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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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문에서 빠지지 않고 반드시 보는 코너가 있다. 부고란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을 본다. 그 이름에 얽힌 사람들도 자연히 보게 된다. 사라진 한 우주와 그 우주를 둘러싼 세계를 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 아주 잠시 상념에 빠진다. 물론 세상엔 신문 부고란에 나오지 않는 죽음이 더 많다. 그 사실도 철저하게 잊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허투루 다뤄서는 안 된다. 죽음에 대해 성숙하지 태도를 지닌 사회야말로 천박한 사회다. 그렇게 보면 한국 사회가 죽음을 다루는 태도는 아쉬운 점이 많다. 오비추어리(Obituary, 부고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 부고란을 맡고 부고 기사를 쓰는 담당 기자는 대부분 신입이나 경력이 얕다. 부고 기사를 한국 미디어들이 얼마나 소홀하게 다루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쩔 수 없다. 해외의 예를 들어야 겠다. 해외 유력 언론에게 오비추어리는 중요하다. 사내 최고의 기자들이 부도 담당을 한다. 특히, <뉴욕타임스>의 오비추어리는 유명하다. 부고 기사만 모아 책으로 발간할 정도다. <이코노미스트>는 마지막 페이지를 한 사람의 부고 기사에 모두 할애한다.

 

부고 담당 기자는 그래서 엄청난 자료를 갖고 있고,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다루기 위해 다양한 취재원과 접촉한다. 한 우주의 소멸을 다루는데, 예의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요, 다양하고 입체적인 정보를 담아야 하는 것은 필수다. 오비추어리는 죽음을 다루지만 결국 독자들에게 지금의 을 돌아볼 것을 권하는 기사인 것이다. 스티븐 킹은 그래서 부고 기사를 커튼콜에 비유했다. 이런 말까지 덧붙여. “때론 쇼의 최고 장면은 커튼콜이다.”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는 오비추어리다. ‘잭 캘로웨이라는 생소한 작가를 기록한 뭉클한 오비추어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한 만화가를 좇는 세스의 여정은 특별한 것이 없다. (자료를) 찾고, (캘로웨이의 흔적을) 찾아가고, 이를 친구와 나눈다. 대단한 작가도 아닌 캘로웨이를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찾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런데도, 이 작품,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림은 더디게 흘러가고, 빠른 장면 전환도 없다. 천천히 묵묵하게 간다. 여느 만화의 속도와는 다르다. 영화의 롱테이크(길게 찍기)’와도 같다. 그림은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 그리고 정교하다. 한 장면이라도 허투루 그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연출 같다. 한 컷 한 컷에 뭔가 다채롭고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한 컷 한 컷도 그래서 주인공이다. 만화로 세상을 배운 세스를 통해 드러난 만화경도 하나의 사소한 재미다. 덕분에 만화에 대한 메타만화로서도 기능한다.

 

세스의 캘로웨이 찾기는 인간이 지닌 어떤 한 본성을 엿보는 것 같다. 사실 캘로웨이를 찾는 일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 그 이유의 불분명함 때문에 이 만화가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세스 스스로도 자신이 왜 그런지 의아할 때가 있다.

 

캘로를 찾아헤매는 것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가 대체 뭐라고그냥 반짝 뜨다 만 사람을 가지고. 더 중요한 작품을 남긴 사람을 찾아봤어야지. 그게 더 현명한 일이었을 텐데.”(p.125)

 

그럼에도 인간은 어떤 이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이끌림에 따른다. 자료를 찾고, 그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전화번호부를 통해 집 주소를 찾아낼 정도의 열성이다. 세스가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무엇일까. 세스를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나도 궁금했다. 돈 되는 일도 아니요, 그의 작품과 흔적을 찾는다고 세상이 떠들썩할 것 같지도 않다. 그는 그저 발을 떼고 찾을 뿐이다.

