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참 아프다.

1. 노동
11월13일, '노동'을 더 유심히 봤다. 버스를 타고 버스노동자를, 커피하우스에선 커피노동자를, 영화관에선 극장노동자를, 서점에선 책노동자를. 구체적인 존재들의 노동을 봤다. 광화문에선 노동자대회가 열렸고, 노동자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경찰도시 서울의 볼품 없는 풍경이지만,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을 경찰노동자들의 노고까지도 오늘, 그냥 품었다.

11월13일, 전태일 열사의 41주기. 

오늘, 나는 쉬는 날을 맞은 커피노동자지만,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 커피를 졸졸졸 내렸다. 어머니의 가사노동은 일요일이라고 쉬지 않는다. 나의 커피는 그런 어머니를 위한 사소한 마음. 노동을 위한 나의 마음. 나는 오늘 하루, 어머니 단 한 사람, 한 노동자만을 위한 바리스타!


2. 김진숙 이후
한 원고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김진숙, 내려오다. 이 말은 아마 2011년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쇳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309일 동안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의 복직 등을 위해 고공농성을 해야 했던 김진숙 위원이었다. 돈과 권력에, 1%에 일방적으로 밀려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던 99%가 일군 아주 드물고 사소한 성공의 사례.

11월13일, 41주기를 맞이한 전태일 열사와 지난 9월3일 소천하신 이소선 어머니도 천국에서 미소를 지어주셨으리라. 그렇게 전태일을 떠올리는 시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소식이 퍼지고 김진숙 위원이 땅을 밟은 날, 쌍용자동차에선 19번째 죽음소식이 날아왔으니까. “해고가 살인”임을 알면서도 자본은 스스럼없이 살인을 자행한다.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된 제주, 그곳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담당하는 강정마을을 파괴하고자 하는 국가(군대)와 자본의 협잡과 침탈은 또 어떻고. 우리는 구럼비의 울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99%의 일상을 흔들어놓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그냥 놔둬도 좋을까. 희망버스가 향할 곳은 아직 많음을 보여준다. 사소한 성공을 이어야 할 이유까지."

쉿. 가카께 비밀이지만,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이 있다. 가카껜 절대 비밀이어야 한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려선 안 되잖나. 백성의 도리!


3. 조제, 봉빈, 오드리 헵번
7년 만에 조제와 츠네오를 스크린에서 만났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폰지하우스 광화문. 7년 전과 눈물을 흘렸던 지점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때와 약간 달라보였다. 나이를 들면서 시각이 약간 변한 걸까? 뽀송뽀송한 츠마부키 사토시, 우에노 주리, 이케와키 치즈루. 사랑스러운 그(녀)들.

며칠 전, <채홍> 김별아 작가와 저녁을 함께 했다. 다른 독자들과 함께였는데, '봉빈' 덕분이었다. 봉빈이 누구냐고? '세종대왕의 며느리이자, 조선왕조 동성애 사건의 장본인'으로 기록되지 않은, 그러나 기억돼야 할 어떤 사랑의 주체. 즉, <채홍>의 주인공이다.
 
그전에,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봤었는데, 조제, 봉빈, 할리 골라이틀리(오드리 헵번)이 나란히 줄을 섰다. 공통점? 조제(다나베 세이코의 단편)와 할리(트루먼 카포티의 단편) 모두 원작소설의 주인공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에 주체적인 여성들이다.

특히, 골라이틀리(<티파니에서 아침을>). 싱글걸에 대한 세속적 편견을 바꾼 여자. 빌리 와일더의 표현에 의하면, "혼자 힘으로 풍만과 육감의 시대를 바꾼" 여자. 대개의 경우, 시대가 여성상을 만들지만, 어떤 여성들은 반대다. 등장만으로 새 시대를 열어젖힌다. 오드리 헵번의 골라이틀리가 그랬다. 조제도, 봉빈도 어떤 편견과 틀을 깨는 여자들이다. 

그러니, 울면서 풀썩 주저앉은 츠네오는 이 시대 수컷들의 다가올 미래일지도 모른다. 

'노동'과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함께 지저귀는 이 묘한 풍경, 재밌군. 
 



4. 저런 사랑
<천일의 약속> 재방송. 지형(김래원)이 알츠하이머로 바보가 되어가는 서연(수애)을 향한 사랑(글쎄, 동정은 아니겠지!)때문에 향기(정유미)와 결혼을 취소했고, 두 집안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지형의 시선은 오로지 서연을 향해 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어머니, 내게 이런 말씀 툭 던진다.

"아들아~, 너도 저런 사랑을 하거라." 

