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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평점 :
사랑을 얘기할 때, 그 사람의 과거사는 얼만큼의 중요성을 지닐까?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 위해 나의 과거를 꼭 설명해야만 하는가. 영화 <화차>처럼 작정하고 남편을 속이려고 작정했거나, 혹은 범죄자라서 전자발찌를 차고 있는걸 숨기는 정도가 아니라면 지금의 내 모습이 진심이라는 가정하에 어느 정도 나만의 비밀은 가질 수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난 내 입이 근질근질해서 묻지 않아도 짝꿍이한테 미주알 고주알 오만 얘기를 다 하고야 말지만 꼭 지켜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지나간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말 것! 오빠는 모든 걸 이해해줄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사랑 앞에 그런 이해까지 바랄 순 없더라. 그러니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어느 정도의 비밀은 필수이지 않겠는가.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는 40년도 넘게 함께 산 아내가 죽은 후, 힘든 일상을 살고 있던 아서 페퍼가 우연히 아내의 참charm 팔찌를 발견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아서 페퍼는 이른바 매우매우 가정적인 남자였다. 아내밖에 모르고 살던 그에게 아내의 죽음은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아마 몸의 반쪽이 뚝 떨어져나간 듯한 기분이었으리라. 그동안 아내와는 아무런 비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녀에게 이런 비밀스럽고도 묵직한 팔찌가 있었다니, 왜 아내는 그간 그에게 팔찌에 대해서 한번도 말하지 않은걸까. 코끼리, 책, 호랑이, 골무, 하트 등 다양한 참으로 구성된 팔찌는 아내가 소중히 간직해 온 듯 하트 상자에 고이 포장되어 있었고, 특별한 사연이 있어보인다. 그 중 코끼리 모양의 참에 알 수 없는 숫자가 조그맣게 적혀있다. 이 숫자가 뭘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아서페퍼의 호기심 여행은 시작된다.
아내의 숨겨진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평소 집에서 벗어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집돌이 아서페퍼는 점점 대담한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안정되고 규칙적인 생활에서 기쁨을 느끼던 아서 페퍼에게 자꾸 변수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내와 알고 지냈다는 사람을 찾아갔다가 한낮의 정원에서 호랑이를 만나 죽을 뻔 하기도 하고, 카페에서 말을 걸어오는 낯선 이에게 자기가 생각해도 좀 멋진 조언을 해주고선 흐뭇해하기도 한다. 평소의 자기라면 생각지도 못할 다양한 경험을 아내의 비밀을 찾는 과정에서 하게 된 것이다. 마치 평범한 사람이 어떤 특별한 일 때문에 엄청난 모험에 휘말리게 되는 스토리처럼 말이다. 그 모험 속에서 알게 되는 미리엄의 모습은 도저히 그가 알던 그녀가 아닌 것만 같다.
그녀는 왜 그에게 얘기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대체 누구인가.
아서 페퍼는 아내로 인해 규칙적으로 일어나 식사를 하고, 시간 맞춰 식물에 물을 주던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모험과 변수가 가득한 세계에 발을 디딘다. 하루하루가 예상 불가능하고, 낯선 사람들 천지지만 그는 그 생활에 점점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는 듯 하다. 평생 한번도 영국을 벗어난 적 없었던 그가 딸과 함께 비밀을 찾아 프랑스로 떠나기도 하고, 잠깐이었지만 또다른 사랑에 흔들리기도 한다. 이 세상은 생각보다 좁지 않음을, 내가 알던 세계가 다가 아니었음을 아서 페퍼는 여행을 통해 점점 깨닫게 된다.
인생을 살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다 인 것 같고, 거기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원하는 일을 얻지 못했을 때, 심한 좌절을 겪었을 때 보통 사람들은 자기만의 동굴을 파고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작은 집에 갖혀 시간이 가기만을, 이 슬픔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소설은 슬픔에 빠진 아서 페퍼를 아내의 과거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솜사탕을 통해 세상밖으로 끌어내는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아내의 과거 비밀 따위가 행복했던 아내와의 추억을 더럽힐 수 없음을 아서 페퍼는 깨닫는다.
현재보다 중요한 건 없다.
아서 페퍼는 이제 아내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며 과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