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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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꿈결같은 이미지를 품고 있는 곳. 하지만 그곳이 왜 그렇게까지 꿈결같은 이미지를 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죽기전에 한번쯤은 꼭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중국의 한 자치구에 속해있지만 그들도 한때는 그들만의 나라일때가 있었다. 단단하게 뿌리박힌 티베트 불교의 단아함속에서 작지만 욕심없이 살아왔던 소수민족이었을거라고 생각되어지지만 어찌되었든 그들이 중국의 침략에 무참히 밟혀 하나의 자치구가 되어버렸을 때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감히 생각해 보게 된다. 포탈라궁이라는 언덕위의 사원이나 현재까지도 어디에 머물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도는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존재가 어쩌면 나에게 그 꿈결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낸 건 아니었을까?

아주 오래전 <티벳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티벳을 보게 된 것 같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그들의 종교생활은 지금 생각해보면 저렇게 무너져내릴 건 아니었지 싶기도 하고.. 환생이라거나 윤회라거나 하는 사상 따위는 믿지 않지만 왠지 무너져버린 그들의 종교적 의미가 안타깝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티베트어로 신의 땅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라싸'라는 지명 하나만 보더라도 그들에게 있어 종교적인 의미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했는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티벳인이라는 작가 아라이의 시선은 우리가 바라보는 그 꿈결같은 이미지를 거부하고 있다. 당신들이 꿈꾸는 티벳의 속살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라고 말하는 듯이.. 그렇게 중국이라는 커다란 장화아래 짓밟혀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꿈틀거리며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듯이.. 아무리 그랬어도 티베트라는 단어가 안고 있는 그 신비스러움이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처음엔 책속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힘겨웠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앞서고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들만의 생활을 이해하기가 쉽진 않았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다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들만의 현재가 책속에 녹아있었지만 왠지 전날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끈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고는 하지만 옛것을 향한 향수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때문일까?  이 책속에는 대체적으로 라마, 즉 라마교의 고승으로써 수도만을 목적으로 살다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의해 철폐되는 사원을 떠나 환속해야 했던 수도승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경전만을 읽을 줄 알았던 그들이 사회의 현실적인 삶에 동화되어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음이다. 그들을 통하여 당시의 티베트인들이 만들어가던 사회상을 볼 수가 있다. 

어디나 다 그렇다. 무너져가는 가정이나 무너져가는 민족 또는 나라의 마지막엔 다시한번 불사르고 싶어하는 한줄기 흐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다 안되면 서서히 현재에 동화되어져 가거나 아니면 체념이나 포기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들도 그랬다. 마을로 내려왔으나 쉽게 마을사람들속에 섞여들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그대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1950년대 이후 쓰촨과 티베트 경계의 지촌이라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면서 그들의 평범한 삶속에서도 변화의 물결에 순응하는 한편 새로움에 대한 기대 또한 놓치지 않는 듯 하다. 몇 편의 짧은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통해서 작가는 그런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국사람이 아닌 티베트사람으로서의 긍지 또한 뚜렷하게 보여주려 한다.

책을 읽다보면 일종의 구도서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작품속의 주인공들을 따라가다보면 왠지 모르게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부분과 자주 마주치는 까닭이다. '현자 아구둔바'라는 단편이 특히나 그런 것 같다. 티베트인이 바라보는 불교적인 특징이라거나 신성화된 시선으로 속세의 감정등을 바라보는 듯한 표현이 그렇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현자로써 살아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석가모니를 떠올리게 하기엔 충분하다. 석가모니처럼 그도 현실의 근심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때로는 신처럼 때로는 인간처럼 그렇게.. 이렇듯이 이 작품속에서는 변화에 희생되어지는 모습과 변화를 찾아 떠나가는 모습이 동시에 그려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변화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 또한 숨기지 않는다.

