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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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공감한다면 나도 모르게 꼰대가 된 것이고, 공감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요즘 애들‘에 포함된 것이다. 둘 다 해당이 안 된다면 그건 중립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지. 재미있는 건 ‘요즘 애들‘도 열심히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보며 그토록 질색하던 꼰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결국 도긴개긴이다. 무려 수메르 고대 석판에서도 ‘요즘 애들‘이 나왔다고 하니 이만하면 꽤나 핫이슈 아니런가. 헌데 오늘날의 세대 갈등은 윗물과 아랫물의 간격이 그렇게 멀지도 않다. 심지어 초등부 고학년이 저학년에게 개념 없다며 혀를 차는 게 방송에 나오더만? 과연 세상은 요지경이다. 이런 재미난 구경거리를 다룬 고전 작품이 있었으니, 무려 제목부터가 ‘아버지와 아들‘이다. 사랑보다 멀고 우정보다는 가까운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보자.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컴백한 A군과 그의 절친 B군. 이 영보이들은 세상만사를 부정하는 니힐리즘, 즉 허무주의로 전신을 무장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또한 올드보이의 관습과 사상을 전부 배격하였고, 그들과의 논쟁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토록 견고하던 영보이들의 세계관은 한 여성을 만나고부터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하는데... 에라이.


BTS와 EXO를 두고 으르렁대는 21세기에 비하면, 이 책의 이념 대립은 엄청난 하이레벨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20대 초중반인 A와 B를 보면서 괜스레 자괴감마저 든다. 여하튼 니힐리즘만이 인류의 진보라고 주장하는 B군의 사상은 꽤나 파격적이다. 이에 동의하는 A군도 가세해서 윗세대를 싸그리 부정했다. 여기서 갈리는 독자의 반응을 반영한 인물이 A의 부친과 그의 형님이다. 부친은 회의감이 들면서도, 영보이들이 현실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이유로 혼란스러웠다. 과거 자신도 모친과 세대 갈등을 겪었으며, 무조건 부모가 옳은 게 아님을 알기에 영보이들을 존중해주고자 했다. 반대로 형님은 지나친 귀족주의라서 시대가 변해도 고유의 것은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B군과의 언쟁도 여러 번 하는데, 솔직히 사사건건 태클 거는 무례한 사람에게 좋은 감정이 퍽이나 생기겠다. 그 때문에 나는 형님 쪽을 응원하면서 읽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꼰대인갑다.


1세대는 귀족 출신에 자유주의자였고, 2세대는 잡계급 출신에 민주주의자로 나온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이상주의적인 사상을 강조하고, 아들들은 혁명적 사상을 주장한다. 이것은 당시의 러시아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1840년대의 러시아는 철학과 예술이 삶의 전부였지만 1860년대에는 자연과학과 실용학문이 삶의 지표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뉜 세대 간의 문제를 기반으로 이 책이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양쪽의 입장과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매우 정교하게 다루고 묘사했다. 오케바리, 이 정도면 내공은 인정. 그치만 잼이가 없떠...


이후 낭만주의를 경멸하는 영보이들의 마음을 뒤흔든 여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두 니힐리스트는 감정 표현도 못하고 애써 착한 생각만 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된다. 어중간한 삼각관계 속에 조금씩 변색되는 우정. 그러다 A군은 그녀의 동생과 사랑에 빠지면서 마침내 니힐리즘으로부터 졸업을 한다. 반면 B군은 자신의 컨셉을 지키며 종용히 그녀를 떠나간다. 그리고 병에 걸려 끙끙 앓다가 허무주의자 다운 죽음을 맞이한다. 상냥한 작가는 B군이 죽기 직전, 그녀와 재회시켜 눈빛 교환 타임을 마련해준다. 하여간 있을 때 잘하지, 이제 와서 뭣들 하는 짓거린지. 그렇게 매사에 부정만 하더니, 그렇게 해서 이룬 것이 고작 죽음이냐 싶었다.