 

인생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연속이 아니야.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이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냥 끌려다니는 거야.”(p.155)

 

어쩌면 캘로웨이는 세스에게 좋은 것의 대명사였는지도 모르겠다. ‘쇠락해가는 옛 것들을 보며 사라져가는 과거를 슬퍼하는 세스다. ‘옛날 삶이 더 단순했고,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쉬웠다고 생각하는 세스다. ‘좋은 건 절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세스다. 그 시절의 좋은 것들이 자신의 삶에 계속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로선, 캘로웨이의 작품을 찾는 것이 자신의 삶의 돌파구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과거 속에 가라앉아 허우적대고 있다. 어린 시절에 해답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지나간 시절을 곰곰이 들여다보다가 뭔가 실마리를 찾아내면 현재의 지긋지긋한 문제들도 해결될 것 같다. 5분만 놔둬도 곧바로 우울해지는 게 나란 사람이다. 세상만사 슬프지 않은 게 없다. 안다. 내가 유난 떤다는 것. 하지만 많은 게 날 우울하게 만든다. 여기 이 기름때 낀 숟가락만 해도 그렇다.”(p.41)

 

그가 캐나다를 오가면서 찾은 캘로웨이의 이야기도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특별한 순간이다. 생의 모든 순간을 기적이라 칭할 순 없지만, 가슴이 뛰는 찰나의 순간을 기적이라 칭하지 말란 법도 없다. 캘로웨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세스가 만난 사람들에게서 나는 가슴이 살짝 뛰었다. 세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특별할 것도 없는 그의 이야기가 특별하게 느껴질 어느 순간을 감식한 세스는 아마 행복했던 것 같다. 미처 몰랐던 아들의 야한 만화를 보면서 재밌어하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런 면이 있는지 몰랐다고 말한다. 아들의 몰랐던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어머니의 모습을 향해 세스는 웃고 있다.

 

그는 한 뼘 성장했을 것이다. 물론 성장이 아니어도 좋다. 성장은 한 순간에 훌쩍 크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이 모인 결정체다. 인생은 그러니까,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IT‘S A GOOD LIFE, IF YOU DON’T WEAKEN.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제목이다. 누구에게나 약해지려는 순간, 느닷없이 닥친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순간은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약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 조금 비참한 게 영혼에는 좋아요라는 캘로웨이의 말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또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본다면 알 수 있겠지만, 캘로웨이의 말은 불행하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말없이 수긍하며 사는 삶에 만족했던 캘로웨이의 미소를 상상해볼 수 있다. 나도 세스가 말했던 것처럼 그의 어머니 바이올렛이 고마웠다. 이 책의 제목이자, 세스에게 종종 해주시던 말씀이라고 하셨다. 그 말이 삶을 버티는데 도움이 된다. 이 책, 로고테라피(의미치유)의 기능도 한다. 이런 오비추어리, 긴 여운을 남긴다. 하늘에 있을 캘로웨이도 참 좋아하지 않았을까!

 

아 참, 옆에서 그저 묵묵히 그것을 받아주는, 체트의 존재도 은근 인상 깊다. 그는 친구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고, 자기비하를 일삼는 친구에게 넌지시 넌 괜찮은 놈이야라고 건네준다. 친구의 만화 열광을 묵묵히 들어주다가 그러게느낌이 좋다고 말해주며, 어쩌면 그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캘로웨이 찾기에 나선 친구를 응원해 준다. 좋은 친구의 좋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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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뼈 그리고 버터
개브리엘 해밀턴 지음, 이시아.승영조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요리() 이야기라기에, 솔깃했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먹는 문제라면 신경이 발딱 선다. 그것이 살아내기 위해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펼치면서, 다른 사전 정보 따윈 거의 없었다. 약간 유명한 셰프가 음식이야기를 펼친다는 정도?

 

그래서 어떤 먹을거리의 향연이 펼쳐지면서, 나를 사유하게 만들까. 식품에 대한 어떤 세계와 철학이 펼쳐질까. 궁금했다. 책 두께(528페이지)도 만만치 않지만(심지어 사진 한 장도 없다!), 먹을거리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그 정돈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아뿔싸!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 식품이 아니었다. 요리가 아니었다. 거기엔 구체적인 개별의 인간이 있었다. 개브리엘 해밀턴. 뉴욕 이스트빌리지 프룬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 한 인간이 세계와 긴장을 이루면서 살아낸 삶이 팔팔 끓고 있었다. , 뜨거 뜨거!!!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 나는 이 여자, 아니 사람, 여자사람에 반했다. 책만 놓고 보면 그렇다. 직접 만나면 무서울 것 같다. 섣불리 범접하지 못할 카리스마에 나는 찍소리 못하고, 음식만 먹을 것이다. 아마도. 먼발치에서 그녀를 힐긋 바라보면서. 흠모의 마음을 품고. 저런 멋진 셰프 작가를 눈앞에서 보다니, 오오.

