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표지들은 너무나 혐오스러워서 탐을 내던 책조차도 거들떠보지 않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 독서를 하다가 책의 내용과 표지, 아니면 텍스트와 저자 사진을 대조해 보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저자의 사진 역시 내 신경을 건드린다. 이 작가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다. 나는 수염도 없고 바싹 마른 그를 상상했다. 그런데 턱수염을 기른 데다 살이 쪄 투실투실하기까지 하다. 도도하고 투박한 여자일 거라고 믿었던 저자는 한껏 교태를 부리는 세련된 도시 여자다.
* 얼마전에 본 닉 혼비의 '피버 피치' 자신은 써포터지 홀리건은 아니라고 하지만, 책 날개의 대머리 사진은 게다가 가죽자켓. 음. 딱 홀리건 스타일인걸. 생각이 들어버렸다. 게다가 그 책의 표지는 정말정말정말 유치찬란하기 그지 없다. 원서 페이퍼북의 깔끔한 노란 표지가 정말 아쉬운 순간이었다. 만약, 인터넷에서 사지 않았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 표지중 하나다. -63쪽
나는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신성 모독을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숭배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는 공상을 품을 정도로 책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있기는 하다. (...) 책 귀퉁이를 접는 것은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백지로 남아 있는 책 마지막 페이지에 스케치를 하는 일은 즐긴다. 옳든 그르든, 나는 이러한 자잘한 탈선들이, 소심한 여자가 용기를 내어 시도하는 나름대로 대담한 이 행동들이 더 큰 탈선, 엄청난 피해,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막아준다고 믿고 있다. 예를 들면, 책에 불을 붙이는 것 같은. (...) 반면, 나는 본문 위의 여백에 수채화를 그리라고 한다면 기꺼이 하겠다. 게다가 나는 이미 최근에 다시 읽은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에, 안드레스의 성찰이 끝나는 폴리오 판 395페이지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 일을 시작했다. 나는 파스텔로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그렸는데, 너무 못 그려 당분간 그 짓은 두 번 다시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주 단단히 미쳐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경우만 빼놓고. 하지만 나는 내가 미치기 훨씬 전에 그 짓을 다시 시작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수채화, 파스텔화, 데생으로 완전히 뒤덮인 책, 마치 스케치북이라도 되는 듯. 맞아, 그렇게 못 할 이유가 어디 있어? 하지만 어떤 책에다? 내가 좋아하는 책(아까워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책(치사해라)?
* 나는 귀퉁이를 잘 접는다. 나중에 다시 보고 리뷰에 참조하거나 밑줄 긋고 싶은 부분들에. 그러나 읽던 부분을 표시하기 위에 접는 것은 절대로 안한다. 나의 타부라고나 할까. 가장 선호하는 책갈피는 책날개이고 물론. 그 다음은 책 끈. 이도 저도 없으면, 굴러다니는 종이를 끼워 넣게 되거나, 종이마저 안 보이면, 그냥 덮어버리고 만다. 이 책은 친절하게도 하드커버면서, 책끈도 책날개도 없다. 책의 반 이상을 읽을때까지도 나는 덮었다 폈다 어디까지 읽었나 찾았다를 되풀이 해야했다. -92-95쪽
가방에 책 여러 권을 - 나머지 소지품도 함께 - 늘 넣고 다닐 정도로 체력이 튼튼하면서도 독서광은 어떤 심리적인 허약함, 병적일 정도의 예민함을 보인다. 어쨌든 나는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읽고 있는 책 제목을 흘낏거리는 것을 참아내질 못한다. 특히 흘낏거리는 그 눈에 " 어디 뭘 읽고 있는지 좀 볼까..."라는 참기 힘든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을 때는 ( 밥맛없는 현학자!). [공작의 주인](아, 동물을 좋아하시는군요!)나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넬슨 알그렌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을 때는 그런대로 참을만하다. 하지만 퍼트리샤 콘웰의 최신작을 읽을 때는 전반적인 탐정소설, 특히 이 책을 싫어한다는 것을, 이런 책은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순전히 직업의식 때문에 읽기 시작했다는 것을(하지만 그 후로 잃어버린 시간을 따라잡느라 한동안 푹 빠져 지냈다) 무슨수로 느끼게 할 것인가
* 병적일 정도의 예민함이라. 근데, 그게 참, 꽤나 주관적이어서, 책 읽는 사람들끼리도 이해는 더 잘 하지만, 참 다들 다르다. -16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