A군의 그녀가 이런 말을 한다. 스스로를 존중하며 순종하는 것, 이것이 곧 행복이라고. 이 말을 한 명 한 명에게 비추어 보니 신기하게도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촌구석에서 귀족주의를 고수하는 이도, 이 세상을 통째로 부정하는 이도, 타인에게 휘둘려사는 가련한 이도,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스스로를 존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겉보기엔 답답해 보일지언정 본인들은 그것이 곧 행복의 길임을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더불어 사는 인간 세상에서 저 혼자 잘 산다고 행복한 사회가 되는 건 아니지. 여하튼 요즘 애들이 버릇없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게 정상이다. 돌고 도는 계절처럼, 2세대들도 언젠가 1세대의 꼰대가 되어 ‘요즘 애들‘을 저격할 것이다. 그래서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각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행복한 나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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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0-10-31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어른도 버릇이 없다는ㅋㅋ 윗물과 아랫물의 간격이 멀지도 않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 2학년보고 버릇없다고 하거든요.^^

A군은 군인에서 민간인이 아니라 학사 학위를 받고 페테르부르크에서 집으로 컴백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으르렁대는‘ㅋㅋㅋ 센스있는 표현이십니다. 저는 형님과 B 둘 다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형님의 겉치레와 B의 언행불일치가 계속 거슬리더라구요.

잼 없는 1인 추가요!ㅎㅎ

정말 허무주의자다운 죽음이었죠? 뜬금없이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작가가 마지막 부분에 말한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이게 답인 것 같아요. 그래도 이야기의 흐름이나 문체나 여러가지 설정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소설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산을 또 무사히 넘어왔네요~~^^*

물감 2020-10-31 23:50   좋아요 1 | URL
‘요즘 애들‘이 커서 ‘요즘 어른‘이 된게 아닐까요 ㅋㅋㅋㅋ 차라리 꼰대가 되는 편이 더 낫겠군요 ^^; 어린 친구들이야 몰라서 그렇다 치지만, 알만한 어른들이 그러는 건 용서가 안되네요 하하하...

A군이 민간인 된 것이 아니었군요? 대충 읽은게 들켰네요 ㅋㅋㅋㅋㅋㅋ

B군이나 형님이나 흑백처럼 극과 극이라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긴한데, 워낙 B군이 재수가 없어서요 ㅋㅋㅋㅋ 철저히 중립의 입장으로 지켜보았지만, 버릇없는 걸 떠나서 근본없는 말들로 밀어붙이는 영보이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그저 객기를 부리는 거라면 그러려니 할텐데 그것도 아니고요 ㅋㅋㅋ

정말 재미없고 교훈 쪽에서도 확 와닿는건 없는데, 평점은 되게 높은 책이더라구요. 다른 리뷰들을 읽어보면 재밌고 좋았다는 말은 많은데, 뭐가 어떻게 좋았다는 설명은 거의 못봤다는...

이렇게 10월도 지나가네요. 저도 업무가 늘어나서 많이 힘든 한달이었네요 ^^;;
근데 책 마저 재미없으니 피로감이 어마어마 하더군요... 왜 그런거 있죠, 다이어트 한다고 빡시게 운동하던 중에,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거요 ㅋㅋㅋㅋ독서고 리뷰고 뭐고 그냥 내려놓을까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독서모임이 저의 나태함을 잡아주는 것 같아요, 하하하핳. 10분뒤면 11월 이네요. 이번달도 수고 하셨어요, 11월에도 파이팅입니다 ㅋㅋㅋ

페크pek0501 2020-11-11 1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 님.
당선작에 뽑히신 것 축하드려요. ㅋㅋ

