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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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오르한 파묵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자아를 찾아헤맨 한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음을 느낀다. 처음 접하는 작가의 책으로 『 새로운
인생』과 만났다. 노벨문학상 때문에 널리 알려진 작가이긴 했지만 그 때문에 읽고 싶
지는 않았기에 차일피일 미루던 중에 지인의 생일선물로 보내며 내 것도 함께 구입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로 시작하는 문구에서부터
'누군가가 나의 생각들을 나보다 먼저 생각해서 적어 내려간 것'이라는 말을 보며, 책을 읽으며
가끔 이런 생각도 하고 공감을 표하지만 주인공처럼 그야말로 모든 것이 변화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
지 상당한 호기심이 일었다. 책에서 눈을 돌려 외부적으로 길을 나선 주인공은 그의 내부로 향해가기
시작한다.

'나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나와 닮은 영혼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에게 말을 걸었던 꿈을
찾을 수 있는 나라는 또 어디에 있는가? 나와 같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 20쪽


'여행자여, 너는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 하지만 분명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자신이 바로 그 순간의
문턱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문 뒤에 있는 정원, 아니면 그 뒤에 있는 다른 문에 서 있는 것인지,
그리고 더 뒤에 올 죽음과 삶, 의미와 행동, 시간과 우연, 빛과 행복이 서로 뒤섞인 또 다른 비밀의
정원에 있는지 모르고 너는 어떤 기다림 속에서 달콤하게 흔들리고 있구나.' - 87쪽


'글에서 찾았던 것을 글 바깥에서, 인생에서 찾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
또한 글만큼이나 한계가 없고 결점투성이에,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 289쪽


'수많은 길을 지나오는 동안 나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 290쪽

앞 부분이 상당히 서사적으로 지나가서 지루함도 없지 않지만 뚜렷한 목적 없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동안 결국 그는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수없이 펜을 들
었다 놓았다 하며 고뇌하고 적은 작가의 흔적이 느껴진다. 결코 'ㅡ은 ㅡ이다'라고 명쾌하게 말해주
지 않는 작가는 그 몫을 오롯이 독자의 과제로 만들었다. 그래서 다소 쉬이 읽히지 않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차근하게 읽어가는 것이 좋다. 작가의 진중함이 오히려 내게는 좋았다. 또 사실 작가는 이렇게 수
많은 의미를 중첩하거나 물음을 주지 않더라도 굉장히 감각적인 문장력을 갖고 있어서 문체만으로도
다분히 훌륭한 글을 써낼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책의 매력으로 내가 꼽는 것은 뚜렷함없
이 흘러가는 이야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재구성하게 되는 별난 재미 때문이다.

'사랑은,' (중략)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목표를 향하게 만들고, 물건들 속에서 인생을 꺼내지.
지금 깨달은 건 결국 사랑은 우리를 세상의 비밀로 이끌어 준다는 거야. 지금 우리는 그곳으로 가고 있
어.' - 103, 104쪽


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그의 사랑이다. 그녀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그의 모든
것이자 유일한 낭만이 느껴지는 부분인데 환상처럼 그를 잡아끈 그녀는 가질 수 없는 하나의 꿈처럼 느
껴진다.

그리고 낯선 나라 터키의 이질감은 어느덧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스탄불만을 알고 있던 내게 서구문명
의 홍수에서 고유 양식을 잃어버리는 터키의 현실을 수면으로 끌어내 알려준 것이다.

'지난 14년 동안, 큰길뿐 아니라 지저분한 뒷골목까지 서로서로 악쓰는 듯한 문구가 적혀 있는 플렉
시 유리 광고판으로 도배하라고 지시한 것은 누구인가? 교도소의 담장처럼 아타튀르크의 동상을 둘러
싸고 있는 콘크리트 아파트 건물을 바라보면서, 나는 누가 발코니의 철제 난간들을 저렇게 찍어 낸 듯
똑같이 만들라고 명령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중략) 또 엘리베이터나 환전소나 대기실 같은 생소한 장
소에서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다면 상대방을 적대적인 눈빛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결정한 사람
은 누구인가?' - 359, 360쪽


'오늘날 우리는 패배했지. 서양은 우리를 삼켰어, 짓밟고 지나갔지.' - 380쪽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감수성을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며, 이를 문명화되는 것이라
고 생각한다.' - 368쪽


이렇듯 곳곳에 드러나는 터키문제의식, 여행, 사랑 등이 여러 의미를 갖고 많은 생각을 유도한다.
매일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렇다. 나도 새로운 인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전의 삶을 죽이는 것이다.

