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눈썹

과묵한 입매

북쪽 후문 앞

분주한 당신은

매일 아침 떠오르는

한 폭의 달마도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테두리를 넓혀가는 일

두 팔 활짝 벌리고

꼼지락거리는 자유를

기꺼이 다독이며 바라보는 일

 

짙은 눈썹 사이로

번져가는 당신의 미소

내 마음도 덩달아

투명하게 맑아지는데

 

은은함이 배어나오는

진한 수묵화 한 점

따뜻한 달빛 바다에

흘러가는 조각배 두 척

 

달마가 떠오른 이유

어렴풋이 알 것 같아

달마도 바라보며

나도 따라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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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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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녹는점이었다. 글을 경계로 추웠던 마음은 따뜻함을 향해 허물어졌다. 농담이 아니었다. 외롭다, , 격하게 외롭다. 소름 돋는 이 고독을 냉큼 예술로 승화시켜야 해. 우스갯소리로 포장하여 친한 이에게 건네곤 했던 이 말은 사실 진심이었다. 내 말은 아재개그처럼 썰렁했지만 가끔은 웃겼고, 그 말 직전에는 더 자주 외롭고 추웠던 마음이 늘 앞서 있었다.

10여년 남짓 되었을까. 외로울 때면 책을 읽고 느낌을 글로 적었다. 그럴 때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음을 단지 글로 표현했을 뿐인데, 거울인 듯, 자화상인 듯 나의 글은 잔잔하게 내 자신을 보여주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순간, 글을 쓰는 나는 글 안에 있는 나를 보는 관찰자가 되어 그 안에 담긴 마음을 토닥이고 있었다. ‘불완전하고 상처 입은 자신을 아름답게 재탄생시키는 것이 바로 삶의 예술이다. 흠과 결함을 더 창조적인 것으로 변신시키기 때문에 예술인 것이다.(p241)’아직 불완전하고 결점 많은 문장이 결정적인 흠이지만, 그래도 꿋꿋이 예술이라 세뇌하며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긴다. 그때마다 거짓말처럼 외로움이 위로가 되는 마법을 경험하며.

상처를 외면하지 말라. 붕대 감긴 곳을 보라. 빛은 상처 난 곳을 통해 네게 들어온다.(p183)’외면하거나 감추지 않기로 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이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은 당신의 가슴에 담긴 것들이다.(p266)’라는 말처럼, 가슴 뛰는 순간들을 많이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공전 소리는 너무 커서 오히려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주 깊은 슬픔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듯이, 이 책이 그랬다. 이러다가는 책 한 권 통째로 필사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옮겨 적기가 어려웠다. 근 한 달 동안 사무실 책상 위에, 안방 머리맡에, 커피 옆 테이블에 이 책이 놓였던 이유다. 난해한 문장은 단 한 줄도 없었건만 소설책 읽듯 쭉쭉 읽어 내릴 수 없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잡는 손가락은 습자지를 넘기듯 조심스러웠다. 마음 역시 느린 화면이 재생되듯 천천히 움직였다. 명상록인 듯 잠언집인 듯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보도록 하는 내용들로 가득한 51편의 산문집이다. 나는 걷기 명상을 하는 사람이 되어 느릿느릿 문장의 뒤를 따라 책 속을 산책했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문장들이 발끝에 닿는 풀잎인양 마음 곳곳을 툭툭 건드렸다.

 

마음속으로 다양한 부호들이 쏟아졌다.

물음표가 들어온 어느 날은 하루의 매듭을 묶기 전에 책 속의 문장을 따라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노래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춤춘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고요히 앉아 있었던 것이 언제인가?(p112~113)’, ‘오늘 놀라운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감동받거나 인상 깊은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나에게 영감을 준 일은 무엇이었는가?(p191)’

쉼표가 들어온 또 다른 날은 과감히 직장 일을 내려놓고 좋아하는 일(=웹 소설 판타스틱 남장신부몰아보기)을 했다.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기 때문에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쉼표를 매겨 가며 연주해야한 한다.(p15)’심적으로 힘들다는 친한 지인에게 카카오 톡으로 이 문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위로가 되었다며 격하게 공감을 했다.

느낌표가 들어온 날도 있었다. 많은 위로를 받고 잠이 들었다.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무의미한 길이다.(p45)’간혹 주춤거릴 때가 있었다. 시를 쓰거나 글을 쓰면서 퇴근 후의 시간을 보낼 때, 전공과는 전혀 반대편에 있는 이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 걸까 하는 생각에. 그 때에도, 으슬으슬 몸이 떨려 털스웨터에 야상까지 입고 굳이 커피숍에 온 4월 하순의 지금도, 나의 글에는 나의 온 마음이 담겨있으니. 이 길은 분명 좋은 길일 것이다. 박하사탕을 입에 넣은 듯 마음이 화해졌다.

