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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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시점은 어쩌면 개인주의자가 되기로 작정한 때부터가 아닌가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주의자는 되지 말되, 나 자신의 행복을 가장 먼저 생각하자. 더 이상 남의 이목을 신경 쓰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말자. 싫은 인간관계에 굳이 얽매이지 말자. 몇 가지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 나름대로 깔끔한 정리를 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행복감이 커졌다. 가끔 내가 너무 세상을 좁게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라고 하면 그리 못할 것 같긴 하다.

그러던 차에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의 제목은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안도감과 위로를 주었다.

"나는 개인주의자다!" 이 얼마나 용기 있으면서도 솔직한 선언인가.

나도 이제 당당하게 선언하겠다. 나는 행복한 개인주의자라고!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심리학계의 연구결과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고,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는 높은 소득보다 개인주의적 문화 때문이라고 본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들이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인종 문제가 심각하며 선진국 중 강력 범죄율이 가장 높은 미국도 15위로 늘 행복지수 상위권이다. 집단주의로 인한 압력에 짓눌리지 않고 각자 제 잘난 맛에 사는, 서로 그걸 존중해주는 개인주의 문화의 강력함이다.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동아시아 경제 우등생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개인주의자 선언 p.56

우리나라는 특히나 남들과의 비교우위를 통해 행복감을 충전시키는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SKY 캐슬'에는 어떻게든 자신들의 기득권을 오랫동안 지키기 위해 아이들의 교육에 아주아주 발 벗고 나서는 대한민국 1%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행복 기준은 사회의 기득권을 자식에 물려주고 오래오래 이어가는 것이다. 그들만의 카르텔을 만들고 누구도 넘어오지 못하게 안간힘을 쓰며, 심지어 같은 목표를 가진 SKY 캐슬 이웃끼리도 서로 협동하는 척, 견제하고 경쟁한다. 태어날 때부터 서울대 의대를 가야 하는 것으로 정해져 태어난 아이들은 자기들의 자유의지가 끼어들 틈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인 덕에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긴 하겠지만, 과연 평생을 경쟁하며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올라가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인생이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지.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개인주의자 선언 p.22


남들은 어떻든 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변호사 사무실 개업하여 재벌 회장들 변호하며 큰돈 버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체질이 소시민적이다. 야심도 없고 남들에게 별 관심이 없고, 주변에서 큰 기대를 받는 건 부담스럽고, 싫은 일은 하고 싶지 않고 호감 가지 않는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내 일을 간섭 없이 내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해내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내가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심지어 가끔은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갖길 원한다.

p.59

자신만의 확고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은 중요하다. 책을 읽다 저자 문유석 판사가 말하는 자신의 성향이 나와 매우 비슷해서 좀 놀랐다. 책의 추천사에서 손석희 앵커도 문 판사가 자신의 성향과 매우 비슷해서 경이로움까지 느꼈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런 성향이 그리 독특한 성향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마음속에는 주변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소소하고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사는지도. 하지만 남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가 지대한 관심사인 우리나라에서 그 관심에 초연해지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이 책에서 개인주의에 대해서만 주야장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모인 집합이 사회이니만큼 사회문제에 관해서도 폭넓은 생각을 전한다. 직업이 판사라서 그런지 모든 문제에 대해 따뜻하지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어 읽는 동안 흥미로웠다.

우리 사회는 사실은 제대로 된 이념이 부재한 곳인데도 이념 코스프레 중인 상황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원자력발전소 건설, 한미 FTA 체결 등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다층적 갈등 구조의 문제를 진영 논리로 단순화해서 선악 구도로 몰고 가기도 하고 반대로 이념과 무관한 일상적인 문제에도 이념의 꼬리표를 붙이기도 한다. (중략) 우리 사회의 많고 많은 문제 중 어느 하나를 얘기하면 그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제기하는 저의부터 의심한다.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보수냐, 우리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진보냐고 묻는 사회에서 문제 자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생각한 것이온데....

개인주의자 선언 p. 208

나도 예전부터 궁금했던 사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모든 사회문제에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을 붙여 편을 나누고 물고 뜯고 싸우는 것인지. 현재 우리나라 정당의 정책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정책에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두 정당 모두 자본주의와 복지주의가 혼재된 정책을 펼치고 있어 만약 모르는 사람에게 정당 이름을 가리고 어느 쪽에서 내건 정책인지 맞춰보라고 하면 전혀 모를 정도라고 한다. 본질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하는지부터 정해야 하는 이런 분위기가 걱정스럽다.