<색에 물들다>라는 그의 작품을 읽고나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읽어보리라 했었다. 그랬기에 이 책은 주저없이 선택되어졌지만 전작만큼의 느낌은 전해받지 못한 듯 하다. 티벳이라는 나라의 속성을 잘 몰랐기에 그러했으리라.. 그리고 그다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작품의 형태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앞서기도 하지만 작품속의 흐름이 왠지 멀게 느껴졌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순수함이라거나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그들 삶의 형태는 나에게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전해주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순수를 받아들이기엔 내 마음도 너무나 멀리 와버린 탓이겠지 한다. 그렇지만 티벳이 품고 있는 라싸의 땅위를 죽기전에 한번쯤은 걸어보고 싶다는 욕심은 여전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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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힘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김은경 옮김 / 북바이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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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세이, 다시 말해서 수필이라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나 역시도 끄적거리는 걸 좋아하다보니 그저 산문형식의 글이 될 수 밖에 없다. 수필이라는 건 아무런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글이 아닐까 싶은데 그러다보면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시작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글쓴이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개인적인 생각을 표현한 글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게 보여지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수필 읽기를 꺼려한다. 어느정도 그 사람의 작품을 읽어보았다면 한번쯤 도전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 마주친 그 사람의 작품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거나 해서 글쓴이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는 경우다. 이 작품 <망각의 힘>이 바로 수필집이다. 무심코 생각하기엔 망각, 즉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하게 다가오는 어떤 기억의 원리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읽으면서 바로 수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체적으로 수필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을 담다보니 너무 어렵거나 혹은 너무 장황스럽거나 하는 느낌을 전해받을 때도 있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글이니 쓴 사람보다는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그 책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하게 된다. 너무 어렵거나 장황스럽다면 (쉽게 말해서 잘난체한 듯한 느낌을 전해받게 되면) 두번 다시 그사람의 글을 읽고 싶지 않을테고 그렇지 않고 쉽고 차분하게 다가왔다면, 그리고 나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의 글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의 저자 도야마 시게히코의 생각은 단순명료하게 다가온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풀어가는 문체도 수월하게 읽힌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무언인지를 눈치챌 수 있는만큼의 거리를 주고 있다. 하지만 간혹 일본스러운 것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 나라의 문화적 속성을 모르니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쳐가야 할 때도 있다는 말이다. (소개글을 살펴보자면 일본에서는 꽤나 유명한 사람인듯하다)

