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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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녀가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읽고 싶으면서도 쉽게 손이 가지지 않는 책이었다.
내용을 알았더라면 더더욱 손이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소설책을 읽고 힘들기는 참 오랜만이다.

어제는 잠까지 설쳤더랬다.

그래도 뭔가 기록을 해 놓아야 할 것 같아 책 내용을 다시 상기해보는데 여전히 힘들다.

남 얘기하듯 담담하게 써 내려간 이야기들.
금방 읽어낼 수 있는 분량이었음에도 책장을 넘기다 말고 심호흡을 몇번씩 해야 했다.

뭔가 알 수 없은 울컥함이 밀려온다.

단지 그날의 일부, 글만 읽었을 뿐인데도 이런데 그때 그곳의 사람들은 오죽할까.

방사능 피폭과 같다는 표현이 와닿는다.

고기가 익어가는 걸 참지 못하고 머리가 달린 생선도 먹지 못하는 은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날 불판에 고기를 구워 처먹었다. 맛있게도. 젠장.


그때 난 너무 어려서 몰랐다.  국풍81이라는 행사에 좋아라 놀아났던 기억만 어슴푸레 난다.

그리고 철이 들 나이쯤에는 관심에 없었다.

읽는 내내, 모르고 살아서 모른척 살아서 죄송하다고 누군가에게 사죄해야만 할 것 같았다.


작가는 어떻게 이리 상세하게 알 수 있었을까?

경험하지 않고는 쓰지 못할 것 같은 내용들이라 궁금했다.

70년생, 광주출생.

아....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했는데 에필로그를 읽어보고 그건 아니란 걸 알았다.

글 쓴 한강도 힘이 많이 들었겠구나, 작가의 힘이란 위대하구나 싶다.

분명 읽기 힘들지만,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소년이 온다>에 대해 한 말이, 이 책을 읽은 느낌을 한마디로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소년이 온다>는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

읽으면서 어쩐지 지금의 시국과 너무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끝은 <소년이 온다>의 동호와 같지 않기를 바라며, 그럴거라,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믿고 싶다.


 

p. 57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p. 89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피하고 싶었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둔감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입을 벌리고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지고 싶지 않았다.

p. 95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이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자자는 말한다.
(...)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 99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p. 207 (에필로그)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찬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 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키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벼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여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숙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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