마지막으로 의외의 사실에 가장 놀라고 흥미로웠던 이야기가 있다.

저자가 미국 하버드에 연수 갔을 당시 친지의 안내로 흑인들이 모여사는 할렘가에 갔던 얘기에 관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지역에 주유소가 딱 하나 있는데, 갤런당 2달러 33센트를 받더라는 점이다. 이렇게 비싼 곳은 미국 와서 처음 봤다. 하버드 로스쿨 근처 주유소는 2달러 9센트를 받고 있었다. 백인 중산층 거주 지역 주유소보다 이곳의 기름값이 훨씬 비싼 이유가 무엇일까? 친지의 설명은 슈퍼마켓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거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주유소에 온다는 것은 폐차 직전일지언정 차가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싼 주유소를 찾아가면 될 것 아니냐? 대답은, 이들은 가격을 비교해 싼 곳을 찾아가는 등의 생각도 별로 안 한다는 거다.

요지경 세상이다. 뉴저지에 근사한 식민지풍 저택을 짓고 숲도 소유하고 있는 어느 교민은 반짝 세일 정보를 주시하다가 단돈 299불에 7박 8일 카리브해 크루즈를 다녀왔다고 자랑하고, 나만 해도 책 하나 살 때도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최저가를 찾고 마일리지다 쿠폰이나 써가면서 호들갑을 떨고, 식료품도 보스턴 시내를 다 뒤져서 제일 저렴한 체인인 마켓배스킷까지 15분을 운전해 장을 보러 다니는데, 컴퓨터도 인터넷도 차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푼이라도 더 아끼고 벌어보려는 악착같은 의지조차도 없는 이들은 시에서 가장 비싼 가격을 받는 하나밖에 없는 작은 가게에서 술, 담배, 싸구려 과자를 사서는 하염없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새삼스럽지도 않은 세상의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집창촌 아가씨들에게 싸구려 화장품이나 옷을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들은 떼어온 물건 값의 열 배 스무 배를 받아내고, 그녀들이 가는 미용실에서는 동네 일반 손님한테 받는 값보다 훨씬 비싼 값을 그녀들에게 받는다. 경제학적으로는 최적화된 가격차별화 정책이다.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낮은 시장이니까.

p. 223~224

이런 분위기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간 교포들이 흑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슈퍼마켓 같은 걸 운영해서 꽤 쏠쏠한 수익을 내며 자수성가한다고 한다. 어려우니까 더 아껴 쓰겠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아껴 쓸 의지조차 없어 백인 중산층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오히려 백인 중산층은 어떻게든 돈을 아껴 적은 돈으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생각해보니 내 경우도 비슷한 것 같다. 20대 땐 지금보다 훨씬 수익도 적고 어려웠지만 돈은 오히려 더 펑펑 쓰고 다녔다. 어차피 몇 푼 아껴봤자 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그때보다 수익이 훨씬 나아졌지만, 오히려 씀씀이가 많이 검소해졌다. 물론 지르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모든 쿠폰과 할인을 총동원해 가장 적절한 시기를 골라 과감히 지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다.


하루에 몇 챕터씩 읽다 보니 완독하는데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개인주의에 관한 가벼운 에세이인 줄 알았는데 꽤나 묵직한 이야기와 사회에 대한 그의 신선하고 객관적인 시선들도 다양하게 담겨있어 신선한 채소가 가득 들어있는 건강한 맛의 비빔밥 한 그릇 맛있게 뚝딱 비워낸 느낌이다.

밥을 먹어 묵직하지만 신선한 채소가 많았기에 속이 부대끼지 않는 그런 느낌!

문유석 판사에 이어 나도 선언한다!

합리적이지만 이기적이지 않고,

객관적이지만 차갑지는 않은 시선을 가진,

똑똑한 개인주의자가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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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2019-01-16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새 새로나온 쾌락독서도 재밌던걸요.

