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너프 : 불만족의 심리학
존 네이시 지음, 강미경 옮김 / 예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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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면서 진정 이것이면 충분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살면서 그만큼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해주는 사람은 있어도 이만큼이면 되었다고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그리 쉽진 않을 것 같다. 만족한다는 것은 어느 것 하나만을 특정적으로 콕 짚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테니 말이다. 내 삶에 진정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오긴 올까? 내 스스로가 이제 되었다고 말하며 마음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가끔 생각해보기도 한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도대체 지금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뜬금없는 자문속에서도 답은 찾을 길이 없다. 그만큼 정신없이 바쁜 것도 아닌데, 그만큼 무엇엔가에 미친 듯이 푹 빠져 지내는 것도 아닌데...

'원숭이 마음'이라는 말을 보면서 뜻모를 서글픔을 안아든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쉼없이 왔다 갔다하는 그런 상태와 우리의 삶속에 내재된 인간의 속성과 무엇이 그리 다르겠느냐고.. 욕심을 버리고 이제 마음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라는 말은 눈으로도 귀로도 끊임없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예측해보건데 이제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들어야 할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이지만) 하나의 이룰 수 없는 꿈처럼 아스라한 뉘앙스를 풍기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가장 필요한 것들은 가장 가까이에 머물고 있지만 그것을 멀리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못된 습관이 눈에 띄지 않게 할테니 말이다. 

뭐,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속에 이렇다하게 특별한 것들은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 뿐이다. 책을 읽는동안 내게 살풋 미소짓게 만들었던 자기계발 이야기.. 그렇지 그건 그럴거야. 저자의 말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에 성공했다면 이 세상은 어찌 되겠는가 말이다.(어쩌면 모두가 다 도인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를..) 그렇다고해서 저자가 외치고 있는 말 '더 많이'에서 '충분해'로! 를 크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책속에는 자꾸만 변신을 거듭해가는 거대 문명의 비대함을 꼬집고 있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들임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묻고 있다.  

더할 수 없이 무서운 정보에 중독되어가면서도 그 중독으로부터 헤어나지 않으려하는 우리들의 모습, 끝도없이 먹고 마시는 폭식이나 무언가를 찾아 쉼없이 두리번거리는 우리의 물질적 탐욕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그러면서도 영원한 행복추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일중독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선택앞에서 점차 흐려지는 우리의 판단력과 인지력에 대하여(이것은 정보의 다양성과도 문제가 이어진다), 생태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직접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과속성장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상태에 대하여 우리가 불안해하지 않는 둔탁함에 대하여 저자는 아주 큰 염려를 하고 있다. 쓰지않는 물건들이 집 구석구석에 쌓이는, 그리하여 한번도 쓰지 않았던 물건들이 중고상품으로 되팔려나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생각해보자고 절절하게 말하고 있다.

각 장의 말미에 실려있는 실천전략... 저자가 우리에게 내미는 약이다. 심각한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어떻게하면 되는지 알려주고 있다. 정보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정보 다이어트를 시도하라와 같이 폭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라, 물질적 탐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고, 일중독에서 선택의 고문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등... 명령어조의 이야기들이 약간 거슬리기는 하겠지만 실천의지만 있다면 도전해 볼만한 사항들이 꽤나 많다. 가령, 폭식을 피하기 위해서 되도록 가짓수가 많은 식사를 피하고, 절제를 아는 친구와 사귀며, 식사 시간을 일정하게 지키고, 햇볕을 많이 쪼여라, 숙면을 취하라, 외식할 때는 작은 식당을 이용하라 같은 말들은 그다지 어려운 조건이 아니란 생각이 드니 하는 말이다. 많이 듣고 보아 왔겠지만 다시한번 생각해본다고해도 과하지 않을 내용이란 생각이 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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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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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후우~~~ 이제 마지막인가? 그렇다면 나도 내 심장을 쏴야 하는가?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가슴 한쪽이 먹먹했다. 알싸하게 아파왔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이건 뭐지? 알 수 없는 감정하나가 내 가슴 저 밑에서부터 스멀거리고 올라왔다. 순간적으로 눈을 깜박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왠걸? 눈물이다. 툭하면 운다고해서 어렸을 적부터 내 별명은 울보였다. 하지만 어느순간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으려고, 최소한 타인에게만큼은 내 울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내게는 너무도 명확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말, 사람은 저마다의 동굴을 하나씩 끌어안고 산다는 그말이 누군가의 손을 빌어 내게로 다가왔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속이 쓰렸다. 다시 신경증!

