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원 - 꿈꿀수록 쓰라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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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웬만해선 신간을 잘 안 읽는다. 검증 안 된 책들을 읽었다가 괜히 시간만 버리고 기분 상했던 경우가 허다해서 그렇다. 지금은 남들이 다 읽고 검증해준 책만 골라 읽는다. 그런데 시즈쿠이 슈스케의 신간을 고른 이유는 뭘까. 처음엔 이 작가는 당연히 읽어줘야지 했지만서도 돌아보면 이전 작품들은 별 세 개 이상을 넘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분도 글은 참 잘 쓰는데 알맹이는 약한 것이 딱 하루키 스타일이다. 하루키는 멀리하는 내가 이 작가의 글은 왜 읽느냐면, 일단 작품마다 컨셉이 신선하고 둘째는 심리를 다루는 글을 주로 씀에도 전혀 올드하지 않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냥 한번 읽어보고 싶었어요. 그래도 컨셉 얘기는 진짜니까 한번 읽어들 보시길.


여기, 한참 사춘기가 진행 중인 아들과 공부 좀 하는 딸이 있다. 부상으로 축구부를 그만둔 아들이 어느 날 실종되고, 뉴스에서는 아들의 친구가 폭행 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보도된다. 아들의 휴대폰은 며칠째 꺼져있고, 아들이 평소 질 나쁜 무리와 어울렸다는 정보를 듣는다. 사태는 점점 아들이 범죄하고 도주 중인 분위기가 되고, 대중은 이 가족을 범죄자 가정으로 몰고 간다. 당연히 아들을 믿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싹튼 의심은 믿음을 무너뜨린다. 아빠는 아들이 피해자가 되어 집안에 피해가 최소화되길 바라고, 엄마는 아들이 가해자가 되어 살아있기만이라도 바란다. 두 사람의 사고는 끝없이 부딪히고 집안엔 냉기가 흐른다. 아들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두 가지 가능성, 희망 없는 바람. 깜빡이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이 고난을 어떻게 감당해내야 하는가.


​늘상 일본 문학의 라이트한 맛이 싫다고 투덜대지만 이 작가 책은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알맹이는 다소 약해도 남들이 잘 안 하는 소재를 주로 쓰는 데다 짬밥이 팍팍 담긴 글을 쓰기 때문에.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임팩트는 다 다를진대, 슈스케의 글은 유독 그런 느낌이 강하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통달한 산신령 같은 이미지랄까. 하루키에게도 있는 이 고유의 분위기가 이 분에게도 있다. 사실 이런 섬세함과 정교함을 가진 사람들은 장르 불문하고 어떤 글을 써도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 그런데 그 장점을 장르소설에 접목하면 서스펜스 묘사에서 엄청난 빛을 발한다. 이 책은 출간 전부터 심리를 다룬 끝판왕 작품으로 소개되었고, 작가의 이름을 듣는 순간 결코 과대광고가 아니란 걸 알았다. 마케팅 팀 제법이야?


부모는 아들의 심성이 본래 따듯하고 착한 아이란 걸 알고 있다.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었단 뜻이다. 그러나 날마다 집에 찾아오는 기자들의 압박과 그에 동조하는 주변인들로 인해 아들에 대한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절대 범죄 하지 않았다고 믿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 일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비록 아들이 구경만 했다 쳐도 그 무리들 중에 하나라면 똑같은 공범이 된다. 더 이상 아들이 그 사건과 무관하지는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모의 억장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만약에 아들이 가해자라면 부모는 세상 앞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이 안되는 게 없었다. 이쯤에서 작가는 느닷없이 범죄자 가족으로 돼버린 한 가정의 멘붕 심리와 함께 방향을 잘못 잡은 대중의 분노까지 다룬다. 가족도 대중도 약간의 정보만 듣고 마음대로 추측하여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이다. 너도나도 똑같이 주장하는데 혼자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힘들 테지만.


아빠는 아들 친구를 통해 축구부를 그만둔 과정을 듣는다. 아들이 이 사건에 말려있는 게 맞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계기나 동기가 있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아들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였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부모로서 버티는 게 한계가 온다. 아빠는 사업 계약이 취소되고 업계에서 왕따가 된다. 엄마는 기자들 때문에 밖에도 못 나가고 초인종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린다. 당연히 집안일도 올 스톱 된다. 딸은 학교생활에 타격을 입고 고교 입시 준비는 엉망이 된다. 집 밖에서 받은 조롱과 상처를 집안에서 서로에게 화풀이하는 가족들. 개인에게 일어난 불행과 슬픔 때문에 내 가족이 느끼는 걱정과 근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평화롭던 가족의 일상들이 단 한 명의 부재로 인해 무너지고 있었다. 단 한 사람으로 이 커다란 태풍을 몰고 올 줄 아무도 예상치 못했으므로.