다림냥 2019-01-17 20:3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책도 재밌다고 하더라고용! 저도 곧 구해서 읽어봐야겠어요^^
 
거울 나라의 앨리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8
루이스 캐럴 지음, 김민지 그림, 정윤희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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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 키티와 하얀 고양이 스노드롭과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앨리스는 항상 거울 속 세계가 궁금했어요. 앨리스가 있는 이곳과 분명 똑같이 생겼지만 저곳은 분명 방향만 반대인 가짜 세계 같았거든요. 그렇게 거울 앞에서 서서 유심히 그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던 앨리스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거울 앞에 뿌연 안개가 생기면서 점점 거울 속으로 빠져들어간 거죠. 맞아요. 앨리스는 정말로 거울 나라에 들어간 거예요. 겉으로 보기엔 비슷한 것 같지만 분명히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는 그 거울나라에 말이죠.



7살 앨리스가 거울나라 속에서 펼치는 모험이 궁금하지 않아요? 거울 나라는 모든 게 제멋대로예요. 마치 꿈 속 처럼요. 장면이 휙휙 바뀌고, 등장인물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전혀 앞뒤가 안 맞죠. 하지만 원래 꿈꿀 때 그렇잖아요. 장면이 아무리 휙휙 바뀌거나 내가 하늘을 날아다녀도 하나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앨리스는 거울 속 세계를 마구 휘젓고 다닌답니다. 거울나라에 있는 거대한 체스판에서 여덟 칸을 옮겨가면 앨리스도 여왕이 될 수 있다고 붉은 여왕이 알려줬거든요. 그때부터 앨리스의 신나는 모험이 시작된다고요.

앨리스가 거울나라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험프티 덤프티에요. 달걀모양으로 생긴 얼굴과 몸이 너무 웃기고 귀엽지 않나요? 앨리스가 목도리와 허리띠를 구별하지 못하자 살짝 삐치는 모습도 우습고 말이지요. 그리고 험프티 덤프티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아요



"그분들 주셨어. 생일이 아닌 날 선물로 주신 거지."

"제 말은요, 생일이 아닌 날 선물이 뭐죠?"

"그야 당연히 생일이 아닌 날 주는 선물이지."

앨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난 생일 선물이 제일 좋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

험프티 덤프티가 외쳤다.

"일 년이 총 며칠이지?"

"365일이요."

앨리스가 말했다.

"그중에 생일은 며칠이지?"

"하루요."

"365일에서 하루를 빼면 며칠이 남지?"

"당연히 364일이죠."

험프티 덤프티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종이 위에 계산한 걸 봐야 알겠어."

앨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으면서 수첩을 꺼내서 직접 숫자를 적어 계산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 p140~ 141



그러네요. 생일은 일 년에 단 하루, 생일이 아닌 날은 364일이나 돼요. 일 년에 한번 돌아오는 특별한 날보다 생일 아닌 평범한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은걸요. 험프티 덤프티는 계산은 잘 못하지만 어떤 날들이 더 소중한지 잘 알고 있는 거 같죠?

인디고 고전 시리즈는 오랫동안 살아남은 고전 동화에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덧붙여 훨씬 재밌고 아름다운 동화책을 만들어냈어요. 이야기는 꿈속처럼 말도 안 되고 정신없지만 아름다운 일러스트만큼은 자꾸자꾸 펼쳐보고 싶을 만큼 예쁘다고요.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이야기들은 뭘 뜻하는지 생각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즐겨야 할 듯해요. 찾아보니 루이스 캐럴은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중에 특히 앨리스 리들이라는 아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 이름을 따서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해요. 아이들이 좋아하다 보니 계속해서 생각나는 대로 막 갖다 붙인 거죠. 그래서 루이스 캐럴의 문학은 난센스 문학이라고 하네요. 애초에 말 안 되는 이야기들이 천지잖아요? 그렇게 지어낸 이야기들이 이렇게 오랫동안이나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더 대단하죠.

지금 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나라로 앨리스랑 같이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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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5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쿄의 디테일 - 고객의 감각을 깨우는 아주 작은 차이에 대하여
생각노트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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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우리나라에는 둘 다 통에 들어있는 껌을 판다. 하지만 일본의 껌 통에는 들어있고, 우리나라 껌 통에는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껌을 싸서 버리는 종이다. 종이로 포장해서 파는 납작한 껌과 달리 통에 낱개로 들어있는 껌은 씹다가 버리고 싶을 때 싸서 버릴 종이가 없으면 정말 낭패다. 길 가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껌을 밟았을 때의 그 더러운 기분을 안다면 대충 바닥에 훅 하고 뱉어버릴 생각만큼은 제발하지 말자.