감동적인 휴먼드라마라는 말이 있다. 감동적? 웃기네! 대체적인 내 반응은 그랬다. 도대체 뭐가 감동적이라는 거야? 그렇다고 그 흔한 눈물조차 짜내지 못하면서? 그랬는데, 정말 그랬던 내가 책을 읽으면서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만큼 진하다. 삶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시간의 존재 의미가... 정신병원에서 살아가는 정신병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감동적이라는 말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러니다. 미쳐서 갇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갇혀서 미쳐가는 사람도 있지요. 잘 아시잖아요? 최기훈을 향해 내뱉던 수명의 그 한마디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세상속에서 나를 건져내고 싶어했던, 아니 시간의 굴레속에서 헤어나고 싶어했던 수명은 어쩌면 우리 자신일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래서 자신만의 삶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했던 승민은 어쩌면 우리속에 내재되어져 있는 한올의 머리카락같은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명을 끌어안은 채 승민을 바라보아야 했던 나는 정말이지 참 많이도 아팠다. 수명이 나였다. 그 깊은 눈속에 한가닥 절망조차도 숨기고 싶어하지 않던 승민을 도와주기 위해 마지막 탈출을 시도했을 때 우울한 세탁부는 수명에게 물었었다. 선생님은요? 왜 같이 안가시나요?... 거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너 자신을 한번만 돌아보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병에 걸린 선생님을 이해하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고 말하던 우울한 세탁부의 말처럼 이제는 자신의 껍질속에서 나와야만 한다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를일이었다. 껍질속에만 있으면 질식사한다는 것도 모른 채 힘겨운 세상살이를 막연하게 거부해서는 안되는거라고 누군가가 말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신병원의 일상을 낱낱이 꿰고 있는 수명과 정신병원이라는 곳엘 처음 와보는 승민의 만남은 정신병원을 향해 가고 있던 길목에서였다. 그리고 그 정신병원의 복도에서 그와의 끈이 얽혀버리고 만다. 느닷없이 공조자가 되어버린 수명은 승민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친 새끼, 저러다 죽지.. 였을 뿐이었다. 관심갖지 말자고, 다가가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던 수명이 끝내 인정해야 했던 것은 승민이 자신이고 자신이 승민이라는 거였다. 끝도없이 밀려오는 현실의 파고속에서 힘에 겨워 모든 것을 놓고 싶어하는 수명과 그 파고의 물결을 잘 읽어내 파도타기로 즐기고 싶어했던 승민은 하나였다. 그리고 바로 나였다. 수명의 앞길을 열어주던 작가는 잔인하게도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었던 승민의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를 나한테 떠밀었다. 시체없는 자살이라고...

자신이 걸어왔던 여정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승민의 지나온 시간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 시간속으로 돌아가 자신과의 재회를 꿈꾸었던 승민이 시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의 기억속에서 찾아낸 먼 날의 아픔을 끌어안은 채 살아야 했던 수명이 당당하게 그 아픔과 마주서고자 했을 때 나는 눈물이 났다. 지극히 당연한 현실속에서 일어났던 두 남자의 사건은 결국엔 얻어터지고 깨지는 탈주극이었지만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수명과 승민이  적으로 간주하여 싸워댔던 것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오롯이 싸워야할 적으로만 보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있었다. 싸움은 하되 설득과 관심과 이해도 필요하다고.. 내 삶이지만, 내 시간이지만 나의 판단과 선택과 통제력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들이라고.. 모두가 정신병자들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룰로써 정을 나누었던 병동사람들의 그 살가운 표현을 외면해서는 안되는거라고..