이 작가의 세계는 독특하다. 그래서 잠시 딴생각을 하면 안 된다. 과연 제대로 읽고 있느냐는 듯한 핀잔
마저 느끼게 한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다시 이 책을 잡고 있을 나를 상상하며 책을 덮었다. 그런데도
머리에서 생각은 덮어지지 않는다. 오르한 파묵의 다른 소설을 앞으로 만날 생각을 하니 흐뭇하다.
얼마나 읽었느냐가 아닌 얼마나 이해했느냐가 관건이라는 점이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 말은 즉 자신의 삶을 얼마나 이해했느냐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떨리는 가슴으로 수많은 생의
의미를 찾고, 벗기고, 깨달아도 결국 자신이 지고 나갈 고뇌를 잊지 말아야겠다. 새롭게 살고 싶다.
그 속에 행복만이 있을 거라도 생각하진 않는다. 때로 슬프거나 우울해도 좋다. 살아가는 자체가 종교
의식만큼이나 신성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말랑한 '새로운 인생' 캐러멜이 먹고 싶다.


* 아쉽게도 오자가 있었다. 15쪽과 346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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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밤의 꿈 그림책으로 만나는 셰익스피어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데니스 놀란 그림, 브루스 코빌 다시 씀, 구자명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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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만나는 셰익스피어 1편인 『한 여름밤의 꿈』은 책표지 그림만 보고 주저 없이 구입했다.
피리를 부는 요정(퍼크)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림책은 그림이 많은 부분을 좌우한
다. 그리고 아이들이 읽는 셰익스피어는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책장을 넘겨보니 일단 그림이 예쁘다. 특히 사랑스러운 장난꾸러기 아이같은 요정인 퍼크가 가장 귀엽
다. 아이가 읽기에 다소 글이 많기는 하지만 예쁜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잘 해주면 좋아할 거 같다. 더
구나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아닌가. 이만큼 내용을 줄이고 설명한 것도 일이었을 것이다. 물
론 난 미혼이라 경험담은 없지만 아이가 있다면 꼭 아이와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리라. 사실 아이
뿐 아니라 자신도 행복할 테니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읽고 자란 아이가 후에 생략된 내용을 깊
이있게 찾아 읽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 같다.

아이에게 셰익스피어를 읽게 해주자는 생각의 출발에서부터 일단 점수를 후하게 줄만 한 책이다.
거기에 그림도 아름다워서 소장가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잘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아이에게 읽어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림이 화려하거나 색감이 진하지는 않은데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지나치게 자
극을 주지 않고 부드러운 그림에 각 인물의 표정이 자연스럽고 익살스럽다. 어린 시절에 읽은 그림책
은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에 남아있다. 내 경우에도 어린 시절 읽은 그림책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로 인
해 꿈꾸던 많은 상상력과 달콤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만큼 꿈꿀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어서 어른인 내
가 읽기에도 좋았다.

현실도 한껏 자고 일어나면 고된 꿈이었다고 생각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웃다 보니 한 여름밤의 꿈은 끝나지 않았음을 되뇌어본다.
웃고 싶을 때는 그림책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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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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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언제 읽어도 그 대사에 빠져서
시간가는 줄 모른다. 비록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다른 작품에서
소재를 빌려와 자기의도에 맞게 재구성했다고 하지만 그의 능력을 의심할 수 없을 만
큼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이 작품에는 사랑과 배신, 믿음, 음모, 내면, 치밀함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비극이 모두 들어있다. 그리고 가장 특징적인 것은 역시 각 등장인물의

대사다. 특히 햄릿의 대사는 수없이 되새김하여도 지겹지 않고 놀라울 뿐이다.

'인간이란 참으로 걸작품이 아닌가! 이성은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은 얼마나 무한하며, 생김새와 움직
임은 얼마나 깔끔하고 놀라우며, 행동은 얼마나 천사 같고, 이해력은 얼마나 신 같은가! 이 지상의 아름
다움이요 동물들의 귀감이지 ㅡ 헌데, 내겐 이 무슨 흙 중의 흙이란 말인가? 난 인간이 즐겁지 않아 ㅡ
여자도 마찬가지야.' ㅡ 75쪽, 햄릿.


인간임에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열거하고 결국 그래도 싫다고 말할 만큼 햄릿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특히 어머니의 배신으로 여자를 믿지 않으며 그로 인해 오필리아의 비극도 햄릿의 몫이 된다. 모친을
혐오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오필리아를 만났더라면 사랑이 넘치는 희극이 되었겠지만 역시 햄릿은 되
돌릴 수 없는 비극 중의 비극이다.

