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소녀
세라 페카넨.그리어 헨드릭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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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세계에서는 여럿이 한 작품을 공동작업하기도 하고 때론 그것이 엄청난 결과물을 낳기도 한다. 근데 소설 쪽에서는 공동작업으로 효과를 본 케이스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머리가 많을수록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줄 것 같지만, 오히려 사공이 많은 탓에 읭?스러운 전개라던가, 무리한 개연성이라던가 하는 허술함이 작품을 망치게 되더라. 공동작품은 쉽게 말해 스타트업 같은 거다. 괜찮은 사업 계획이 있는데 혼자로는 부족하니 좋은 파트너를 구해서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보는 게지. 첨부터 기획을 잘 한 덕분에 작품성은 대부분 우수한 편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십중팔구는 망하고 한두 곳만 살아남는 게 스타트업 계의 현실이다. 그것도 간신히 운 좋게 말이다. 다행히도 이 작품은 무사히 살아남은 케이스였다. 솔직하게 공동작업을 할 거면 이 정도는 되어야 좋은 평가를 받는다. 참 잘했어요.


돈에 쫓겨사는 여주가 한 정신과 박사의 윤리 실험에 참여한다. 실험 질문마다 솔직하게 답해주고 돈을 받아 가길 수차례, 실험의 연장으로 그녀는 한 남자를 유혹하는 미션을 받는다. 돈이 궁한 여주는 그저 시킨 대로 했는데 알고 보니 이 남자, 박사의 별거 중인 남편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는 깜놀한 여주에게 아내를 조심하라 경고하였고, 그녀는 이제 그만 실험을 중단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을 쥐락펴락하며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박사에게 점점 두려움을 느낀다. 대체 이 해괴망측한 실험을 진행하는 박사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달팽이 걸음마처럼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되지만 후반에 가서는 엄청난 텐션을 보여준다. 이렇게 전후반의 온도차가 확 다른 느낌은 아가사 크리스티 후로 처음이다. 이 작품은 흐름이 너무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게 장점이다. 어느 곳 하나 막힘없는 걸 보면 처음부터 다 계산된 플롯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등장인물을 최소화 함으로써 오로지 세 명에게만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하였다. 이렇게나 치밀한데 과연 성공할만하지 아니한가. 검색해보니 두 작가 모두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한다. 나는 베스트셀러를 안 믿는 편이지만, 이 책은 두 사람이 결코 거품 작가가 아니란 걸 증명해 보였다. 글솜씨도 훌륭하고 기승전결도 완벽한데다 특히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교가 일품이다. 그런 두 사람이 손발까지 착착 맞다니, 독자들은 어서 풍악을 울리시오.


내가 베스트셀러와 출판사 마케팅에 낚인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평점 높은 작품을 읽을 때면 매의 눈으로 비평 거리 먼저 찾게 된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말하면 박사 부부의 심리싸움에 여주 옆구리 터진다는 내용인데, 아무리 봐도 수박 겉핥기만 반복되어 진도가 도통 나가질 않는 거다. 박사는 여주를 데려다 단계별로 계획을 성취해가고, 여주는 그 속내를 모른 채 꼭두각시 노릇만 한다. 박사가 주는 돈맛에 길들여진 탓도 있지만, 앞서 실험 질문들을 통해 자신의 개인사와 비밀을 다 공개해버린 게 더 문제였다. 실험을 거부하려 할 때마다 자신의 약점을 건드리는 박사를 보며 진퇴양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는 여주. 갈수록 박사는 무리한 요구로 그녀를 압박해오고, 여주는 점점 미쳐간다. 이렇게 한 사람을 실험 쥐로 삼고 정신을 망가뜨리는 사디스트 박사의 이야기가 전부인가 싶을 만큼 중반까지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러다 중반부터 박사의 남편이 여주와 동맹을 맺고부터 흐름이 크게 바뀐다.


남편의 외도로 두 부부는 별거 중이었다. 그것이 괘씸했던 박사는 남편의 외도녀를 불러 여주와 똑같은 실험에 참여시켰고 끝내는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알아낸 남편은 여주가 똑같은 꼴을 당할까 봐 보호해주고자 했다. 또한 그도 여주처럼 아내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박사와 잘만 지내는 그의 모습과 거짓말들을 보며 여주는 누가 더 위험한지 알 수 없었다. 반쪽짜리 동맹의 끝은 결국 박사에게 들통나버렸고 박사는 두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 추궁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공방전이 시작되었으나 두 사람은 박사의 지략에 지도록 되어있었다. 분량은 다 돼가고 마무리는 멀어 보이고 대체 어쩌려나 싶었는데, 마지막에 여주가 박사를 떠보는 질문을 하고 거기에 걸려 넘어진 박사는 그대로 녹다운이 된다. 과연 심리소설 답다고 하겠다.


냉정하게 말하면 엄청 참신한 스토리는 아니었다. 결국 이 작품도 캐릭터를 잘 만든 덕분이란 얘기다. 근데 겨우 셋 밖에 안되는 인물들의 매력과 존재감이 엄청나다. 작가들이 자신과 전혀 다른 캐릭터를 쓸 때 얕게 다루면 별 탈이 없는데 깊게 다루면 어색함이 딱 티가 난다. 그런데 이 세명은 다 다른 성격인데 실제 인물처럼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는 이 점에서 공동작업이 효과를 봤다고 생각한다. 박사의 점잖으면서도 역동적인 광기와 집착, 남편의 선량하면서도 묘하게 비밀스러운 태도, 그릇된 윤리 의식과 싸워서 외면해왔던 스스로를 찾게 된 여주의 인간미. 작품을 위해 과한 설정을 넣지도 않았고, 억지스러운 액션이나 쓸데없는 대사도 없었다. 한마디로 캐릭터 설정에는 흠이 없다. 분위기 고조가 느린 게 단점이지만 어느새 가랑비에 옷이 젖은 자신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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