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르페브르는 1970년대 중반에 그의 유명한 저서 <헤겔, 마르크스,니체 또는 그림자의 왕국>을 발표했다. 책이 출간되었을 무렵 라디오의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저는 선생님 기분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선생님을 가리켜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라고 하더군요." 그러자 르페브르는 답변했다. "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영광이군요. 나는 그렇게 평가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눈앞에 펼쳐진 지평선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실용주의만 고집하며 일단 손에 쥔 것만 가지고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들은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직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들, 지평선 너머로 펼쳐져 있을 세계를 보는 사람들만이 실제론자들입니다. 이 사람들만이 세상을 바꾸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석적인 이성으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도래할 것, 우리가 원하는 것,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은 내면의 눈, 즉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유토피아를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pp.31-31)

-장 지글러  / 탐욕의 시대 중 인간은 누구가 행복할 권리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혹은 '불멸의 사랑'은 우리가 꿈꾸곤 한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찬미와 욕망은 많은 작가를 먹여 살리는 장르로 굳건하게 '불멸의 사랑'이 서 있게 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노래하고 듣지만 끊이지 않는걸 보면 어쩌면 우리는 그 사랑 이야기 속 '당신'을 찾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혹은 내가 어디에 있어도, 내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나를 찾아줄, 그리고 기억해줄 '당신'을. 


앤드루 데이비슨의 <가고일>은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그렇고 그런 많은 책 중에 한권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 오래도록 다시 만나게 될 운명을 안고 서로를 찾았던 두 연인의 이야기 말이다. 소설은 전도 유망한 배우겸 제작자가 자동차 사고로 화염에 휩싸인채 화상을 입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이 소설을 영화로 옮긴다며 가장 고민될 장면인데 꽤나 자세한 묘사로 작가가 많은 조사를 통해 글을 썼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화상치료에 매진하던 그가 치료를 받는 유일한 이유료 '자살을 하기 위해'라고 생각할 즈음, 그에게는 마리앙네 앵겔 이라는 한 여인이 찾아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들의 과거와 자신들의 사랑, 그리고 단테의 <신곡>을 기억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그녀와 그의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이 어떤 사랑을 했는지, 그 사랑의 결말이 무엇이 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가고일을 조각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치유하게 된다. 그녀는 그와의 끊이지 않는 불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자신과 그녀의 과거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혹은 그녀의 삶 속에서 점차 치유하게 된다. 치료를 받는 유일한 목적을 자살을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다른 삶이 찾아온 것이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그녀와 오랜 시간을 망각했던 그와의 만남은 짧은 시간이었다. 길지도 않았고, 어떤 강렬한 감흥이 있지도 않았다. 소설 속에서 가고일은 그녀와 그가 함께 살고 있는 집을 지켜주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녀의 생을 유지시켜주는 존재이면서도, 그녀의 삶을 결정지어주는 존재이다. 그녀와 그의 삶 속을 동시에 공유하는 존재가 바로 가고일이다. 한번쯤은 꿈꾸는 영원한 그리고 불멸의 사랑을 오랜만에 읽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의 좌파, 왜곡된 신화와 새로운 정치"


[철학자의 서재]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기사입력 2008-12-20 오전 9:56:2


▲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이광일 지음, 메이데이 펴냄) ⓒ프레시안


한국적 보수(?)가 생산하는 진보=좌파의 낡은 프레임

사람들은 보수와 진보라는 두 가지의 프레임을 가지고 오늘날의 한국 정치 지형을 본다. 그러나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한국의 보수를 보수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의 눈에 비친 진보를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이다. 한국의 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과 뉴라이트,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조선·중앙·동아일보의 눈에 '진보'는 좌파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 오늘날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좌파에 대한 신비화와 왜곡이 있다. 진보(the progress)는 현재 주어진 사회·정치·경제적 구조를 바꾸려는 자들 전반을 가리키는, 더 외연이 넓은 정치적 지향성을 가진 집단을 말한다. 그러나 좌파(the left)는 그 중에 일부, 즉 평등이라는 가치·이념적 지향성을 가진 집단을 말한다.