물감 2020-11-11 12:02   좋아요 2 | URL
ㅎㅎㅎ감사합니다. 엄청 오랜만에 뽑혔네요ㅎㅎㅎ
 
내가 너였을 때
민카 켄트 지음, 공보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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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라는 게 참 그렇다. 어떤 대상에 대한 좋고 싫음에 따라 아군과 적군이 생긴다. 음식으로 예를 들면, 같은 걸 먹었어도 누구는 맛없다 하고 누구는 맛있다 한다. 이것은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취향 차이이다. 그런데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맛있다고 하면 맛없다는 한 명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다음은 거리에서 빨게 벗고 행위예술 중인 사람이 있다 치자. 구경꾼마다 미쳤다며 소리 지르는데, 혼자서 박수 치며 감탄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도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한다. 그냥 취향을 존중해주면 그만인데, 소수자들을 혐오하다 못해 정신 이상자로 몰아간다. 이 현상은 문학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대다수가 극찬하는 작품이 나한테는 영 시시할 수가 있고, 저평가 받아온 작품에서 반전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같은 책을 읽어도 누구는 만점을 주고 누구는 점수조차 매기지 않는다. 심지어 읽은 책마다 습관적으로 만점 주는 사람도 있다. 이 모두가 취향이 다른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좋게 못 봐주는 나 같은 소수자의 취향도 존중해주길 바란다. 이 말을 하려고 열심히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출판사의 책 소개 글은 대강 이렇다. 강도 당해 기억을 잃은 여주에게 본인의 이름으로 임대한 계약서가 날라오고, 자신을 흉내 내며 살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여 절망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맞는 내용이긴 한데 어쩐지 또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읽어보면 그 여자와의 갈등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기 때문. 내 버전으로 소개 글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임차인 유부남을 흠모하는 집주인 여주가 알고 보니 그의 아내라고 한다. 묻지 마 폭행을 당하고 정신불안 증세로 살아가는 그녀와의 이혼을 준비 중이던 남편은 사실 여주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사기꾼이었다. 그의 계략에 빠져 신분도 잃고, 정신병원에 감금돼버린 그녀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여주보다도 남편을 사칭한 남자가 더 주인공에 가깝고, 스토리도 잘 이끌고 간다. 남자가 부자인 여주를 목표물로 정한 것은, 가난했던 과거에 대한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된 줄 알았다. 작품 내내 남자는 똑같이 가난했던 그의 연인에게 돈 걱정 없는 미래를 선물해주고 싶어 안달 나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교도소까지 다녀온 그녀였기에 지난날들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던 그였으니까. 다만 그 방식이 사탄도 혀를 내두를만한 범죄라서 그렇지, 남자의 순애보는 그만큼 진심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해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이유를 알고 나니 뭐 하러 힘들게 생각했나 싶다. 폭력적인 부친과 가난 속에서 거짓말과 임기응변으로 살아온 남자는 그것들을 본인의 재능으로 여겼으나,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 덫에 걸리고 만다. 그리하여 끝내는 연인을 버리고 혼자 사는 길을 택하는 의리의리한 남자. 아무튼 거시기한 사정을 지닌 이 남자의 캐릭터는 꽤나 입체적이다. 여주보다 남자의 사정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내용을 지켜볼수록 여주의 위치는 더더욱 애매하게만 보인다. 내 관점과 해석이 특이한 거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취향을 존중해달라.


솔직히 심리 스릴러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재산도 탈탈 털리고, 신분도 도용당했다는 사실에 공황 상태가 된 그녀는 남자가 달아날까 봐 신고조차 못하는 상태이다. 이렇게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다가, 후에는 겁먹어서 그의 연기에 맞춰주고만 있는데 심리는 무슨 심리? 이럴 거면 차라리 심신 미약 스릴러라고 부르자. 빼앗긴 신분은 그 여자가 직접 찾아옴으로써 해결되었고, 남자는 도주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허무하게 끝난다. 보시다시피 남자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 주인공이 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딱히 반전이라 할 만한 상황도 없고, 모든 조각들이 우연처럼 딱딱 맞아떨어져 없던 긴장감도 마구마구 떨어뜨린다. 작가 나름대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게 느껴졌지만, 미안하게도 내 심장은 흔들림 하나 없는 시몬스 침대 그 자체였다. 며칠 전에 읽은 심리 스릴러인 ‘익명의 소녀‘와 비교해보면 수준이 매우 낮은 편이다. 내 기준에 그렇다는 말이지, 남들의 감상평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원래 ‘스릴러‘라는 장르 자체가 인간의 심리에 기반을 두고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심리 스릴러‘라는 장르를 구분했다는 건 그쪽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건데, 타 스릴러 장르와 차별성이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다. 그건 그렇고 한글날을 기념하여 최대한 한글로만 서평을 써봤는데 생각만큼 어색하거나 불편한 건 없었다. 앞으로는 나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이것저것 시도해볼 계획이다.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물려버리는데, 글쓰기라고 다를까? 글쟁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볼 문제이나 딱히 정답은 없다. 이것 또한 취향의 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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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당 2020-12-25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별 두개 주는게 너무 너무 미안한가요? 전혀 그러실 것 없습니다,저는 책을 고를 때 가장 혹독한 평가의 평에 주목한답니다, 알라딘에 별 다섯개씩 주는-그게 내 보기에 님 말씀처럼 진짜 취향이라면 백프로 존중하는데-알바생들 이거 어찌보면 범죄수준 아니냐 따지기도 했습니다.

