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이런 경우 무슨 말을 해야할까? 책을 덮으면서도 나는 왠지 책속의 주인공들에게 미안했다. 어떤 폭력이 되었든 당하는 자도 그렇고 보는 자도 그렇고 모두가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세상에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부적절한 상황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진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다고 큰소리치던 책도 많았고, 우리 인간의 뒷모습을 투시하고 있다는 책도 많았지만 이번처럼 강렬한 느낌으로 전해져오지는 않았던 것 같아 남은 여운이 너무 가슴 아프다. 나 역시도 그렇게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끝도없는 폭력의 가해자요 피해자였을테니 말이다. 원제가 '光'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검은 빛이라고 써야만 했을까, 생각했었던 나의 마음에 한가닥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책장을 넘기면서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한정된 공간속에서 벌어졌던 아주 짧은 순간들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비굴함과 비겁함, 그리고 이기심이 내재되어진 그 기억은 오래도록 현재가 되어 주인공들을 따라다녔다. 일전에도 말했던 기억이 있지만 일본소설이 주는 그 리얼함에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현재의 감각이 리얼하다는 말이다. 피해가려고 하기 보다는 먼저 부딪히고 파헤쳐보아야 한다는 듯이. 이 작품 역시도 그랬다. 그 숱한 폭력의 겉면만을 핧을 줄 알았지 그것을 쪼개어 이렇다 보여주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의 허울은 얼만큼이나 부풀어 오를 수 있을까?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이기심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하마섬.. 어두운 바다에서 들려오는 물밀 파도소리와 밤의 숲에서 떨어져 쌓이는 동백꽃이라는 서두만 보더라도 그 섬의 끔찍한 아름다움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그 붉디 붉은 꽃송이가 떨어져내리는 장면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눈앞에 그려진다는 말이다. 바로 그곳에서 서로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폭력은 잉태되어졌다. 하지만 그 폭력이라는 것이 미하마섬에만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하마섬을 떠나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곳에서도 그와 똑같은 폭력은 재현되어지는 까닭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 직접적인 접촉을 해오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모른척하거나 외면해버린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이유만으로.. 끼어들어서 얽히면 공연스레 귀찮아지는 그런 것들을 우리는 용납하기 싫은 까닭에..

아버지의 생에 대한 불협화음이 일구어낸 육체적인 폭력의 피해자였던 다스쿠는 어린시절부터 누군가의 절실한 관심을 그리워했다. 날마다 멍이 들었고 상처가 났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려들지 않았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그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웠던 노부유키형에게 매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반면 그런 다스쿠가 싫었던 노부유키는 그에게 한자락의 마음도 용납해주지 않았다. 어느날 밤 쓰나미가 밀려오고 모든 것을 휩쓸어갔던 그 쓰나미를 계기로 미하마섬의 폭력은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잠시의 공백기였을 뿐, 그들의 삶을 향한 폭력의 고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엮어지게 된다.

<도가니>라는 작품을 얼마전에 읽었었다. 보호해줄만한 울타리 하나 없던 곳에서 아무런 대응책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당하고만 있던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은 그 울타리를 조여가며 올무처럼 그들을 옭아매었다.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라면 폭력일 것이다. 육체적인 폭력과 그 육체적인 폭력에 맞서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들의 또다른 폭력. 바라보기만 했던 시선과 마음, 그것을 정신적인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그렇다라고 단언을 하고 있다. 드러나지는 않아도 그것은 분명 폭력이라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진행되어지는 폭력은 무수히 많다고.

단지 사랑을 위해서 살인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게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이용하고 또한 배신을 한다. 노부유키에게 '살인자'라는 또하나의 이름을 붙여주었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삶을 위해서만 노부유키를 필요로 했던 미카의 존재. 순수와 영악이라는 단어로 이름을 바꿔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 사이를 오가는 다스쿠의 역할이야말로 흔들리는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 선을 칭송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이 악과 거래를 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이 오래도록 아버지의 폭력앞에서 길들여져 버린 다스쿠와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자신이 헤쳐나오기보다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손을 내밀어 끌어내 주기를 원하는 아이러니라니.. 하다보해 동정심만이라도 발휘해주기를 기대하는,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그런 다스쿠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카는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하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안된다, 하지마라의 연속적인 반대와 부딪히면서도 우리는 어른이 되었을 때의 화려한 비상을 꿈꾼다. 두번째 살인을 하고 미카와 완전한 하나됨을 꿈꾸었던 노부유키에게 미카는 이렇게 말했었지. 이제 더 이상 나한테 아무것도 원하지마. 그날 밤부터 원해도 아무것도 못 느끼니까. 날 좀 내버려둬.. '네가 '부탁'한다고 해서' 라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시켜버리고 싶었던 노부유키의 꿈은 허상이었을까? 이미 지나간 기억을 붙잡고 살기엔 우리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것도 어딘가 미심쩍은 것을 그것만은 아닐거라고 부정하는 일이 연이어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겨운 일이다. 미카를 향한 노부유키의 마음과 노부유키를 향한 다스쿠의 마음이 같은 것일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꿈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과 현실의 인정과 안녕을 바라는 또하나의 시선은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노부유키가 두번째 살인으로 다스쿠를 묻어버렸을 때 우리의 가슴속에는 역시 善 아니면 惡만 존재하는 거라는 섬뜩한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가슴속에 품은 것은 선일지라도 끝없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악의 존재감을 우리는 어쩌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필요악'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세상속에 떠도는 수많은 '필요악'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을게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일게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일 수도 있을게다. 정말이지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런 '필요악'의 존재를 이 책을 통해서 가슴 쓰리게 인정해야만 했다. 어쩌지 못하는 것들.. 아니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으나 우선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들.. 내가 아닌 남이 나서주기를 원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필요악'일 것이다. 참 잔인하다. 이렇게 속까지 파헤쳐야만 시원할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내면과 마주한다는 것은 역시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원하다. 가끔씩은 이렇게 마음속에 바람 한 점 넣어주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노부유키와 어떻게든 자신을 상승시켜보고 싶었던 미카와 힘겨운 현실속에서도 누군가의  따스한 접촉을 꿈꾸어왔던 다스쿠를 통해서 만나본 우리의 현실은 정말이지 검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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