'난 그저 북북서로 미쳤을 뿐이야. 바람이 남쪽으로 불면, 뭐가 발인지 톱인지 분간할 수 있다고.'
ㅡ 78쪽, 햄릿.


의미심장한 햄릿의 말과 빠질 수 없는 요소로는 기가 막힌 은유를 들 수 있겠다. 어쩌면 그렇게 적재적
소에 딱 맞게 빗대는지...그리고 단 한 줄도 허튼소리 없는 대사와 상황에 극적인 전개까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ㅡ 94쪽, 햄릿.


보통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잘 알려진 말. 원문은 [To be, or not to be]이나 함축하
고 있는 의미를 더 포괄적으로 느끼도록 '있음이냐 없음이냐'로 바꾼 거 같다. 어감은 전자의 것이
멋져 보일지 모르나 내 생각에도 후자가 더 포괄적인 거 같다. 있음과 없음...

'죽는 건 ㅡ 자는 것뿐일지니,
...(중략)...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 ㅡ 95쪽, 햄릿.


이 대사는 뉴트롤스(New Trolls)의 곡 아다지오(Adagio)가 저절로 떠오른다.
아다지오의 가사를 보자.

To die, to sleep
May be to dream...


이토록 수많은 영감을 주는 작품이니 시간은 가도 변함없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을 판 主소득이 먹고 자는 것뿐이라면, 짐승 이상은 아니다. 우리에게 그렇
게 넓은, 앞뒤를 내다보는 사고력을 넣어주신 분께서, 그 능력과 신과 같은 이성을 쓰지 않고 썩이라
고 주신 건 분명코 아니다. 헌데 이 무슨 짐승 같은 망각인지, 혹은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인지 ㅡ 그 생각을 쪼개봤자, 반에 반만 지혜이고 나머지는 비겁함이겠지만 ㅡ 난 내가
왜 이건 하리라고 살아말하는지 모르겠다, 해치울 명분과 의지, 힘과 수단이 있음에도. 흙처럼 흔한
예가 날 훈계한다.' ㅡ 149쪽, 햄릿.


동시에 햄릿의 말은 독자인 나까지 훈계하고 있다. 때로 방황하나 결코 타협하지 않고 돌진한다!

그리고 햄릿에서 관심이 가는 또 다른 인물은 바로 오필리어이다. 아마도 영화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
멜 깁슨이 햄릿으로 나오고, 글렌 클로즈가 왕비, 헬레나 본햄 카터가 오필리어였던 오래된 영화가
있는데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다. 창백한 얼굴과 실성한 그녀의 행동과 표정에서 책에서 많이 언
급되지 않았어도 비극적인 그녀의 캐릭터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표지그림은
바로 오필리어다.

너무도 사실적으로 표현된 오필리어의 표정과 꽃이 뇌리에 박혀버렸다.
거기에 덧붙여 왕비가 그녀의 죽음을 오빠에게 전해주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울 같은 물 위에 하얀 잎을 비추며 냇가에 비스듬히 수양버들 자라는데, 그것으로 네 누이가
기막힌 화환을 미나리아재비, 쐐기풀, 들국화, 그리고 입 건 목동들은 더 야하게 부르지만 정숙한
처녀들은 <죽은이 손>이라는 야생란과 엮어서 만들었지. 흰 가지에 풀꽃관을 걸려고 올라가다,
한 짓궂은 실가지가 부러져, 풀화환과 네 누이가 울고 있는 개울로 떨어졌어. 입은 옷이 쫙 퍼져
그녀는 인어처럼 잠시 뜬 채, 옛 찬가 몇 구절을 그 동안에 불렀는데, 자신의 위기에는 무감하게
되었거나, 마치 물에서 태어나고 거기에 적응된 생물 같아 보였지. 그러나 멀지 않아 그녀의 의복
이 마신 물로 무거워져, 곱게 노래하는 불쌍한 그애를 진흙 속 죽음으로 끌고 갔어.' ㅡ 172쪽, 왕비.


비극적이지만 꽃 같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낭만적인 죽음이다. 그래서 여러 화가가 오필리어를 그리
고 그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셰익스피어가 이 시대를 살고 있다면 과연 어떤 희비극이 나왔을지 궁금해진다.

햄릿을 읽지 않았다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는 바이며,
책상 가까운 곳에 늘 보이게 두는 책이 될 만큼 무한한 애정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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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 열림원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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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많은 시를 얼마나 오래도록 암송하고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랑과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도 친숙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잊지 않고 따뜻한 위로까지 건네주었으니까...
또한 자연친화적인 마음에 교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시가 노래로 불렸듯 나도 노래하고 싶게 만드는 시인.