 

피와 뼈 그리고 버터, 유기농, 친환경, 자연산 등의 수식어 따윈 저버리고, 그저 자신의 마당에서 막 자란 채소와 근처 농장에서 갓 잡아와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고기를 적당히 구워 자신이 만든 소스를 버무려 만든, 개성 뚝뚝 떨어지는 개브리엘표 요리다. 글은 생생하게 팔딱거리며, 자신만의 생명을 갖고 움직인다. 스트레이트로 쭉쭉 뻗어나가는데다 한 번씩 날리는 잽은 맞으면 기분이 좋다. 내 눈앞에서 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그만큼 현장감 있고, 돌직구처럼 달려든다. 번역한 사람도 꽤나 공을 들인 것 같다. 어지간하면 이런 생각 들지 않는데, 원서로 읽고 싶어졌다. 아마 평생을 가도 다 읽진 못하겠지만.

 

책은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하다. 자주 웃었고, 종종 뭉클했으며, 가끔 눈물이 찔끔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든 생각은, 이 책, 식품이나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외로웠던 한 사람의 가족 예찬사. 평소의 나 같으면, 부정적인 의미로 이를 다뤘겠지만, 이 책, 다르다. 어린 시절부터 복선처럼 깔린 그녀의 분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요리에 대한 멋지고 풍성한 이야기도 있지만, 이 책을 지배하는 기조는 가족이다. 특히 가족(시월드), 그중에서도 저자가 시어머니와 함께 요리를 하고 그것을 나누는 장면, 압권이다. 그 장면만으로도 그림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녀, 어릴 때부터 어른이었다. 세상엔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돼야하는 아이들이 있다. 개브리엘이 그랬다. 부모의 이혼이 계기였고, 십대의 나이, 주급 74달러 11센트의 주급이 쥐어진 순간부터 그녀, 어른이 됐다. ‘나를 책임지는 사람은 나 말고 또 누가 있는가.’ 그녀를 지켜줄 혹은 옭아맬 신념이 아로새겨졌다. “내가 몸소 벌어서 살아간다면, 나는 내 맘대로 살 거야.”(p.71)

 

열세 살, 초보 요리사가 된 그녀, 공장노동이나 다름없는 케이터링 업체의 요리기계를 거치고, 작가의 길로 잠시 들어섰다가 우연찮게 오너 셰프로 레스토랑을 꾸려간다. 지지고 볶고 고달프게 버텨나가는 그 전쟁 같은 요리사 생활 가운데서도 그녀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시종일관 가족이다. 스쳐지나갈지라도 따뜻하게 던져진 말 한마디, 남자보다 욕을 잘 하는 그녀지만 그 안에 있는 소녀를 단 한 순간이라도 보듬어줄 수 있는 손길 하나. 그녀는 꽤나 많이 터프하고 와일드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녀를 관통하는 건 소녀다. 가족을 배경으로 둔 소녀. 채워질 수 없는 소녀의 아픔이나 외로움이 그 터프함을 뚫고 나온다.

 

그런 그녀에게 알다는 유사 어머니이자 가족이다. 남편이라는 것을 소유하게 된 그녀가 덩달아 만나게 된 사람, 시월드에서 만난 놀라운 인물. 알다와 그녀는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알다의 아들이자 개브리엘의 남편을 매개로 하지 않고, ‘요리라는 언어를 매개로 맺어진다. 그것이 인상적이다. 개브리엘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요리는 워낙 단순하고 순식간에 끝나서 조리법을 말하고 자시고 할 건더기도 없을 정도다. 그녀에게서 조리법을 알아내는 것은 교육적이라기보다 시적인 경험이다.”(p.302)

 

레즈비언이었으나 어쩌다 이탈리아 출신 의사이자 박사 남편을 소유하게 된 그녀.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은 결혼생활이지만,(책 곳곳에 그녀는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녀는 진정 멘탈갑이다. 괴롭고 힘들고 슬프고 외롭고 지치지만, 그녀는 그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견뎌낸다. 부모와의 불화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오해를 털어내는 장면, 오빠의 죽음, 남편과의 심난한 결혼생활. 요리 덕분에 견딘 것도 같지만, 일찍 어른이 된 그녀의 멘탈은 충분히 단련이 된 듯하다. 죽음(자살) 대신 또 다른 죽음이라며 실종을 선택하고 여행을 떠난 나이가 열아홉이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세계와 긴장을 놓지 않으면서 삶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견뎌냈다.

