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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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었던 2015년 당시, 네이버 파워블로거 중에 ‘까칠한 비토씨‘라는 닉네임의 서평가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독서광들은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었다. 나 또한 비토씨의 리뷰를 열심히도 읽었었는데, 그의 엄청난 글빨과 날카로운 분석력과 닉네임답게 까칠함으로 무장된 비평은 정말이지 완벽한 내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비토씨의 스타일은 어느새 나의 롤모델이 되었고 그 느낌을 담아서 수차례 리뷰를 써온 결과 몇몇 이웃들에게 비토씨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의 희열은 진짜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리뷰로 글쓰기를 공부하던 차에 비토씨는 이 책을 써내고서 작가로 등단했고 블로그는 문을 닫았다. 그건 마치 맨날 가던 야동 사이트가 갑자기 막혔을 때 오는 충격과 견줄 정도였다. 여하튼 비토씨의 광팬인 내가 이 책이 나온 지 2년도 더 된 지금에야 읽은 것은, 적어도 쪼렙일때 리뷰를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레벨이 어디쯤인진 모르지만 때만 기다리다가 영영 못 읽을까 봐 그냥 읽기로 했다. 그럼 이제 작가 도선우가 아닌 블로거 비토씨를 생각하며 리뷰를 써본다.


보육원 출신의 장태주는 불행이란 불행을 전부 짊어지고서 이 험한 세상 꾸역꾸역 살아간다. 이 왕따 소년은 자신이 돌보던 새를 죽인 동급생을 혼내주면서 잠재돼있던 전투능력이 각성하였고, 그 힘은 왕따에서 문제아라는 타이틀로 바꿔주었다. 이후 선도부에게 잘못 걸려 들어간 소년원에서 만난 담당 선생의 권유로 권투를 배우게 되었고, 타고난 재능과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으로 그 실력은 어느새 국가대표를 넘어 프로 선수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그는 동양인 최초로 세계 챔프까지 되었지만 소중한 것들을 잃은 공허함으로 결국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넘고 만다. 그 많던 팬들은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 그를 비난하였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군중을 보며 괴물이 되기로 결심한 주인공. 이제 그는 종점을 향하여 최후의 주먹을 뻗는다.


이야, 역시는 역시나였다. 스토리, 필력, 분위기, 속도감, 메시지 등등 완성도가 죽여준다. 과거 리뷰왕 비토씨께서 줄곧 강조하시던 게 바로 ‘페이소스‘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왕따 소년의 단순한 개과천선 이야기가 아닐 줄은 짐작했지만 이렇게나 심오했을 줄이야. 시작부터 끝까지 쌈질하는 내용은 맞는데 액션 장면은 한 3% 나올까 말까 한다. 줄거리만 보면 정통 액션물이지만 그쪽의 소재만 빌린 성장소설 겸 사회파 소설이었다. 거기에 연민, 슬픔, 고뇌 같은 페이소스를 유발하는 요소도 잔뜩 넣어서 진짜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조건은 다 갖추었는데 말야, 작품도 작가도 많이 안 알려진 게 참 아쉽다. 암튼 읽어보면 매우 와일드하고 묵직한 문체가 시종일관 유지되고 있는데 대충 작가가 어떤 캐릭터인지 감 오지 않는가? 느낌 그대로 도선우 작가는 헬스장 관장님 같은 그랜드 바디를 소유하고 있다. 블로그에서 본인이 싸움 잘한다고 했으니까 잘못 걸리면 큰일 난다. 아무튼 상남자 캐릭터라 글이 하드해 보이지만, 비토씨의 리뷰를 읽어본 분들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안다. 오랜만에 파워블로거 시절 비토씨가 새록새록 떠올라서 좋더군.