어머니의 근엄한 명령. 네, 어무니, 그럴게요, 하면서도 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나도 아버지에게 쫓겨나면, 아버지가 빌려준 돈, 어무니가 대신 주나요? 그러니까, 지형, 넌 참 팔자 좋은 아들이다.ㅋ 하지만, 그 (동정 아니어야 할) 사랑, 인정!
 
나는 그 사랑이 아프다. 나는 그 사랑이 슬프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거늘, 도리 없이 사랑과 기억을 잃어야 할 사랑이라니.
궁금하다. 알츠하이머는, 가슴도 그 사랑을 잃어야 하는 것일까.

먹먹한 내 가슴이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천일의 약속> 8회 마지막에 삽입된 박인환의 詩 '세월이 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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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4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4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여자가 아메리칸 커피를 시킨 이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먼저 인생을 바꿔야 한다.
                                                 -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오늘, 특별히 이 커피콩을 볶는다. 에티오피아 하라르 지역 사람들이 만든 커피. 그 남자가 오기 때문이다. 그 남자, 오늘 밤 9시부터 詩를 낭송할 계획이다.

시즌이다. 10월20일부터 시즌에 돌입하긴 했다. 한 20일에 걸쳐 있는데, 오늘 11월10일이 정점이자 마지막 날이다. 커피 이름은 쉽다. 

랭보. 

오늘, "랭보 한 잔이요~"라고 주문하면 나는 하라르 커피를 내놓는다. 그래, 오늘 120주기라서 그렇다. 1891년 11월10일, 서른 일곱의 나이였다. 요절이었던 거지. 죽기 몇 달 전, 병 때문에 다리를 자른 뒤, 그는 특유의 시니컬함을 거침없이 내질렀다.  

"우리 인생은 불행이다. 끝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빌어먹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번번이 실패하고 불행한데, 버티고 견딘다. 아주 사소하고 엉뚱한 성공에 감읍해서. 

열 다섯에 데뷔, 빅토르 위고로부터 "어린 셰익스피어"라는 극찬을 받았던 랭보는, 스무 살, 詩를 덜컥 놓았다. 그 얘긴 예전에 했던 블라블라를 참조하시고.
 
11월에 생각하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



詩에 작별을 고하고, '스무 살 이후'를 살게 된 랭보는 커피 상인(무역상)으로서도 살았다. 당시 백인으로서 커피무역상에 고용된 것은 랭보가 처음이었단다. 그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향했다.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했단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하라르로 갔다. 해발 1850m의 이슬람 도시. 이슬람 4대 성지 중 하나다. 하라르(의 커피)에 대해선 이런 유언비어(?)가 있었다.
'인도네시아 만델링 지역의 커피가 커피의 왕이고, 에티오피아 하라르 지역 커피가 커피의 여왕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또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바디가 풍부하고 중간 정도의 산미에 초콜릿 향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여왕'의 타이틀을 달 만큼은 아니다. 내 코와 혀는 그리 말한다. 

개성이 다소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랭보는 "지저분하고 커피도 맛이 없는 곳"이라고 하라르를 평했다. 하지만 하라르 커피는 랭보의 간택을 못 받았을 뿐, 그리 최악은 아니었다. 하라르 커피의 미묘한 밸런스는 예멘으로 전파됐고, 그 유명한 '예멘 모카'를 잉태했다.

그러니 하라르 커피는 랭보나 예멘 커피에 얽힌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오늘의 특별한 커피, '랭보'는 그래서 나온다.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중2병(중학교 2학년 나이 또래 청소년들이 겪는 허세적 착각)'을 앓았을 무렵의 랭보를 추억해도 좋고, 더 이상 랭보에 빠질 수 없음을 아는 속물적 현실을 자각할 수도 있다.

랭보는 詩에 작별을 고한 뒤, 철저히 돈 밝히는 속물로 살았다. 극과 극의 체험을 겪은 천재가 택할 수 있는 건 결국 분열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라르 커피에 섞인 랭보적 자취는 그래서 찐~하다. 터키의 속담, '커피는 지옥만큼 어둡고, 죽음만큼 강하고, 사랑만큼 달콤하다'는 하라르 커피를 지칭한 것인데, 랭보의 질척한 방랑이 섞여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늘 랭보를 읊을 남자의 이니셜은 L.D.다. 아마, 당신도 본 적 있을지도 모른다. 천하의 꽃미남! 꽃랭보가 그러했듯. 나는 그 남자에게 이걸 부탁하려고. 아님, 내가 읊던가. 「가장 높은 탑의 노래」.