 

개브리엘의 이야기를 통해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이자크 디네센의 말을 자연스레 떠올린 이유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7월의 이탈리아 휴가길, 이젠 더 이상 시월드와 관계를 맺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앞에 그녀는 시월드 별장의 가지를 치고 바다를 바라본다. 시어머니 알다와 함께. 그 장면, 시적이다. 이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으나, 불안하지 않다. 다만, 가족. 그토록 갈망하던 가족이라는 배후. 7월의 이탈리아 3주 여행. 그녀는 지금도 시월드를 방문하면서 알다와 요리를 하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까. 살짝 궁금하다.

 

올리브나무로 둘러싸인 저녁 식탁에 모여 앉아 있는 이탈리아 대가족의 그림은 정말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다. 그러나 그건 내 가족이 아니고, 나는 그들의 가족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아들을 낳아주고, 저녁을 차려주고, 낙엽을 치워주고, 정원을 가꿔주고, 비행기 요금을 대주어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p.511)

 

(책만 보고 단정해버렸지만) 개브리엘 같은 이 멋진 여자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녀만을 위해 요리를 해주는 남자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켈레(개브리엘의 남편) 같은 남자는 아니고 싶다. 슬픔 품은 이토록 매력적인 여자를 외롭게 만들다니. . 개브리엘이 완벽한 식당의 본보기로 여긴다는 그리스 키클라데스 제도의 작은 섬 세리포스의 작은 식당으로 데리고 가야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고, 그물로 무엇을 얼마나 잡든 그것이 저녁 요리로 나오는. 오후 8시에라도 물고기가 떨어지면 그걸로 요리는 끝인 식당. 손님이 양고기를 원하면 양념만 해서 아무런 야채도 없이 달랑 양고기만 내주고, 콩과 감자를 원하면 따로 주문해야 하는. 그곳에.

 

대부분 사람은 그렇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은 많고, 조화로운 날은 좀처럼 없다. 누구나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이 생기고, 누구나 상처를 받고그래도, 개브리엘에게도 그렇고, 우리에겐 그렇다. 요리가 있다. 2013년 신년 첫 책 덕분에, 나는 실컷 웃고 뭉클했으며 찔끔했다. 요리도 잘하고(먹어보진 못하였으나), 글도 잘 쓰는 이 사람. 부럽다. 나는 커피라도 잘 내렸으면 좋겠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내 커피는, 내 요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다. 9, 문을 열고 들어오시라. 당신만을 위한 만찬의 시간이다. 개브리엘, 라 브라바(La Brava).

 

요리는 나로 하여금 이 땅에 발붙이고 살게 하는 것이고, 내게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다.”(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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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가 세상을 바꾼다
이창호.김은국 지음 / 한누리미디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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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지에 대해 최일선에서 바라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과연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끌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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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란 무엇인가 - EBS 교육대기획 초대형 교육 프로젝트
EBS <학교란 무엇인가> 제작팀 엮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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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구시렁거림부터.

이른바 (경제적으로) '쫌' 사는 나라들의 계모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뭔 국제적인 통계만 나온다 싶으면, 들먹이는 게 'OECD 중 몇 위', 이런 거다. 최근 몇 년 간, 우린 줄기차게 들었다. 또 듣고 있다. 인구 10만명 당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율(자살 사망률) 1위. 불명예뿐이랴, 슬프고 아프다. 겉으로 드러나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실체적 진실은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경우가 훨씬 많으리라. 아마도.

 

OECD의 저주(?)는 계속된다.

최근 보도를 보면, 한국 사람들, 여전하다. 죽어라 일'만' 한다. 놀 줄 몰라서, 놀면 죽으니까,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다. 이 사회가 가진 심약한 지점. OECD 나라 중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이 무려 2193시간(2010년). 1등 좋아하는 나라라고 티내고 싶은지, 10년째 1위란다. 참고로, OECD 평균은 1749시간이다. 25% 가량 더 일한다. 미친 거다. 대형마트는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설날에도 '정상'영업한다고. 이걸 떳떳하게 자랑질하듯 붙여놓은 '비정상'의 나라. 쉬파, 이땅엔 개미들만 사나?

