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바람난 여자
아니 프랑수아 지음, 이상해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3월
절판


어떤 표지들은 너무나 혐오스러워서 탐을 내던 책조차도 거들떠보지 않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 독서를 하다가 책의 내용과 표지, 아니면 텍스트와 저자 사진을 대조해 보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저자의 사진 역시 내 신경을 건드린다. 이 작가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다. 나는 수염도 없고 바싹 마른 그를 상상했다. 그런데 턱수염을 기른 데다 살이 쪄 투실투실하기까지 하다. 도도하고 투박한 여자일 거라고 믿었던 저자는 한껏 교태를 부리는 세련된 도시 여자다.


*
얼마전에 본 닉 혼비의 '피버 피치' 자신은 써포터지 홀리건은 아니라고 하지만, 책 날개의 대머리 사진은 게다가 가죽자켓. 음. 딱 홀리건 스타일인걸. 생각이 들어버렸다. 게다가 그 책의 표지는 정말정말정말 유치찬란하기 그지 없다. 원서 페이퍼북의 깔끔한 노란 표지가 정말 아쉬운 순간이었다. 만약, 인터넷에서 사지 않았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 표지중 하나다. -63쪽

나는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신성 모독을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숭배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는 공상을 품을 정도로 책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있기는 하다. (...) 책 귀퉁이를 접는 것은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백지로 남아 있는 책 마지막 페이지에 스케치를 하는 일은 즐긴다.
옳든 그르든, 나는 이러한 자잘한 탈선들이, 소심한 여자가 용기를 내어 시도하는 나름대로 대담한 이 행동들이 더 큰 탈선, 엄청난 피해,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막아준다고 믿고 있다. 예를 들면, 책에 불을 붙이는 것 같은. (...) 반면, 나는 본문 위의 여백에 수채화를 그리라고 한다면 기꺼이 하겠다. 게다가 나는 이미 최근에 다시 읽은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에, 안드레스의 성찰이 끝나는 폴리오 판 395페이지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 일을 시작했다. 나는 파스텔로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그렸는데, 너무 못 그려 당분간 그 짓은 두 번 다시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주 단단히 미쳐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경우만 빼놓고. 하지만 나는 내가 미치기 훨씬 전에 그 짓을 다시 시작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수채화, 파스텔화, 데생으로 완전히 뒤덮인 책, 마치 스케치북이라도 되는 듯. 맞아, 그렇게 못 할 이유가 어디 있어? 하지만 어떤 책에다? 내가 좋아하는 책(아까워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책(치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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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퉁이를 잘 접는다. 나중에 다시 보고 리뷰에 참조하거나 밑줄 긋고 싶은 부분들에. 그러나 읽던 부분을 표시하기 위에 접는 것은 절대로 안한다. 나의 타부라고나 할까. 가장 선호하는 책갈피는 책날개이고 물론. 그 다음은 책 끈. 이도 저도 없으면, 굴러다니는 종이를 끼워 넣게 되거나, 종이마저 안 보이면, 그냥 덮어버리고 만다. 이 책은 친절하게도 하드커버면서, 책끈도 책날개도 없다. 책의 반 이상을 읽을때까지도 나는 덮었다 폈다 어디까지 읽었나 찾았다를 되풀이 해야했다. -92-95쪽

가방에 책 여러 권을 - 나머지 소지품도 함께 - 늘 넣고 다닐 정도로 체력이 튼튼하면서도 독서광은 어떤 심리적인 허약함, 병적일 정도의 예민함을 보인다. 어쨌든 나는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읽고 있는 책 제목을 흘낏거리는 것을 참아내질 못한다. 특히 흘낏거리는 그 눈에 " 어디 뭘 읽고 있는지 좀 볼까..."라는 참기 힘든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을 때는 ( 밥맛없는 현학자!). [공작의 주인](아, 동물을 좋아하시는군요!)나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넬슨 알그렌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을 때는 그런대로 참을만하다. 하지만 퍼트리샤 콘웰의 최신작을 읽을 때는 전반적인 탐정소설, 특히 이 책을 싫어한다는 것을, 이런 책은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순전히 직업의식 때문에 읽기 시작했다는 것을(하지만 그 후로 잃어버린 시간을 따라잡느라 한동안 푹 빠져 지냈다) 무슨수로 느끼게 할 것인가

*
병적일 정도의 예민함이라. 근데, 그게 참, 꽤나 주관적이어서, 책 읽는 사람들끼리도 이해는 더 잘 하지만, 참 다들 다르다.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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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기

선물을 하려면 책을 사야만 한다. 그리고 책을 사려면 서점에 가야만 한다. 작은, 아주 작은 서점에. 동네 상점을 하나하나 돌아가며 신중하게 외상을 깔아놓는 가난뱅이처럼 나는 치밀하게 한 곳 한 곳을 체크해가며 돌아본다.

