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날씨가 미쳤다. 내가 지금 지구에서 사는 건지 태양에서 사는 건지 모르겠다. 당장 다음 주가 입추인데 이제서야 열대야라니. 갑자기 어항 속 구피들이 넘나 부럽더라. 니들은 땀이 뭔지도 모를 테니까. 이렇게 더울 때는 스릴러소설이 제격인데 왜 빌려온 건 죄다 어두컴컴한 사회소설뿐이지? 진짜 더위를 먹긴 먹었나 보다. 그래 곧 죽더라도 못다 쓴 리뷰는 남기고 죽어야겠음. 그나마 이 작품 배경이 겨울 왕국 러시아라서 시원하고 좋았는데 그냥 플라시보 효과겠지. 근데 재난 소설이라니 완전 의외였음. 느낌상 정유정의 ‘28‘과 영화 ‘설국열차‘를 섞은 듯한 분위기랄까. 대충 감이 오리라 믿겠다. 자 그럼 관자놀이에 나사 쪼이고 시작해볼란다.



세계는 지금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져서 줄줄이 사망하는 등 난리도 아니다. 도리 자매가 살고 있는 러시아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병으로 가족들이 죽었고 거처를 잃었으며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온 마을이 고통받았다. 안식처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다 피난 중인 탑차에 얻어 탄 도리는 지나와 절친이 된다. 그러나 식량을 구하러 간 곳마다 강도들에게 습격을 받았고 생존자는 점점 줄어든다. 온 사방 천지에 죽음이 가득했고, 산 자들에게는 가족도 동료도 다 적이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마을마다 식량을 휩쓸고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가 노예를 삼았고, 도리와 지나 일행도 예외 없이 잡혀갔다. 탈출도 불가능하지만 도망친다 해도 갈 곳이 없다. 차라리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은 이 상황.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여 이들을 이토록 미궁에 몰아넣는가.



보다시피 엄청 무겁고 우울한 줄거리이다. 게다가 재난물의 뻔한 절차를 그대로 밟고 있다. 이런 장르의 결말은 대부분 정해져있는데 대체 어떤 기승전결을 보여줄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책은 ‘생존‘에 포커스가 맞춰져있지 않았다. 읽다 보면 그건 금방 눈치채는데, 그럼 진짜 포커스가 뭔지 봐도 봐도 모르겠다가 도리와 지나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작가의 퍼즐은 하나씩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잘 가다가 생뚱맞게 웬 동성애물인가 싶었는데 그 이후로도 쭉 등장인물들의 죽어있던 사랑 감정들이 눈을 뜬다. 결국 작가는 이 ‘사랑‘에다 포커스를 두었고, 진부할 수도 있는 이 소재 덕에 더 진부할 수 있었던 장르를 그럴싸하게 완성시켰다. 이야기와 메시지, 두 마리 치킨을 잡은 것이다. 



아무리 포커스가 생존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기본 베이스가 재난물인데 바이러스 원인도 없고, 탈출 장면도 없고, 구원도 희망도 없어 끝까지 진퇴양난이다. 어째 내용이 너무 건너뛴다 싶었는데 그게 다 의도된 거란다. 근데 그것과 상관없이 흐름은 어색함을 못 느꼈고, 작가가 강조하려던 것들은 누락된 것 없이 다 보여진 듯하다. 자, 그러면 대체 이 책의 사랑들은 뭐가 다른가. 비상사태에도 주연들은 각자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고 사랑을 찾는다. 눈앞에서 살인과 강간, 전쟁과 약탈이 일어나는데도, 그 가운데 피어나는 사랑으로 다 참고 이겨내고 있었다. 여기서 독자들은 나와 정반대 성향의 사람과, 나 아닌 다른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과, 내가 지켜줘야만 하는 사람과 하는 독특한 모양의 사랑을 보게 된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사랑이 서로를 소유하는 일반적인 사랑이 아닌, 서로를 잘 모른 채 최소한의 관계로 맺어진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단순히 썸 아니냐 할 텐데 그거랑은 또 다르다. 여튼 이런 것도 사랑인가 싶은 것들도 이들에게는 강렬한 감정이 되었고, 그것이 죽고 사는 일보다도 더 귀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삶의 이유도 의미도 없는 이들에게 있어 사랑은 모든 질문의 해답이 되어주었다.