어느 쪽일까? 멀쩡했지만 정신병원안에 갇혀버렸던 수명과 승민을 바라보면서 나는 물었다. 타의에 의해서 그곳으로 갔는가, 아니면 자의에 의해서 그곳으로 갔는가. 그리고 현실의 시간에게 떠밀려 그곳으로 갔는가, 아니면 내 스스로가 그 시간밖으로 걸어나오듯 그곳으로 갔는가. 생각해보면 정말 愚問이다. 멍청한 질문! 답이 있어도, 답이 없어도 멍청한! 지금처럼 끝없는 愚問속에서 살아가는 나를 다시 만난다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수명과 승민은 묻는다. 너는 어느쪽이냐고. 내 시간에 떠밀려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냐고.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인 '나'를 만나기 위해 글라이더를 타고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던 승민이 나는 궁금하지 않다. 단지 내 시간속에 나로 존재하고 싶었다고 말하던 승민은 정말 그렇게 되었을거라고 나는 믿으니까. 병원문을 나서며 자신을 묶었던 올가미를 털어내듯이 약과 소지품이 든 가방을,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꼬리표처럼 끌고 다녔던 그 물건을 병원 정문안으로 힘차게 내던졌던 수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를 감시하고 감독하는 족쇄는 많다. 우리를 겨누는 세상속의 총구는 셀 수도 없다. 누군가 쏘는 총에 언제 맞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쭉 째진 가재미눈을 한 채 살펴본다한들 그 많은 것들을 어찌 다 볼 수 있을까?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이 책의 마지막 문구다. 그렇게 승민을, 아니 자신만의 희망을 저 멀리로 보내놓고 수명이 했던 마지막 말이다. 눈물이 날만큼 진하게 안겨왔던 수명과 승민의 여정들이 뿌옇다.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수명과 승민의 존재를... /아이비생각

추신..
말투가 많이 불손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밉지 않았기에 다음에 해 줄 작가의 이야기를 기다려보기로 한다. 아주 멋지게 강하고 아름다운 펀치를 다시 한번 날려주기를 기대하면서... 기도가 없는 곳은 사탄의 잔칫집. 기도가 있는 곳은 사탄의 초상집. (153쪽) 의 말처럼 은유라는 것은 때로 혹독한 매질로 나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 매력적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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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 도둑 - 김주영 상상우화집
김주영 지음, 박상훈 그림 / 비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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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 도둑'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면서 순간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왜 이런 제목을 생각했을까? 사실 이 책은 작가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글들이다. 신문속에서 작가의 글을 처음 보았을 때 낯선 설레임을 느꼈었다. 한편 한편 글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신문을 오려 스크랩하기 시작했고 그 스크랩을 보면서 언젠가는 책으로 나오겠구나 했었다. 신문을 오려 스크랩을 할 때의 내 마음이 어땠었는지 다시한번 내게 묻는다. 참 아득했었다는 그 느낌을 다시 떠올려 보기 위해 이 책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는 건 핑게일까?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버릴 수 없는 꿈에 대한 미련으로,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때로는 과거로 달려갈 수 없는 향수에 대한 기억으로 짧은 글들은 하루 하루 다른 느낌을 내게 전해 왔었다.

<똥 친 막대기>라는 동화를 통하여 어른들의 메마름속에 한줄기 강물을 흐르게 했던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 어른들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책을 바친다던 작가의 말이 왠지 안타깝게 들린다. 유난히 힘겨웠다던 작가의 어린시절을 나는 잘 모르겠지만 글을 통해서라도 한번쯤은 도달하고 싶었던 꿈에 대하여 되새김질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감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행복한 시간속에 머물렀을거라고... 그 상상의 세계속에서 못다 이룬 꿈들을 이루었을 거라고... 하지만 상상우화라는 말처럼 내가 근접할 수 없는 그의 꿈들이 이 책속에 머물고 있기도 하다. 자신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자신만의 언어로 쓰여진 우화도 몇 편...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 사람의 꿈은 오직 그 사람만의 것이라고.. 그러니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말자고..

이해되지 못하는 나의 짧은 생각속에 그저 스쳐가던 몇편의 우화들을 보면서 나는 좀 버거웠다. 항상 배고팠고 무엇을 하든 꼴찌였다던 작가의 어린시절은 좌절과 외로움만이 존재했다는 그 말에 수긍은 하면서도 왠지 안타까웠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자신의 아픔에 대하여 남들이 편하게 다가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나를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하지만 천천히 읽어가며 속내를 들여다보자고 마음 먹는다.  작가의 연세가 일흔... 삶을 되돌아보는 길목에서 이 글을 쓰셨을까?  누구나 나이를 먹고 삶의 뒤안길을 되돌아 볼 때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데 작가는 어땠을까?

