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간과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맑은 거울 하나 몰래 품는 일이다

 

시공의 거울을 사이에 두고

거울 저편 당신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마주 한다

 

당신의 오른편이 고스란히

나의 왼편이 될 런지

혹은 오목 거울이거나

볼록 거울일 수도 있지만

 

당신을 향하는 마음이 경계를 넘어

일렁이는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뜨거워진 거울은 흐물흐물 녹아

 

나의 심장은 쿵

두 배로 빨라지고

나의 영혼은 쑥

두 배로 자라나고

나의 세상은 확

두 배로 넓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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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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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막연한 것이었다. 길을 걷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어, . 삶에 미련 따위 하나도 없어. 해탈의 가면을 쓴 나는 쿨 한 척 어설픈 말을 번지르르 늘어놓았다.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운 적도 없으면서, 그 순간의 느낌을 디테일하게 상상해본 적도 없으면서 종종 죽음을 입에 올렸다.

수많은 죽음과 삶을 지켜본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기록. 첫 장을 펼쳐드는 마음은 여느 책과 다르지 않았다. 기쁨이나 슬픔, 사랑이나 아픔 같은 감정들과 죽음은 별반 차이가 없는 색깔이었다. 내가 상상해온 죽음은 한없이 쉬운 것이었으므로.

 

흑백의 이미지로 남아있는 30대의 많은 날들이 있었다. 퇴근길에는 무거운 납덩이를 발목에 매달고 또 다른 직장과 다를 바 없는 일터를 향했다. 의무만으로 꽉 매인 24시간. 나에게 집이란 ‘home’이 아닌 ‘house’이였다. 한밤중 아파트 13층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며 어두운 바다와 같은 저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경직된 심장의 아바타였다. 뾰족한 세상의 모서리에 한 발로 서 있는 기분에 혼자 된 장소에서는 자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익숙하지 않은 발걸음인 듯 삶을 한 발 두 발 내딛으며 비틀거렸다. 걸을 때마다 생각했다. 우연인 듯 차에 치이거나 사고가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마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지는 못했다. 운이 없어 의도치 않게 살아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기는 싫었으니. 그저 자연스럽게 나의 삶이 끝나기를 바랐다.

 

부끄럽다, , , 부끄럽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점점 이런 생각이 차올랐다. 꾹꾹 눌러쓴 기록은 단순한 글자의 조합이 아니었다. 피를 토하듯 문장을 토해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수면제를 먹거나 12층에서 추락하거나 목을 매거나 철로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한 사람, 재혼한 남편이나 동거남, 동거녀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 루게릭병이나 담도 암 말기의 사람, 눈에 대못이 박힌 사람에 이르기까지 죽음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수시로 다가왔다. 시간의 화살표 위에 예고 없이 불쑥 다가와 너무도 다양한 방법으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안락사에 대한 갈등, 시신을 바라보며 죽음을 마주하는 의식, 의사로서 가까이해야 하는 수많은 죽음들이 0.1mm펜으로 그린 정밀화처럼 선명하게 묘사되었다. 뚝뚝 떨어지는 시뻘건 피의 비릿한 냄새가 훅 끼얹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죽음이 담겨있는 19편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먹먹하다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 느린 무게감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죽음의 동굴을 빠져나오니 2부에는 삶에 담긴 자잘한 유머가 기다렸다. 19편의 이야기를 지나면서 중간 중간 풋 웃음을 터뜨렸다. 치열한 삶에 담긴 유머는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 조각처럼 반짝였다. 죽음의 순간을 기록하면서도 줄곧 삶을 보여주던 그를 생각하니 이조차 물컹하게 녹아들었다.

겉표지에 적힌 부제가 눈에 띈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경계를 마주한다는 것은 경계를 중심으로 양쪽에 존재하는 대상의 온도 차를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땅과 대기의 경계에 있는 인간은 가벼운 공기를 호흡하면서 생명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차가운 우주에서 날아온 유성은 대기권의 경계를 마주한 순간 불에 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맞이할 테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경계를 바라보는 순간은 얼마나 먹먹하게 스며들어올까. 더군다나 경계를 긋는 일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는 인간이라면. 경계를 걷고 있는 이의 고독을 상상했다. 아득하게 깊고 짙푸른 바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살아야 합니다, 꼭 살아야 합니다. 그의 모든 기록은 같은 주제로 점철되었다. 어떠한 사람이 오든 절대 비켜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 스스로 말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이 빨려들 듯 다가온다 하는 사람.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뛰어들어 삶의 끈을 붙잡으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죽음이란 말을 입에 자주 달고 살았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십여 년 간 내가 안고 있던 죽음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절실했고, 20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복기되는 느낌은 눈가를 시큰하게 만드니. 묵직한 강으로 흐르던 시간들을 건너온 지금, 책 안에 담긴 죽음의 사례들을 보며 깨닫는다. 사실 죽음이란 내가 지녔던 마음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길어 올려야하는 심연의 대상이었다. 나의 것은 죽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건 차라리 죽음의 색깔에 가까운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마음에 기대어 그 어느 때보다 살고 싶었던.