 

뭐, 그게 끝이 아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도 최하위권이다. 2009년 기준, 우리나라 공공의료비 기준은 58.2%. 칠레 47.4%, 미국 47.7%, 멕시코 48.3% 등을 제외하고 가장 낮다. OECD 평균은 71.5%. 쉬파, 아프면 죽으라는 거지? 비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죽도록 일한다. 병을 얻는다. 건강보험 혜택도 별 못 받는다. 뒤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나 더 들까?  

곧,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주역(?)이 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느끼는 행복수준 역시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란다. 앞서 얘기한 것만 봐도, 그래, 아플만 하다. 미안하다, 아이들아. 아무리 '세상이 빅엿' 같아도 행복해야 할 아이들마저 이렇다는 건, 이 나라가 미쳤다는 거다. 전체가 병적인 불행감에 싸여 있고, 집단 우울증에 걸려있다는 징표다.

 

이 집단 우울증의 근원은 무엇일까.

물론 하나의 이유로 귀결하고 싶진 않다. 허나, 이것 하나는, 걸고 넘어져야 하겠다. 지금의 교육(이라 쓰고, 사육이라 읽는다). 그것을 대변하는 학교. 학교,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오로지 입시 위주로 세팅돼 돌아가는 그 시스템.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모두를 불행에 몰아넣는 구렁텅이.

 

누군가가 그러더라.

지금의 한국 교육 시스템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고진감래'라고. 빙고. 당신도 생각해 봐라. 중고등학교, 지금은 초등까지 포함해야 할 텐데, '대학만 가면 넌 자유야'라는 감언이설. 대학을 위해 '쫌만 죽도록' 고생하란다. 그러면 세상을 얻을 것인양 꼬드긴다. 그렇게 대학을 가면? 이젠 취업이다. 취업을 위해 또 죽도록 고생하란다. 어딜가도 낙원은 없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데 어디 낙원이 있단 말인가. 

 

이 말도 바꿔야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신분 상승이나 계층 업그레이드가 비교적 쉬웠던 과거엔 틀린 말,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바꿔야 한다. 고생 끝에 병이 온다. 시대에 맞춰 제대로 알려줘야 아이들, 착각하지 않는다. '고통 없이 무엇도 얻을 수 없다(No Pain, No Gain)'. 지금, 이건 나쁜 이데올로기다. 학부모나 교사, 학생 의심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길들여졌고, 지금도 그리 길들인다. 그러니 고통은 당연한 것이고 즐기란다. 지겹도록 들었던 이 말.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개뿔. 고통이라면,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한다.

 

놀지 말고 공부하라.

대수롭지 않게 부모가 아이에게 툭 던지는 이 말. 재미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고, 이 말이 그렇다. 왜냐!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 그것을 대립으로 놓는다. 잘못된 인식을 박아놓는다. 노는 것은 즐거운 것, 공부하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그러니 이 말, 되레 위험하다. 즉, 아이에게 공부는 재미없고 괴롭지만 나중을 위해 참아 내야 하는 고통이 된다. '공부=고통'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 아울러, 가학적인 취향까지 곁들인다. 그 고통, 누가누가 잘 견디나 게임을 한다. 집단적으로 고문 게임에 빠졌다. 이 땅의 교육은, 미.쳤.다!

 

그래, 학교를 다시 생각해보자.   

학교는 근대의 유산이다. 큰 건물 하나에 벌집처럼 똑같이 생긴 방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아이들을 모아놓는다. 교사가 있다. 교육이 이뤄진다. 그리고 거기,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개입한다. 그 교육의 진짜 목적은, 임금 노동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국가가 개입하고 주도한 의무교육의 요체였다. 그것은 수리와 언어 관련 과목이 다른 과목보다 서열상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언어와 수리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임금 노동자로서 요구되는 자질이다. 이른바 '문명'국들에선 하나 같이 비슷한 양상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자질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지만, 학교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더구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학교는 곧, 관계(망)가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해관계가 철저히 얽힌 장소이기도 하다. 학교에 대한 고민,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학교란 무엇인가》는 학생, 교사, 부모 등 그 이해관계자의 고민을 담았다. 교육이 불가능해진 시대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놓을 수는 없다. 임금노동자가 세상의 99%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EBS의 시도.