물감 2023-03-10 16:12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물건을 사거나 책을 고르거나 할때 비평을 위주로 살피는 편이에요. 특히 책에는 너무 많이 낚여봐서 진짜 좋은 작품도 삐딱하게 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그리고 알바생들은 딱 봐도 티가 나니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진지한 리뷰어들도 알바글과 똑같은 평을 쓸 때도 많더군요. 참 볼 때마다 속이 다 터집니다. 그래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의 댓글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고맙습니다.
 
과외활동
이시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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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시작과 함께 추석 연휴를 맞이하였다. 이럴 때에 진도 잘 안 나가는 두꺼운 책들을 읽어주면 참 좋을 텐데, 반대로 나는 평소에 어려운 책을 읽고 휴일에 가벼운 책을 읽는 편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으나 돌아보니 그러고 있었더라는 소소한 삶의 발견으로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괜히 특별해지는 느낌이 든다. 여하튼 요즘같이 날씨 좋을 때 읽기 딱 좋은 신간이 나와 연휴 동안 느긋하게 읽어야지 했는데 펴자마자 금세 다 읽어서 당황했다. 이 작품, 속도감이 장난 아니다. 내가 아는 페이지 터너 소설 중에서 가히 원탑이다. 애석하게도 쉬는 타이밍을 못 잡아서 결국 끝까지 읽어버렸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볍거나 작품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소 식상할 수도 있는 문제아의 성장 드라마인데, 재미와 메시지와 남성들의 판타지까지 꽉꽉 눌러 담은 고농축 로열젤리 같은 작품이다. 그니까 믿고 함 잡숴봐.


인적 드문 길목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시체 하나. 그것을 최초 목격한 전교 꼴찌 남학생과, 전교 1등의 같은 반 여학생. 친구의 도움으로 경찰에 신고하여 잘 마무리했지만, 자신이 살인범이라는 인터넷 기사들과 CCTV 사진이 돌고 있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자신의 결백을 위해 한 번 더 전교 1등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주인공. 현장의 CCTV 서버를 해킹한 소녀는 이 일에 정체불명의 조직이 있음을 알게 되고, 정보가 노출된 적들은 주인공을 죽이려고 달려든다. 대체 이들은 누구 관대 일면식도 없는 소년에게 범죄를 뒤집어 씌우는가.


문제아 소년과 천재 소녀의 콤비네이션? 육체파와 두뇌파가 만나 공동의 적을 무찌르는 일반 학원물인 줄 알았다. 근데 우째 가면 갈수록 생각처럼 가볍지만은 않은 것이어라. 도시의 CCTV를 장악하는 의문의 조직, 일명 ‘동호회‘는 공무원, 병원, 학교, 기업 등등 사회 각 계층의 종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각자의 신분과 지위를 이용하여 살인을 취미 삼는 범죄 집단이었다. 그런데 겨우 고딩 두 명에게 아지트도 들키고 보안망도 뚫리는 등 이례 없는 봉변을 겪는다. 이리하여 소년은 도망자 신세가 되고, 해커 소녀의 지원사격에 의지하며 외로운 생존게임을 이어나간다. 알고 보니 부패한 권력자들에게 대항하는 취약계층의 쟁투를 다루는 제법 진지한 작품이었다. 근데 아무리 쌈 좀 한다지만 일개 고등학생일 뿐인데 캡틴 아메리카 같은 신체능력을 부여한 건 쪼까 거시기 했으요.


중간중간에 소년의 과거가 간간이 소개된다. 어렸을 적 화재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삼촌과 살아온 주인공. 부모를 죽인 자식이라는 누명을 쓰고 세상에게 학대받아왔고, 일진들과의 쌈박질로 둘도 없는 문제아가 되었으며, 그렇게 앞집 똥개도 무시하는 왕따로 살아가는 외톨이. 종합해볼 때 현실을 극복해내는 성장물이 분명한데, 연속되는 액션신 속에서 뭘 어떻게 성장을 한다는 건지 궁금할 것이다. 먼저 삶에 미련이 없던 소년이 살기 위해 도망 다니는 아이러니함에서부터 성장판이 열린다. 그 이면에는 삼촌의 목숨이 걸린 것도 있지만, 자신을 돕다 위험해진 친구를 생각해서라도 죽음에 굴복해서는 안되는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 자신을 벌레보듯 하던 삼촌에게도 인정받게 되고, 끝까지 한패가 되어준 여학생에게도 호감을 산다. 아, 참고로 소녀는 아이돌 저리 가라 할 절세 미녀라는 설정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모태솔로 주인공이 소녀와 말을 섞을 때마다 몸속에서 활화산이 폭발해대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풋풋하던지, 이성에 눈 뜨기 시작하던 나의 학창시절이 생각나더라. 모든 게 서툴렀지만 가장 순수했던 그때가.