'사람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다 시가 들어 있다.
그 시를 내가 대신해서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다.' ㅡ 시인의 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 '수선화에게', '나무들의 결혼식', '마음의 똥', '아버지들' 등을 비롯해 무심코
펼쳐드는 페이지마다 그가 말한 달팽이가 천천히 돌아다닌다. 동화적인 감성과 작은 것에서도 이입
해서 느끼는 연민의 정이 겨울밤을 훈훈하게 한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는 시인이 말처럼 마음은 이미 나만의 바닷가로 달려간다.

나무들의 결혼식

내 한평생 버리고 싶지 않은 소원이 있다면
나무들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낭랑하게
축시 한번 낭송해보는 일이다

내 한평생 끝끝내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우수가 지난 나무들의 결혼식 날
몰래 보름달로 떠올라
밤새도록 나무들의 첫날밤을 엿보는 일이다

그리하여 내 죽기 전에 다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은은히 산사의 종소리가 울리는 봄날 새벽
눈이 맑은 큰스님을 모시고
나무들과 결혼 한번 해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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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원리
장기표 / 한길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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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원리
장기표 / 한길사 (1996년) 소장본 1996년

'사랑의 철학', '사랑의 정치'를 부르짖는 정치가 장기표의 사랑론에
관한 책.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이 기본이념인 그가 은혜를 받은
사람의 딸 결혼선물로 쓴 편지글이다. 그중에서도 '부부사랑'에 중점
을 두고 내용을 설파하며 넓게 나아가 모든 사랑에 관해 풀어두었다.
그의 말처럼 사랑의 합일성이 부부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 사회 전체에 넘쳐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장배열이 다소 불규칙한 느낌을 제외하고는 아니 반복되는 점을 제외하고는 내용 자체는 충분한 동감을 이끈다.



'사랑의 초월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의 비합리성을 주장할수는 없다. 사랑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폭발 같지만 사실은 오랜 기간 축적된 과학적 노력의 결과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ㅡ 8쪽.


도입부의 말처럼 그는 차근하게 하나씩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워낙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감동보다는 하나의 학설을 듣고 이해하는 느낌이 먼저 든다. 내게는 그것이 은근히 재미있다.
아무래도 추상적으로만 썼다면 오히려 그저 그런 책으로 치부하고 덮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랑의 실천성을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란 감정의 소비가 아니라 가치 있는 일을 창조하고 생산
하는 행위임을 밝히고자 해서이다. 사랑이란 소비행위가 아니라 사실은 창조행위이다.' ㅡ 66쪽


그야말로 처음부터 줄기차게 끝까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는 그는 성경과 불경뿐 아니라 많은
예를 통해 쉽고 직설적인 말로 풍부함을 뒷받침하며 설명한다.

'사랑이란 자기를 확산하는 것이라고 해서 세상이 저절로 자기화하는 것은 아니고 자기가 사랑을 실
천하는 것만큼 자기를 확산시켜가게 되는 것이지.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노동이란다. 가치를 창출
해가는 인간의 노동 말이다. 노동 혹은 노력이 아닌 사랑은 참된 의미에서 사랑이 될 수 없음을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ㅡ 77쪽


'평화시장의 전태일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각성과 단결이 필요하
다고 보아 노동자들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했건만, 노동자들은 그러한 전태일을 보고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말라고 해서 마침내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각성과 단결과 투쟁을 호소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
고 말았었지.' ㅡ 112쪽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만큼 대상을 자기화하게 되는바, 만약 우주 전체를 사랑하는 사
람은 우주 전체를 자기화하게 된다. 이처럼 우주 전체까지도 자기화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면 어찌
주체적이지 아니하고야 가능할 수 있겠는가.' ㅡ 123쪽


사랑예찬론자의 글을 정신없이 읽는 동안은 몰랐는데 책장을 덮을 때쯤에는 내게 '역시 사랑을 하
자.'라는 생각과 더불어 정치에 무관심한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물론 저자가 주체적인 사랑을 위해
'사회적으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131쪽)이라는 말을 해서이기도 하지만 학창시절
에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자신을 떠올렸다. 비판하고 참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내가 말해보았자 세상은 멋대로 흐르더라 하며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갑자기 정치에 관심이 옮겨지지
는 않겠지만 아주 조금씩 신경을 쓰자고 마음 한편에 숙제를 담아두었다. 역시 정치가답게 정치 쪽으로
한 독자의 눈을 돌리게 했으니 이 정도면 성공한 게 아닐까 싶다. '사랑의 정치'는 얼마만큼 왔을까.

* 장기표 블로그 = http://blog.naver.com/changkp.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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