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8:21-35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우리가 살다보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평생 지워지지 아픔으로 남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피부가 곪아가면서 주변을 아프게 하듯이 그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 집니다. 상처를 방치한다면 살이 썩어가듯이 그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인생이 불행해 집니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어떻게 하면 치료할 수 있을까요? 유대교 랍비들은 다른 사람이 상처를 주면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몇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21절)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자신이 랍비들보다 관대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파격적인 대답을 하셨습니다.(22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 곱하기 일흔 번은 490번입니다. 예수님은 490 번을 용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생생한 표현을 위해서 과장법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무한대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23-34절) 예수님은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결산을 해보니 만 달란트가 부족했습니다. 만 달란트는 계산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만 달란트를 봉헌했고(대상29:4), 하만이 유대인들을 멸족시키기 위해 바사 왕에게 만 달란트를 바쳤습니다.(에3:9) 성경배경주석을 보면 은 일 달란트는 노동자의 6천 일분 일당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일 만 달란트는 하루 일당의 6천 만 배가 되니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신문을 보니 일본 우체국 여직원이 창구 단말기를 조작해 92년부터 얼마 전까지 2억 엔을 횡령했다고 합니다. 1엔을 십 원으로 계산하면 20억 원 정도가 됩니다. 아마 이 종도 돈을 담당했었나 봅니다. 그 종이  돈을 차용했던지 횡령했던지 했나 봅니다. 임금은 그 종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고대사회는 돈을 갚기 위해 재산도 팔았고 가족도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갚겠다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놓아 주며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임금은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 종이 나가서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습니다. 일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일당을 5만 원이라 계산하면 5백만 원이 됩니다. 그 종은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습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서 갚겠다고 간구했으나 그 종은 빚을 갚으라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동료는 재산을 팔거나 친척이 갚아주지 않는 한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금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을 탕감해 주었으나 그 종은 마음만 먹으면 갚을 수 있는 금액을 갚으라고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종은 무자비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그 사실을 임금에게 알렸습니다. 임금은 노했습니다. 그 종은 더 큰 빚을 탕감 받았으나 다른 동료의 더 작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그 종을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며 호통을 쳤습니다. 임금은 그 종이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겼습니다. 그 종은 그 돈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평생 감옥에서 썩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종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적은 금액을 받아내려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을 갚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종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가 훔친 고기를 입에 물고 강을 건너다 강물 속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고기를 빼앗으려고 물어뜯으려다 고기 조각을 물속에 빠뜨렸던 것처럼 동료에게 적은 빚을 받아내려다 자신의 많은 빚을 갚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이셨습니다.(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2절을 통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 14-15절을 통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종들은 우리들을 가리키고, 결산은 최후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임금이 빚을 탕감해 주었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2장 1절을 통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 데나리온 빚진 다른 사람에게 빚을 받아내려 합니다. 우리는 더 큰 빚을 탕감 받고도 더 큰 죄를 용서받고도 더 작은 빚을 받으려 합니다. 더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남을 칭찬하기 보다는 험담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세워주기 보다는 깎아내리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더 작은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더 큰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심과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줘야 합니다. 우리가 더 큰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작은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KBS 1TV에 [아름다운 용서]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한 순간의 잘못으로 악화된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의뢰인이 용서를 구하면 초청인이 용서를 해줌으로서 관계를 회복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 중 <두 번의 배신>이란 내용이 있었습니다. 의뢰인이 아버지처럼 따르던 교회 장로에게 1억 5천만 원을 빌렸으나 사업이 부도나자 연락을 끊어버렸습니다. 장로의 가족들은 거금을 빌려주고 딸의 학원비를 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의뢰인은 장로에게 실망을 끼쳤다며 죄책감에 빠졌고 장로의 가족들은 의뢰인이 사기를 쳤다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10년이 지나 의뢰인이 용서를 구하러 나타나고 장로는 어이없어 합니다. 의뢰인이 진심으로 사과하자 장로는 용서를 결심합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아름답게 퇴장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죄스러워 해서도 그렇다고 남을 미워해서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죄를 지었다면 용서를 빌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해야 하고 남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용서를 하는 아량을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더 큰 죄를 용서해줬기 때문에 나는 더 작은 죄를 용서해 주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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