300일이 넘은 310일째, 김진숙 위원을 위해. 어제 노사 잠정합의안이 나오면서 김진숙 위원이 내려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경찰이 삑살이를 놨다. 병력을 투입하는 과잉반응이 결국 김진숙의 귀환을 막았다. 개새끼들. 하는 꼬라지하곤. 

아, 김진숙 위원님이 내려와서 건강이 회복되면,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싶다. 
  

속박되어 꼼짝 못하는
한가로운 청춘
자질구레한 걱정탓으로
내 인생을 망쳐버렸네

아아, 내 마음이 열중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오게 해다오
나는 생각한다, 좋아
그대와 만나지 않을지라도,
그대와 얘기하는 덧없는 기쁨의
약속따윈 이제 아무래도 좋아
당당한 은퇴를 그대가
멈추게하여 주기를 바라네

언제까지나 내가 꾸었던 헛된꿈을
그토록 참고 견디었다
공포도 고통도 하늘높이 날아가버렸고
그런데 불쾌한 갈증이 내 혈관을 어둡게 하는구나   

평원이 버려진 채로 커지고 
향과 갈라지색 꽃을 피우는 것처럼
수많은 불결한 파리떼가
잔인한 소리를 내는도다

아아, 그토록 가여운 영혼
말할 수 없는 홀아비 생활
그것은 오직 노트르담 교히의
모습이구나
성모마리아에게
간구하는 것인가?

속박되어 꼼짝 못하는
한가로운 청춘
자질구레한 걱정탓으로
내 인생을 망쳐버렸네
아아, 내 마음이 열중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오게 해다오

  

그러니까, 굳이 밤 9시의 커피가 읊는 시 낭송회에 오지 않아도 좋다.
그저 오늘, 랭보 한 잔 마시며 시를 만나도 좋은 시간. 김진숙 위원의 귀환을 기다리며. 한때 랭보의 격정적인 연인이었던 베를렌이 랭보를 일컫길,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당신에게도 '가장 빛나는 죄악' 하나쯤. 오늘만큼은.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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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밤9시의 커피]'하쿠나 마타타'로 떠올리는 프레디 머큐리
    from 맺고,따고,볶고,내리고,느끼고,사랑하라! 2011-11-24 03:04 
    친구들이여, 이것은 하루 중 가장 유쾌하면서도 위험한 시간이다. 새날이 밝고 카페인이 퍼지면서 이 스파이스 걸(Spice Girl)에게는 스파이스, 즉 흥취를 돋울 시간이 아닌가. 아, 오늘 나는 또얼마나 많은 것들을 성취할 것인가!- 샤나 맥린 무어 콩콩콩콩...세상에서 가장 향긋한 콩 볶기, 로스
 
 
2011-11-11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가난한 사람은 죽고 부자는 헛산다
<인 타임>이 뱉은 이 말은 정곡이다. 지금, 누가 저 말을 부정하리오. (영화를 만들면서)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영화는 "점령하라(Occupy)"는 지금-여기의 외침을 닮았다. 시간이 화폐를 대신하는 상상력이 빚은 혁명적 태도. 금융시간자본의 100만년, 그것은 훔치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을 다시 찾는 것이다. 혁명이다. 가난한 사람은 죽고 부자는 헛사는, 누구도 사는 것이 아닌 구조를 뒤엎는 것.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현실을 전복하는 것.  

<인 타임>. 다시 언급하겠지만, 만듦새는 허술하고, 개연성 떨어지는 장면이 속출하나, 그래도 내겐 미덕이 더 크다. 다만, 20세기 폭스가 배급했다. 역시 자본답다.

슬픈 것 하나는, 아메리칸 스윗하트, 아만다 시프리드는 이번 영화에서 헛다리다. 미스 캐스팅 혹은 그녀의 헛발질. <맘마미아>나 <레터스 투 줄리엣>의 아만다를 돌려줘~


2. 사회적기업
부천의 사회적기업 한마당에 퍼진 커피 한 내음. 예기치 않게 안태호 선수도 다시 만나고. 노리단도 오랜만이다. 사회적기업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청년사업단의 고민이 단순히 (인증)사회적기업 만들기가 아니면 좋겠다. 우리의 마음이 담긴, 사회와 분리되지 않고 사회적가치와 목적을 우리 스스로 내면화하면서 실천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되길.   


