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마 21:23-32 뉘우치고 갔으니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일렀습니다.(28절 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맏아들이 시원스럽게 대답했습니다.(29절 상) “아버지, 가겠나이다.” 맏아들은 연장을 챙겨들고 포도원으로 향했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을 대견스러워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도 일렀습니다.(30절 상)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둘째 아들이 짜증을 냈습니다.(30절 하) “싫소이다.” 둘째 아들은 씩씩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아들이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거역하면 아버지는 엄청난 수치를 당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안타까우셨습니다. 언제 철이 들지 걱정이었습니다.

맏아들이 포도원에 가고 있었습니다. 맏아들 친구들이 원두막에 둘러앉아 아침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맏아들을 보고 말했습니다. “여보게, 어디가나?” “포도원에 일하러 간다네.” 친구들이 제안했습니다. “자네는 허구한 날 소처럼 일만 하는가. 이리 와서 우리와 한 잔 하세나.” “미안하지만 나는 포도원에 가야 한다네.” 친구들이 간청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딱 한 잔만 하게나. 술 한 잔 마시면 일도 더 잘 되지 않는가? 싫으면 말고.” 맏아들이 망설였습니다. “그래, 그럼 딱 한 잔만 할까.” 맏아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습니다. 한 잔만 마시려 했으나 술은 마실수록 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석 잔이 되고 이렇게 계속되다 보니 정신이 몽롱해졌습니다. 맏아들은 원두막에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맏아들은 포도원에 가겠다고 말해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개울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투망에서 고기를 건지며 신나했지만 둘째의 마음은 영 편치 않았습니다. 자꾸만 아버지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요즘 아버지가 부쩍 쇠약해진 것도 같았습니다. 둘째는 도저히 시시덕거릴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자네, 고기를 잡다 말고 어딜 가려고?” “응, 나 급한 볼 일이 있어서.” 친구들은 둘째가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그럼 빨리 다녀오게나. 우리가 매운탕 맛있게 끓여 노을 테니.” 둘째는 잘못을 쏜살같이 포도원을 향했습니다. 둘째는 포도원에 가지 않겠다고 거역해놓고 뉘우치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31절 상)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종교지도자들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31절 중) “둘째 아들이니 이다.” 맏아들은 포도원에 일하러 가겠다고 대답해놓고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일하지 않겠다고 거역해놓고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맏아들은 말로는 순종하고 행동으로는 불순종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말로는 불순종하고 행동으로는 순종했습니다. 두 아들 다 불순종했지만 그나마 둘째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31절 하-32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들과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에게 있는 맏아들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소문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사자인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하러 가겠다고 말해놓고 포도원에 가지 않은 맏아들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맏아들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교회에서는 경건한 신앙인인척 위장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는 대형사건이 터질 때마다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끼여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 사람에게 있는 둘째 아들은 세리들과 창녀들을 가리킵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은 율법을 어긴 죄인들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행동으로는 죄를 지었으나, 세례자 요한에게 찾아가 회개의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이 말씀할 때에 눈물을 흘리며 아멘 하였습니다. 그들은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거역해놓고 뉘우치고 포도원에 간 둘째 아들과 같습니다. 오늘날 둘째 아들은 새 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새 교인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쏙쏙 받아들여 신앙이 날마다 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습관적으로 드리다 보니 신앙이 정체되어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지만 고여 있는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주범은 맏아들을 자처하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맏아들처럼 일하러 가겠다고 대답해놓고 딴 짓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종교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을 잘 믿는 척 하면서 뒤로는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둘째 아들처럼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거역해놓고 뉘우치고 가겠습니까? 세리들과 창녀들처럼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자랑하는 바리새인보다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입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맏아들처럼 입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뉘우치고 둘째 아들처럼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유다처럼 잘못을 후회하고 자살할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깊이 뉘우치고 다시 쓰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기를 바라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 20:1-16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요즘 포도 철입니다. 시장에 나가면 포도가 천지네요. 포도는 전 세계 과일 생산량의 3분의 1일 차지한다고 합니다. 과일 가운데 압도적인 1위죠. 포도에는 당분(포도당과 과당)이 많이 들어있어 피로 회복에 좋고, 비타민이 풍부해서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한다고 합니다. 포도는 BC 3천년 무렵부터 재배했다고 하는데 성경을 보면 노아가 대홍수가 일어난 이후에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말씀합니다.(창9:20) 포도의 주요 생산국은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인데 이스라엘에서도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성경에서는 포도나무를 많이 언급하는데 포도원을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사용하였고(사5:1-7),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11)

예수님은 ‘천국은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일꾼)들을 고용하려고 집을 나간 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1절)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6시)에 장터로 나갔습니다. 장터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노동자들과 일손을 구하려는 주인들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인력시장입니다. 주인은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일당을 합의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12시간 일하고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일꾼들이 포도원에 가보니 포도가 탐스럽게 열렸습니다. 일꾼들은 아이를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포도를 땄습니다. 햇살은 따갑고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습니다. 포도는 익어 가는데 허리를 펴지 않고 작업을 해도 일이 더뎠습니다. 아무래도 일꾼들을 더 데려와야 할 것 같았습니다.