진보는 현 상태, 주어진 사회구조적 질서를 바꾸고자 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이념적 지향성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이념적으로 구획되지는 않는다. 진보 안에는 다양한 가치·이념적 지향성이 어울려 공존한다. 진보에 특정한 가치·이념적 지향성이라는 잣대를 설정해 주었을 때 진보는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분화한다. 진보 안에는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를 신봉하는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자유주의자들과 합리적 이성을 신봉하며 이 이성적인 사회체제를 건설하려는 계몽주의자들에서부터 모든 사회적 강제성과 국가의 통합적 권력을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자들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 지형은 이런 자유주의적 개혁이나 합리주의적 계몽조차 왜곡된 보수적 권력 체계에 의해 압살당해 왔다. 심지어 로크의 자유주의적 관점이나 아담 스미스의 자유경쟁조차 한국의 우파들에게는 위험한 급진주의자들, 현재의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로 낙인찍히기 일쑤였다. 그들이 보는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들을 잡아먹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표현되어 있는 개인의 이기성을 초월적으로 지배하는 국가 이념적 가치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좌파는 언제나 '비이성적 폭도, 위험분자, 친북인사'들로 분류되었다. 이 낙인 찍기는 소위 '386세대'로 상징화되는, 자유주의적 이념을 신봉하며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앞장서서 추진했던 노무현 정권조차 좌파라는 딱지로 바꾸어 놓았다.

이광일의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메이데이 펴냄)는 바로 이런 한국 정치 지형이 만들어낸 좌파에 대한 왜곡과 신비화를 한국 좌파 형성의 역사적 추적을 통해서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추적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는 이 글이 오늘날 정치 지형과 관련하여 한국 좌파의 신비화와 왜곡을 해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 헤게모니에서의 좌파에 대한 과대평가는, 늘 진보=좌파라는 도식 속에서 '반북·반공이데올로기'라는 낡은 프레임을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좌파와 자유주의 간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하며 오히려 '한국적 보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프레임 속에서 보수는, 오히려 보수 이념인 민족주의를 배제하는 '친미적 보수'로, 보수 이념인 '개인의 가치'를 배제하는 '국가주의'로 생산된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좌파 안에서 재생산된다. 그것은 두 가지 정파의 대립, '민족이냐 계급이냐', 그리고 '시민이냐 계급이냐'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한다. 여기서 좌파는 모호해지며 '자유주의적 담론', 좌파의 가치·이념적 지향성이 사라진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자유주의적 헤게모니, 자유주의적 담론의 과잉은 이로부터 재생산된다.

한국의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되었는가?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1980년대를 좌파 헤게모니의 시대로, 심지어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좌파의 실패인 것처럼 모든 역사적 과오와 탈선을 좌파에게 덮어씌운다. 그들은 마치 80년대의 좌파가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억압했으며 역사적 책무와 거대담론을 통해서 그 시대를 지배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데마고기'는 분명하게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적 언론 매체를 통해서 재생산된 신비화에 불과하다. 오늘날까지 지배 헤게모니를 작동시킨 것은 명백히 '좌파'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날까지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개혁적 헤게모니를 작동시킨 것은 김대중·노무현을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었다. 따라서 한국 정치사회에 부재하는 것, 또는 작동하지 못한 것은 '자유주의'나 '합리주의'적 공론장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정치 사회에서 문제는 '자유주의의 과잉'이다. 그들은 좌파의 헤게모니를 과장하고 확대해석함으로써 자유주의가 수행해온 역할을 감추고 자유주의적 헤게모니의 부재를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로 탈바꿈시킨다. 여기서 자유주의의 과잉이 생산된다. 특히 1987년 6·10 이후 진행된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는 언제나 시민운동과 지배 권력을 장악한 자유주의 정치세력과의 '동거체제'를 만들어온 프레임이 되었다. 1994년 중반 이후 시민운동의 성장과 1998년 이후의 김대중·노무현 정권과의 동거는 한국 정치사회의 왜곡된 지형, 친미적이고 반민중적 보수체제를 생산하면서 '자유주의 블록'의 형성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양산하는 틀이 되었다.