3. 안나푸르나

망연자실함.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사랑을 다시 안나푸르나에 잃은 여인의 얼굴. 슬픔보다 더 슬픈,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 남은 얼굴. 남은 자가 감내할 수밖에 없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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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해
김지수. 슈퍼스타K 시즌2 출신의 가수 혹은 배우 아닌 보그코리아의 기자.
그녀가 최근 낸,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 독자만남에 자리하고, 책을 읽었다. 詩를 말하고 있었지만, 왠지 허세 혹은 허영 같았다. 어쩌다, 꿈틀하는 대목은 있었지만, 어쩌다 걸린 것이지, 전반적인 기조는 '詩, 너의 가장 허영덩어리'라고 생각했다.

보그코리아. 거의 볼 일도 없고 찾아서 보지도 않는 잡지를 어쩌다 보게 됐다. 휘리릭 휘리릭 건성으로 넘기다가, 한 기사에 꽂혔다. 북~ 뜯었다.

내 것이 아닌, 공공의 잡지를 뜯는 경우. 살짝 죄를 저지른 셈인데, 드물게 일어나는 이런 경우는 내게 꼭 필요한 정보가 있거나, 글에 꽂혔을 때다. 아, 멋지다. 다시 찬찬히 씹어먹고 싶다, 뭐 이런 이기심의 발동. 뜯을 땐 몰랐다. 아니, 김지수였다. 그러니까, 후자였다. 글쓴이가 묻어 있는 진심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허세니 허영이니, 오해였다. 미안하다. 그날 독자만남, 다른 일 때문에 기분이 영 언잖고 다운돼서 그리 뒤틀려서 그랬나보다. 무척 미안하다. 혼자 생각한 거였으니 거두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김지수가 이글을 볼 리도 없지만, 그래도 사과. 괜히 앞뒤로 랭보 이야기만 시불렁 거린 것도 좀 미안해지네.

그녀 글에서, 10년 전 동티모르 독립을 지원하고 있다는 노르웨이의 한 버스 운전사를 만나고 싶어졌다. 10년 전이면 동티모르가 독립하기 직전인데, 노르웨이와 동티모르. 글자수가 같다는 것 외에는 안드로메다와 지구 사이다. 와~ 나는 히치하이커가 되고 싶어졌다.(으응?) 액세서리로서의 삶이 아닌, 뭔가 없는 걸 얻으려고 심하게 노력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개성을 품은 삶. 

결론은? 난 변덕쟁이 남자! ^^;
 
 

2. 미안
그런 아픔이 있는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미안.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서 있는 것 조차도 힘들었을텐데, 그 수많은 사람들의 눈은 또 얼마나 고문이었을까. 구체적인 존재들의 심연을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이것 하나만은 분명해. 넌 전혀 잘못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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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멍
미처 몰랐으나 지난 주말에 알았던 사실 하나가 있어요. 감도 멍이 든다.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하늘나리 상한마을의 감에게 인공중력을 부여하던 날. 가을햇살에 부끄러워 얼굴이 발갛게 익은 감을 땄어요. 땅에 내려앉은 감의 꼭지를 잘라 상자에 넣는 작업을 하던 내게, 농부님이 건넨 말씀. "허허, 그렇게 넣으면 감이 멍들어요." 

감 꼭지를 따서 상자에 툭툭 던지듯 집어넣던 나는, 아차차 했습니다. 감도 멍든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감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어요. 내 얼굴도 감처럼 발갛게 물들었습니다. 멍 때리다가 감에게 멍을 선사할 뻔한 내 과오 때문이지요.

가을하늘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을 스윽 쳐다봤습니다. 조심할게, 말했습니다. 그리곤 이후로는 감을 살살, 내려놓았습니다. 감이 웃습니다. 고마워, 멍 들지 않게 해줘서. 나도 고맙습니다. 내 마음의 멍을 달래줬으니까요.



 
2. 아픔
역시 곡성, 가을 낙엽이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다섯 살 고준이에게 물었습니다. 잎이 왜 떨어질까?

고준이가 혀 짧은 소리로 답합니다. "응... 아파서 떨어져." 

아이들, 하나 같이 시인이라더니, 시인은 사회의 아픔, 세상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라더니, 틀린 말이 아닌가 봅니다. 가을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지하는 고준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향한 애정이 묻은 아이의 대답에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래, 가을이 아픈 거구나. 가을이 아파서 잎은 떨어집니다. 낙엽은 그 아픔을 보여주는 징표인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도 아이일 때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요. 어른이 되면서 우린 말짱 그것을 지웠나 봅니다.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사는 데 그 까짓 게 무슨 소용이냐며. 고준이 덕분입니다. 낙엽을 보면, 또 누군가 아프구나,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고준이가 시인의 면모를 내팽개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자연,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겠죠.

헌데, 그거 아세요? 고준이의 그 말을 들으면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아욱아욱, 당신이 아팠습니다.