나는 살 책을 결정했을 때에만 서점에 간다. 그런데도 서점에서 나올 때는 항상 손에 적어도 세 권은 들려 있다. 아니면 병적인 허기증 환자가 제과점 진열창을 애써 피하듯, 나는 침대 옆에서 쓰러질 듯 흔들리며 대기하고 있는 거대한 책 더미를 더 높이 쌓아올릴 뿐인 부추김의 허기와 충동구매를 피하기 위해 눈을 감다시피 하고 서점 앞을 지나간다. 계속 그러다가는 내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쌓아둔 책들이 나를 덮쳐 일종의 복수를 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가장 견디기 힘든 경우는 도서전이다. 죽었거나 살아 있는 그 수천 명의 작가들, 내가 읽지 않은 그 수백만 권의 저작들.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나는 소화불량에 시달린다. 나는 곧 도매 푸줏간이나 대형 양계장에서 길을 잃은 채식주의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식욕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없이 널려 있는 그 책-음식물들이 구역질을 일으킨다. 나는 매년 도서전에서 나올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럴 때면 나는 늘 다니는 서점들 중 하나에 급히 뛰어들어 즐겨 찾는 코너나 신간 진열대를 허겁지겁 훑어보고 출구를 향해 달려간다. 이미 늦었다. 훑어보던 내눈에 [팔라틴 공주의 편지]가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계산대 바로 옆에 진열되어 있는, 첫 페이지가 눈부신 문장력의 진열창인 비방 드농의 {다음날은 없다]도 나는 황급히 사서 달아난다. 휴, 세 권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 게다가 그중 두 권은 아주 얇다. 그 정도면 고통의 책더미도 날 용서해줄 것이다.

가끔 드라마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서점에 내가 탐하는 책이 없다. "[미들마치]요? 부르주아 서점에도 재고가 없어서 나도 못 구했어요. 윈 서점에 한 번 가 보세요." 들른 김에 동생에게 선물하기 위해 엘렌 방베르게르의 소품을 집는다. 윈에는 물론 [미들마치]가 있다. 옴니버스가 다른 소설 두 권과 함께 묶어서 내놓은 것으로. 그런데 나는 아직 소설 세 권을 한꺼번에 먹어치울 만큼 조지 엘리엇에게 굶주려 있지 않다. 그만 포기한다. 짐 해리슨의 새 책이 나왔을거라며 나 자신을 달랜다. 웬걸, 게으르기는! 나는 욕구불만인 상태로 윈에서 나온다. 발자르 카페에 앉아 프랑수아를 기다리고 있자니 콩파니 서점이 아직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나에게 [미들마치]를 사게 하려는 운명의 신호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책 더미가 날 깔아뭉개거나 말거나. 입에 침을 튀겨가며 그 책을 추천해준 카트린은 좋아할 것이다.

안달하지도 동요하지도 않고 이 코너 저 코너 차분하게 구경하며 돌아다닐 수 있는 프랑수아, 서점 주인의 입발린 소리에 잘도 넘어가는 아르멜이 얼마나 부러운지. 반면, 나는 마치 위협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푸르넬의 [운동선수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 선물용 서랍 속에 이미 세 권이나 들어 있다. 없어서 못 준 경험을 한 후로는 몇 권씩 쌓아두고 있다)를 또다시 사고 만다. 그러고는 속으로 따져본다. 이 놀라운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스포츠지 기자가 되겠다고 설쳐대는 레옹-모리스의 딸에게 한 권, 일요일마다 자전거로 백 킬로미터를 달리는 아페니노 식당 주인 리노에게 한 권. 그 책을 읽을 이유는 전혀 없지만 그 책을 사랑할 이유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수십 권.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나는 새 책보다는 샀던 책을 더 많이 산다. 나의 정신 나간 행동에 서점 주인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도 나와 엇비슷하다. 동시에 또는 차례로, 투덜거리고, 쾌활하고, 까다롭고, 바쁘다. 따뜻하든 차갑든, 나는 그들의 기질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적응해나가면 된다. 그들 역시 그렇겠지. 우리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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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4-03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하이드님 얘긴 줄 알았어요..^^;; 좀 비슷하지 않으신가요?