그깟 껌 통의 껌종이 몇 장이 뭐가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껌종이 따위 별거 아닐 수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배려한다는 것 자체에서 살짝 충격이 온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디테일이란 아마도 그런 것일 것이다.

도쿄 디테일은 저자가 일본 도쿄를 여행하면서 느낀 일본 특유의 디테일한 문화에 대해 보고 느낀 점을 정리해 담은 책이다. 도쿄에 다녀온 감성을 나열해 놓은 단순한 에세이나 여행기가 아닌, 머릿속에서 별사탕이 톡톡 터지는 느낌의 마케팅 #인사이트 가 담긴 책이다. #일본 문화를 단순히 구경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느낀 것을 메모하고 그것들을 통해 자기만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흥미롭게 담고 있다. 재밌는 건 저자가 처음부터 책 내용을 기획하고 #도쿄로 떠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휴식차 갔던 여행이었는데 도쿄 일정 막바지에 갑자기 프로젝트화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는 저자가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돌아다니며 느낀 감상과 아이디어들이 톡톡 거리며 살아있다. 바로 메모의 힘일 것이다.


책 마지막 부분을 보면 여행 중에 갑작스럽게 퍼블릭 측에서 SNS를 통해 도쿄 여행기의 프로젝트화 제안을 받게 되지만, 그 자리에서 이미 준비됐다는 듯이 바로 전체적인 책의 콘셉트와 목차, 대략적인 내용까지 술술 읊어될 수 있었던 걸로 보아 그는 이미 여러 면에서 준비가 되어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책 내용이 도쿄에서 본 다양한 디테일에 대한 찬양인 만큼 책의 구성도 꽤 꼼꼼하게 신경 쓴 것 같다. 일단 책 겉모습부터가 누드 제본으로 되어있어 책을 360도로 쫙 펴서 볼 수 있게 만들었고, 앞부분엔 일반적인 목차 외에도 필요한 부분을 따로 찾아서 보기 쉽도록 콘텐츠 종류에 따라 분류를 따로 하고 있다. 책 뒷부분엔 저자가 이동한 경로를 일정과 함께 지도에 꼼꼼하게 표시해주거나, 마케터나 기획자,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각각의 책 속 문장을 따로 정리해서 수록해 뒀다. 그만큼 "이 책도 디테일에 엄청나게 신경 썼다고요" 하며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문구덕후 답게 초반에 나오는 문구점 탐방에서 온 마음을 빼앗기며 봤다. 언젠가 도쿄에 가면 꼭 방문해보리라 마음먹은 #이토야 문구점이다. 1층부터 12층까지 없는 것이 없고 층마다 다른 테마로 꾸며진 다양한 인테리어까지, 이쯤 되면 문구점이 아니라 백화점 수준 아닐는지. 아마 이곳에서만 하루 종일이라도 구경할 수 있을 듯하다. 그중 요즘 유행하는 일명 떡메라 불리는 접착식 메모지에 대한 아이디어도 좋았다. 운동이나 영화, 책등 자신이 원하는 주제에 따라 원하는 메모지를 사서 기록할 수 있다.


개인의 취향이 갈수록 다양해지면서 하나의 상품이 모두를 만족시키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제품 구성은 대부분 모듈화가 진행될 것이며, 개인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모듈을 조립하여 완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제품을 스스로 만드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도쿄의 디테일> p.80~81



이미 각 분야의 #모듈화, #커스터마이징 은 많이 진행되고 있다. 그중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던 아이디어, 바로 #와이어드 호텔의 #커스터마이징 가이드북에 관한 이야기다.


호텔 투숙객들은 체크인 후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1마일 가이드북이라는 벽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호텔을 중심으로 1마일, 약 4km 내에 위치한 가볼 만한 장소들을 1페이지 단위로 정리하며 벽에 걸어두었습니다. 벽을 살펴보며 내가 관심 있는 곳, 가보고 싶은 곳의 페이지를 뺀 뒤 이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을 수 있죠. 이렇게 만들어진 가이드북을 보며 호텔 주변을 탐색해볼 수 있는데요. 아마 '1마일 가이드북'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도 걸어 다니면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장소를 한정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쿄의 디테일> 82~83



천편일률적인 가이드북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곳만 한 페이지씩 모아서 나만의 가이드북을 만든다. 이거 참 괜찮은 아이디어 같다. 책을 읽다 보면 다양한 사업기획에 접목해볼 수 있을만한 아이디어가 툭툭 튀어나와서 머릿속이 즐거운 책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이런 여행이 부럽다. 마냥 휴식하고 놀고 돌아온 여행이 아니라, 여행하며 느꼈던 다양한 감성과 아이디어가 새로운 콘텐츠로 다시 태어나 책이 되는 것. 이런 걸 보고 진정한 1타 2 피라고 하지.