주인은 일꾼들을 더 고용하려고 제 삼시(아침 9시)에 장터로 나갔습니다. 일감을 구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제안했습니다.(4절)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상당하게 주리라.” 주인은 일꾼들에게 상당하게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일꾼들은 일을 늦게 시작했으니 일당을 다 못 받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일꾼들을 더 투입했지만 일손이 부족했습니다. 포도는 시간을 잘 맞추어 따야지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지 늦으면 상품 가치가 떨어졌습니다.

주인은 제 육시(정오)와 제 구시(오후 3시)에 장터로 나가 일꾼들을 데려왔습니다. 주인은 이들에게도 상당하게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2시에 온 일꾼들은 일당의 절반쯤 받겠거니 생각하였고, 오후 3시에 온 일꾼들은 일당의 4분의 1이라도 받아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려고 하는데 작업량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일과가 오후 6시에 끝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습니다. 주인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주인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제 11시(오후 5시)에 장터로 나갔습니다. 아직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빈둥거리는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물었습니다.(7절 상)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일꾼들이 푸념했습니다.(7절 중)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 이다.” 주인이 제안했습니다.(7절 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주인은 얼마를 주겠다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일꾼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못하니 일당은 고사하고 상품 가치가 없는 포도라도 얻어다 처자식의 주린 배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후 6시가 되었습니다. 일이 끝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일꾼들은 일을 마무리하고 일당을 받으려고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굶주리지 않게 하기 위해 일당을 당일에 지급했습니다.(레19:13,신24:14-15) 일꾼들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옷은 소금기가 배여 허옜습니다. 허리는 끊어질 듯이 아팠고 다리는 휘청거렸습니다. 그래도 배고프다고 보채는 자식들을 먹일 생각을 하니 참을 만 했습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 지시했습니다.(8절)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주인은 관리인에게 나중에 온 일꾼들부터 일당을 지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청지기는 오후 5시에 온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품가치가 없는 포도송이라도 받으면 감지덕지할 판이었는데 온전한 하루치 일당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무언가 착오가 있지 않냐 는 표정을 지었더니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들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주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부리나케 달아났습니다.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에게 일당을 주었기 때문에 먼저 온 일꾼들은 은근히 더 받을 걸로 기대했습니다. 청지기는 오후 3시에 온 일꾼들에게도, 12시에 온 일꾼들에게도, 오전 9시에 온 일꾼들에게도 그리고 오전 6시에 온 일꾼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먼저 온 일꾼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거칠게 항의했습니다.(12절)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일꾼들은 일감을 준 주인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일꾼들은 1시간 일한 사람들과, 3시간 일한 사람들과, 6시간 일한 사람들과, 9시간 일한 사람들과, 12시간 일한 사람들이 똑같이 받을 수는 없다고 항의하였습니다. 이들의 불만이 타당해 보였습니다. 일한 시간이 다른데 일당을 똑같이 주는 것은 경제논리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인이 이들 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13-15절)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한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일꾼들은 거칠게 항의했지만 주인은 차분하게 대꾸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일꾼들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일꾼들이 옳다면 주인이 틀린 것인데 그렇다고 주인이 틀린 것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당은 한 데나리온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일꾼들에게 약속한 일당을 주었습니다. 하루 근무시간을 채웠든 채우지 못했든 똑같은 일당을 주었습니다. 근무시간을 채운 일꾼들에게는 정당한 일당을 주었고 채우지 못한 일꾼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서 주었습니다. 근무시간을 채우지 못한 일꾼들이 일당을 받았다고 근무시간을 채운 일꾼들이 일당 이상을 받으려는 것은 욕심이었습니다. 주인이 자비를 베풀었다고 일꾼들이 왈가왈부할 사안은 아니었습니다. 일꾼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일당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일꾼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일꾼들은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은 주인의 호의로 일당을 받았습니다. 포도원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은 서성거릴 뿐이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온 일꾼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고 나중에 온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들도 이방인들입니다. 나중 온 일꾼들입니다. 일당은 이른 아침에 일하러 온 유대인들만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나중에 온 우리들을 불쌍히 보고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우리는 일당을 받을 만한 아무 자격 아니 구원 받을 자격도 없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서 우리는 일당을 받을 자격 아니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공로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12년 믿었든, 9년 믿었든, 6년 믿었든, 3년 믿었든 그리고 1년 믿었든 똑같은 일당 아니 구원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일찍 예수님을 믿었다고 나중에 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구원받는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주인이 인자하기 때문에 후하게 베푸시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12살짜리, 9살짜리, 6살짜리, 3살짜리, 1살짜리 자녀가 있다면 누가 더 예쁠까요? 똑같이 예쁘지 않습니까? 