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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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나오는 요 시리즈는 하나같이 작품 퀄리티가 상당히 높아 보인다. 지금까지 4권 읽었는데 전부다 소재나 테마가 독특했고, 이슈되는 사회문제를 꼬집는 장면이 꼭 있다. 스토리텔링도 훌륭하고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지고 있어 유명한 일본 사회소설에 전혀 꿀리지 않는다. 시끌시끌했던 ‘82년생 김지영‘도 이 시리즈던데 그 책도 언젠가는 읽을 날이 오겠지. 요즘은 국내 작가 쪽에도 관심을 많이 가져보려 한다. 한국문학은 유명한 작품 위주로 읽어봤는데 내 코드와 영 안 맞는 작품이 많았고 실망을 거듭하여 선입견이 생겼었다. 꽤 괜찮은 국내 작가들도 많은데 스타 작가들에게 가려져 모르고 지나쳐온 것도 있고 사실 그동안 너무 무관심하기도 했다. 이젠 골고루 좋아해볼게유.


주인공 고요나는 재난 당한 나라에 관광을 보내주는 여행사 과장이다. ​퇴출 대상만을 성추행하는 김 팀장에게 성추행당한 그녀는 결국 사표를 던지지만, 회사는 한 달 휴가와 함께 출장 개념으로 재난 관광지를 보내준다. 무이라는 섬으로 날아가 5박 6일의 일정을 마친 요나는 공항 가는 열차에서 가이드 일행과 떨어지고 섬에 혼자 남겨진다. 회사도 도와주지 않았고, 소지품도 사라져서 불법체류자가 된 그녀는 묵었던 여행사와 계약 맺은 리조트로 돌아온다. 마침 리조트 업체에서 고용한 한국인 작가가 요나를 알아보고 이 섬의 재난 프로그램을 리뉴얼하자고 제안한다. 이 섬은 관광 상품의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제안을 기회로 삼아 상품 가치도 되살리고 본인의 가치도 높여볼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작가의 시나리오가 범상치 않다. 인위적인 재난을 발생시켜 여행사에 재계약을 체결하시겠다? 이 계획에 공범이 되는 게 과연 잘한 선택일까. ​​


​재난 지역으로 관광을 간다니, 발상 한 번 프레쉬하다. 재난 지역을 관광하면서 삶에 대한 감사를 느끼게 하는 취지라나. 맨날 고객들만 비행기 태워주다가 직접 날아가보니 감회가 퍽 새로운 주인공. 그녀는 관광하며 카메라에 담아둔 섬의 모습과 사람들의 분위기가 이곳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관광이 끝난 다음에야 섬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1달러를 벌기 위해 섬 주민들은 억지로 웃고 노래했다. 그리고 무대가 끝나면 마치 기초생활수급자들만 사는 섬처럼 변했다. 가치를 잃은 관광지는 주민들의 생계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요나의 말대로 재난은 눈앞에서도 진행 중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섬 전체가 아닌 실속을 챙기는 몇몇을 위해 상품을 리뉴얼 한다는 게​​ 어쩐지 꺼림칙하다. 그렇게 무생물 같던 그녀의 심장 속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감수성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요나의 양심을 시험하는 순간이 참 많았다. 섬 주민들까지 동원해 재난 조작극을 꾸미는 황 작가와 업체를 말릴 기회도 많았다. 그러나 제 코가 석자인 요나는 그러지 않았고, 심지어 이 일이 주민들을 대학살 할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번번이 외면하였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안위만을 우선시하였다. 근데 나는 그녀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야망에 눈이 멀어 분별력을 잃은 게 아니라 그냥 피곤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것이니까. 마치 성추행 당한 직원 그룹에 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문제는 요나도 본인의 선택이 어떤 운명을 가져올지 짐작하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애써 모른척하기 위해 죽어가는 소금 땅을 살려내는 것만 집중했을 뿐이다. 그러나 공포 앞에서는 다 똑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천천히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곧 죽을 사람들에게 별 감정도 없다가, 본인이 죽을 처지가 되고 나니 생명이 귀한 줄 깨달으신 우리 고 과장님.


여행사에 도움을 요청해도 회사는 알아서 하라며 그녀를 모른 척 한다. 그제서야 요나는 고객들의 취소/환불 요청들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절실한 고객들에게 갑질로 대응했던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동정을 해야 할지,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도와줄 마음이 없는 여행사는, 이윤 없는 일에 힘 쏟지 않는 자본주의사회의 표본이다. 내 밥줄 챙기기도 바빠서 타인을 신경 쓰는 게 오지랖이 돼버린 사회. 그 속에서 벗어나 보려고 떠났던 여행인데, 교만함으로 만든 재난과 대 자연 앞에 요나 일행은 굴복하고 말았다. 역시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다고 숨 막히는 현실이 달라지기나 할까.


꼭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추격전 같은 액션이 있어야 스릴러, 호러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처럼 철저하게 사람을 고립시키고 궁지에 몰아넣는 것만으로도 극 공포와 긴장감을 보여줄 수 있다. 직장에서 퇴출될 위치임을 감지했을 때, 외국에서 길을 잃고 국제 미아가 되었을 때, 여권이 없어서 귀국할 방법이 없을 때, 재난으로 죽음이 닥쳐오는 게 느껴질 때, 사랑하는 사람이 곧 죽을 예정임을 알고 있을 때. 얼마든지 살면서 이 같은 절대 위기의 상황을 실감할 수 있고 공포를 마주할 수 있다. 웬만하면 피하고 싶겠다만. 작품 해설자는 지독한 현실의 중압감을 다른 방식으로 허구화한 작품이라 했다. 아, 역시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았구나. 현실이라는 재난의 하루를 무사히 버텨내고 살아남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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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9-06-27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던 클래식도 그렇고 민음사 시리즈 좋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물감 2019-06-27 11:58   좋아요 1 | URL
ㅎㅎㅎ시리즈 전부 줄줄이 읽어봐야겠어요^^

카알벨루치 2019-06-27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좋아요 물감님 글은 속도감이 있어요 ㅎㅎ

물감 2019-06-27 14:53   좋아요 1 | URL
크으... 저의 템포를 알아봐주시다니요, 역시 프로 리뷰어 카알님ㅋㅋ

카알벨루치 2019-06-27 12:26   좋아요 1 | URL
물감님 과찬에 점심 안 먹어도 되겠습니다 ㅎㅎ

물감 2019-06-27 13:08   좋아요 1 | URL
ㅎㅎㅎ감사합니당. 남은 6월도 마무리 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