새로운 아이디어와 생각지 못한 디테일로 머릿속을 반짝반짝하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이런 1타 2피의 여행이 가능할까 궁금하다면,

읽어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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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20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구덕후! 저두저두~ㅎ

다림냥 2018-12-20 23:15   좋아요 1 | URL
ㅋㅋ 카알벨루치님도 문구덕후시군요~ 책 좋아하시는 분들은 문구덕후일 가능성도 높은거 같아요~ ㅋ
저도 문구류 넘넘 좋아한답니다 ㅋㅋ

카알벨루치 2018-12-20 23:16   좋아요 1 | URL
나중에 펜자랑 좀 해주시죠? ㅎㅎ

다림냥 2018-12-20 23:18   좋아요 1 | URL
대단한 덕후님들만큼은 아니지만 꽤 두둑하게 가지고 있습죠ㅋㅋ
담에 자랑 좀 해야겠네요 ㅋㅋ

카알벨루치 2018-12-20 23:59   좋아요 1 | URL
기대합니다~ㅋ
 
닿음 Touch
양세은(Zipcy)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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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으면 한 번쯤 따라 해보고 싶은 따뜻하고 짜릿한 연인과의 스킨십을 담아낸 예쁜 일러스트 북이 나왔다. 책 전체에 걸쳐 다양하게 따뜻함을 나누는 연인이 등장한다. 같이 기대 누워 영화를 보거나 맥주를 마시는 등 별것 없는 일상의 모습도 다양한 포즈의 스킨십을 통해 다채롭게 표현하고 있다. 

연인 간의 따뜻한 사랑을 표현한 일러스트로 예전에 발간된 그라폴리오 작가 퍼엉의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래》 시리즈와 비슷한 주제지만 퍼엉의 책이 예쁜 집과 공간에서 연인의 아늑한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닿음》은 두 사람의 다양한 애정표현과 '스킨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중 주인공인 두 사람의 외모가 무지무지 매력적으로 나온다. 특히 여자 주인공의 자연스러운 듯 시크한 스타일과 외모가 너무 매력적이라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라폴리오와 인스타그램에서 이미 큰 사랑을 받은 바 있는 작가 집시의 작품들은 평범한 일상에서의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잘 포착했다. 특별한 화려함이나 이벤트가 없어도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의 편안한 모습이라 더 공감 가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특별히 인체해부학을 공부하진 않았지만 최대한 두 사람의 포즈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위해 여러 번 고치고 다듬으면서 작업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닿음이 주제이니만큼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두 사람 인체의 꼬임(?)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림에 어색함이 없는 걸 보면 꽤나 훌륭하다.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을 땐 남편에게 특정 포즈를 취하게 해서 보고 그리거나 부부가 직접 포즈를 취해서 사진을 찍고 그걸 모델로 그리기도 했다는데 그건 작가의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해보는 걸로 ㅋㅋ 




일러스트 컷마다 짧고 예쁜 말들도 함께 적혀있다. 코에 키스하는 건 상대방이 너무 소중하다는 의미란다. 
보통 코보다는 이마에 많이 하지 않나? 
"오빠, 내가 너무나 소중하다면 코에 뽀뽀해줘!" 
이러면 오빠가 뭥미?! 하겠지 ㅋㅋㅋ



일러스트 북 끝부분에는 일러스트 과정 컷도 함께 실려있어서 흥미롭다. 이런 따뜻하고 환상적인 느낌의 일러스트는 어떻게 그리는 걸까 궁금했는데 꽤나 다양한 과정을 통한 리터칭이 필요한 듯하다. 

이런 사랑이 퐁퐁 넘치는 일러스트를 보면서 드는 생각! 연인들의 기념일이나 웨딩사진으로 잔뜩 꾸미고 찍은 스튜디오 사진 대신 이런 자연스러운 애정이 넘쳐나는 사진을 스냅으로 찍어보는 건 어떨까. 훨씬 예쁠 것 같은데 말이다. 