하이드 2005-04-03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하하, 우.리.가(강조해서) 글쵸 뭐.

chika 2005-04-03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 전 정말 '사기'치는 줄 알았어요. 정신없는 치카~ =3=3

하이드 2005-04-0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풉. 책사기. 흐흐흐 . 그러고보니 그렇게도 보여요. 치카님

2005-04-03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메뚜기의 하루
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이종인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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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네이얼 웨스트를 처음으로 접했던 미스 론리하트에 비해 이 책은 참 실마리가 없다. 책을 어떻게 읽어나가야할지 난감하다고나 할까.  읽는 내내 불행하고 꼬인 버전의 '티파티에서의 아침을'을 보는 느낌이었다.

은유로 가득차서 읽는 내내 머리가 갑갑스러웠다. 읽는 당시 너무나 감동이었던 '미스 론리하트'는 어느새 내 기억에서 사라져 있었다. 읽은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나의 리뷰를 다시 보니, 당시 그렇게나 재미있게 읽어놓고, 다시 떠올려 보려면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은 메뚜기의 하루에서는 더 심해져서 책의 끝장을 덮을 즈음에는 주인공의 이름과 책 속의 사건들이 신속하게 기억에서 사라져가 버려서 리뷰 쓰려고 옆에 책 놓고 앉아 있는 지금 계속 책을 펼쳐 뒤적이게 된다.

미스 론리하트에서 굉장히 여러가지 주제를 중편 길이의 책에 담고 있다면, 이 책은 좀 더 긴 중편소설에 더 집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폭력과 사랑, 야망등으로 그 주제는 집약되는데,

페이 그리너라는 팜므파탈적인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그녀를 쫓아다니는 별볼일 없는. '돈이 많거나 잘생긴'이라는 그녀의 기준에 충족되지 않은 '착한' 토드와 ( 본인 입으로 착하다고는 하나, 왜 자신이 착하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융통성이 없고 사회성이 없어서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 표현을 자학의 방법으로밖에 못하는 페이에게 분노와 수치감과 경멸을 동시에 안겨주는 호머가 있다.

페이는 헐리우드의 단역배우이다. 남는 시간에는 광대였던 아버지와 집에서 만든 광택제를 팔러 다닌다.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는 모두 현실을 연기한다. 그들이 하는 연기는 드라마틱하긴 하지만 여전히 현실을 배경으로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페이의 주위에는 페이와 비슷한 삼류인생들의 모임이다. 난장이, 건달 양아치, 닭싸움 시키는 멕시코인.

그 모두의 생활은 구질구질하지만 나름대로 생생하다. 진흙바닥에 딩구는 굵은 지렁이들처럼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아니면, 예전의 주차장이었던 공터에 잡초와 잔디가 자라 버린 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알고 끊임없이 팔딱대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그러다가 차에 치여 혹은 발에 밟혀 죽어버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할까?

개인으로서는 힘없고 비굴하고 수줍다가도 머리가 둘이상 셋이상 혹은 몇십, 몇백, 몇천이 늘어나기만 하면 포악해지고, 용기백배해지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정의로워지는등 미쳐돌아간다.

몇장에 걸쳐서 잔인하게도 자세하게 묘사된 닭싸움의 장면이나 시사회장에서 메뚜기떼처럼 잔뜩 몰려 이리저리 휩쓸리는 장면이나 그 아수라장에서 악마같은 아이에게 돌을 얻어맏고 아이를 죽여버리려고 하는 끈이 끊겨버린 호머의 모습이나 경찰차에 실려가면서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사이렌 소리를 흉내내는 토드의 모습은 자극적이지만 동시에 드라이하다. 드라마틱하지만 동시에 현실이다.