1년 2개월. 국내외 교육 현장 취재. 학생 200명 심리 실험. 현직 교사 혁신 프로그램 도입. 초·중·고를 포함한 4,000명 학생들의 설문 참여와 다양한 교육 실험. 늦었지만, 당연히 했어야 할 시도다. 우리에게 학교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교육현장에서 길어낸 이야기들은 그동안 자본(기업)과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학교에 대한) 관성에 금을 가게 한다. 다큐로도 방영된 이 책의 미덕이다.

 

우리는 진즉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  

교육이 불가능해지도록 우리는 무력했다.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만당했다. 끌려다녔다. 학교(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면서도, 우리에겐 우리의 시선이 없었다. 책은 그것을 다시 조명한다. 학생, 교사, 학부모, 각자의 관점에서 학교를 고찰한다. 재조명한다. 교육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점수에 목 매단 지금의 교육은 잘못됐다! 

 

사교육은 '배움'이 아니다.

지금의 학교를 무너뜨린 장본인 중의 하나, 사교육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교육'이라고 일컬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건, '사육'이다. 국가에 의해 주도된 학교가 그나마 임금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자본이 은밀하게 주도한 사교육은 '노예'를 길러내기 위한 것이다. 배움(의 즐거움)? 사(교)육에 그런 항목은 없다. 사육하면서, 사육당하는 것들의 권리와 입장을 생각하는 것 봤나? '배움의 역주행'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적절하다.

 

뭐어? 선행학습? 

개뿔이다. '선행'이라는 레떼르를 붙인 것은 앞서 가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자극하기 위함이다. 그저 남들보다 앞서고, 남들을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가치관에 오염된 이들을 현혹하는. 내일을 위한답시고, 오늘을 지운다. 희망? 그전에 절망이 올 뿐이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 까닭이다. 불안을 심어주는 것이 권력자들의 간교한 계략이었다. 책은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불안한 학생들과 부모들의 실태가 드러난다. 불안한 부모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교육과 선행학습! 스스로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게 하라. 책은 그 당연한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되면, 사교육을 지금처럼 거대한 괴물 아닌 한갓 액세서리로 전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교란 무엇인가》의 미덕, 이것으로 일단 충분하다.

사교육의 무쓸모를 자꾸 이야기해야 한다. 학교를 말하면서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분명하다. 악화가 구축한 양화. 그것에 금을 가게한다는 것. 나쁘지 않다. 물론, 칭찬의 역효과를 보여줘 양육에 대해 사유하게 하고, 부모와 자녀의 끈끈한 스킨십과 관계맺기(사랑)가 영재를 만든다는 것 등을 보여준 것도 미덕이다. 책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알고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항목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책 읽기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그것 자체로 목적이고, 더 넓은 세계를 항해하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 또한 좋다. 무엇보다 알아서 훌쩍 크는 아이들. 교육이, 학교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대목. 남의 욕망이나 타인의 삶이 아닌, 나로서, 나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교육이어야 한다. 학교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학교에게 의문을!

자꾸 물어야 한다. 학교야, 넌 무엇이니? 지금의 학교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니? 산업혁명으로 임금 노동자가 탄생하고, 이어 등장한 근대교육, 특히 20세기 이후, 학교는 대인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잘못이다. 고대와 중세, 지금의 학교 형태는 아녔으나, 그것을 빼먹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그것은 이어지고, 그것을 핵심에 뒀다. 관계맺기. 즉, 대인관계를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으로 여겼다. 그래서 후세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도록 했다. 그것은 또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학교, 그것을 잊었다.

회피일까, 망각일까. 글쎄, 그건 모르겠다. 인간관계에 대한 교육을 상실한 지금의 학교는 폭력이 자연스럽게 고착화됐고, 분리하고 구획 짓는 것이 일상화됐다. 관계맺기의 파편화. 학교는 미쳤고, 서로 미워하고 무시한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지옥도, 그것이 학교에서 아이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뭔가 부족하고 답답한 느낌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땅히 배웠어야 할 관계맺기의 중요성과 기술에 대한 배움이 없었으니까. 대인관계 능력, 떨어질 수밖에!