뗏목을 타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생활을 즐기던 그에게 어느날 문득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취재원이 등장하고, 여러 사람들에게서 원치않았던 성원과 갈채를 받게 되면서부터 그의 자유는 파괴되고 말았다.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자유로웠던 시간들.. <자유의 뗏목을 타고>에서 보여지는 현실은 참 암담하다.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일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것 같다. 타인의 시선으로 인하여 변해가는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길을 떠났지.. 그 번잡함이 싫어서, 타인의 시선이 너무 많아서..  길을 떠났던 장미꽃과 늑대는 처음 그 한가함과 여유로움속에서 정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외로움이었다. 서로의 외로움을 알고 있어도 소통할 수 없었던 그들의 언어는 그들을 더 외로움속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장미와 늑대>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문득 군중속의 고독을 생각한다. 혼자있어도 외롭고 함께 있어도 외로운 것이 우리의 속성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책속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크기는 엄청났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는 말이다. 작게 그려지는 우화속의 존재들은 하나같이 외롭게 보였다. 왜 그랬을까? 책을 덮고 나는 내가 스크랩 해놓았던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나의 무지를 탓한다. 그저 단순하게만 생각하고 싶어했던 나의 아집을 질책하며 다시한번 천천히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 먹는다. 그냥 스쳐지나가기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담겨 있을거라는 기대를 접지 못한 채.. 그동안 작가가 보여준 대하드라마의 커다란 물결과 이 책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일렁이는 물결의 차이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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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천하의 경영자 - 상 - 진시황을 지배한 재상
차오성 지음, 강경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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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李斯... 그가 누구인가를 궁금해 한 적이 있었던가?  진시황을 논할 때 그의 책략사였다던 이사, 그의 이름이 역사책에 거론되어진 적은 있었던가?  알 수 없다. 그늘에 가려져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늘에 가려 제 이름보다는 누군가의 이름을 앞세워 세상 모든 것을 쥐락펴락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일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존재 이사라는 사람을 통해서 본다면 그다지 행복한 일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진시황이 그의 분신이었는지 그가 진시황의 분신이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게다. 단지 그들 서로의 분신 중 하나가 없어진다면 당연히 남아있던 존재도 사라져야 한다는 것뿐.. 그래서 보이지 않는 2인자는 서글플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못하는 인생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은 희생속에서 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행복일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사의 일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이사라는 인물을 통해 들여다 본 중국의 역사는 길고 장대하다. 한사람의 꿈이 다른 사람의 꿈과 함께 어울려 커다란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다.  역사속에 진시황이라는 커다란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되는 그들의 여정속에서 하나씩 영글어가는 꿈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굉장한 일이다. 그 달콤함 앞에서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의 끝없는 욕심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라는 기록을 통하여 한줄로 엮어지던 그들의 일생.. 책을 읽으면서 천년만년 살았을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진시황의 썩어가는 육신을 바라보며 생의 허무함을 느꼈던 이사가 자신의 말로에 대한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었을까?

장장 600쪽에 달하는 책이 상,하로 두권이다. 두께에 놀라고 그 두께가 두배라는 사실에 눌렸던 이 책에 대한 첫인상.. 하지만 그다지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조금은 지루하다. 신식과 고전을 오가며 퓨전형식을 취했지만 다가왔던 느낌은 그저 그랬다. 일단 커다란 축을 세워두고 그 축을 받치기 위한 잔가지들을 만든다음 그 잔가지들에서 자라난 잎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을 하나씩 묘사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니 커다란 물결의 파고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정석대로 흘러가는 단조로운 강같다고나 할까? 그랬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혹은 다 읽고난 뒤의 느낌은..  하지만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부분에 대하여 세세하게 알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방대하지만 흘러가는 물줄기는 하나였으니 말이다. 