어떤 기분이 들때 이 책을 다시 잡고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읽은 지금으로선 머릿속에 온통 수많은 퀘스쳔마크가 떠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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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4 0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메뚜기의 하루
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이종인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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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이 눈물의 혜택을 받는다. 울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호머처럼 희망이 없는 사람, 견고하고 영원한 고뇌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 눈물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어떤 것도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지 못하는 것이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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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 vs 찰튼

1989.3.21

이제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책의 첫 부분에 등장했던 불안한 소년은 사라졌다. 이십대 시절 내내 자신을 비꼬던 젊은이도 없어졌다.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어리다거나 젊다는 것을 핑계 삼아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 해명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내 삶과 내 주변 사람들의 삶에 축구가 미치던 절재적인 영향력은 이해하기도 힘들고 호감도 가지 않는 것으로 변했다. 오랜 세월 동안 나 때문에 기운 빠지는 일들을 겪어온 가족과 친구들은, 어떤 약속이든 결국은 축구경기 날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들은, 다른 가정에서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우선권을 가지는 세례식이나 결혼식이나 그 외의 모임을 나와 상의한 다음에야 계획할 수 잇따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축구는 결국 견디며 살아야 하는 장애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내가 만일 휠체어를 타야 하는 처지라면 내 가족이나 친구들이 아파트 맨 꼭대기 층에서 행사를 열 계획은 하지 않을 테니, 축구 시즌 중의 토요일 오후에 행사를 열어야 할 까닭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나 또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삶 속에서는 주변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이 사람들은 보통 1부 리그의 경기 일정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고는 싶지만 할 수 없이 사양해야 하는 결혼식 초대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집안에 일이 있다거나 마감이 바쁘다거나 하는,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변명을 대고 있다.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라는 것은 이런 상황에 적절하지 못한 변명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리 알 수 없는 무슨 컵의 재경기, 주중의 경기 재편성, 텔레비전 방송 일정에 맞추어 경기 직전에 날짜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는 경우 등이 있으므로, 나는 실제로 경기 일자와 겹치는 행사뿐만 아니라 경기 일자와 겹칠 가능성이 있는 행사의 초대까지도 거절해야 한다. (혹은 내가 어떤 행사를 주관하게 되면, 관련자 모두에게 마지막 순간 내가 빠져야 할지도 모른다고 미리 말해 두지만, 잘 먹혀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때때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피할 수 없다. 이날 찰튼 전은 일정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아주 친한 친구의 생일 파티, 그것도 딱 다섯 명만 초대받은 생일 파티와 겹치게 되었다. 일단 두 가지 이해관계가 상충할 것을 알고 나자, 나는 나 없이 홈경기가 열릴 것을 생각하는 동안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친구에게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 사연을 털어놓았다. 웃으며 괜찮다는 반응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그녀의 음성과 거기에 실린 실망감과 지긋지긋한 짜증에서 절대 그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신 그녀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 혹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는 식의 무서운 말을 했다. 그것은 나의 정체를 드러내놓는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나는 생각 좀 해보겠다고 대답했지만, 그 대답으로 내가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을 것이며, 나는 쓸모없고 천박한 벌레만도 못한 존재임이 밝혀졌음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나는 결국 축구를 보러 갔다. 나는 경기를 보게 되어서 기뻤다. 폴 데이비스가 하이버리에서 내가 본 골 중에서 가장 멋진 축에 속하는 골을 넣었던 것이다. 찰튼의 공격수를 뒤따라 그라운드를 날쌔게 횡단하다가 다이빙 헤딩으로 완성한 골이었다.