화살표가 들어온 날에는 든든한 동지를 얻은 듯했다. ‘내가 지금 걸어가는 이 길, 누군가는 그 길을 걸었으며, 지금도 누군가는 나처럼 길을 걷고 있고, 또 누군가는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p78)’문장에서의이 물리적인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디를 향하든 마음이 향하는 곳이라면 씩씩하게 걸어가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책을 읽는 모든 날이 좋았다. 잠시 무로 돌아가셨던 그분이 떠오를 정도로 내내 마음이 편하고 행복했다.

 

마음의 연필을 들고, 나와 나의 삶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스케치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내가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며 비관적인 시선을 가졌던, 어느 책 속 등장인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던 때가 있었다. 우물을 향해 던져진 작은 돌멩이가 개구리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이 되듯, 마음을 할퀴는 상처는 철저하게 상대적이다. 누구도 절대적인 크기로 상처의 깊이를 속단할 수는 없다. 상처투성이의 마음을 그러안은 나는 어리석게도 세상을 탓한다.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피하거나 도망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스스로에게 쏘는 화살은 피할 길이 없다.(p139)’땅에 떨어진 화살을 굳이 주워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혀온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독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맺는 두 종류의 관계를 -의 관계와 -그것의 관계로 분류했다고 한다.(p256) 그의 시선이 참신하다. 주변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려본다. 어떤 이는 이고, 또 다른 이는 그것에 가깝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는 그것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내 글도.

 

이번 달 독서모임의 토론도서는 소설이었다. 마음이 지쳐있던 한 달 전, 소설을 한 호흡으로 길게 읽어 내려가기 부담스러웠을 때, 이 책을 가볍게 집어 들었다. 근 한 달간 이 책을 읽고, 힘을 얻은 나는 이틀 만에 토론도서 읽기와 독후감을 클리어 한다.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삶이 우리를 우회로로 데려가고, 그 우회로가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안겨 준다.(p83)’우회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머문 셈이다. 선물과도 같은 책이고, 따뜻한 책이고, 스스로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책이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p204)’가장 위로가 된 문장이다.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처럼, 이렇게 잠시 쉬어도 가면서 가슴 뛰는 순간들로 내 삶을 채워가고 싶다. 마음 어딘가 달려있을 나만의 날개를 믿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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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오일이 담긴 포도송이 캡슐 20여개를 알알이 담은 지퍼 팩을 같은 사무실 사람들에게 죽 돌리던 동료는 말했다.

-여러 용도로 쓰세요. 샐러드드레싱으로도 좋고, 계란 프라이를 해도 되고.

유럽 여행을 가서 사왔다나 어쨌든 어딘가를 다녀왔냐는 내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위 문장의 악센트는 사...에 찍히는 것이니.

당장이라도 여러 용도로 쓰일 것 같던 올리브유는 계란 값의 폭등과 의외로 비싼 야채들로 한동안 싱크대 안에서 잠을 잤지만.

 

올리브유의 잠을 깨운 건 안방 화장대였다.

머리에 바르던 헤어 에센스가 바닥을 보일 무렵이다.

가만 있자, 이거나 저거나 기름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분명히 여.러.용.도.라고 했으니.

인터넷을 미친 듯이 뒤진다. 올리브기름의 용도, 올리브유 활용법...

블로그 여러 군데를 방문한 끝에 유통기한이 지난 올리브유를 클렌징 오일로 활용하면 어떠냐는 댓글이 눈에 띈다.

-저 같으면 그냥 먹을 거 같아요. 가 대다수의 답변이긴 했지만.

그 어디에도 올리브유를 머리에 발라도 된다는 허락은 없다.

자기 암시를 걸기 시작한다. 피부에 양보하라는 말이 왜 있겠어. 먹을 수 있는 거니 상관없지 않을까. 상한 우유로 마사지도 하잖아.

 

어느덧 내 손은 가위를 들고 캡슐 1개를 자른다.

지난 3,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긴 친한 동료에게 카톡을 보낸다.

-한 가지 물어볼 거 있어. 2월에 **가 준 올리브 오일을 머리에 양보해도 될라나? 헤어에센스가 다 되어서ㅋㅋ

-ㅎㅎ 아마 그건 식용일 거예요~ 식용유 대신 드셔요. 바르시면 머리 떡 질듯ㅎㅎ

-! 헤어 에센스 코딱지만큼 남은 병에 1개 잘라서 섞어 놓았음ㅋㅋ 낼 발라보고 떡 지나 후기 남겨줄껨

-ㅎㅎ 사진 전송해주세요~~

이 인간이! 동료 맞냐.

