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숲에서 누구는 외롭다. 그리고 누구는 사람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문제로 마음이 심란하다. 살아가는 일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버거운 일이기도 하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늘 그럴 수만은 없는 현실이 발목을 잡는다. 그럴 때 책은 좋은 친구가 되는데 <절은 절하는 곳이다>가 그랬다. 소설가 정찬주가 순례한 남도의 작은 절을 차례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편해진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남도를 좋아해서인지 언젠가는 나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실은 예전부터 어머니와 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계획했었지만 실행하지 못했는데 언제가 되더라도 이 책을 떠올리며 꼭 가봐야겠다. 종교에 관계없이 절이란 곳은 누가 들어서건 간에 마음에 이는 칼바람을 잠재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저자의 마음이 공명하여 큰 떨림이 되었다. 일단 저자가 정찬주였기에 이런 책이 나왔을 테지. 노을의 황금빛깔로 물든 미황사를 보며(책의 사진.) 어느 가을 보았든 이름 모를 절의 풍경이 선했다. 눈부시게 빛이 나서 서까래며 벽면 등을 물든 고운 빛을 정확하면서도 우아하게 표현하는 모습 그리고 불심과 다도에 조예가 깊은 그답게 글 곳곳에서 느껴지는 향기가 좋았다. 글에서 느껴지는 저자 고유의 풍경이나 느낌이 있는데 책에서 풍기는 게 딱 그였다. 갑자기 <하늘의 도>라는 그가 쓴 책이 떠오른다. 발자국을 남기며 눈 위에서 걸음을 떼던 모습과 책 등장인물의 내면이 혼재되 시공간을 무너뜨리는 듯하다. 위에서 말했듯 저자의 문장력과 더불어 여러 절에 대한 간략한 설화 등과 사진이 함께한다. 특성상 많은 곳을 짤막하게 소개하다 보면 지루할 만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번에 읽지말고 쉬어갈 때마다 펼쳐야 할 책이었다. 유마사에서 '살아있는 부처를 무서워하라'라는 말도 인상적이다. 역시 설화의 일부라 전체를 소개하지는 못하고 큰소리로 꾸짖는 말을 옮겨본다. "너는 종이에 그린 부처는 무서워하면서 어찌 살아 있는 부처는 무서워하지 않느냐!" (109쪽.) 어쩌면 어디선가 들은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는데 그곳이 유마사라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그리고 유명한 운주사의 거지부처가 문득 보고 싶어진다. 저절로 절하게 하는 거지부처이다. 욕심도 사랑도 미움도 다 버린 무욕無慾의 얼굴이다. 이루고 싶은 꿈이 복잡한 나로서는 결코 닮지 못할 얼굴이다. (290쪽.) 설화는 당시 상황의 재현이다. 민중이 바라는 희망을 담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절마다 간직한 역사에서 꺾이지 않는 희망이 보인다. 시詩가 말言과 절寺이 합쳐졌다며 절에서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되돌아보라는 저자의 말 또한 잊지 못하겠다. 침묵의 언어는 시가 된다고 했으니까. 절의 수를 줄이고 더 자세하게 실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순례길에 만난 절들이라 하나하나 그에 걸맞은 풍경을 독자에게 전한다. 수행이 수행자만의 것이 아니듯 책을 접하는 독자 또한 자신만의 수행을 정진하라는 거 같다. 미래나 삶에 대한 행복한 기대감보다 더 떨리는 것은 현재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게 무언지 아는 일이다. 그리하면 수없이 내 몸과 마음이 부서져 망가지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이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맑은 차 한 잔 우려내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이다. 단순한 절소개서가 아닌 명상서처럼 마음을 안아준 책이었다. 물론 저자처럼 불심까지 있다면 더욱 몰입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의 일기예보란 게 없는 우리 모두에게 한순간이나마 마음의 고요를 보태줄 것이다.