이광일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방어하고 확장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세력은 "80년대 급진 노동운동"이었다. 그가 진단하고 있듯이 "이들 급진 노동운동은 그 이전까지 최소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일반과 동일시했던 자유주의적 논리들과 '국가 대 사회'라는 대립선을 경계로 전개된 정치적 실천을 사회민주주의와 진보정치라는 지평으로 확장시켰다." 따라서 문제는 자유주의의 부재 또는 자유주의의 미약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과잉에 있다. 언제나 이 속에서 자유주의 헤게모니를 생산했던 것은 '독재 대 민주', '봉건적 재벌 대 자유 시장'이라는 이원적 틀이었다. 이 이원적 틀에 대항하면서 자유주의와 투쟁을 전개해 온 것은 좌파였으며 좌파의 역사는 곧 자유주의와의 투쟁 속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한국의 좌파를 80년대의 담론을 지배했던 좌파, 신비화된 좌파를 상상적으로 구성하고 이 속에서 개인의 억압된 욕망을 투영할 뿐이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환상과 자유주의 정치 세력에 대한 사람들의 과도한 기대와 열정은 이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노무현으로 상징화되는 자유주의 지배블록으로 귀결되었으며 이 책이 말하고 있듯이, '통합국가' 안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런 갈등, "총체적인 구조 변화를 위한 모순, 그로부터 야기되는 갈등을 함축"하는 "부르주아 국가 및 시민사회와 민중사회와의 갈등"은, 잠재된 채 오히려 급진 노동운동에 대한 포위와 고립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오늘날 이명박의 귀환으로 상징화되는 반동적 보수의 등장은 노무현정권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환멸과 정치·사회운동의 위기로부터 출현한 것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나타난 사람들의 적극적인 기권과 낮은 투표율, 그리고 이어진 촛불 집회는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이 '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민중의 호민관'이 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명박을 필두로 하는 반동적인 한국 사회의 보수를 불러온 것은 자유주의이다. 이것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회고적 투표가 이명박의 당선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비판되어야 할 것은 좌파의 급진성, 이념성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의 과잉을 벗어나 좌파의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해 가야 한다. 그것은 정치조직으로 자유주의와 단절하는 것이며 민주주의를 더욱 급진화하고 다양한 사회운동과 계급운동을 정치화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은 비판의 지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좌파 내부의 이원적 프레임과 좌파의 미래

이 책은 최장집을 비롯한 소위 한국 사회의 진보적 프레임의 왜곡된 지형을 역사적 추적을 통해 해체한다. 이들은 좌파의 정치적 힘을 과대포장하고 한국 민주주의의 과오를 좌파에게 떠넘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정치는 결코 민주주의의 확장이 아니다. 지난 촛불 집회에서 최장집은 '정당정치의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다시 '대의제'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들이 사고하는 정치는 '자유주의적 정치 게임'이다. 그들은 결코 '촛불 대중'이 표현하고 있는 잠재적 역량, 미래를 생산하는 역동적 힘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거기에서 민주주의의 위협이라는 '대중들에 대한 공포'를 느낄 뿐이다. 여기에는 철저한 엘리트주의자들의 공포가 내재해 있다. 그들은 무지한 대중들의 일탈, 그들 스스로 권력을 만들고 통치하고자 하는 주권적 힘에 공포를 느낄 뿐이다.

그러나 좌파는 그것을 더욱 급진화하고자 할 뿐이다. 좌파에게 평등은 단순한 양적 교환이나 경제적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양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질적인 가치의 상호 소통이며 그 소통을 수행하는 정치적 주권과 권력의 평등이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권력의 평등한 소통, 호혜적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대중 자신의 자치 권력이자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으로서 제헌적 권력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광일의 글은 좌파 내부에서 생산되는 '민족 대 계급'이라는 이원적 프레임을 기각한다.

좌파가 소위 민족해방 계열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고수해 온 것은 '민족 문제'가 ('민족 문제' 때문이) 아니다. 갈등의 진정한 뿌리는 '민족 대단결'이라는 원칙 속에서 재현되는 '자유주의적 헤게모니'로의 투항이라는 한국 민족주의의 기형적 재생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보수가 아니라 진보 진영 내부에서 '독재 대 민주'라는 이분법, '매판 대 민족'이라는 이분법으로 재생산되며 좌파의 정치적 자립화를 억압한다. 87년 대선에서의 '비판적 지지론'과 그 후에 반복되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과의 모호한 관계는 바로 이와 같은 역사를 반영한다. 따라서 좌파 또한 '민족 대 계급'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하고 '민족 공통의 제헌적 권력'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정치학적 비전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시민운동 대 계급운동의 대립이라는 낡은 이분법 또한, 시민운동이 '자유주의'적 담론의 헤게모니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촛불 집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급진적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운동 또한 정치적 지도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의 몰락은 94년 이후 급속도로 성장했던 시민운동의 위기를 가져왔다. 사실, 역사상 좌파는 헤게모니를 행사한 적이 없지만 지금의 시민운동은 지난 10년간 음으로 양으로 지배적 헤게모니 틀 내에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위기로 귀결되었던 것은 좌파를 고립시키는 '자유주의적 프레임' 안에 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 '자유주의적 지배블록'과의 정치적 연합을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좌파와의 적극적인 연합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좌파의 정치 또한 바뀌어야 한다. 이광일은 '정치의 빈곤'을 말한다. 좌파의 빈곤은 '정치의 빈곤'을 생산한다. 그들의 실천 양식은 고립적이고 방어적인 투쟁 속에서 습성화되어 왔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좌파'는 고립된 어떤 계급만의 정치적 실천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 혁명은 항상 사회 혁명 속에서 작동되어야 한다. 한국의 좌파는 '시민적·자유주의적 헤게모니'에 대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을 대립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 혁명의 정치적 성격"을 따라 사회 혁명을 정치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로 바꾸어가는 정치적 기획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낡은 이분법적 프레임 안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 오히려 좌파의 적극적인 미래 기획,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정치학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모순들 속에서 중첩된 모순들을 급진적 민주주의로 전화시키고 다양한 대중들의 삶을 자기 통치적 정치로 바꾸어 가는 새로운 정치를 구상하는 것이다.