 

낼 발라본 지 6일째다.

첫 날, 소심해서 손바닥이 먹은 양이 더 많았다.

둘째 날, 손바닥에 코를 바짝 들이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본다. 바닥에 남아있던 에센스와 혼합해서 그런가, ~ 나쁘지 않다.

셋째 날, 반 곱슬이라 전체 파마조차 못했던 부시시함이 그토록 차분했던 어제라니! 양을 조금 더 늘려보자.

넷째 날, 어제는 실패했다. 오후에 거울을 보니 물 만난 미역이었다. 아기를 처음 목욕시켰을 때처럼 손바닥이 바들바들 떨린다.

다섯째 날, ~ 나쁘지 않아졌다.

여섯째 날, 불어오는 봄바람, 흔들리는 꽃잎과 함께 부드럽게 흩날리는 머릿결...까지는 완벽했다. 문득 코끝에 계란 프라이향이 스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곱째 날, 내일이다. 계속 이래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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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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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키스>를 보던 순간, 정적이 흐르듯 시선이 고정되었다. 아직도 그 충격이 생생하다. 어떤 사진이나 영상보다 에로틱하게 다가왔던 강렬함은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금빛이 뿜어내던 색채감이었는지, 서로를 감싸 안은 두 연인의 포즈였는지, 제목이 연상시키는 설렘이었는지, 이 모든 것이 뒤엉킨 복합적인 분위기였는지 정확히 모른다. 무엇이 나를 끌어당긴 건지, 그것이 부분이었는지 전체였는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분명한 건 그 그림에 매혹되었다는 사실뿐이다.

강렬한 매력이 육박해올 때 평소의 취향은 발언권을 내세우지 못한다.(p114~115)’ 연보라, 하늘? 초록도 좋고. 간혹 좋아하는 색이 뭐냐는 질문을 받을 때, 노란색은 어떤 식으로든 언급된 적이 없다. <키스> 후로 노란색이 추가된다. 어쩌면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노란색을 좋아하는 성향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그림을 계기로 봉인 해제된 건지도.

그때부터였다. 카드형 USB나 휴대용 손거울이나 머그컵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소지품을 선택하게 된 기준이 뛰어난 성능에서 변경된 것은. 명화 하나면 족했다. 시골 느낌 나는 도시 근교에 직접 지었다는 멋들어진 집으로 집들이를 갔어도, 그저 부러웠던 건 전면이 통유리인 거실 너머로 펼쳐지던 초록의 흔들거림도, 큰 숨 한 번으로도 깨끗함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던 공기도 아니었다. 주방 한 벽에 자리 잡은 거대한 황금빛 타일 하나면 충분했다.

책장을 펼쳐보기도 전에 이미 절반 이상은 맘에 든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책 제목이 보이지 않던 거리에서는 말라비틀어진 동태 덩어리처럼 보이던 표지그림이 지금도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것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책에 대한 호감지수는 급속도로 치솟는다. ‘벌써 재밌다, 보검아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p9)’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사랑의 생애에 대한 정밀묘사다. 책에서 언급되는 현미경 아래 사랑이라는 프레파라트를 올려놓고 구석구석 관찰이라도 하듯, 그 속성을 연구한 학자가 쓴 논문처럼 사랑을 담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심리묘사가 치밀하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인물의 의식이나 그 이면에 잠재된 심리를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는 점에서 심리학의 냄새가 짙다.

형배, 선희, 영석, 준호, 민영, 형배의 부모님이 하는 사랑은 어느 것도 같지 않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색상도 다르고 채도도 다르기에 비슷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도 없다. 이들의 사랑 중 몇 가지 요소를 엮어 순서쌍으로 결합시킨 후, 자신만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고유키를 입력하면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기억 속의 사랑이 된다.

주로 등장하는 세 인물 이외에 주변인들의 사랑에도 어느 것 하나 가벼이 스칠 수 없는 무게감이 있다. 새 한 마리에 해당하는 살점의 무게가 한 사람 전체와 동일하다며 존재의 중요성을 어필한 우화처럼, 그 어떤 사랑도 가볍지 않다. 누구나 겪었음직한 감정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마다 그 대상마다 다른 미묘한 차이는 특별하지 않은 사랑은 없음을 말해준다. ‘모든 사랑이 다 다르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규정되지 않으니까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걸 따로 정할 수도 없다.(p145~146)’라는 말처럼.

