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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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런 교육이 모두에게 다 잘 먹히는지는 모르지만 상당수가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자라난다고 한다. 서로 간에 예의를 지키며 조심하는 세상. 이 얼마나 이상적인 유토피아인가. 내 생각, 내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실례이고 상처되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계속 돌아보는 삶. 피곤하게 산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습관화되고 일반화되면 피곤한 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될 것이다. 이런 얘기를 왜 하고 있냐면, 이 책은 자신의 지난 잘못이 뭐가 문제인지, 자신의 태도가 타인에게 왜 상처인지를 모른 채 살다가 땅을 치며 후회하는 한 남자를 말하고 있어서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다면 타인이 말하는 말에 조금만 귀 기울여도 고치고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인데, 자존심이 밥 먹여준다고 믿는 권위적인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을 생각은 안 하고 외부 요인에서 찾으려고만 한다. 그 생각의 결과가 어떤 문제를 낳았는지, 또 이 사회를 어떻게 더럽혀가는지 알아보자.


항공사 승무원인 딸의 장례식 장면부터 시작한다. 유나는 차를 몰고 저수지에 뛰어들어 익사했다. 딸과 남처럼 지내왔던 공군 대령 출신의 아빠는, 딸이 죽고서야 지난 세월을 돌아본다. 현역 시절부터 전역한 지금까지도 아빠는 가정을 소홀히 했고, 10년간 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울고 싶어도, 화가 치밀어도 그럴 자격이 없는 아빠였다. 그는 딸의 일기장에 적힌 의미심장한 글을 발견하고 딸이 자살하게 된 경위를 조사한다. 그리고 딸이 근무하던 항공사에서 딸과 한 부기장의 스캔들 루머를 듣는다. 또한 진실에 다가갈수록 마주하는 건 딸의 심장에 칼을 꽂은 사람이 바로 아빠 자신이란 사실이었다.


유나와 아빠의 사이가 틀어진 두 사건이 있었다. 먼저 딸과 소문난 부기장은 과거 아빠의 운전병이었다. 그의 아내가 아이를 유산하던 날, 대령은 끝내 운전병을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대령에 대한 증오를 분풀이하려 유나를 납치해 집으로 데려간다. 반면 유나는 그의 심경을 이해하고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유나는 납치되었음에도 집에다 가출한 것으로 말했고, 납치된 동안 자발적으로 운전병의 아내를 조리하고 집안일을 도왔다. 아빠 때문에 한 가정이 깨져버린 것을 대신 사과라도 하듯이. 일찍이 철들어 타인의 심경을 이해하고 위로할 줄 아는 성숙한 아이였다.


또 한 사건은, 방산업체가 국방예산을 횡령하는데 동조한 장교들을 폭로하려던 윤 대령의 죽음이다. 그를 압박하여 입을 막고 자살하게 만든 것은 유나 아빠 홍 대령이었고, 이 사건은 사회에 알려져 대령은 불명예 전역했다. 당시 유나는 아빠를 비난했고, 눈 뒤집힌 아빠는 폭력으로 답했다. 한 가정이 무너졌는데 아빠는 고작 딸이 버릇없게 군 것으로 화를 낸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유나. 그 후로 딸과 엄마는 아빠와 따로 살게 된건데 듣자 하니 이건 도저히 커버칠 수가 없다. 나는 잘못한 거 없다는 태도로 나오는 아빠와 누가 같이 살고 싶을까. 더 충격인 건 어떻게 그 방산업체의 경비원으로 들어갈 수가 있지? 자신이 뭐 때문에 군복을 벗었는지 알면서? 그리고 힘들었던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딸한테 지금도 섭섭하다는 대령 이 인간은 진짜 하이킥 좀 맞아야 한다. 왜 아빠는 가족과 싸우고 해결할 생각보다 각자 갈 길을 택했을까?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고, 선택지도 없다고 판단한 걸까? 자신이 원인이고 가해자라는 인식조차 없으니 해결할 생각을 안 했겠지. 알았다면 딸과 대면해서 풀어볼 기회도 얼마든지 많이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것들은 대령의 집안 사정일 뿐, 유나가 자살을 결심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직원을 고발하여 성과를 올리는 항공사의 엑스맨 제도가 시초였는데, 유나의 스캔들을 보고한 동료는 사과는커녕 오히려 유나가 잘못한 것처럼 몰고 갔다. 여기서 동료의 적반하장 태도가, 과거 아빠의 모습과 겹쳐진다. 똑같은 상황에서 아빠에게 저항했던 그녀는 세상에겐 저항하지 못하고 끝내 패배한다. 단순히 승산 없다는 사실에 분하여 자살한 게 아니다. 위계질서를 따라 비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아빠가 그제서야 이해된 것이다. 그녀는 군대라는 계급사회를 오랫동안 봐왔으면서도 좀처럼 위계질서 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운전병이 상사의 가족한테까지 기사 노릇하는 게 당연한 건지, 임신한 아줌마를 불러다 일 시키는 엄마의 행동이 당연한 건지 항상 의문이었다. 늘 부조리함에 거침없이 맞서던 그녀였는데, 사회로 나와 겪어보니까 이 바닥의 더러움을 실감했다. 그래서 아빠가 속한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생을 끝냈다.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 각도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작품이다. 다 읽고 나서야 이 책이 성장 소설이란 걸 알았는데 딸뿐만 아니라 아빠의 성장까지 그려냈다. 딸은 승무원이 되면서 고객들에게 희롱과 폭행을 당하고, 반성문을 쓰고, 근신 처분까지 받으면서 인생은 실전이라는 것과 혼자만 깨끗해봐야 소용없단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 성장한다. 인생 승리하는 흔한 성장이 아닌 순수함에 때가 잔뜩 묻어 현실을 깨닫게 된 마이너 틱한 성장이었다. 반면 아빠는 딸이 죽고서야 걸어온 길이 오물로 얼룩져있었음을 깨닫는다. 수많은 불편한 진실로 부들부들하다가 끝나는 게 아니라 딸을 위해 달라지려는 아빠도 성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두 부녀를 통해 독자까지도 성장시켜준다. 어째 세상은 의로운 사람일수록 가만 놔두지 않으려는 것만 같다. 심지어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더 문제 삼으려는 썩은 인간들도 많다. 똑같은 세상인데 어째서 누군가는 세상이 아름답다 말하고, 누군가는 세상이 더럽다고 말하는가. 적어도 어린이들만은 세상이 더럽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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