이런 사건에서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내가 소속감을 느끼는 대상이 아스날 팀보다는 하이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경기가 크리스털 팰리스나 웨스트햄의 홈에서 있었다면, 그곳 역시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비록 내가 광적인 팬일지라도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무슨 까닭일까? 왜 나는 런던의 한 지역에서 벌어지는 아스날의 경기는 반드시 봐야 하면서, 같은 런던의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아스날의 경기는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요기에 작용하는 판타지는 뭘까? 단 하루저녁이라도 하이버리에 가지 못해서, 행여 리그 순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경기-반드시 재미있다는 보장도 없다-를 놓치게 된다면 큰일이라도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해답은 이렇다. 나는 놓친 경기의 다음 경기를 볼 때, 응원가라든가 관중들이 어떤 선수에 대해 느끼는 반감 등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곳, 내 집 이외에 절대적이고 의심의 여지없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곳이 낯설게 느껴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나는 1991년 코벤트리 전과 1989년 찰튼 전을 놓쳤는데, 그때는 외국에 있었다. 처음으로 홈경기에 가지 못하게 되자 기분이 이상했지만, 하이버리에서 몇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어 그런 대로 참을 만했다. 딱 한 번, 아스날이 홈경기를 하는데 런던 안의 다른 곳에 있은 적이 있다. (1978년 9월에 우리가 퀸스파크 레인저스를 5-1로 이기고 있었을 때, 나는 빅토리아에서 프레디 레이커스 스카이트레인 비행기표를 끊으려고 줄을 서 있었다. 스코어와 상대 팀을 모두 기억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때 나는 가만히 서 있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이버리에 가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며,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병이 나거나,(하지만 나는 독감에 결렸을 때나 발목이 삐었을 때나 그 밖에 이곳저곳이 아플 때,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하지만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하이버리에 갔다. ) 장차 아이가 처음으로 축구경기를 하거나 학교에서 연극을 할 때나, ( 학교 연극에는 꼭 갈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걸 빼먹을 정도로 미치광이라서, 그 아이가 2025년쯤 햄스티드의 안락의자에 앉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정신과 의사에게,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가 자기보다 아스날을 더 중하게 여겼다고 할까 봐 두려운 마음도 든다.) 가족의 장례식이 나, 일 때문에...

그렇다. 경기 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생기는 두번째 문제는 바로 일이다. 남동생은 현재 정규 근무시간 외에도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을 갖고 잇다. 지금까지는 남동생이 일 때문에 경기를 놓친 일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이번 시즌이나 다음 시즌 중 어느 날, 누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회의를 요청하고 그 회의가 8시 30분이나 9시까지 끝나지 않는다면, 남동생은 머스가 상대 팀 풀백을 괴롭히는 곳에서 3,4마일 떨어진 자리에 앉아 메모지를 노려보고 있게 될 것이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달리 방법이 없으니, 남동생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참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에서, 나는 결코 남동생 같은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일을 하게 된다면, 나도 남동생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쩔 줄 몰라서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하고 입을 내밀고 난리법석을 떨어서, 성인으로서의 생활이 요구하는 바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기를 바란다. 작가는 보통 사람들보다 운이 좋은 편이지만, 언젠가 나도 재난에 가까울 정도로 불편한 시각에 어떤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토요일 오후에만 만날 수 잇는 사람과 단 한 번밖에 기회가 없는 인터뷰를 해야 할 수도 있고, 마감 날짜 때문에 수요일 저녁에 워드프로세서 앞에 앉아 있어야만 할 경우도 생길 것이다. 제대로 된 작가라면, 작가 여행을 가기도 하고 토크쇼에도 출연하는 등 온갖 위험천만한 일을 하게 되는 법이니, 나도 언젠가는 그런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 책을 발행하려고 하는 출판사 사람들이 제정신이라면, 이런 식의 강박증에 대해 글을 쓰게 해놓고서, 그들의 출판을 위해서 축구를 못 보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사이코라고요, 그거 기억하시죠?"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다 그런 거라니까요! 난 수요일 밤에는 절대로 낭독회를 할 수 엇ㅂ어요!" 그러면 나는 조금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10년 넘게 봉급쟁이로 살면서도, 경기를 놓칠 수밖에 없는 입장들을 모두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로 우연이나 운 덕분일까?(보통의 경우, 사람들이 사교 생활을 즐겨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극동 무역회사의 상사들조차도, 나에게는 아스날이 최우선이라는 점을 인정해주었다.)그렇지 않으면, 강박증 덕분에 소망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충격적인 것이니까. 만약 정말 강박증 때문이라면, 십대 소년 시절 내가 갖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선택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며, 1968년의 스토크 시티로 인해 나는 사업가나 의사나 진짜 저널리스트가 되지 못한 것이 된다. ( 다른 많은 팬들처럼 나 역시 스포츠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하이버리에서 아스날과 윔블던의 경기를 봐야 할 시간에, 어찌 리버풀과 바르셀로나의 경기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또 내가 사랑하는 경기에 대해 글을 쓰면서 많은 돈을 받는 것은 몸서리가 나도록 두려운 일 가운데 하나다.) 나는 운 좋게도 내가 선택한 작가라는 직업 덕택에, 경기가 있을 때마다 하이버리에 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편이 훨씬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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