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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미세한 입자로 흩어지는 시대적 불화, 근대와 현대가 교차되던 찰나를 중인 이하 하층민의 삶을 통해 비춘다. 소설이면서 삶이고, 19세기 후반의 것인 동시에 21세기 현재의 것이기도 하다. 1894년 갑오개혁, 공식적으로 노비가 해방되고, 신분제가 금지된다. 이 개혁은 근대 봉건 사회 제도의 청산으로 여겨지지만, 친일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추진되면서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실제로도 몇 백 년간 굳건하게 이어진 신분제는 온 나라 구석구석을 갉아먹으며 막강한 신분계급을 유지시킨다. 이면에는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쓰는 양반관료 무리가 있었다. 법으로 양천제가 시행되면서 과거는 양인 이상에게 허락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반상제가 통용되어 양인은 양반/중인/상민으로 구분되었다. 중인(서얼과 기술관)에게는 무과만이, 상민은 농사나 장사로 그마저도 시간내어 공부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행여 급제하더라도 주요관직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흔했고, 신분에 의해 세습되는 직이 워낙 많아 자리가 부족했다. 글공부를 하고도 양반의 대리시험을 치러주거나 지레 포기하는 이들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권리는 철저히 박탈당하고 조세, 공납, 역의 의무는 성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받는 계급 또한 이들이었다. 꿈을 꿀 권리조차 상실한 이들은 대체로 입에 풀칠하기 바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세상을 향한 울분과 절망을 표출시키며 세상이 달라지기를 희망한다. <여울물 소리>는 서얼 출신, 하급 관리, 잔반, 기술관을 비롯한 중인들의 울분이 표출된 임오군란에서 갑오개혁까지의 시대상을 다룬다. 기생, 노비, 무당, 소리꾼, 광대와 같은 하층민의 생활상 또한 상세히 밝힌다.
그저 눈 감고 귀 닫고 입 다문 채 먹고 입고 자면서 살아갔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늘 그래온 것처럼 평온한 나날들이 계속되는 한, 유교가 강조하는 불평등 세상은 바뀌지 않았겠지만 싸우다 죽어간 귀한 목숨들을 구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것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형이나 아우가 천지교도라는 이유로 대신 끌려가 처형당하는 일도, 억울한 감옥살이도, 실컷 일하고 급료를 받지 못하는 관료나 군인도, 사람의 노동력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사고팔 수 있다는 어이없음도.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위험한 구호는 임금과 신하, 양반과 노비,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형과 제 등 모든 상하관계를 깨부수려는 시도였고,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이었고, 그래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신호탄이었다. 적어도 삼례 집회, 교조신원에 대한 서울복합상소, 보은 집회, 금구 집회. 굵직한 봉기만 수 차례, 동학농민운동은 청일전쟁에서 갑오개혁까지 안팎으로 흉흉한 시대상과 연합적으로 발기하고 또 진압되었다. 동학을 천지교로 픽션화했지만 처형당한 최제우와 뒤를 이은 최시형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감으로서 모든 일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언젠가 꼭 만나고 싶었소.
하는 이신통의 말이 야속하고 고마워서 눈물이 방바닥에 똑똑 떨어졌다. 나는 그 밤을 오롯이 이 서방과 함께 보냈다. 엄마는 새 이부자리를 들인다, 방의 군불을 지핀다 하며 내놓고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사흘 동안 묵었는데 칠팔 명의 동행이 와서 앞채에 들었다. 그들은 그믐께에 강경을 떠나 삼례로 출발했다.
기나긴 세월 속에 문득문득 떠오르고 간혹 그리워지는 대상이다가, 궁금하다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가, 우연히 만났을 때 비로소 참지 못하고 내뱉는 사내의 무심한 듯한 목소리. 쿵 내려앉는 여인의 마음 한귀퉁이에 불이 붙는다. 누구의 자식, 아비, 손주, 제자, 아우, 그들은 어째서 버려두고 떠났나. 길을 서성이게 하고, 불덩이를 치밀어오르게 한 주체는 무엇인가. 시대가 그러했으리라. 급격한 물살에 휩쓸린 이들의 전쟁같은 사연을 대할 때면 나는 멀찌감치 있어야 했다. 고작 백 년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이제는 잊혀져 가는 삶. 어쩌면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던 삶. 말해지지 않은 삶들이 미열처럼 들떠 날개를 달고 날아갔다. 여백이 남긴 기다림이 얼마나 더 길어질지, 그 기다림의 끝이 어디일지 미리 볼 수 없어 애가 탔다. 즉흥세계에 발붙이고 사는 것들을 까무룩하게 만드는 덩어리. 멀리보고 멀리듣고 멀리가는 이들. 그들은 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으며, 증발하고 또 증발해야 했으며,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갈 수가 없었나. 왜 아무 곳에 제 존재를 뉘이거나 어느 끈에도 매일 수 없었나. 매순간 아픈 역사지만, 아래로부터 가장 치열하고 가열차게 싸워야 했던 밑바닥 것들의 날. 개혁과 혁명이라는 말에는 가늠할 수 없는 온도가 만져진다.