ㅡ 책속으로 들어가기 전 <패싱 Passing>의 뜻을 생각하기도 전에 바로 아래 적힌 문구를 발견했다. 백인 행세하기! PASSING. 그렇다면 백인이 아닌 인종이 백인 행세를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띠지에 적힌 글로 얻은 정보는 할렘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작가 넬라 라슨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1929년에 발표한 작품이 국내에는 글빛 출판사를 통해 2006년에 소개된 것인데 아쉽게도 넬라 라슨은 당시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남편과의 이별, 출판사와의 불화 등)으로 세 번째 소설을 출판하지 못하고 1930년대 말에 작가생활을 청산했다. 결국, 단 두 권의 작품으로 주목받는 작가이니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2006년 지인의 서평을 통해서도 궁금했던 책을 이제야 펼치게 되었다. ㅡ 패싱을 선택한 사람들 두 흑인 여성의 대조되는 삶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야기. 아이린은 전적으로 패싱하지 않지만, 편의상 백인만 들어가는 호텔이나 영화 티켓을 끊을 때 등 잠깐씩 백인인 척 한다. 다시 말하자면 흑인과 백인의 구별이 모호한 외모이므로 다른 이들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니까 그녀도 일부러 말하지 않는 정도이다. 책에서는 물라토라고 했던 거 같다. 혼혈이 되어 외모만으로 백인과 흑인을 구별할 수 없는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이들을. 아이린과 다르게 패싱하는 클레어는 대담하게 백인과 결혼해서 딸을 낳았는데 딸의 외모도 다행히(클레어에게는 천만다행.)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는다. 우연히 재회하게 된 이들의 장소는 의미심장하게도 백인만 들어갈 수 있는 호텔이었다. 그날의 만남으로 클레어는 아이린의 삶에 들어온다. 백인 속에서 그것도 흑인이라면 치를 떠는 남편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클레어에게 아이린과의 만남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러니 더욱 아이린과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강박을 느끼며 불안과 만족으로 뒤범벅된 생활에서 같은 인종이 그리웠을 것이다. 애써 거짓으로 위장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 또한. 매력적인 외모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상대를 조정할 수 있는 클레어를 아이린은 달가워하지 않지만 아이린이 거부해도 클레어는 이미 그녀 속으로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무튼, 의도는 다르지만 아이린과 클레어 둘 다 백인행세를 한다는 점은 같다. 아이린의 가벼운 패싱과 클레어의 패싱은 차이를 보인다. 자신의 불행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패싱을 택한 클레어를 보며 공존하는 탐욕과 공허함을 느껴진다.
" '패싱' 에 관해서는 정말 알 수 없어요.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용서해요. 우리는 그것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찬미해요. 우리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며 그것을 피하면서도 보호해요." - 본문 101쪽. 아이린의 말.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았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새벽. 숨소리조차 크게만 느껴져서 발소리마저 조심스러운 날. 가족들이 자니 스탠드를 켜기도 미안한 날이다. 그러나 이렇게 누워서 날을 새기는 어렵다는 걸 아는 이상 가만있을 수가 없다. 결국, 조용한 방으로 가서 스탠드를 켜고 부담 없이 읽을만한 두께의 책 한 권을 펼쳤다. 그러다 <책상은 책상이다>의 여운에 빠져 잠을 청했다. 7개의 이야기에는 모두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이 모두 존재감을 잃은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점인데 특히 책에서는 대부분 나이가 많은 남자들이다. 어느 정도의 세월을 보낸 이들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이나 다가올 미래 따위는 없는듯하다. 현실에서 이들은 다만 외로울 뿐이다. 무언가를 해서 또한 무언가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것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든가 모든 말을 자신만의 언어로 바꿔서 부르기도 하며 발명에 집중했지만 이미 시대는 변하고 발명품이 넘쳐났으며 아무것도 더는 알고 싶지 않아서 집에 틀어박히던가 하는 식이다. 그래서 이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었을까? 오히려 존재감의 위기를 넘어 존재감 상실이 되어버린다. 소외감은 또 다른 고립을 불러와 결국 세상과 더욱 높은 벽을 쌓았다. 그래서 이들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아무것도 안 하고 주저앉아있지 않았다는 점만 놓고 보자면 행동파 적이었던 이들이다. 또한, 행복해졌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결말을 우리가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작가는 재치있는 사람이다. 말을 다룰 줄 안다고 할까. 기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더 풍요해지는 문명의 혜택 속에서 정신적 빈곤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말이다. 그래서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앞으로도 다른 형태의 누군가로 살아갈 것이다. 이렇듯 어찌 보면 제법 간단한 우화 같은 이야기라 느껴질지 모르지만, 작가가 시도한 방식이 마음에 든다. 잠시 다른 이야기 하나, 아파트 1층인 우리 집에는 불청객 꼬마가 한 명 자주 온다. 가끔 오후 시간이면 뒷배란다 쪽에서 소리가 나는데 꼭 같은 꼬마 녀석이 돌로 두드리는 소리이다. 꼬마와 대면해서 왜 두드리느냐고 묻고 싶지만, 창을 열면 내빼기 바쁘다. 꼬마는 어쩌면 외로웠는지 모른다. 놀이터를 두고 여기까지 와서 혼자놀이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데 학교가 끝나고 학원까지 다녀오고도 늦은 오후 시간이 남는가 보다. 집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꼬마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지. 그리고 유난히 오감이 예민한 나도 나만의 이유로 그 소음이 싫다. 다음에 꼬마를 만나면 설득해보고 혹은 혼을 내보고 그래도 다시 온다면 그냥 둘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니 문득 녀석이 떠오른다. 돌로 두드리는 시간이 길지 않으면 좋겠다. 앞으로 두드려야 할 세계가 넓고 만만치않으니 말이다. 책상은 책상이고 돌은 돌이고…. 사람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