 

내 글을 그렇게 읽는 사람이 세상에 한 분 있다.(p315)’ 저자는 후기에서 자신이 쓴 글을 마냥 편하게 읽을 수 없던 어머니를 언급한다. 친정어머니를 떠올리며 공감한다. 작년 봄,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은 적이 있다. 현장에서 제시된 세 가지 주제 중 하나를 택해 두 시간 가량 글을 써서 내는 대회였다. <이팝꽃처럼 솔솔> 이란 제목의 시를 썼다.

공양주로 일하던 / 어미의 소원은 / 이팝꽃처럼 솔솔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내 새끼 뱃속에 담아 / 배불리는 것이었다 // 부처님 공양하고 / 남은 밥 찐 도시락 / 어느 날 삭아버려 / 축 늘어진 이팝꽃 / 자식은 밥을 버리며 / 철없이 투덜댔다 // 30년 뒤 절 마당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이팝꽃처럼 솔솔 / 지어주고 싶었지 / 버려진 이팝꽃은 / 노모의 마음속에서 / 여전히 뜨겁게 / 피어나고 있었다

며칠 후, 대회 결과가 발표되자 우쭐했다. 자랑스러운 둘째 딸이 쓴 시라며 전화로 한껏 자랑하고 어머니께 메일로 시를 보내드렸다. 한참 지나 친정에 갔을 때 당신은 시를 읽고 우셨다고 했다. 더불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날은 쉬어버린 밥을 버린 하루였는데, 밥을 먹지 못하고 집으로 가져왔던 날들이 종종 있었다 하셨다. 자식에게는 우연히 떠오른 하루가 당신께는 늘 안고 사시던 날들이었던 거다. 내가 가난의 온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은 그런 날들을 통과해서였을 테니 오히려 감사한 경험인 것을.

 

책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동판화를 새기듯 한 자 한 자 쓰인 제목 만약은 없다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만약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의 수이다. 과거를 기억하며 되뇌는 만약은 후회의 다른 말이며, 미래를 상상하는 만약은 발뒤꿈치를 들고 팔을 한껏 뻗어도 닿지 않는 별이다. 우리는 단지 현재만을 절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살아가야 할 뿐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어가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나바호 인디언은 이와 관련해서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라고 했다 한다. 여러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등장했던 책이지만 이 모두를 삶이라는 보자기로 묶어 짊어지고 걸어가는 한 사람의 삶이 담긴 책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묵직하면서도 징 했다. 획 하나도 허투루 긋지 않고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내려간 초등학생의 8칸 국어 공책이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불현듯 꾹꾹 내딛고 싶어졌다. 나의 삶을 향하는 발자국을 8칸 국어 공책 속 한 글자처럼 찍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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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6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8-11-16 23:07   좋아요 0 | URL
하루 하루를 정성껏 살아야 하는데 가끔 나태해질 때가 있어서^^; 그래도 계속 노력을 해야겠지요?

zzakzi 2018-11-1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본 후기 중 가장 멋진 글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비종 2018-11-16 23:10   좋아요 0 | URL
원래의 책에 비하면 제 글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걸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제가 받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잘 전달되었나 싶어 기분이 좋습니다.ㅎㅎ
 

잃어버린 것이지

잊어버릴 것은 아니다

찾아야 했던 거지

참아야 했던 것은 아니다

눈물 흘려야 했던 거지

눈감아야 했던 것은 아니니

 

세월 지나 잊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차마 목적어를 뱉지 못하고

지킬 수 없었던 자는

지켜볼 수밖에 없던 자는

알아야 하는 거다

안아야 하는 거다

 

차라리 목적어를 삼키고

남겨야 하는 거다

남겨져야 하는 거다

남은 자의 몫인 거다

남겨진 자의 몫인 거다

 

 

* 2018. 10. J시 공모전, 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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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은 사람

손을 잡힌 사람

누가 더 설렐까

손이 가까워지는 순간

손과 손이 닿는 순간

손을 잡고 머무는 순간

언제가 더 설렐까

 

더 많이 설레는 심장에서

미세하게 퍼져 나오는 파동이

영혼과 영혼이 맞닿은

숨 막히는 진공을 건너

또 다른 손을 지나

또 다른 심장으로

전해질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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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엄마 엄지발톱 거무스름하단 말에

검은 발톱 검색하니 흑색종 사진 가득

가슴이 쿵 내려앉아 잠을 자지 못했다

 

조퇴하고 만나서 피부과 찾아가니

발톱 밑 살짝 떼어 현미경 관찰 한다

무좀이 이토록이나 반가운 말일 줄이야

 

항암제 부작용이 원인일 수 있단다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 먹고 빵 사드리고

초승달 올려다보니 엄마 발톱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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