여하간 성장소설치고는 참 혈기왕성한 작품이다. 수퍼 액션이 과다 첨가돼있지만 메시지는 분명한 청소년 문학이다. 사실 이 장르도 범죄소설처럼 인물이나 환경이 비슷하다 보니 작품의 분위기 또한 고만고만한 편이다. 게다가 잘 보면 클리셰도 되게 많다. 그럼에도 늘 꾸준히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다들 그 시절을 겪어봐서가 아닐까 한다. 한때 우리는 모두 똑같은 고민을 하고 방황하던 청소년이었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의 고충을 내 문제처럼 여기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성장소설의 진짜 매력은 그 누구라도 엇나간 일진을 이해하고, 왕따 학생을 이해하고, 소년소녀 가장을 이해한다는 데에 있다. 본래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아는 법인데, 경험해보지 않고도 타인을 공감할 수 있다는 건 일종의 마법 같은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도 단순히 재미로만 읽고 끝나지 말았으면 한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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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6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07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익명의 소녀
세라 페카넨.그리어 헨드릭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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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세계에서는 여럿이 한 작품을 공동작업하기도 하고 때론 그것이 엄청난 결과물을 낳기도 한다. 근데 소설 쪽에서는 공동작업으로 효과를 본 케이스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머리가 많을수록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줄 것 같지만, 오히려 사공이 많은 탓에 읭?스러운 전개라던가, 무리한 개연성이라던가 하는 허술함이 작품을 망치게 되더라. 공동작품은 쉽게 말해 스타트업 같은 거다. 괜찮은 사업 계획이 있는데 혼자로는 부족하니 좋은 파트너를 구해서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보는 게지. 첨부터 기획을 잘 한 덕분에 작품성은 대부분 우수한 편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십중팔구는 망하고 한두 곳만 살아남는 게 스타트업 계의 현실이다. 그것도 간신히 운 좋게 말이다. 다행히도 이 작품은 무사히 살아남은 케이스였다. 솔직하게 공동작업을 할 거면 이 정도는 되어야 좋은 평가를 받는다. 참 잘했어요.


돈에 쫓겨사는 여주가 한 정신과 박사의 윤리 실험에 참여한다. 실험 질문마다 솔직하게 답해주고 돈을 받아 가길 수차례, 실험의 연장으로 그녀는 한 남자를 유혹하는 미션을 받는다. 돈이 궁한 여주는 그저 시킨 대로 했는데 알고 보니 이 남자, 박사의 별거 중인 남편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는 깜놀한 여주에게 아내를 조심하라 경고하였고, 그녀는 이제 그만 실험을 중단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을 쥐락펴락하며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박사에게 점점 두려움을 느낀다. 대체 이 해괴망측한 실험을 진행하는 박사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달팽이 걸음마처럼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되지만 후반에 가서는 엄청난 텐션을 보여준다. 이렇게 전후반의 온도차가 확 다른 느낌은 아가사 크리스티 후로 처음이다. 이 작품은 흐름이 너무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게 장점이다. 어느 곳 하나 막힘없는 걸 보면 처음부터 다 계산된 플롯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등장인물을 최소화 함으로써 오로지 세 명에게만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하였다. 이렇게나 치밀한데 과연 성공할만하지 아니한가. 검색해보니 두 작가 모두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한다. 나는 베스트셀러를 안 믿는 편이지만, 이 책은 두 사람이 결코 거품 작가가 아니란 걸 증명해 보였다. 글솜씨도 훌륭하고 기승전결도 완벽한데다 특히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교가 일품이다. 그런 두 사람이 손발까지 착착 맞다니, 독자들은 어서 풍악을 울리시오.