진시황이라거나 중국역사속의 진나라에 대한 것들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도 무방할 듯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화폐나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그 유명한 분서갱유에 대한 배경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니 말이다. 초나라의 하급관리였으나 하찮은 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꿈을 일으키게 되는 이사라는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떻게 중국역사를 뒤흔드는 손이 되었는지  그 과정만큼은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위인전이라면 너무 장황한 느낌이 없지는 않기에 하는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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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 : 세상은 백성의 것이다 샘깊은 오늘고전 9
작자미상 지음, 윤기언 그림, 김기택 글, 강명관 해설 / 알마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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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어디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갖게 될까? 그리고 그 사람을 살아 숨쉬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어지는 것일까? 어린시절부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생각을 고려해 볼 줄 아는 깊이를 가졌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인물감일까? 자라면서 무언가에 얽매인 채 살아가야 하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억눌린 심정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아마도 누구나 가슴속에 저마다의 칼자루 하나씩은 쥐고 살아가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현실이라도 받아들이며 안주하느냐, 그런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느냐의 차이점이다.

일개 무지한 백성이 나라를 위해 빼든 칼자루였기에 그토록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것도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나라였다면 더더욱이나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 나타나 이토록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한번쯤 뒤집어 엎었으면 하는 바램을 한번쯤은 가져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도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이 꿈꾸는 개벽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개벽이 일어나긴 하되 단, 나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어야 한다, 세상이 바뀌긴 하되 나에게도 떨어지는 것이 많았으면 좋겠다.. 뭐 이런 것 말이다.

일전에 읽었던 <홍길동전>이 생각난다. 하늘의 부름으로 태어나는 홍길동의 탄생배경은 가히 신화적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탓에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분연히 일어난 그가 외쳤던 것은 당연히 신분제도였다.  적자와 서자를 가리지 않아야 하며 설사 서자라해도 벼슬은 물론 자식으로서의 온전한 대접을 받아야한다는 그런 것들.. 평민이 아닌 양반이어서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가질 수 없었으니 그의 한서림이 더욱 깊었을까?  분신술을 썼다느니 율도국에 들어갔다느니 하는 것들은 하나의 가림막일 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야말로 명백했으니 말이다. 현실이었다. 그가 처해있던 그 부조리한 현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홍경래>는 어떨까?  그저 평범했던 백성이었다. 다르다면 어릴적부터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깊이가 깊었다고나 할까? ( 물론 인물들의 어린시절이야 누구나 다 똑똑하고 영리하다. ) 이제 가르칠 것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며 등 떠밀던 스승조차도 아비에게 이르기를 심히 앞날을 염려했다. 가르쳐주는 한줄의 글귀에서도 현실을 볼 줄 알았던 그를 염려했던 스승은 말했다. 똑똑하고 글재주가 남다르지만 말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여 앞길이 크게 걱정됩니다... 홍경래가 열두살이었다고 하니 가히 신동이다. 하지만 앞에 말한 스승의 염려를 고려해 볼 때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수단과 널리보는 융통성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원리원칙만 고집하다보니 생각이 고루할 수 밖에 없다.

양반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었던 사회적인 현실이 그의 앞에 장애물로 나섰을 때 그는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홀연히 고향을 떠나 세상을 주유하며 삶을 힘겨워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았고, 그 원인을 파악했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게되니 그와 뜻을 같이 할만한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그리하여 일으키게 되는 '홍경래의 난'.. 조선시대 민란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홍경래의 난'은 지배계층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 많은 민란중에서 참으로 오랜시간을 들여 계획되어지고 실천에 옮기게 되지만 다른 민란들처럼 끝이 참 허무하다. 물론 거기에서 찾는 의의야 다르겠지만 말이다. 우습게도 나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지금 세상에서도 저와같은 민란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성공하면 '혁명'이오 실패하면 '반역'이라는 명분이 지금 세상에서도 통할까?  그 때나 지금이나 한치도 변하지 않는, 아니 변하고자 하지 않는 정치세력들을 보면 한번쯤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는 걸 보면 나도 지극한 평민이라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민란이라는 말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순수한 농민저항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현실에 대한 만족도가 그리 높지 않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야말로 뜻이 있어 세상을 바꾸고자 했으나 힘이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을 것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그토록이나 힘겨운 일일테니 말이다. 세상이 진정 백성들의 것일까? 백성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삶을 영위하는 곳, 그것이 세상이오 그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백성은 아닐까? 뜻이 너무 커서 감히 바라볼 수 조차 없다면 너무 어렵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겨냥해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의 고전시리즈가 참으로 고맙다. 단지 학습적인 면을 떠나서라도 우리의 고전을 읽어본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주고 싶은 까닭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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