 

나는 늘 이 생각을 한다.

교과 과목 바꾸기. 서열 뒤집기. 임금 노동자 양성을 위해 강조된 근대 교육의 핵심인 수리와 언어 관련 과목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이 아닌, 내가 원하는 과목은 이런 것이다. 사랑, 우정, 이별, 가족 등과 같은 관계맺기를 위한 과목과 더불어, 음악, 미술, 문학, 낭만, 아름다움 등과 같은 인생의 목적을 다룬 과목 앞세우기.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詩와 현재의 중요성(카르페 디엠)을 알려준 키팅 선생님은 극중에서 그랬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하지만 시詩와 미美,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이야." 영국의 교육학자 켄 로빈슨, 무용이나 미술이 주요 과목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학교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 인생의 목적인 무용이나 미술이 수학이나 영어만큼 강조되지 않는지. 그것은 과학으로도 설명된다. 다중지능이론에 의하면, 음악지능이나 신체운동지능, 시각지능 등 모두 다 독립된 인간 고유의 지능이며 동등하게 가치 있는 본성이다. 《학교란 무엇인가》는 말했다. "교육의 목표는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삶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이런 지능과 본성 모두를 훈련시키고 개발해야 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모두가 의사와 검사·변호사가 돼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학교에 의문을 제기하자. 그리고, 학교는 그 물음에 답해야 한다. 왜 지금 학교는 희망이 아닌 절망의 본거지가 돼야 하는가 말이다.

 

나는 학교가, 아프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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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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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달리 보이는 계기는 무엇일까?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런 계기나 순간,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형태로든. 가령,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로, 애써 문제의식을 외면하고 달리던 내가 ‘일단 멈춤’을 택한 것은 그 어느 해 가을날의 햇살 때문이었다. 햇살은 고왔는데, 내 삶은 질척거렸다. 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어떤 간극이 자꾸만 생을 좀먹고 있는 것 같았다. 갑갑했고, 우울했다.


그런 날, 내 목을 타고 내려간 커피 한 잔. 어쩌면 뜻밖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곧, 나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됐다. 관성처럼 바라보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됐다. 달리 보였고, 달리 보게 됐다. 내 생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붕대를 벗어던지기로 했다. 허위로 날 지탱하던 직업을 그만 뒀고, 나는 커피를 만들기로 문득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만드는 남자가 됐다. 최고의 커피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고의 커피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나는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커피를 만드는 남자가 됐다. 커피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나는, 에스프레소나 인스턴트커피가 아닌, 드립커피를 내리는 속도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간극은 좁혀졌고, 나는 이전보다 좀 더 행복한 사람이 됐다. 나의 원래 속도를 찾았다. 커피, 아 템포(본래의 빠르기로).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그가 세상을 달리 보게 된 첫 계기는 질병의 역습이었다. 서른네 살의 유럽여행, 심각한 신경장애 증상을 유발하는 미확인 바이러스성 또는 세균성 병원체가 그를 덮쳤다. 자율신경계가 망가졌고, 모든 신체기능들이 고장 났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순간순간을 참고 이겨내는 것밖에 없었다. 질병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앗아갔다. 행간을 보건대, 절망으로 도배된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세상이 도래한다. 제비꽃 화분에서 일어난 뜻밖의 사건. 달팽이가 그에게 왔다.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 느림보 생명체가 느닷없이 다가왔다. 세상 모든 속도가 급하게 멈춘 그에게, 달팽이는 유일하게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였다. 두 생명은 의기투합했다. 《달팽이 안단테》는 그러니까, 두 생물의 동거의 기록이다.