이 아이는 이래서 예쁘고, 저 아이는 저래서 예쁘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믿었든 임종 전에 믿었든 똑같이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온 자든 나중 온 자든 똑같이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 18:21-35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우리가 살다보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평생 지워지지 아픔으로 남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피부가 곪아가면서 주변을 아프게 하듯이 그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 집니다. 상처를 방치한다면 살이 썩어가듯이 그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인생이 불행해 집니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어떻게 하면 치료할 수 있을까요? 유대교 랍비들은 다른 사람이 상처를 주면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몇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21절)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자신이 랍비들보다 관대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파격적인 대답을 하셨습니다.(22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 곱하기 일흔 번은 490번입니다. 예수님은 490 번을 용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생생한 표현을 위해서 과장법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무한대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23-34절) 예수님은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결산을 해보니 만 달란트가 부족했습니다. 만 달란트는 계산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만 달란트를 봉헌했고(대상29:4), 하만이 유대인들을 멸족시키기 위해 바사 왕에게 만 달란트를 바쳤습니다.(에3:9) 성경배경주석을 보면 은 일 달란트는 노동자의 6천 일분 일당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일 만 달란트는 하루 일당의 6천 만 배가 되니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신문을 보니 일본 우체국 여직원이 창구 단말기를 조작해 92년부터 얼마 전까지 2억 엔을 횡령했다고 합니다. 1엔을 십 원으로 계산하면 20억 원 정도가 됩니다. 아마 이 종도 돈을 담당했었나 봅니다. 그 종이  돈을 차용했던지 횡령했던지 했나 봅니다. 임금은 그 종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고대사회는 돈을 갚기 위해 재산도 팔았고 가족도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갚겠다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놓아 주며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임금은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 종이 나가서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습니다. 일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일당을 5만 원이라 계산하면 5백만 원이 됩니다. 그 종은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습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서 갚겠다고 간구했으나 그 종은 빚을 갚으라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동료는 재산을 팔거나 친척이 갚아주지 않는 한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금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을 탕감해 주었으나 그 종은 마음만 먹으면 갚을 수 있는 금액을 갚으라고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종은 무자비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그 사실을 임금에게 알렸습니다. 임금은 노했습니다. 그 종은 더 큰 빚을 탕감 받았으나 다른 동료의 더 작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그 종을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며 호통을 쳤습니다. 임금은 그 종이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겼습니다. 그 종은 그 돈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평생 감옥에서 썩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종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적은 금액을 받아내려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을 갚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종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가 훔친 고기를 입에 물고 강을 건너다 강물 속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고기를 빼앗으려고 물어뜯으려다 고기 조각을 물속에 빠뜨렸던 것처럼 동료에게 적은 빚을 받아내려다 자신의 많은 빚을 갚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이셨습니다.(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2절을 통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 14-15절을 통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종들은 우리들을 가리키고, 결산은 최후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임금이 빚을 탕감해 주었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2장 1절을 통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 데나리온 빚진 다른 사람에게 빚을 받아내려 합니다. 우리는 더 큰 빚을 탕감 받고도 더 큰 죄를 용서받고도 더 작은 빚을 받으려 합니다. 더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남을 칭찬하기 보다는 험담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세워주기 보다는 깎아내리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더 작은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더 큰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심과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줘야 합니다. 우리가 더 큰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작은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KBS 1TV에 [아름다운 용서]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한 순간의 잘못으로 악화된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의뢰인이 용서를 구하면 초청인이 용서를 해줌으로서 관계를 회복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 중 <두 번의 배신>이란 내용이 있었습니다. 의뢰인이 아버지처럼 따르던 교회 장로에게 1억 5천만 원을 빌렸으나 사업이 부도나자 연락을 끊어버렸습니다. 장로의 가족들은 거금을 빌려주고 딸의 학원비를 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의뢰인은 장로에게 실망을 끼쳤다며 죄책감에 빠졌고 장로의 가족들은 의뢰인이 사기를 쳤다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10년이 지나 의뢰인이 용서를 구하러 나타나고 장로는 어이없어 합니다. 의뢰인이 진심으로 사과하자 장로는 용서를 결심합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아름답게 퇴장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죄스러워 해서도 그렇다고 남을 미워해서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죄를 지었다면 용서를 빌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해야 하고 남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용서를 하는 아량을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더 큰 죄를 용서해줬기 때문에 나는 더 작은 죄를 용서해 주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 18:15-20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리리라