인류 멸망의 순간에도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을 작가는 강조한다. 남편에 대한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과거형 사랑의 류, 사랑의 감정에 눈을 뜬 현재진행형 사랑의 도리와 지나, 헤어진 지나와 재회를 소망하는 미래형 사랑의 건지, 그리고 곁에서 언니를 잠잠히 사랑하는 제자리걸음형 사랑의 미소. 죽음이 오늘내일하는 마당에 이 감정은 희미해지긴커녕 그 형태가 갈수록 뚜렷해졌다. 그래서 다들 처음에는 이 사치스러운 감정을 애써 외면하고 뿌리쳤다. 그러나 사랑은 내 마음대로 잘라낼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것에 기대어 숨을 쉬고 서로를 지탱해주는 등, 이 형국에 그거라도 없었으면 어쩌나 싶을 만큼 사랑은 위대했다. 지금은 사랑이 죽고 시들은 세상이다. 비연애, 비결혼, 남녀 혐오 등등 사랑이 부재된 지 이미 오래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 같은 거 없어도 잘만 산다고 말한다. 그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생각은 없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사랑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꼭 서로의 몸과 마음을 가져야만 사랑이 되는 게 아니므로.



지나는 똑같이 겪는 고난 속에서도 유독 다르게 행동했다.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화장품을 식료품보다 좋아했고, 조급하고 불안해하는 내색 없이 느긋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유지했다. 도리는 이런 재앙 속에도 웃을 수 있는 지나가 부러웠고 닮아보려고도 했으나 자신의 처지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도리에게 있어 어린 동생은 살아남아야 할 이유이자 삶의 목표였고 버팀의 원동력이었는데, 겨우 사랑 감정에 흔들려 잠시나마 동생을 소홀히 했던 자신이 미웠고 지나도 미워했다. 분명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에 계속 노출되어온 사람들은 그 불행이 당연하단 듯이 여겨지고, 불행을 바라지 않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건 줄 안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불행은 두려움으로 이어져 나쁜 시나리오를 만들어내고 사소한 행동에도 벌벌 떨게 한다. 이윽고 부정정인 생각이 본인을 지배하여 ‘나‘라는 존재의 의미까지 부정해버린다. 이런 사람들의 심경을 압축한 대사가 있다. ‘하루하루 살아남는 게 기적이면서도 기적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 마지막까지도 기적은 없었다.



이성이 없는 좀비와 이성을 잃은 인간 중 뭐가 더 무서울까? 인간은 좀비에게 물리지 않고도 좀비처럼 포악해질 수 있었다. 바이러스보다 위험한 건 붕괴된 인간성이었다. 지나의 가족은 일원이 죽을 때마다 괜히 도리 자매를 원망해댔고 그녀들은 이유 없이 욕받이가 되었다. 지나 가족의 남자들은 돌아가면서 지나를 성폭행 했고, 지나의 아빠는 그걸 모르쇠 했다. 군인들은 마을을 약탈했고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 노예로 부려먹었으며, 모기 잡듯이 사람들을 죽였다. 어린이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괴담으로 전 세계는 장기 매매에 혈안이 되어있다. 보다시피 어디에서도 인간다움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게 희망마저 기대할 수 없을 때 사람은 목숨을 버리거나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하긴 세상이 엉망진창인데 제정신이면 그것도 비정상이겠다. 학대와 폭력을 일삼던 자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던 자도, 짐승의 탈을 쓴 자도,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자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도 그것에 이유 따윈 없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눈 감고 영원한 겨울잠을 자는 게 나을 정도니까. 그래서 사랑의 작은 불씨는 그렇게나 따뜻하고 강렬했던 건가 보다.



왜 제목은 해가 뜨는 곳이 아니라 지는 곳인가. 해지는 곳은 금세 밤이 찾아올 것 같은 적막한 곳이 연상되는데, 반대로 이 작품은 해가 지는 그곳에 여름 같은 빛의 기운이 있는 곳을 뜻했다. 그럼 도리 자매가 가고자 했던 곳은 사랑이 깃든 곳을 의미한 게 아니었을까. 작가는 매듭짓지 않은 결말처럼 아무것도 정답을 내리지 않는다. 그래 뭐 독자에게 맡기는 건 좋은데 요즘 이런 작품이 너무 많은 듯. 난 그냥 전부 답을 알려줬으면 좋겠어. 더워서 그런지 요새 전두엽이 잘 안 돌아가거든. 여튼 잘 읽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8-08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난 서사의 엔딩은 작가에게 딜레머가
아닐까 싶습니다.

좀비보다 위험한 건 아작난 인간성이라
는 점에 대한 지적은 정말 멋졌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인간의 살을 먹겠다고
덤벼드는 좀비보다 나만 살겠다는 이기
가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물감 2019-08-08 11:0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어쩌면 뻔한 엔딩이 싫어서 똥싸다 만 결말을 택한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재난가운데 나는 과연 인간성을 잃지 않을수 있을지 장담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아이의 간 빼먹을 정도는 안되겠지만요. 인간의 이기심이 좀비를 능가함을 보여주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