  

3. 이호준
허영만 맛있게 잘 쉬었습니다. 호준이 형이 낸 책 제목입니다. 허영만 선생님과 함께입니다. 축하해 줬습니다. 형은 고맙다며, 홍보 좀 잘해 줘, 이럽니다. 씨익 웃었습니다. 형은 《식객》의 취재팀장입니다. 즉, 스토리를 허영만 선생님과 함께 궁리하고 짠 사람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얘기했던 가요?

사실, 호준이 형은 내게 호돌이 형입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형을 그렇게 불렀거든요. 자주 만나진 않지만, 내가 사랑하는 형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좀 까칠한 성격이 돼 놔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닥 깍듯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네 가지 없다는 말도 종종 듣는 사람이고요. 그런 제가 형으로 인정하는 거의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형에게 물었던 기억이 나네요. 형, 허 선생님 품에서 떨어져 나와서 책 쓸 생각 없어요? 

형이 그럽니다. 옛날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충분히 좋아. 그런 욕심도 버렸고. 그리고 이렇게 책이 나왔습니다. 아직 보진 않았지만, 충분히 좋은 책입니다. 어떻게 장담하냐고요? 아, 제가 사랑하는 형이라니까요! ^^;(절 못 믿는다면 말고요!)

꼭 사서 읽어보세요! 《허영만 맛있게 잘 쉬었습니다 : 일본의 숨겨진 맛과 온천 그리고 사람 이야기》.



...   
그리고, 지금 얘기엔 숫자를 붙이지 않겠습니다.  
이 남자, 제가 한때 청춘의 시작과 끝이라고 지칭했던, 남자입니다.
18년 전, 1993년 10월32일의 전날, 길에서 세상에 작별을 고했던 남자.
사람들이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고 특별히 지칭하는 날에 영화처럼 바람이 된 남자.

맞습니다. 리버 피닉스입니다. 23살로 모든 것을 끝낸 폭풍 집시. 그를 좋아했는지 당신에게 물어보질 못했습니다. 당신이 있었다면, 리버 피닉스에 대해 블라블라 말을 했을 텐데요. 그리고 뭣보다 당신을 위해 이날 특별하게 만든 나의 커피 '리버 피닉스'를 내려서 줬을 겁니다. 

그 사람, 유작이 곧 선보일지 모른답니다. 피닉스가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영화 <다크 블러드> 필름을 재편집하고 있다네요. 조지 슬루저 감독과 제작사가 의기투합해 이를 추진하면서 리버의 동생인 호아킨 피닉스에게도 도움을 청하고 있답니다. 잘 되면, 내년에 볼 수 있을 거라지만, 유족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어요. 글쎄, 상업적인 목적이 가미됐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이미 찬란했던 그의 영화들이 반짝반짝 존재하는 마당에, 이 영화가 그 영화들 반열에 오를 것 같지는 않은 막연한 생각. 그래도 스크린에서 그의 미공개 유작을 본다면, 아주 살짝 좋을 것 같습니다.

참, 그것 아세요? 리버가 1993년 10월의 마지막 날, 선셋대로에 눕지 않았다면, 리버가 출연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토탈 이클립스>를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캐스팅이 거의 확정적이었으나 그의 급작스런 요절로 사람이 바뀌었다죠.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는 크리스찬 슐레이터가 리버를 대신했고, <토탈 이클립스>, 맞아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대신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가 됐을 겁니다. 디카프리오의 랭보, 충분히 아름다웠고 좋았지만, 랭보 그 자체였을 리버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랭보와 리버, 생각만 해도 짜릿한 조합이죠. 

이건 저만 알고 있었던, 일종의 놀이였는데요. 랭보의 태어남(10월20일)과 죽음(11월10일) 사이, 딱 중간에 리버의 죽음이 있다는 사실. <토탈 이클립스>의 조합을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던 혼자만의 아쉬움! 그러고 보니, 리버 역시 스크린의 시인이었죠. 존재감 자체로 詩가 되는 배우.

작년 오늘은, 스크린으로 <허공에의 질주>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 보니, 호돌이 형이 몇 년 전부터 말했었습니다. "준수야, 언제가 됐든 10월의 마지막 날 리버 피닉스 예약한다." 호돌이 형을 위해 언제든 준비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꼭 주고 싶었던, 꼭 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도 '리버 피닉스'였어요. 하하.

그래요, 오늘. 10월32일의 전날, 잘 지내나요?  

제가 특별히 오늘을 위해 만든, 리버 피닉스 한 잔 하실래요? (레시피는 비밀이에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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