사람이 살다보면 크고 작은 일로 갈등을 겪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갈등이 일어나는데 처음에는 말싸움을 하다 감정이 격해지면 폭력을 행사하고 사태가 장기화되면 별거에 들어가고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면 이혼으로까지 치닫게 됩니다. 8월 27일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올 상반기 동안 혼인은 16만 8000 건으로 작년보다 감소한데 비해 이혼은 6만 5100 건으로 작년보다 증가했습니다. 이혼율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4년째 감소했는데 올해는 증가세로 돌아설 전망입니다./ 직장인들도 업무보다는 갈등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고 합니다. 갈등이 일어나다 보니 직장생활의 성공은 능력보다 인간관계에 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갈등을 줄이려면 커뮤니케이션을 잘 해야 하는데 갈등의 주체인 ‘나’의 의견도 솔직하게 말하고, 상대방인 ‘너’의 의견도 귀담아 들어주고, 갈등이 일어나는 ‘주제’와 ‘상황’을 서로 간에 이해한다면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갈등은 교인 간에도 일어나는데 어떤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한 형제와 한 자매가 된 교인끼리 상처를 주고받는다면 개인도 마음이 아프지만 교회 공동체도 난감해 집니다. 예수님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먼저 피해를 당한 교인이 가해를 한 교인에게 찾아가서 단 둘이 대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절 상반 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당하면 되갚아줄려고 벼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가해자를 욕하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해를 당했다고 복수를 다짐하거나 험담하며 돌아다니지 말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가서 단 둘이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해자에게 마음을 풀어주고 가해자에게 잘못을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갈등이 일어나면 묻어두기 보다 해결하길 바라십니다. 피해자의 항의를 듣고 가해자가 사과를 한다면 예수님은 형제를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하다면 이 단계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가해자에게 다른 교인 한 두 사람을 데리고 찾아가서 모든 사실을 밝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우리는 피해를 당하면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교인간의 갈등을 원만히 조정하기 위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누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두세 사람이 증언해야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신19:15) 우리 속담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혜로운 조언으로 화해를 주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교인간의 갈등을 비밀에 부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갈등이 확산되기 보다는 수습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가해자가 화해를 하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상반 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갈등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가 나서게 됩니다. 교회는 가해자가 잘못을 회개하고 신앙을 회복하도록 주선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중재도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중재를 거부한다면 출교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하반 절)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입니다. 세리는 로마제국의 지시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세리와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 교인과는 관계를 단절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음행을 저지르는 교인은 공동체에서 쫓아내라고 말했고(고전5:13), 편지에 적어 보낸 말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교인과 사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살후3:14) 그가 형제이기에 회개하기를 바라서이지 원수처럼 멀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결정은 천국에서도 유효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매는 것’은 구속하거나 투옥하는 것 다시 말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가리키고, ‘푸는 것’은 자유를 주거나 석방하는 것 다시 말해 무죄판결을 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징계를 받으면 천국에서도 징계가 유효하고 교회에서 용서를 받으면 천국에서도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징계를 하려면 사람의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잘못을 저지른 교인의 유익을 위해서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징계를 당한 교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20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구약 율법에서는 판결이 내려지면 두세 사람의 증인이 법을 시행했지만(신17:7),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징계를 당한 교인이 회복되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도하면 예수님이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기도하는 곳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인 간에 화목하게 지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은 형제에게 다시 말해 교인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먼저 화해하고 나서 나중에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인과 화해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교인들과 화목하게 지내길 바라십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서로 싸운다면 부모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가 서로 우애 있게 지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저질러 하나님과 사이가 벌어졌을 때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교인들과 싸우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교인을 한 형제와 한 자매로 알고 사이좋게 지내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 6:24-34 그의 나라와 의를