"사회정치적 갈등들은 여전히 자본의 착취라는 대립선으로부터 기인하지만 그것들은 전통적인 계급모순을 중심으로 배열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양한 영역-환경, 여성, 지역, 노인, 반전평화 등-들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매개로 중첩되어 현실 속에 던져지고 있다. (…) 이런 측면에서 급진 동운동은 기존 보수자유주의 정치 세력과의 대결을 통해 정치적 자유를 확보해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합주의적 이해를 넘어 새로운 대안 세계를 모색하기 위해 민중-민족적 헤게모니를 확보, 구사해야만 하는 장기적 임무에 직면해 있다."

출처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219180323&Section=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합리성의 심리학 - 왜 인간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반복하는가
스튜어트 서덜랜드 지음, 이세진 옮김 / 교양인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심리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싫어하는 편이다. 모든 인문학이 기본적으로 '사람'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관심사에 두고 있지만 심리학처럼 노골적인 학문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때로는 정말 '사람'은 이런 존재가 맞는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리학은 예의가 없는 학문이라 난 그리 생각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어쩔 수 없이 순수한 학문적 재미를 느끼곤 하는데 그게 바로 <비합리성의 심리학>과 같은 책을 읽었을 때 그렇다.


학문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학문간 교류를 통해 다른 학문을 통해 좀 더 서로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 인문학의 대세이다. 이런 최근 흐름에서 심리학만큼 여기저기 마실을 다닐 수 있는 학문도 드물다. 예술부터 경영,경제와도 접목되고, 언어학을 제외한 왠만한 인문학과 손잡는 일쯤은 심리학에게는 유도 아니다. 경영학에 심리학을 접목해서 소비자의 심리를 설명하기도 하고, 한창 유행하는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해 비합리성을 설명하는 점이 최근의 소위 트랜드이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제대로 된 심리학의 기본을 설명하는 책은 없는 듯 하기도 하다. 


<비합리성의 심리학>은 사실 기본에 충실한 책이다. 다른 학문과의 교류를 하기 보다는 심리학의 가장 기본에 충실하게 맞춰서 심리학이 설명하는 '인간'에 대해 전적으로 그 중심을 두고 있다. 다만, 이 책이 독특한 점은 심리학이 설명하고 분석하기는 영역이 인간의 소위 '비합리성'이다. 합리적이는 가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왜 비합리적이고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지를 다분히 학문적으로 설명한다. 당연히 딱딱한 내용이고 그를 감안해서 각 소재별로 다양한 실례를 많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하게 만드는 이유는 이 책이 나도 한번쯤은 겪어봤고 충분히 공감하는 소재들이라는 점이다. 왜 독일 군인들은 유대인들을 그렇게 살해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왜 학교를 다닐 때는 선생님에게 사회에서는 어떠한 권위에 그토록 쉽게 복종하는가. 합리적인 개인이 모인다고 해서 과연 우리 사회가 합리적일까. 쉽게 사람들의 여론에 쉽쓸리는 군중심리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정말 성과급을 받으면 성과가 나아지는걸까. 성과와 보상은 비례하는 것일까. 당연히 한번쯤은 경험해본 이 경험들을 <비합리성의 심리학>은 하나씩 꺼내서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성과와 보상이 비례하는지에 대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는 건 지금 내 상황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비합리성의 심리학>은 빈말이라고 재미있다고 할 수 는 없다. 책은 너무 투텁고 너무나 많은 내용을 꾹꾹 둘러 담고 있다. 하나도 기억하기 어려운 내용을 꾹꾹 담아서 그토록 많이 넣었으니 농담이라도 재미있다고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덕분에 이 책을 쉽게 권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일단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가 붙기 시작한다면 옆에서 누가 말려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일단 읽으면 참 재미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행을 순회하며 밀린 은행일을 휘리릭 해결하고
동료에게서 빌린 KTF 포인트 카드를 빌려다가 별다방으로 출동.
할인카드와 포인트카드로 드.디.어.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 획득.


뭔가 로망을 이룬 기분이 이런건가.
그냥 괜시리 좋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