흥미로웠다. 세상의 주류 속도에서 생래적 혹은 불가항력의 사고로 이탈한 두 생명의 교류와 교감. 물론 저자의 일방적인 관찰처럼 보이지만, 내겐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생명은 눈을 맞추고 속도를 맞추는 순간, 서로가 영향을 미치고 받는다.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생명들이 형성하는 생물 환경. 생물 환경은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생물과 함께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곧, ‘공진화(coevolution)’인 셈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달팽이의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나와 관계된 인간 세계는 반대로 점점 더 멀어졌다. 나와 같은 종은 너무 크고 너무 경솔하며 너무 혼란스러웠다.”(p.55) 


그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됐다. 어느 날부터는 방문객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는 데 몰두하는 자신도 발견한다. 달팽이와의 동거와 관찰이 야기한 새로운 시선이다.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녀석의 호기심과 우아함은 나를 평화와 은자의 세계로 점점 더 가까이 이끌었다.”(p.57)


내게 커피가 그랬다. 커피의 우아한 맛은 나를 평화의 상태로 이끌었고, 커피의 역사와 유통을 통해 나는 세상의 불공정한 교역실태를 새삼 깨달았다. 커피의 다양한 맛과 다양한 변수에 의한 변덕(?)은 사소함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뭣보다 나는 내 생에 맞는 속도를 찾았다. 모두 똑같은 시간을 살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생에 묻은 시간의 결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책을 보면서, 그에게 있어 달팽이가 내겐 곧 커피임을 알았다. 

읽는 내내, 그에게 이입이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질병이 바꾼 저자의 삶은 더욱 격했을 터이다. 삶이라는 질병이 내게도 틈입했지만, 그는 거기에 바이러스의 침공까지 받았으니, 오죽했겠는가. 과거나 지금이나 존재하긴 매 한가지이지만, 그에게 닥친 질병의 무게는 그를 더 고립상태로 이끌었던 것 같다. 그는 종종 그것을 토로한다. 누군가 떠나고 또 누군가는 변하는 상황에서 고립은 그를 더욱 깊이 병들게 하기도 했단다.


그런 상황에서 달팽이는 구원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작고 사소한 달팽이라는 생명이 주는 영향력이었다. 


“우리 달팽이는 내 영혼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우리 둘은 온전히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고립감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었다.”(p.152)


그것에서 나는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고 말한,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을 떠올렸다. 저자는 달팽이(들)가 아니었으면 버텨내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과 다른 생명체를 관찰하는 것은 그것의 삶을 돌아보는 일. 그것은 관찰자인 저자에게도 삶의 목적을 부여했다. 달팽이가 작고 느리다고 멸시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오만이다. 다윈이 자신의 일기에 썼다는 한 다짐이 떠올랐다. 어떤 생명체를 논하든, 하등하거나 고등하다고 쓰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


저자는 되레 달팽이의 존재감이 인간보다 더 낫다고 주장한다. 달팽이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이리라. 달팽이는 주로 죽은 것들을 먹어치우고 배설물로 분비하여 토양에 영양분을 되돌려주고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반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존재다. 오히려 해만 끼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과 다른 생명에 대한 오만으로 똘똘 뭉친 채.


달팽이를 다시 생각했다. 속도를 다시 돌아봤다. 이 책, 달팽이의 속도에 대한 찬양복음서 같다. 


“달팽이의 타고난 느린 걸음걸이와 고독한 삶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헤매던 나를 인간세계를 넘어선 더 큰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달팽이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 아주 작은 존재가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p.181)


그것은 아울러 너무 급하게, 너무 빠르게, 관성처럼 달려온 삶이 불러온 파열음을 알아채자는 호소다. 그런 파열음에서 비롯한 균열이 우리 세계와 자신의 삶을 갉아먹지 않도록 하자는 성찰적 호소. 느닷없이 다가온 질병에 이어 달팽이는 저자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꿨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독자는 달팽이가 주는 사유에 동참할 수 있다. 암세포의 속도보다 달팽이의 속도가 인류 본연의 것임을 자각할 수도 있다.


작가는 한없이 늦춰진 속도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음을 입증했다. 《달팽이 안단테》, 그것의 명백한 증거다. 커피와 함께 한 달팽이의 속도. 나는 내게 맞는 속도, 나만의 속도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론 역주행도 하지만, 그렇다고 '건강하게 이 사회에 썩어 들어가라'는 주술을 거부할 순 없다. 그것이 내겐 '달팽이 안단테'이기도 하니까.  


주류 속도와는 명백히 다른 빠르기. 그래도 나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아무렴, 세상이 달리 보이거나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일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당신이라는 사람만을 위해 내리는 나의 커피, 아마도 우연이 빚은 사고(?)일 것이다. 《달팽이 안단테》를 만난 것도 마찬가지. 죽기 전 다시 들춰보고, 살아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축복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휘말릴 수 있는 우연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1903,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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