브랜드컨설팅 전문업체인 브랜드 38 연구소가 올해 5월 20일부터 30일까지 2000여명의 연구소 패널을 대상으로 광고 모델이 광고에 미치는 영향력(호감, 신뢰, 구매욕구) 등을 분석한 결과 빅뱅(5명의 멤버로 구성된 국내가수)의 배스킨라빈스 31 광고가 스타의 광고 효과를 입증하는 SMBI(Star Marketing Brand Index) 지수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조선일보 2008년 6월 23일) 그렇다면 지금까지 SMBI 지수가 가장 높았던 광고는 무엇일까요? 2001년 12월 29일부터 2002년 1월 2일까지 5일 동안 방영된 김정은의 BC카드 광고라고 합니다. 탤런트 김정은이 빨간 산타클로스 차림으로 나와 귀엽고 간절하게 “여러분~ 여러분~모두 부자되세요~!! 꼭이요 당신의 경제를 생각하는 BC카드입니다. BC카드 여러분 부자되세요~”([출처] BC카드 김정은- 2002|작성자 김철희) 이 광고의 영향으로 새해의 덕담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에서 “부자되세요”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죽는 줄도 모르고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 저녁 늦게까지 일합니다. 정당하게 벌기도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부정하게 벌려고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자 병에 중독됐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그 당시는 너무나 가난하여 오늘 먹을 양식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라고 가르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내일까지 쌓아놓고 먹을 양식은 고사하고 오늘 당장 허기를 채울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사막에서 살다보니 실컷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물배라고 채운다면 행복했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옷이라고는 달랑 속옷과 겉옷 한 벌뿐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제비를 뽑아 옷을 나눠가졌을까요.(마27:35)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오늘 먹을 양식과 오늘 마실 물과 오늘 입을 두벌 옷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목표를 먹고 마시고 입는 것-현세적인 만족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병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새는 봄에 씨를 뿌리지도 않고, 여름에 땀을 흘려서 가꾸지도 않고, 가을에 추수하여 창고에 쌓아놓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먹여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새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었다는 기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새가 농부들이 뿌려놓은 농약을 먹고 죽거나, 사냥꾼들이 쏜 총에 맞아 죽기는 하지만 굶어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갓 새조차도 하나님께서 먹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우리를 먹이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병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들에 피어있는 한 송이 백합화를 살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29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는 예쁘게 차려 입으려고 꾸미지도 않고,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온갖 명을 차려 입은 솔로몬 왕보다 아름답게 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공미가 아니라 자연미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한낱 들풀도 아름답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를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자 병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와 같은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오늘 먹을 양식이 풍족합니다. 라면을 먹느냐 피자를 먹느냐가 다르지 내일까지 먹을 양식이 냉장고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오늘 마실 물이 넉넉히 있습니다. 냉수를 마시느냐 델몬트 주스를 마시느냐가 다르지 내일까지 마실 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오늘 입을 옷이 쌓여 있습니다. 시장표를 입느냐 명품을 입느냐가 다르지 사시사철 입을 옷이 옷장에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현세적인 성공에 집착하느라 40대와 50대의 여성대비 남성사망률이 세계 1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현세적인 성공에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32절)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무엇에 두어야 할까요? 현세적인 것보다 한 차원 높은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합니다.(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처럼 인생의 목표를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문제에 두지 말고, 우리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에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문제)을 해결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문제에 집착하면 어느 정도 만족을 이룰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에 두면 하나님을 얻을 수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어떤 호화 유람선이 암초에 걸려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선원들은 승객들을 구조선에 태웠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석을 가지러 선실로 갔습니다. 이 사람은 물건을 찾아 나오다가 혹시나 싶어 다른 선실도 들어가 봤습니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보석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선실을 돌며 값비싼 물건을 한 자루나 챙겨서 갑판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구조선은 이미 떠났고 배는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보석과 함께 차가운 바다로 가라앉았습니다. 이 사람은 눈앞의 보석을 찾느라 아까운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승객들은 보석을 버리고 귀중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처럼 보석을 찾으려고 생명을 잃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승객들처럼 보석보다 생명을 구하겠습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집착하면 하나님을 잃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돼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