폭력에 노출된 한 아이를 마침내 괴물로 바꿔버린 배경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악‘이다. 태생부터 악한 자들과, 그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악에 눈을 뜬 자.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종이지만 사람들 눈에는 도긴개긴이었다. 후자가 전자를 응징해 정의를 구현한들, 후자도 그저 폭력을 휘두른 또 하나의 악일뿐이다. 스스로 정해둔 선을 넘은 사람만 잡는 주인공도 남들에게는 똑같은 일진이고 양아치였다. 악을 응징했다고 선이 되는게 아니었고, 선의 가면을 쓴 악은 더이상 악이 아니었다. 이렇게 세상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했고, 태주는 정의란 것에 회의가 든다. 힘의 유리함을 택한 소년의 양심은 점점 사라지고 못된 친구들을 마땅히 응징하는 단계를 넘어서 끝내 선에도 발 한 짝, 악에도 발 한 짝씩 담그고 살아간다. 왜 세상은 태주에게 생존의 선택지를 악인이 되는 것 하나밖에 주지 않았는가. 모두가 나를 괴물이라고 부른다면 까짓거 진짜 괴물이 되어주겠다던 소년의 외침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작가 인터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삥 뜯기던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피해자는 도망가고 어느새 자신은 시비를 건 가해자가 되어있었다고. 분명 사건은 일어났는데 피해자가 없으니 가해자도 없는 이런 상황. 이와 같은 정의의 부재, 정의의 이중성을 선도연합회한테서 볼 수 있다. 질서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의 돈을 걷는 선도연합회는 학교폭력을 폭력으로 근절하고 있었다. 누구는 이 제도에 안정감을 느끼고, 누구는 회의감이 들었지만 이미 잡혀있는 질서에 반대해봤자 혼자만 튕겨나갈 뿐이다. 그래서 이 시스템은 자기가 피해자인 줄 모르는 학생들이 스스로 유지하는 꼴이었고, 여기에 가해자는 없는 실로 희한한 상황이었다. 정의가 있어야 할 곳에 부조리가 있었고 다들 그것이 정의라 여겼다. 권위 앞에서 정의는 묵살당했고 그러므로 냉혹한 현실은 더 이상 정의 추구가 불가능했다. 세상에 피해자를 걸러내기 위한 정의도 다 있는가? 과반수가 지지하면 틀린 답도 정답이 되는가? 대체 정의가 책임져야 할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소년은 커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태주는 남들이 자신을 프레임에 가두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정의당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정의하였고, 만든 질서대로 묵묵히 달려나갔다. 시합을 이길수록 선수 장태주는 진짜가 되었지만, 인간 장태주는 점점 가짜로 드러나고 있었다. 남들이 정한 타이틀에 맞추다 보면 결국 본인을 잃어버리게 됨을 알고 있었으나 한번 폭주해버린 기관차는 멈출 수가 없었고 그런 태주를 사람들은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태주가 생각하는 진짜 괴물은 불공정한 질서를 만들고 뒤에 앉아 씹고 뜯고 즐기는 자들이었다. 보육원 후원자들이 그러했고, 학교에 선도연합회가 그러했고, 권투연맹이 그러했다. 그들은 본인이 직접 한 게 아니니 일관 잘못 없다는 태도로 세상을 주름잡고 있었다. 그런 부류가 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건만 자신도 그런 불공정한 질서를 세운 똑같은 괴물이었다. 아이고, 태주야...


장태주는 작가의 삶이나 인생관이 아주 잘 반영된 캐릭터이다. 태주가 체고를 가지 않고 일반고에서 선수가 된 것은, 문학 쪽에 연줄 없는 작가가 노력으로 상을 타낸 것과 같다. 그리고 작가가 사업으로 쓰라린 고비를 겪고 재기한 것도 태주의 인생 굴곡 안에 그대로 담겨있으며, 수상하고도 남들에게 알리지 않은 작가의 성격 또한 챔피언이 되고도 과시하지 않는 주인공과 닮아있다. 하여간 대단한 사람이다. 비록 리뷰와 작품의 글 스타일이 많이 달랐지만 나의 롤모델을 만나서 너무 즐거웠다. 지금의 내 글들은 이 분에게 받은 영향이 8할쯤 된다. 그 옛날, 많은 글쟁이들이 하루키의 문체를 닮으려 했듯이 나는 비토씨를 닮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여하튼 선우 행님, 제가 이렇게나 행님 빠돌이입니다. 행여 이 글을 보신다면 쓴소리든 잡소리든 뭐든 댓글 하나만 달아주셔요. 솔직히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ㅎㅎㅎ 언젠간 저도 행님처럼 리뷰왕이 될 거니까 기다려주이소. 아, 그리고 늦었지만 상 탄 거 축하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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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8-1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롤모델이 있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죠.
물감 님은 꾸준하게 열심히 쓰고 계시기 때문에 언젠가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이미 좋은 글을 쓰고 계십니다. 조지 오웰도 서평을 많이 썼죠. ‘어느 서평가의 고백‘이라는
에세이를 쓴 적도 있어요. 아마 <나는 왜 쓰는가>에서 제가 봤을 듯합니다.

꾸준히 그리고 절실히,를 이길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파이팅!!! 응원하겠습니다.

물감 2019-08-16 13:59   좋아요 0 | URL
응원 감사합니다! 꾸준함과 절실함... 그렇군요. 어디에나 중요하지만 글쟁이에게는 절대 필요 조건이에요.. 분발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신 조지 오웰의 책도 언젠가 찾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