자식이 범죄자일 때와 사망자일 때의 부모의 심정이 어떻게 다른지 세세히 나온다. 공통점은 남은 생애를 어떻게 버틸지 막막하다는 것. 아빠는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도 살인자라면 내가 알던 아들이 아니며 평생을 살인범으로 사는 거라고 주장한다. 반면 엄마는 설령 자식이 범인이라 해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사는 동안 얼마든지 새 출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는 아빠와 감정이 격해지는 엄마는 서로를 이해 못 하고 싸운다. 아빠는 혹시 모를 상황도 예상하고 그에 따른 대비도 해야 한다는 뜻인데, 엄마는 그런 주장이 자식이 범죄자이길 바라는 거로밖에 안 보인다. 현실을 대처하는 방식이 다를 뿐 자식에 대한 믿음은 같은데 각자가 받은 섭섭함으로 분별력마저 잃어버리는 두 사람. 아내는 현실을 못 보고 남편은 사고방식이 잘못됐다는 생각에 서로 말도 꺼내지 않는다.


계속되는 압박감에 휘청이는 부모는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각오를 한다. 이런 경우에 가장 참담한 게 뭐냐면 가해자일 바에야 차라리 피해자로 밝혀지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식이 죽었길 바라는 부모는 없으므로 가해자라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다오 할 것 같았지만,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가해자 가족의 입장으로 지내온 가족들은 아들이 피해자였단 사실에 안도했다. 아들의 죽음을 바란 게 아님에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단 게 더 참담한 것이다. 비슷한 상황을 꼽자면 ‘사랑해서 헤어진다‘ 정도 되지 않을까. 나만 좋자고 A를 택하느니 B를 택해서 여럿이 좋은 길을 가는 게 나은 그런 상황. 어떤 선택이든 이기적인 생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반드시 피해자라야 가족이 누명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들의 죽어준 덕분에 구제받은 집이라니. 그토록 사람들에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아들은 피해자일 수도 있다고 울부짖었건만, 대중은 저마다의 추측과 여론몰이로 한 가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탄 내버렸다. 사건이 종료되고 진실이 밝혀져도 사과하는 이 하나 없었다. 게다가 오해했다며 용서를 구한들 가족이 받은 상처가 없던 일로 되겠나. 그런다고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나. 이런 대중의 두 얼굴 현상은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더 심각하다. 살인과 폭행, 루머 같은 자극적인 뉴스들은 항상 결과만을 따지므로 이슈의 발단과 과정은 늘 뒷전이 된다. 그래서 정황이 드러나면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했던 사람들은 관심 없던 척 돌아서고, 네티즌들은 올렸던 악성 댓글을 조용히 삭제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 만드는 게 숨쉬기 운동만큼 간단한 세상이다. 나도 비슷한 일을 크게 겪어봐서 그런 두 얼굴의 사람들을 정말 정말 경멸한다. 사정도 모르면서 멋대로 떠들고 제 말이 무조건 정답 인양 우쭐대는 사람들. 어깨에 힘주고 어슬렁대다가 이때다 싶으면 물어뜯는 하이에나가 세상엔 너무 많다. 정작 사자 앞에서는 깨갱할 것들이.


책 소개 글을 안 읽어서 소년의 실종사건이 중심인 줄 알았지만, 진짜 내용은 최악의 결과만큼은 피했으면 하는 부모의 간절함 바램과, 혹시나 그런 결과일 때 어떻게 해야만 좋을지 염려하는 과정에 더 중점을 둔다. 과연 심리 소설답다고 하겠으나 그 내용 외에 다른 내용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대략 난감이다. 배경과 무대도 좁고 주요인물도 적고 무엇보다 사건이랄 게 없다. 좀 심하게 비약하자면 ‘어떡해 어떡해‘만 반복하다가 끝나는 스토리였다. 차라리 모노드라마 형식이었다면 좀 더 달랐으려나. 전에도 말한 적 있는데 아무리 맛있는 요리라도 계속 먹으면 금방 질린다. 반찬도 골고루 먹고 밥이랑 국이랑 번갈아 먹고 물도 마셔줘야 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다채로움도 없고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맴돌고 있어 골방에 갇힌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왕이면 인간의 이중성도 더 세게 고발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심리묘사의 달인은 인정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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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8-13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별 세개!!! ㅎ ㅎ ㅎ

물감 2019-08-13 13:41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ㅎㅎㅎ
근데 전 웬만한 책이 별 세개더라고요ㅎㅎㅎㅎㅎ

카알벨루치 2019-08-13 13:51   좋아요 1 | URL
물감님 까칠대마왕 ㅋㅋㅋㅋㅋ

페크pek0501 2019-08-16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소설 같은데요. 자식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이길 바라는 부모의 심리라는 게
그리 간단치 않을 것 같네요.
아무튼 리뷰의 달인이십니다. 이렇게 재밌는 리뷰는 오랜만에 읽어 봅니다. 리뷰가 흥미진진...

물감 2019-08-16 13:53   좋아요 1 | URL
오.. 페크님께 인정받은건가요? ㅎㅎㅎ 기분 너무 좋습니다. 알라딘에서는 칭찬받는게 정말 하늘의 별따기라서요 ㅠㅠ
여러가지로 볼게 참 많은 책인데요, 그중 부모간에 이념대립이 가장 볼거리입니다. 작가도 그걸 다루고 싶어서 쓰다 나온 책이 이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심리소설 좋아하시면 읽어보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