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문신가 스토리콜렉터 73
헤더 모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북로드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는 글 쓸 때 가장 고민하는 구간이 도입부이다. 왜 그런 말 있지 않나. 병맛 같으면서도 멋있고, 심플하면서도 세련되고, 평범하면서도 개성 돋보이는 그런 거. 어떻게 써야 시작부터 읽는 이의 마음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지를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도입부만 잘 해결되면 그 뒤로는 글이 술술 써지는 편이다. 반대로 잘 안 풀리면... 생각도 하기 싫군. 타인의 글을 읽을 때도 가장 눈여겨보는 게 도입부이다. 그 몇 줄에서 삘이 오지 않으면 금세 흥미를 잃어버린다. ‘좋은 글‘은 저마다 생각해둔 정의가 다를 터인데, 내게 좋은 글이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글‘이라 볼 수 있겠다. 또한 그런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다. 온 우주의 감성과 창의력을 끌어모아 글을 쓰다 보면 때때로 참신한 표현이 나오기도 하지만 운빨이 매번 있는 게 아니고, 트레이닝으로도 한계가 있단 말씀. 그래서 내린 결론은 작품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 나와 잘 맞는 책은 잘 맞는 대로, 안 맞는 책은 안 맞는 대로, 읽다 보면 저절로 쓸 말이 떠오르는 책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영감이 안 오는 책을 만날 때면 지금처럼 작품과 관련도 없는 내용으로 지면을 채우게 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간단히 1절만 하고 끝내자는 심정으로 리뷰를 써본다.


주인공 랄레는 독일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입소자들의 팔에 번호를 새기는 문신가를 맡는다. 나치의 개가 되어 제 손으로 유대인 동포들에게 고통을 주어야 하는 괴로운 나날 가운데 어느 한 소녀에게 반하게 된 주인공. 간부의 도움을 받아 소녀와 가까워진 그는 이 지옥에서 반드시 생존하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매일 매시간 죽음의 소식이 들려오는 수용소에서 무엇을 바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오늘도 하늘은 타버린 시체들의 연기와 재 가루로 가득했다.


2020년 9월 기준으로 <교보문고 10.0 / 예스24 9.2 / 알라딘 9.4>라는 높은 평점을 받은 작품인데, 과연 그럴만 한가 싶은 의심이 든다. 온갖 호평이 넘쳐나므로 나는 비평 위주로만 적겠다. 내 눈에는 저가 재료로 건축한 브랜드 아파트처럼 보였다. 외관은 그럴싸하나 내부는 영 부실하다는 말이다. 기본 베이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인데 배경도 사건도 너무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였고, 문단의 호흡은 짧으면서 진행 속도는 매우 빠르다. 읽는 속도가 느린 나조차도 반나절이면 다 읽겠더라. 무엇보다 두 남녀의 사랑 장면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너무 설렁설렁 써서 작품의 불균형이 심각하다. 수용소의 끔찍한 상황, 수용자들의 참담한 심정, 나치의 폭력과 야만성 등등. 이런 것들을 더 깊고 진중하게 다뤘다면 주인공의 사랑도 훨씬 가슴 절절해졌을 텐데. 살은 다 쳐내고 뼈만 가지고서 이끌어가는 작품이라 완성도도 떨어진다. 살 좀 덧붙이고 각색했더라면 나도 별 4개 줄 수 있었겠다. 최상급 재료가 있으면 뭐 하나. 재료 손질하는 방법부터 잘 모르는데 괜찮은 음식이 나올 리가 만무하다.


실제 인물인 주인공을 작가가 몇 년 동안 인터뷰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을 텐데, 너무 사건 중심으로만 글을 쓴 것이 아쉽다. 지금으로서는 슬픔도 애환도 고통도 그저 텍스트로만 존재하고 있는 기분이다. 주인공 캐릭터는 그나마 입체적인데, 나머지들은 주연도 조연처럼, 조연은 카메오처럼 평면적이다. 비중의 높낮음을 떠나 하나같이 존재감이 없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저 그런 스토리라도 잘빠진 캐릭터만 있으면 얼마든지 분위기 살릴 수가 있는데, 이 책은 좋은 콘텐츠와 소스를 그저 그런 캐릭터들이 잡아먹고 있다. 이 다운된 분위기는 주인공이 수용소를 탈출한 후로부터는 복구가 불가했다. 수용소 안에서는 그의 활동이 제한되어있었으므로 사건 중심의 진행이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러나 수용소 밖에서는 주인공이 사건을 이끌고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디테일 없이 두 남녀를 급 재회시키고 그대로 마무리해 버렸다. 이건 용두사미가 아니고 그냥 성의가 없는 거로밖에 안 보이는데? 작가의 역량이 이게 끝이라면 이후 나올 책들은 안 봐도 그만이겠다. 에고, 1절만 하려 했는데 어느새 글이 길어졌다.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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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9-18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홀로코스트 다룬 책들을 연달아 세 권 읽었는데, 저는 일단 이 책을 패스한게 수용소 안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게 너무 끔찍하잖아요. ㅠㅠ 이 문신가가 실존 인물이라죠? 근데 남녀가 만날 수 없었을거 같은데 사랑같은건 생각도 못할 환경이었는데 너무 소설적인거 아닌가...생각했네요.

물감 2020-09-18 23:09   좋아요 1 | URL
저도 그냥 패스할걸 그랬나봐요. 수용소의 문신가라 해서 그 일과 관련된 사건들을 기대했는데 사랑 내용 말고는 볼 게 없었어요ㅜㅜ 게다가 전반적으로 너무 가볍습니다. 그래선 안될
장르라고 생각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