내가 베스트셀러와 출판사 마케팅에 낚인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평점 높은 작품을 읽을 때면 매의 눈으로 비평 거리 먼저 찾게 된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말하면 박사 부부의 심리싸움에 여주 옆구리 터진다는 내용인데, 아무리 봐도 수박 겉핥기만 반복되어 진도가 도통 나가질 않는 거다. 박사는 여주를 데려다 단계별로 계획을 성취해가고, 여주는 그 속내를 모른 채 꼭두각시 노릇만 한다. 박사가 주는 돈맛에 길들여진 탓도 있지만, 앞서 실험 질문들을 통해 자신의 개인사와 비밀을 다 공개해버린 게 더 문제였다. 실험을 거부하려 할 때마다 자신의 약점을 건드리는 박사를 보며 진퇴양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는 여주. 갈수록 박사는 무리한 요구로 그녀를 압박해오고, 여주는 점점 미쳐간다. 이렇게 한 사람을 실험 쥐로 삼고 정신을 망가뜨리는 사디스트 박사의 이야기가 전부인가 싶을 만큼 중반까지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러다 중반부터 박사의 남편이 여주와 동맹을 맺고부터 흐름이 크게 바뀐다.


남편의 외도로 두 부부는 별거 중이었다. 그것이 괘씸했던 박사는 남편의 외도녀를 불러 여주와 똑같은 실험에 참여시켰고 끝내는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알아낸 남편은 여주가 똑같은 꼴을 당할까 봐 보호해주고자 했다. 또한 그도 여주처럼 아내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박사와 잘만 지내는 그의 모습과 거짓말들을 보며 여주는 누가 더 위험한지 알 수 없었다. 반쪽짜리 동맹의 끝은 결국 박사에게 들통나버렸고 박사는 두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 추궁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공방전이 시작되었으나 두 사람은 박사의 지략에 지도록 되어있었다. 분량은 다 돼가고 마무리는 멀어 보이고 대체 어쩌려나 싶었는데, 마지막에 여주가 박사를 떠보는 질문을 하고 거기에 걸려 넘어진 박사는 그대로 녹다운이 된다. 과연 심리소설 답다고 하겠다.


냉정하게 말하면 엄청 참신한 스토리는 아니었다. 결국 이 작품도 캐릭터를 잘 만든 덕분이란 얘기다. 근데 겨우 셋 밖에 안되는 인물들의 매력과 존재감이 엄청나다. 작가들이 자신과 전혀 다른 캐릭터를 쓸 때 얕게 다루면 별 탈이 없는데 깊게 다루면 어색함이 딱 티가 난다. 그런데 이 세명은 다 다른 성격인데 실제 인물처럼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는 이 점에서 공동작업이 효과를 봤다고 생각한다. 박사의 점잖으면서도 역동적인 광기와 집착, 남편의 선량하면서도 묘하게 비밀스러운 태도, 그릇된 윤리 의식과 싸워서 외면해왔던 스스로를 찾게 된 여주의 인간미. 작품을 위해 과한 설정을 넣지도 않았고, 억지스러운 액션이나 쓸데없는 대사도 없었다. 한마디로 캐릭터 설정에는 흠이 없다. 분위기 고조가 느린 게 단점이지만 어느새 가랑비에 옷이 젖은 자신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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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문신가 스토리콜렉터 73
헤더 모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북로드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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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는 글 쓸 때 가장 고민하는 구간이 도입부이다. 왜 그런 말 있지 않나. 병맛 같으면서도 멋있고, 심플하면서도 세련되고, 평범하면서도 개성 돋보이는 그런 거. 어떻게 써야 시작부터 읽는 이의 마음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지를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도입부만 잘 해결되면 그 뒤로는 글이 술술 써지는 편이다. 반대로 잘 안 풀리면... 생각도 하기 싫군. 타인의 글을 읽을 때도 가장 눈여겨보는 게 도입부이다. 그 몇 줄에서 삘이 오지 않으면 금세 흥미를 잃어버린다. ‘좋은 글‘은 저마다 생각해둔 정의가 다를 터인데, 내게 좋은 글이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글‘이라 볼 수 있겠다. 또한 그런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다. 온 우주의 감성과 창의력을 끌어모아 글을 쓰다 보면 때때로 참신한 표현이 나오기도 하지만 운빨이 매번 있는 게 아니고, 트레이닝으로도 한계가 있단 말씀. 그래서 내린 결론은 작품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 나와 잘 맞는 책은 잘 맞는 대로, 안 맞는 책은 안 맞는 대로, 읽다 보면 저절로 쓸 말이 떠오르는 책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영감이 안 오는 책을 만날 때면 지금처럼 작품과 관련도 없는 내용으로 지면을 채우게 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간단히 1절만 하고 끝내자는 심정으로 리뷰를 써본다.