여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문제에 대해 찬반이론과 호불호의 이론의 보여진다. 그렇다고 딱히 저자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지는 않는 듯 하다. 단지 내 생각은 이렇다, 라는 것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보니 딱히 거부감이 일지는 않는다는 말이 맞을게다. 저자가 어떤 사람이었든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나의 일상적인 것들과 마주하는 글들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그리고 어떤 주제를 놓고 너무 강력하게 말하기보다는 읽고 있는 나에게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면 더욱 더 좋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때에 아름다운 것들을 굳이 가까이 다가가 실망하고야마는 우리의 조급함에 대한 생각이 참 좋았다. 빗나가기 때문에 재미있다는 예측이론은 왠지 작금의 현실세계를 살짝 엿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고, 무서울 정도의 힘을 가진 습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글은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어 좋았다. 아이들의 교육문제라거나 블랙먼데이 혹은 블루먼데이라고 부르는 월요일과 상반되는 휴일의 개념에 대한 그의 생각에는 작은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느낌이 괜찮았던 에세이집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의 뇌는 서랍처럼 되어 있어서 가끔씩은 정리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 그 비워주는 역할을 해주는 건 아닐까?  굳이 멀리가지 않아도 좋다. 가까운 곳을 잠시 떠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해서 잠시 머리를 쉬게 해주기도 하고 저 아래쯤에서 눌려 신음하는 기억이라는 것들을 차분하게 들어내는 것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망각.. 잊혀지는 사람이 가장 슬프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때로는 잊혀지는 것이 오히려 좋을수도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잊고 살아가야 하는 것들 혹은 잊고 살았으나 잊지 말아야 했던 것들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잊어야만, 혹은 버려야만 다시 채워넣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비우기가 절실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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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루 - Swa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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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배우들의 내면연기가 괜찮았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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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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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경우 무슨 말을 해야할까? 책을 덮으면서도 나는 왠지 책속의 주인공들에게 미안했다. 어떤 폭력이 되었든 당하는 자도 그렇고 보는 자도 그렇고 모두가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세상에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부적절한 상황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진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다고 큰소리치던 책도 많았고, 우리 인간의 뒷모습을 투시하고 있다는 책도 많았지만 이번처럼 강렬한 느낌으로 전해져오지는 않았던 것 같아 남은 여운이 너무 가슴 아프다. 나 역시도 그렇게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끝도없는 폭력의 가해자요 피해자였을테니 말이다. 원제가 '光'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검은 빛이라고 써야만 했을까, 생각했었던 나의 마음에 한가닥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책장을 넘기면서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한정된 공간속에서 벌어졌던 아주 짧은 순간들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비굴함과 비겁함, 그리고 이기심이 내재되어진 그 기억은 오래도록 현재가 되어 주인공들을 따라다녔다. 일전에도 말했던 기억이 있지만 일본소설이 주는 그 리얼함에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현재의 감각이 리얼하다는 말이다. 피해가려고 하기 보다는 먼저 부딪히고 파헤쳐보아야 한다는 듯이. 이 작품 역시도 그랬다. 그 숱한 폭력의 겉면만을 핧을 줄 알았지 그것을 쪼개어 이렇다 보여주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의 허울은 얼만큼이나 부풀어 오를 수 있을까?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이기심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하마섬.. 어두운 바다에서 들려오는 물밀 파도소리와 밤의 숲에서 떨어져 쌓이는 동백꽃이라는 서두만 보더라도 그 섬의 끔찍한 아름다움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그 붉디 붉은 꽃송이가 떨어져내리는 장면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눈앞에 그려진다는 말이다. 바로 그곳에서 서로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폭력은 잉태되어졌다. 하지만 그 폭력이라는 것이 미하마섬에만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하마섬을 떠나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곳에서도 그와 똑같은 폭력은 재현되어지는 까닭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 직접적인 접촉을 해오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모른척하거나 외면해버린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이유만으로.. 끼어들어서 얽히면 공연스레 귀찮아지는 그런 것들을 우리는 용납하기 싫은 까닭에..

아버지의 생에 대한 불협화음이 일구어낸 육체적인 폭력의 피해자였던 다스쿠는 어린시절부터 누군가의 절실한 관심을 그리워했다. 날마다 멍이 들었고 상처가 났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려들지 않았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그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웠던 노부유키형에게 매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반면 그런 다스쿠가 싫었던 노부유키는 그에게 한자락의 마음도 용납해주지 않았다. 어느날 밤 쓰나미가 밀려오고 모든 것을 휩쓸어갔던 그 쓰나미를 계기로 미하마섬의 폭력은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잠시의 공백기였을 뿐, 그들의 삶을 향한 폭력의 고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엮어지게 된다.

<도가니>라는 작품을 얼마전에 읽었었다. 보호해줄만한 울타리 하나 없던 곳에서 아무런 대응책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당하고만 있던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은 그 울타리를 조여가며 올무처럼 그들을 옭아매었다.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라면 폭력일 것이다. 육체적인 폭력과 그 육체적인 폭력에 맞서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들의 또다른 폭력. 바라보기만 했던 시선과 마음, 그것을 정신적인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그렇다라고 단언을 하고 있다. 드러나지는 않아도 그것은 분명 폭력이라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진행되어지는 폭력은 무수히 많다고.