이신은 서자여서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광대이면서 소리꾼이었으므로 한곳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시대를 거스르거나 뛰어넘고자 했던 이들이 흔히 그랬듯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아무 곳에 닿지 못했을테지만 어디로도 가지 않으면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할지라 그들은 자꾸만 떠난다. 연희패와 천지교. 소리꾼과 광대. 그것이 연옥의 사랑, 신통의 이름이다. 짧고 불 같았던 하룻밤과 오랜 기다림과 헤맴, 또 다시 반 년, 연이은 기다림과 헤맴. 티끌같은 희망. 연옥은 가세를 돌보며 오지 않는 사내를 기다린다. 찾아나설 때마다 그의 과거와 소식을 마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치이고 매이던 아랫것들이 저항과 혁명을 구상한다고 했다.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내세워 세상을 뒤집으려 할 때, 천지교도들은 '주자의 성리학'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세무민의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어갔다. 수차례의 천주교 박해,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제물포 조약), 갑신정변,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으로 시국이 시끄러운 즈음이었다.
한국사의 근대 막바지가 생생히 재현된다. 모두는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이신통과 서일수, 김만복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향해 돌진한다. 누군가는 처절하게 생을 다해가고, 또 누군가는 굳건한 심지로 생을 태워간다.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마침내 도달한 그의 생애. 그가 거쳐간 천지교도를 비롯한 세상에 버림받은 이들의 일생. 그를 찾기 위해 그가 간 길을 차곡차곡 밟아가며 제 발자국을 남기는 이 시대의 강인한 여인. 눈물겨운 시국을 제대로 살아내려던 이의 마지막 목소리. 거기서 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목소리를 듣는다. 탄생과 소멸이 뒤섞이는 100년. 시공간의 교차. 세상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아랫것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이들은 세상을 입맛에 맞출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늘 제자리다. 약한 자는 억압당하고, 가진 자는 점점 더 많이 가진다. 미묘하게 나빠지기도 좋아지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1%에게는 좋아지고, 99%에게는 나빠지는 걸테지만. 그들은 사람이 오직 사람으로, 물이 오로지 물로서 존재하기를 바랐다. 돌은 돌이고, 강은 강이고, 부모는 부모인 것이 무엇이 나쁜가. 온갖 것들이 제 바른 이름을 찾아가는 것 어디에 비틀린 욕망이 있기에 이토록 존재를 다하기가 힘든가. 단지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대접을 받고, 능력에 따라 평등히 대우받는 세상을 바랐을 뿐이다. 지금과도 다르지 않다.
가질 수 없는 문관직 일찌감치 내려놓고 시전에 파는 서책을 사서 글 모르는 이들에게 읽어주며 시국을 견디는 신통은 실력확인차 과거 보러 한양에 갔다가 서일수와 김만복을 만난다. 불의에 항거하고 세상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이 모처럼 같은 자리에서 만나 활활 타오른다. 유춘길과 유영길, 박인희와 박도희, 임효 등 다양한 인물군상을 통한 눈물겨운 사연이 시대를 대변한다. 한데 뭉쳐진 마음이 비로소 곧은 소리를 내고, 단단한 세상에 균열을 가한다. 여울은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고 세게 흐르는 지점이다. 한국사에서 진정한 근대는 일본과 청,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외세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고종의 섭정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종식하고, 왕권강화와 쇄국을 위해 애썼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진정한 근대화를 늦추고 왕좌에 대한 권력욕을 끝내 놓지 못한 것이나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세 다툼으로 인한 부정적 평가를 피하기 힘들다. 단단하지 못한 왕조는 제 뜻을 펼칠 때마다 늘 일본과 청의 힘을 끌어다쓸 수밖에 없었는데, 안팎으로 흉흉해져 백성의 고통은 심해지고 결속력도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외세에 국력을 잃고, 을사늑약을 맺으면서 식민시대를 맞는다. 그만큼 근대화의 물살은 빨랐다. 간절할 수록, 목표가 좁고 깊을 수록, 여럿이 힘을 합할 수록 더 빠르게 개혁의 물살이 트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여기저기 갈등의 씨앗을 심어준 것도 사실이다. 사상이 다른 배다른 형제가 신분차별로 서로를 미워하다 기어이 죽고 죽여야 하는 상황. 이런 극단의 사태는 없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얼굴 모르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나는 아이의 미래는 또 어떠한가. 불의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아버지와 불의에 맞서싸우다 죽는 아버지. 거기에는 세상을 점점 더 환하게 밝혀주는 등불이 포함되어 있을까. 과거를 통해 현재를 확인하게 된다면, 메시지는 뚜렷하다. 어리석다고 해도 아직은 우리가 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잘난 누군가의 손에 내 미래를 맡기기 보다는 조금 더 원할 수 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내가 변해야 한다던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철저히 검게 변해갔지만 욕할 수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 될 줄 몰랐듯 나도 후일을 장담하거나 선연히 들여다보지는 못한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찾지 못할 뿐더러 무엇도 이루지 못한다. 이 시대에 바치는 완연하고 정갈한 오마주. 오마주 투 코리아. 그렇게 읽힌다. 얼만큼 흐를 것인가, 과연 흐르고는 있는가, 어디로 얼만큼 흐르거나 누가 멈추게 할 것인가. 이 순간에도 역사는 흐르는 동시에 거슬러 오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