내 사랑의 패턴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비슷한 유형의 사람에게 끌리고, 이별로 이어지는 과정도 비슷했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끌어당기는 공통된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막상 헤어지고 나서는 비슷했다는 느낌이 들던 걸 보면. 다시는 사랑 따위 하지 않을 거야 하면서 어느 순간 또 다른 상대에게서 매혹의 지점을 발견해내던 자신이 이해되지 않던 적도 있다. ‘사랑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관념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사랑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관념의 속성 때문이다.(p289~290)’이 문장이 그에 대한 답이 되는 걸까.

관계를 이어가면서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오류에 대한 지적이 냉철하고 객관적이다. ‘현미경으로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굳이 현미경으로 볼 필요가 없고, 또 현미경으로 보지도 말아야 한다.(p231)’,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대로 들린다.(p221)’, ‘눈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도록 유도된 것을 본다.(p253)’,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나타낸다.(p228)’ 사람의 말이나 행동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심리에 대한 서술이 당황스러울 만큼 적나라하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상대에게 했던 행동과 당시 느꼈던 선명한 감정을, 말하자면 부드러운 말 뒤에 숨겨두었던 마음을 떠올려본다. 묘하게 설득되면서 고개가 끄덕여진다는 점이 더욱 당황스럽다.

책을 읽다가 새로 옮긴 직장에서 심적으로 힘들어하던 직장 동료에게 마음에 꽂혔던 문장을 카카오 톡으로 보냈다. ‘우리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대단한 일을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일을 견딘다.(p54)’ 제 이야기 같다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읽다보면 사랑이 사람으로, 사람이 삶으로도 읽힌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사랑이란 것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므로 일반적인 관계에 적용해도 도움이 많이 될 만한 내용이다.

표지를 다시 본다. 하얀 바탕에 쓰인 제목 ....’. 동그라미 4개가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의 자만 동그라미가 길쭉하다. 사랑을 뜻하는 와 중의적으로 겹쳐진다. . 별 걸 다 갖다 붙인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추리소설에 버금갈만한 심리소설을 읽다보니 감각이 예민해졌다. ‘다르고 다름을 알았다고나 할까. 무심코 나오는 말에 조사 하나에도 많은 심리가 담겨있음을 깨닫는다. 지금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굳이 귀로 들리는 것이나, 하필 이 순간에 코끝으로 흘러들어오는 향기도, 새삼 부드럽게 느껴지는 감촉도, 이렇게 맛있었나 싶은 음식 하나도 그냥 나를 지나치는 무의미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삶이 새삼 소중해진다.

 

사랑이 목표였던 적이 있다. 멋진 사람을 보면 설레었다. 내 가슴을 뛰게 하던 것은 오로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사정권 안에 들어있는 따뜻한 이성이었다. 설렘으로 가슴 뛰던 마지막 순간이 언제더라. 기억이 희미해져갈 무렵, 내게 다시는 사랑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한동안 울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간지 남은 많았다. 드라마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간들의 띠는 심폐소생술처럼 나의 심장을 부활시켰다. 만지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뭐 그런대로 삶은 다시 즐거워졌고 상상의 힘은 가끔 꿈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살아가다보니,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이성 말고도 많았다.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되었음을 확인하던 순간, 이상형을 앞에 둔 듯 콩닥콩닥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의 대상이 굳이 사람으로 한계 지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니.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p285)’라 말한 저자의 메시지는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고 망설이며 관찰자 입장에서 상상하며 판단해버리는 이들에게 의미심장하다. 이생에서의 사랑이 일단락된 형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준호의 또 다른 사랑이 피어오를 것이 암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제도의 속박에 대한 준호의 의견에 어느 정도 수긍한다. ~ 나는 아무래도 결혼에 적합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작가가 설정한 형배의 사랑에서 희망을 찾는다. 카카오 톡에 저장된 이름 사랑’, 가끔은 사랑이라 쓴 두 글자가 웬수로 읽히는 남자. 거실에서 발가락을 만지면서 그 손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저 인간에게, 또 누가 아는가. 형배가 선희를 다시 만난 그 순간에 느끼던 사랑처럼, 다시 두근거리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말의 영향은 말을 듣는 사람만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나타나지 않을까.(p130~131)’라 말한 작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니까. 하여 내 폰의 주소록에 저장된 닉네임은 앞으로도 줄기차게 내 사랑 ㅇㄱ일 것이다. 사랑은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네버 엔딩 스토리이니까. 나의 삶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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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도 시 한 편
써 주시더래요, 샘
수줍은 소년처럼
해사한 햇살 웃음

파도인 듯 밀려와
통통 튀는 아이들에
모래알 발걸음은
멈출 줄을 모르는데

이미 당신의 삶이
움직이는 시 한 편인걸
초라한 몇 글자로
어찌 붙들어달라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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