연인과 간만에 분위기 잡고 싶다면 함께 맥주 한잔하면서 《닿음》 일러스트북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건 어떨까? 
잊고 있던 스킨십의 짜릿함이 다시 퐁퐁 솟아날 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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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2-19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림냥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다림냥 2018-12-19 23:11   좋아요 1 | URL
올해엔 작년보다 책도 많이 못읽고 글도 많이 못썼는데 서재의 달인이 됐다고 해서 놀랐어요ㅋㅋ 축하감사드립니다~ 서니데이님도 축하드려요~ 좋은 이웃 되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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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대 악을 접할 때면, 사람은 두려움을 넘어 호기심이 발동한다. 무엇이 저 사람을 악의 화신으로 만들었을까. 악이란 태어날 때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아님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474는 정치인 12명을 권총으로 쏴 죽이고, 재판에서 어떠한 항소도 없이 바로 형이 확정되어 현재 사형수이다. 윤은 보통 사람과 확실히 다른 포스를 풍기는 474가 궁금하다.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노골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있지만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474에게 접근한다. 

「474번의 담당 교무관으로 결정됐을 때 내색하진 않았으나 윤은 내심 기뻤다. 호기심을 잔뜩 빨아 마신 마음 뿌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애썼다. 알아내려 하지 않으려 애썼고, 관심 없는 척하려 애썼다. 거리를 유지한 채 기다렸다. 기다림. 그것은 윤이 스스로 잘한다고 믿는 유일한 특기였다. 적당한 압력으로 눌러 더는 앞으로 걸어가지 못하는 개미의 떨림이 멈추기까지, 어째서인지 저수지에 빠진 박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다 얇은 두 다리를 쭉 뻗고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겨울 새벽 인적이 드문 국도를 지나다 차에 치인 개가 더운 입김을 뿜고 서서히 잠들어가는 모습을 기다린 적도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을 차분하게 지켜보는 것. 윤은 그것을 잘했다. 스스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그것은 선한 일은 아니지만 결코 악한 일도 아니라고 스스로 정당화하며, 기다리고 지켜봤다. 누군가 몰락하는 풍경을, 누군가의 비밀이 어떤 이유로 인해 탄로 나는 모습을, 후회와 절망으로 무너져 침 흘리며 우는 모습도 지켜봤다. 직접적으로 엮이지 않고, 인과에 참여하지 않고, 그러나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윤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찾아냈고 선 앞에 서 있었다. 어떤 이는 윤을 사악하다 했고 어떤 이는 윤을 무섭다고 했지만 대부분은 윤을 깔끔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좋아했다. 」 <유령 38~39쪽>

소설 속에서 474는 살인자이자 사형수에서 어두운 과거를 가진 인간 '신해준'이 되어간다. 그의 과거가 하나의 스토리가 되어,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기 때문이다. 누나와 단둘이 외롭게 살다가 누나에게 마저 버림을 받은 불쌍한 어린아이,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 있어 살이 뜯겨나가도, 불 위를 걸어도 자기 몸이 다치는 지도 모르기에 오히려 삶이 더 위험투성이인 사람. 영화에 나오는 아무리 냉혹한 살인자라도 그가 겪은 어두운 과거를 보면 그에게 동정심과 이해심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는 아무리 강렬한 악이라도 그 안에서 그럴만한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지곤 한다. 그가 이미 저지른 일은 어떠한 것으로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에는 다양한 형식의 악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용히 숨어서 다른 사람의 불행을 지켜보기만 하는 관찰자 '윤', 자신의 불행함을 실제 악을 행함으로써 표출하는 474 신해준, 악이란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 믿으며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포기해버리는 누나 신해경.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악을 조금씩 다 나눠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절대악은 그것을 행하는 살인자나 범죄자에게만 존재한다고 태연자약하게 믿으며. 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악마였고, 이해할 수 없는 악은 '사이코패스'라 단정 짓는다. 그런 그들을 널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면서 혀를 끌끌 차며 '미친놈'이라고 한마디 내뱉으면 끝인 것이다. 

저자 정용준은 악과 악인을 분리시켜 보여준다. 악의 상태로 내몰리다 실제로 악인이 되어버린 유령 신해준, 그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것이 불편한 이유는 어쩌면 나도 교도관 '윤'이나 누나 신해경과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그를 봤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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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0 16: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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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1 0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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