 짓고 아이들을 귀가시킨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다 빠져나간 후 좀 전에 걷은 설문지를 하나씩 펴본다. 대부분 귀찮다는 듯 ‘모름’ 혹은 ‘모르겠다’ 라고 성의 없이 크게 끄적여놓았는데 작은 글씨가 촘촘히 적힌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17번 사물함에 cpu 쿨러가 들어있어요.’
곧바로 확인해보니 역시 17번 사물함에 기계뭉치 같은 게 들어있다.
“이게 cpu 쿨러라는 거군.”
다음 날 아침. 컴퓨터 담당자에게 되찾은 cpu 쿨러 장착을 부탁한 후 전원을 켠다. 먹통이다. 고장난 cpu 쿨러였다. 원래의 것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 새 컴퓨터에 있는 cpu 쿨러와 고장난 cpu 쿨러를 바꿔치기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누굴까? 어제 돌렸던 설문지 뭉치를 꺼내본다. 45장. 45명이 한 장씩 써낸 것이다. 교탁 위에 45장의 작은 설문지를 넓게 펼쳐놓고 앞 줄 부터 한 사람씩 나오게 하고는 본인이 쓴 설문지를 고르게 한다. 다들 자기가 쓴 것을 알아본다. ‘모르겠음’, ‘모름’, ‘몰라요’ 등 글자는 몇 자 되지 않아도 자신이 쓴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 마지막 세 장이 남고 자기 것을 아직 고르지 않은 아이도 세 명이 남았다. 마지막 세 장 중에는 ‘17번 사물함에 cpu 쿨러가 들어있어요.’ 가 있는데 마지막 남은 세 명 중 아무도 자기 것이라고 나서지 않는다. 이들을 제외한 42명의 친구들이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얼굴 붉히고 닦달할 수는 없는 노릇. 조용히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교무실로 향한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솔직하게 말해줘. 그러면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할게.”
순간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이들 세 명 중 덩치가 제일 작은 아이는 매우 초조한 표정에 사색이 되어가고 있고, 두 번째로 키가 큰 아이는 무표정, 이들 중 덩치와 키가 제일 큰 아이는 무표정에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누굴까? 세 장을 동시에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기 것을 고르게 한다. 먼저 ‘모르겠음’이라고 쓰인 종이를 두 번째로 키가 큰 무표정의 아이가 냉큼 고른다. 다음 순간 ‘모름’이라고 쓰인 종이를 집으려고 초조한 표정의 작은 아이와 덩치 큰 당당한 아이가 동시에 손을 내민다. 잠시 두 아이와 번갈아가며 눈을 맞춘 채 가만히 기다린다. 콩당콩당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세라 얼굴에 힘을 준다.
잠시 후, 초조한 표정의 아이에게 묻는다.
“이거 네가 쓴 거 맞아?”
“네.”
눈빛이 간절하다. 휙 고개를 돌려 무표정의 당당한 아이에게 ‘17번 사물함에 cpu 쿨러가 들어있어요.’라고 적힌 마지막 종이를 들이민다.
“이거 네 꺼지?”
“......네.”
“네가 그랬구나.”
마지못해, 그러나 무표정하고 당당하게,
“네.”
범인을 밝힌 나는 안도감과 더불어 비애감에 젖어들었다. 이 무표정하고 당당한 태도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왜 그랬니? 집에 있는 컴퓨터가 낡고 고장나서 그랬었노라고.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도 끝까지 발뺌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나는 이 아이가 생각난다. 그 무표정하고 당당한 시선으로 허탈감에 쪼그라든 나를 내려다보던 얼굴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