단지 사랑을 위해서 살인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게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이용하고 또한 배신을 한다. 노부유키에게 '살인자'라는 또하나의 이름을 붙여주었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삶을 위해서만 노부유키를 필요로 했던 미카의 존재. 순수와 영악이라는 단어로 이름을 바꿔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 사이를 오가는 다스쿠의 역할이야말로 흔들리는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 선을 칭송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이 악과 거래를 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이 오래도록 아버지의 폭력앞에서 길들여져 버린 다스쿠와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자신이 헤쳐나오기보다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손을 내밀어 끌어내 주기를 원하는 아이러니라니.. 하다보해 동정심만이라도 발휘해주기를 기대하는,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그런 다스쿠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카는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하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안된다, 하지마라의 연속적인 반대와 부딪히면서도 우리는 어른이 되었을 때의 화려한 비상을 꿈꾼다. 두번째 살인을 하고 미카와 완전한 하나됨을 꿈꾸었던 노부유키에게 미카는 이렇게 말했었지. 이제 더 이상 나한테 아무것도 원하지마. 그날 밤부터 원해도 아무것도 못 느끼니까. 날 좀 내버려둬.. '네가 '부탁'한다고 해서' 라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시켜버리고 싶었던 노부유키의 꿈은 허상이었을까? 이미 지나간 기억을 붙잡고 살기엔 우리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것도 어딘가 미심쩍은 것을 그것만은 아닐거라고 부정하는 일이 연이어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겨운 일이다. 미카를 향한 노부유키의 마음과 노부유키를 향한 다스쿠의 마음이 같은 것일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꿈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과 현실의 인정과 안녕을 바라는 또하나의 시선은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노부유키가 두번째 살인으로 다스쿠를 묻어버렸을 때 우리의 가슴속에는 역시 善 아니면 惡만 존재하는 거라는 섬뜩한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가슴속에 품은 것은 선일지라도 끝없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악의 존재감을 우리는 어쩌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필요악'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세상속에 떠도는 수많은 '필요악'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을게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일게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일 수도 있을게다. 정말이지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런 '필요악'의 존재를 이 책을 통해서 가슴 쓰리게 인정해야만 했다. 어쩌지 못하는 것들.. 아니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으나 우선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들.. 내가 아닌 남이 나서주기를 원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필요악'일 것이다. 참 잔인하다. 이렇게 속까지 파헤쳐야만 시원할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내면과 마주한다는 것은 역시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원하다. 가끔씩은 이렇게 마음속에 바람 한 점 넣어주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노부유키와 어떻게든 자신을 상승시켜보고 싶었던 미카와 힘겨운 현실속에서도 누군가의  따스한 접촉을 꿈꾸어왔던 다스쿠를 통해서 만나본 우리의 현실은 정말이지 검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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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스 - 21세기 코믹 잔혹 일러스트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하나자와 겐고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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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만화책일까 소설책일까? 일단은 그것부터 물어야 할 것 같다. 만화책일거라고 생각했었던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엔 아주 조금 억울한 면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건데 분명코 이건 만화책은 아닌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나고 싶었던 내가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그 두께에 놀랐고 만화책이 아니었다는 것에 또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은 이 작가의 전작에 대한 믿음으로 책장을 펼쳐보기로 한다. <사신치바>와 또다른 작품을 통해 그의 글에서 느낄 수 있었던 속도감을 기대했다는 게 더 좋은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신치바>를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없는 현실밖의 세계를 현실속에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던 작가의 글솜씨를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모던 타임스.. 이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찰리 채플린을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속에서 찰리 채플린이라는 배역은 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고나니 찰리 채플린이라는 배역은 내가 될 수도 있고 당신이 될 수도 있으며 미지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잘은 모르겠지만..  세상속에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는 과연 누가 내려주는 것일까? 이 이야기의 중심축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아니 알고는 있었으나 거짓된 면만을 보여주었던 것에 대한 진실을 알게되면서부터 시작되어진다. 그 불편한 진실의 참된 얼굴을 보기 위하여 책속의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은 '검색'이었다. 그 '검색'으로부터 우리의 주인공들은 쫓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단지 '검색'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단어 몇개를 인터넷이라는 바다속에 던져넣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리마자키 중학교, 안도상회, 개인 상담. 이 세가지 단어를 입력하여 검색을 시작했던 책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일들을 당하게 된다. 주인공 와타나베를 중심으로 고탄다, 오이시, 이사카 코타로, 오카모토 다케루 이렇게 네 명의 남자가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고탄다와 오이시는 같은 회사의 선배와 후배로써 우연하게 맡게 된 일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얼핏보면 거대한 시스템과 싸우고 있는 듯도 보여지고 또 다른 면으로 보자면 지금의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현실속의 이야기와 너무도 닮은 구석이 있다. 정보의 홍수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려내지도 못한 채 오로지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만을 믿어버리고 마는 인터넷의 잘못된 속성에 대해서 일종의 경고성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 작품속의 공간이 인터넷과 정보의 테두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후반으로 내달리면서 어라? 이건 뭐지? 싶은 생각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존재, 그야말로 미지의 존재같이 보이는 와타나베의 부인 가요코부터가 그렇다. 불편한 진실을 안고 있는 하리마자키 중학교가 특수한(일종의 초능력과 같은) 학교였다는 설정이었다고는 하지만 가요코의 존재와 오가타의 존재감은 왠지 썰렁하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초능력의 힘이라는 것도 그렇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느닷없는 초능력의 황당함과 인터넷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만들어내는 황당함이 엇비슷하게 맞물리는 듯도 보여 씁쓸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내기에도 사실은 조금 벅찼다. 잘못하면 옆길로 샐 것만 같다는 느낌때문이기도 했지만 극적인 효과를 노린 듯이 보여지는 만화들이 내 정신을 혼란속으로 밀어넣기도 했다. 차라리 저 그림들이 없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솔직한 말일게다. 흐름을 방해하기만 하는 그림들이 살짝 얄밉기까지 했다. 이런 장르를 시험삼아 시도해본 거라면 아마도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익숙해지지 싶다. '그렇게 되어 있는' 시스템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밀어부치는 미약한 인간의 힘 대결.. 과연 누가 이겼을까?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그 시스템 자체를 만들어내고 그 시스템에 이끌려 다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니 어찌하겠는가!