주인공 랄레는 독일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입소자들의 팔에 번호를 새기는 문신가를 맡는다. 나치의 개가 되어 제 손으로 유대인 동포들에게 고통을 주어야 하는 괴로운 나날 가운데 어느 한 소녀에게 반하게 된 주인공. 간부의 도움을 받아 소녀와 가까워진 그는 이 지옥에서 반드시 생존하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매일 매시간 죽음의 소식이 들려오는 수용소에서 무엇을 바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오늘도 하늘은 타버린 시체들의 연기와 재 가루로 가득했다.


2020년 9월 기준으로 <교보문고 10.0 / 예스24 9.2 / 알라딘 9.4>라는 높은 평점을 받은 작품인데, 과연 그럴만 한가 싶은 의심이 든다. 온갖 호평이 넘쳐나므로 나는 비평 위주로만 적겠다. 내 눈에는 저가 재료로 건축한 브랜드 아파트처럼 보였다. 외관은 그럴싸하나 내부는 영 부실하다는 말이다. 기본 베이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인데 배경도 사건도 너무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였고, 문단의 호흡은 짧으면서 진행 속도는 매우 빠르다. 읽는 속도가 느린 나조차도 반나절이면 다 읽겠더라. 무엇보다 두 남녀의 사랑 장면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너무 설렁설렁 써서 작품의 불균형이 심각하다. 수용소의 끔찍한 상황, 수용자들의 참담한 심정, 나치의 폭력과 야만성 등등. 이런 것들을 더 깊고 진중하게 다뤘다면 주인공의 사랑도 훨씬 가슴 절절해졌을 텐데. 살은 다 쳐내고 뼈만 가지고서 이끌어가는 작품이라 완성도도 떨어진다. 살 좀 덧붙이고 각색했더라면 나도 별 4개 줄 수 있었겠다. 최상급 재료가 있으면 뭐 하나. 재료 손질하는 방법부터 잘 모르는데 괜찮은 음식이 나올 리가 만무하다.


실제 인물인 주인공을 작가가 몇 년 동안 인터뷰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을 텐데, 너무 사건 중심으로만 글을 쓴 것이 아쉽다. 지금으로서는 슬픔도 애환도 고통도 그저 텍스트로만 존재하고 있는 기분이다. 주인공 캐릭터는 그나마 입체적인데, 나머지들은 주연도 조연처럼, 조연은 카메오처럼 평면적이다. 비중의 높낮음을 떠나 하나같이 존재감이 없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저 그런 스토리라도 잘빠진 캐릭터만 있으면 얼마든지 분위기 살릴 수가 있는데, 이 책은 좋은 콘텐츠와 소스를 그저 그런 캐릭터들이 잡아먹고 있다. 이 다운된 분위기는 주인공이 수용소를 탈출한 후로부터는 복구가 불가했다. 수용소 안에서는 그의 활동이 제한되어있었으므로 사건 중심의 진행이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러나 수용소 밖에서는 주인공이 사건을 이끌고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디테일 없이 두 남녀를 급 재회시키고 그대로 마무리해 버렸다. 이건 용두사미가 아니고 그냥 성의가 없는 거로밖에 안 보이는데? 작가의 역량이 이게 끝이라면 이후 나올 책들은 안 봐도 그만이겠다. 에고, 1절만 하려 했는데 어느새 글이 길어졌다.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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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9-18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홀로코스트 다룬 책들을 연달아 세 권 읽었는데, 저는 일단 이 책을 패스한게 수용소 안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게 너무 끔찍하잖아요. ㅠㅠ 이 문신가가 실존 인물이라죠? 근데 남녀가 만날 수 없었을거 같은데 사랑같은건 생각도 못할 환경이었는데 너무 소설적인거 아닌가...생각했네요.

물감 2020-09-18 23:09   좋아요 1 | URL
저도 그냥 패스할걸 그랬나봐요. 수용소의 문신가라 해서 그 일과 관련된 사건들을 기대했는데 사랑 내용 말고는 볼 게 없었어요ㅜㅜ 게다가 전반적으로 너무 가볍습니다. 그래선 안될
장르라고 생각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