검색, 정보, 시스템, 사이트, 인터넷, 엔지니어..라는 말만으로도 이 소설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대시스템의 흐름앞에서 만들어진 진실에 대한 도전은 무모하기까지 하다. 그 도전의 댓가가 너무 참혹한 까닭이다. 21세기 코믹잔혹이라고는 하지만 호러물도 아닌 것이기에 약간의 반감이 일기도 한다. 그런데 그 뒷면을 다시한번 살펴보자면 이렇다. 인터넷의 댓글로 인한 피해가 그와같지 않을까 하는..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정보에 의해 (여기서 말하는 정보라는 것은 네티즌이라고 불리워지는 우리의 소행이기도 하다. 앞뒤 가릴 것없이 너나없이 퍼 나르고 그 퍼나르는 과정에서 나쁜 이야기들은 덧붙여지고 하는 그런 악순환을 말하고 있다는 거다. 그런 행위들이 남을 파괴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사람이 이 책속에도 등장한다. 과연 인터넷이 없으면 못살 것 같은 우리는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 있는가 다시한번 되짚어 생각해 볼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인터넷 실명제를 찬성하는 편이다. 왠만하면 우리 스스로가 정화되어진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정보는 철저하게 숨기고 싶어하면서 타인의 정보는 굳이 없는 것까지 만들어가며 캐내려고 드는 의식이 문제일 뿐이지만 내가 있듯이 남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악순환의 고리는 조금씩 가늘어지고 짧아지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 작품속에서 인터넷의 댓글로 인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던 만화가는 이렇게 말했다. 뭔가 만드는 사람한테는 자기를 보여주려는 욕구와 창작욕, 이 두가지가 있겠지만 전자를 버리고 나면 이해해주는 독자수가 한사람만 있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325쪽) 그리고 또 한사람의 말이 생각난다. 요즘 세상에 독재자는 없다던.. 그 사람 하나만 소멸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던.. 세상의 황폐도, 증오도, 누구 한 사람이나 어떤 단체 탓이라고 꼭 꼬집을 수 없다는 거(-328쪽) 라는 말은 곱씹어 되새겨 볼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주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던 것들에 대한 새로움이었다고나 할까? 단순히 소설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기엔 뭔가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다.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첫머리에 나왔다던 말을 앞에 두고서 한참을 바라다 본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지배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318쪽) 어쩌면 정보라는 것이, 인터넷이라는 것이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지배하기보다는 우리를 도와주는 정보와 인터넷이라는 말은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하게 다가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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